묵상자료 8719(2025. 3. 31. 월요일).

시편 112:7-8.

찬송 1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존 밀턴의 <실명/失明의 노래>의 한 구절입니다. “신께서 빛을 허락하지 않으시고도 낮일을 명하시나이까? 하고 나는 어리석게 묻는다. 그러나 [인내]는 이 같은 불평일랑 가로막고, 곧 대답을 주니 신은 인간의 작업이나 공물/貢物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가벼운 멍에를 최고로 견디는 자가 그분을 최고로 섬기느니라.’”

 

2. “예언자의 생은 상징이다(1-13)”, “흩어졌던 백성이 돌아온다(14-15)”, “끌려가리라(16-18)” 그리고 참된 신 야훼(19-21)”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넷째 단락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과 징계를 한 사람이, 축복과 저주 또한 한 사람이 받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모자람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 인간에게는 비관과 낙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며, 절망과 함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존경하는 한 연로한 목사님이 어느 유명한 신학자이며 목사님께서 치매에 걸리셨는지, 하나님을 부인하며 임종하고 말았다는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이라며 서글픔을 토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삼십년이 흐른 후 저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인간이 짊어진 최악의 질병이 치매인데, 이 질병은 제 정신을 잃게 만드는 질병이라고 합니다. 자식이나 심지어 아내까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정신을 갖게 된다고 하니까 비극중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평생을 신앙의 길을 안내하고 가르쳐온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이는 제 정신을 붙들고 있는 동안만 가능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제 정신을 놓은 순간부터는 전혀 다른 병든 정신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정신이 빠져나간 사람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두고 가타부타 할실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신앙생활을 하는 게 정상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된 신 야훼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신앙에 입문하게 되는 것은 우연일 수도 있고 필연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저의 중학교 동창생 중 하나는 절간 바로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자연히 새벽 예불 소리를 들으면서 불교 신앙을 가질 만도 한데, 대학교까지 기독교 신앙적인 분위기에서 생활했습니다. 중학생 시절은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다녔고, 고등학교와 대학은 미션 스쿨이어서 매우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았는데, 20여년이 흐른 후 전철에서 만났는데, 승가대학원으로 진학하였고 조계종에서는 유명한 법사 스님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가 된 저를 향해서는 보살님 또는 거사님으로 불렀습니다. 비록 타종교일 지라도 지도자급이니까 그렇게 부른다는 풀이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합장을 하고 하는 인사가 성불/成佛 하십시오.”였습니다. 석가모니처럼 되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 최상의 목표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선지 몰라도 그 포교방식이 전투적이거나 경쟁적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수천 수만 년을 환생하며 성불에 이르려는 느긋함(?)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단 한번 뿐인 생이라는 직선적인 시간이해를 가르치는 기독교회와는 달리, 성불에 이르기까지 수억 년도 되풀이 되는 윤회라는 시간이해를 가진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가르치는 참 신의 의미란 그 이름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훼라는 신의 이름은 자존자/自存者라는 뜻입니다. 누군가 혹은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야훼를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신들이 사람에 의해서 그 지위와 능력과 이름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석가모니 역시 자존자가 아니라, 진리를 깨우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니, 참 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유대교를 차용한 기독교회는 야훼 하나님 신앙을 믿고 있습니다. 자존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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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18(2025. 3. 30. 사순절 넷째 주일).

시편 112:4-6.

찬송 30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였던 빌 코플랜드/Bill Copeland단 한 번의 인생이니까 함부로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변명이다.” 고 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은 당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만드는 시간이다. 당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라. 감동이 있고,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고, 행복한 마무리가 있는 이야기로.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5.

 

2. 사순절 넷째 주일의 구약성경 사 12:1-6을 본문으로 야훼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감사할 이유들을 많이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원망과 불평거리를 많이 가진 사람인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삶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삶에 대해서, 사람과 하나님에 대해서 말입니다.

 

첫 번째 야훼를 향한 감사의 노래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 때문이었습니다(1-3).

제가 개척했던 부산의 S교회에는 <감사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말끝마다 감사합니다.”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호스피스 봉사자로 부산과 서울에서 활동하셨는데, 무엇이 감사하느냐고 물었을 때, 권사님은 모든 일이 감사한 일 뿐이라 하셨습니다. 어느 날인가 깨달음을 가졌는데, 형통할 때든 힘들고 어려울 때든, 무조건 감사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놀랍게도 모든 일들이 감사로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감사의 은총을 받으신 거라며 축하해드렸습니다. 이사야는 감사의 노래를 불렀는데, 하나님께 받은 용서와 구원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용서는 죄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깨끗이 해방된 것을 말합니다. 지우개로 모든 허물을 지워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의 기쁨은 죄인만이 깨닫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죄와 죽음의 질곡에서 구원받은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야훼를 향한 감사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 때문이었습니다(4-6).

봄이 오자 제가 사는 마을에는 집고치는 일들로 야단법석입니다. 저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심야보일러를 기름보일러로 바꾸고, 테라스와 그 위에 놓인 야외 식탁을 수리하고 페인트칠을 했습니다. 그리고 펜스도 칠을 하고, 채전도 정리하고, 정원수도 가지치기를 하였습니다. 이웃들 외에는 누구도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냈습니다. 해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에도 보람과 기쁨이 넘치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바보짓 같았습니다. 목련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있고, 산수유도 활짝 피었습니다. 산새들의 날갯짓도 가볍고 노랫소리는 경쾌합니다. 심지어 바람소리까지도 맑고 청아하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린 아이들부터 모든 사람들이 밝은 색의 옷을 입고 자랑하듯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속에 기쁨과 행복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할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살전 5:18).

누구나 감사할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마음을 읽으려 힘쓰다 발견한 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경구/警句였습니다. 억지소리와 같은 경구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감사의 마술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들은 많은 반응은, 감사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하느냐는 볼멘 소리였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역설의 진리를 책으로 펴낸 켄트 케이스의 <그래도/Anyway>그래도 감사하라.”는 항목이 없습니다. 까닭은 10가지 주제 모두가 감사하라는 말에 연결되는 때문입니다. 사랑과 정직 그리고 도움과 헌신 등은 모두 감사를 바탕에 두고 있는 내용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간절히 바라신 것 중에는 범사/凡事에 감사하는 일이 들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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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17(2025. 3. 29. 토요일).

시편 112:1-3.

찬송 34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은 큰 문제와 부딪쳐 싸운다. 인격의 크기도 그렇다. 그렇다면 무엇이 위대한 꿈이며 비전일까? 그것은 그 꿈이 이루어질 때,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라거나, 비록 나에게는 고통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227.

 

2. “두 가지 상징(1-13)”을 읽었습니다. 상징이란 문학의 한 표현 기법으로 어떤 관념이나 사상을 구체적인 사물이나 심상(心像)을 통해 암시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가령 유대교에서는 다윗의 별과 함께 일곱 또는 아홉 개의 가지를 가진 촛대(예루살렘 메노라/menorah)를 중요한 상징으로 삼고 있는데, 진리의 빛을 의미합니다. 이는 출애굽기 2531절부터 40절까지에 메노라를 제작하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루살렘 촛대의 그림을 보는 순간, 이스라엘의 국장/國章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의 상징이 소개되고 있는 데 하나는 모시 잠방이 상징이고, 다른 하나는 술독 상징입니다. 우선 모시 잠방이 상징이란 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게 지은 짧은 홑고의, 여름철에 농부들이 입는 노동복으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에게 모시 잠방이를 브랏지방의 한 바위틈에 땅을 파고 숨겨두게 합니다.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다시 그 잠방이를 꺼내보게 하는데, 이미 다 썩어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유다의 거만함과 예루살렘의 거만함을 잠방이처럼 꺾어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그들은 악한 생각을 굽히지 않고 제 멋대로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우상을 따르고 섬기고 있는 그들을 썩은 잠방이처럼 만드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상징은 술독의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술독은 술을 넣어 보관하기 위함인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인데, 이제 하나님은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술독으로 만들어버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아비와 자식 할 것 없이 서로 부딪혀 깨어지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술독은 술의 순기능 곧 기분을 좋게 하고 즐겁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술의 역기능 곧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어버리고 싸우고 온갖 문제를 일으키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각기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될 때, 역기능으로 혼란과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거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림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곤 합니다. 이른바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간과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공짜는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예외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릴없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모세를 지도자로 부르신 것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남다른 임무(?) 또는 과제를 맡기기 위해서 선택하기도 하시고, 부르시기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일방적인 축복의 수혜자가 되었다는 자만심과 교만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번은 부산 남천동에 있는 베네딕투스 수녀원에 초대를 받아서 간적이 있습니다. 마침 그날은 몇 분 수녀 분들에게 종신 허원식이란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수녀 분들 역시 땅 바닥에 네팔 자를 하고 엎드려서 약속을 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수녀로써 살겠다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산 교구장께서 수녀들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를 초대한 수녀께서 설명해 주셨는데, 주님과 혼인한 사람이라는 표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날의 장면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순서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의 삶을 위한 다짐들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상징하는 두 가지는 비록 하나님의 백성 선민이라고 할지라도 거만하고 불순종하는 한 썩은 잠방이와 같이 아무 짝에도 쓸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기도 하고, 술독에 빠진 취해버린 삶을 살게도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매우 두렵게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선택된 사람다운 삶이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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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16(2025. 3. 28. 금요일).

시편 111:9-10.

찬송 5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Why not the best?” 이 말은 작년 1229일에 작고한 미국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좌우명이다. 그는 해군 장교로 임관하고 배치 받은 함대의 함장 앞에서 해군 사관학교 820명 중 59등을 했다 대답했을 때, 머리를 방망이로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던 질문이다. 그 뒤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려고 힘쓰게 되었다 한다. Why not the best?

 

2. “계약 조문대로 벌을 내리시다(1-8, 14-17)”을 읽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일은 흥미로울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개성과 생각의 차이로 조화롭기 보다는 다툼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불 최소한의 약속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제가 자란 시골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서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날만 밝으면 시끌벅적했습니다. 대체로 말썽꾸러기 아이들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입었던 옷은 광목이라는 천으로 만든 바지 저고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 하고 흙에 뒹굴고 장난치고 싸우다 보니 매일 옷을 갈아입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들은 힘든 일이 시작이 됩니다. 그걸 개울까지 나가서 빨아서 햇볕에 말려야 하고, 저녁이면 풀해서 말린 옷을 다림질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다듬질을 해야 했는데, 오롯이 어머니와 누이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제발 험하게 놀지말라고 부탁 또 부탁을 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걸로 약속을 합니다. 조심조심 옷을 입고 더럽히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와의 약속은 약속하는 그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또다시 엉망진창이 되어 집에 들어가고, 어머니에게 욕을 먹고 때로는 부지깽이로 맞기도 했습니다. 이런 소소한 약속은 물론 크고 작은 약속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살이인지 모릅니다. 부모님과의 약속을 시작으로 자신과의 약속, 학교 선생님들과의 약속, 그 밖에 친구들과의 약속, 나이가 차면 사랑하는 가족과의 약속 등등, 수도 셀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철이 들면서는 그 약속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엄격해지기도 합니다. 저는 재수를 하다가 군대에 입대를 하였는데, 군대에서 반 강제적으로 시키는 약속은 매우 엄격합니다. 때로는 희미한 약속이라 생각했는데, 그 벌칙은 엄중했습니다. 기갑학교 14주간의 교육을 받으면서 받을 수 있는 벌을 다 받은 것 같았습니다. 깊은 잠에 빠진 자정에 전부대원을 기상시켜 연병장을 돌게 하지를 않나, 때로는 살짝 얼어있는 연못으로 뛰어들게도 하였는데, 도난 사고가 났을 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약속 위반에 대한 벌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래 계약이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약 당사들이 서로 지키고 누릴 내용이라는 것이며, 당연히 계약을 어길 경우 그에 따른 합당한 벌칙도 있게 마련입니다. 우선 계약 내용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첫 번째 계약을 잘 지킬 경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대해서 기억할 뿐 아니라, 성실하게 지켜 행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중한 벌칙을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그 벌칙을 저주를 받는 것이라(3)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소홀히 여길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파기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우상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만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우상숭배를 배신이라는 말이나 간음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배신 혹은 간음이라는 계약 파기 행위는 어떤 변명도 어떤 탄원도 가당치 않게 된 것입니다. 13절에 그 잘못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위하는 우상은 성읍의 수만큼 많고, 바알의 산당은 예루살렘의 거리만큼이나 많구나.”라고 말입니다. 뒤늦게 깨달은 그들이 울고불고 용서를 빌지만 그것은 도무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차제에 우리는 약속과 벌칙에 대한 생각을 해 봐야 하겠습니다. 약속이란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래의 환희와 축복을 향한 상호 협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벌칙이란 그 값진 축복을 망가트린 것에 대한 문책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약속을 했을 때는 그 약속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게 중요한 일이고 올바른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서 받게 되는 벌칙은 두 배의 고통이 따를 수 밖입니다. 하나는 약속의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된 아픔이고, 다른 하나는 받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어야 하는 아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할 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 복된 축복의 날을 위해서이고, 헛되게 받아야 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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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15(2025. 3. 27. 목요일).

시편 111:4-8.

찬송 3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흘러가고 있으며 매달리고 집착할수록 지옥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시간이 지금 당도하고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그의 말 중에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또 다른 한 마디는 인생이 비극인 것은 너무 일찍 늙고, 너무 늦게 철이 든다는 것이다.”

 

2. “야훼만이 참 신(10-16)”, “사로 잡혀 가리라(17-18)” 그리고 백성의 아우성과 예레미야(19-25)”을 읽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땅에서는 신들의 전쟁이 요란합니다. 그리스의 올림푸스 산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그리스의 신화 속에 나오는 신들의 싸움만이 아닙니다. 같은 기독교 세계에서도 하나님하느님이 싸우고, 그 밖에도 석가모니알라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리저리 넓게 생각해 보면 이 작은 지구촌을 포함해서 온 우주가 싸움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해프닝을 제외하고는 종교 간에 다툼이 거의 없는 편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모슬렘 사원을 짓는 일과 관련해서 대구에서 심각한 갈등이 있었는데,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종교의 자유를 지지합니다.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믿는 신앙을 가질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격려도 되고 자극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이 믿는 신앙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미션스쿨이었는데, 교장선생님께서 여러 차례 기독교 신앙을 증명하려는 듯한 강연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우주계의 질서 정연한 운행/運行을 예로 들었던 것 등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신앙은 증명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말을 사용하는 까닭입니다. 왜 믿느냐고 묻는다면, 믿고 싶으니까 믿는 것이고, 믿어야 하니까 믿는다는 말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 평생을 살고 있느냐 물으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앙이 믿을 만하고 가치있으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참 하나님으로 야훼 하나님을 지지하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첫째 야훼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신다고 말씀합니다(10-12).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단한 하나님이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창조주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야훼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13-16).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것으로 임무를 다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세상사에 개입하셔서 비와 바람을 제어하시고 천둥과 번개를 움직이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만드는 은장이처럼 숨도 못 쉬는 그런 우상을 만드는 것을 어리석다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시작과 목적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과학이 여러 가지를 밝혀내고 있기는 합니다만, 세상의 흥망성쇠의 의미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늠할 수가 있고, 이른바 사람다운 삶 곧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바탕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제자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테라스를 고치고 있는 늙은 저를 보고 안쓰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행복한 체(?) 하면서 옆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는 강아지를 끌어들였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항상 옆에 있어주는 것도 그렇고, 어디를 가나 말벗이 되어 주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가끔 먹는 것 가지고 투정을 부리긴 해도 서로 비위를 맞춰주려 애쓰니까 그런대로 잘 지내는 중이라고 말입니다. 밥과 물을 챙겨주고, 잔디밭에 나가서 일보도록 문을 여닫는 것도 서로 잘 통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저의 거실 창으로 비춰주는 목련나무엔 가지가지 마다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고, 산수유가 노랗게 꽃을 피우고, 새들이 연둣빛 새 잎들을 환영하듯 노래까지 불러줍니다. 이 모든 삶이 하나님 때문이라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성경의 말씀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제 마음으로 움직여 보려는 수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게 염려라면 염려입니다. 제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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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14(2025. 3. 26. 수요일).

시편 111:1-3.

찬송 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때는 봄, 아침 7, 언덕엔 이슬방울 진주되어 빛나고, 종달샌 높이 나는데, 달팽인 가시나무 위에 도사렸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씨니, 온 누리가 평화롭도다.” R. 브라우닝.

 

2. “슬프다(4-7, 18-23)”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1-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몇 분의 옛 교우들이 생각났습니다. 미국에 가서 기반을 잡고 가족을 불러들이겠다고 떠난 남편이 사실은 미국에서 딴 살림을 차리고 있었던 얘기며,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이를 갖지 못해서 불안해하던 서울 새댁, 가까운 가족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교우 등 등,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길고 긴 사연 사연들 말입니다. 그 긴 사연을 들어주는 것이 목회자의 길인데도 이렇듯 멈출 것 같지 않은 끝없는 문제투성이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몰려올 때, 그때 눈을 뜬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도 더하면 더했지 적지 않은 고민거리라고 말입니다. 그런 푸념 같은 신탁/神託, Oracle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인간사와 얼마나 차이나는 얘기인지를 비교해 보십시다. 첫째로 도망쳐서 아무 소리 누구 얼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다 하십니다(1). 둘째로 배신자들과 간음자들은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린 자들 투성이라 하십니다(2). 셋째로 비수를 꽂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떨게 한다 고백하십니다(2). 넷째로 믿을 만한 구석은 보이지 않고 거짓과 못된 짓으로 온통 지천에 깔려 있다 전율하십니다(3). 그래서 야훼 하나님은 정신을 차릴 것을 당부하십니다. 친구도 동기도 조심 또 조심하라고 하십니다(4). 참 말은 할 줄 모르고 속고 속이는 돌이킬 길이 없는 비뚤어진 세상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다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들 인간 세상만 괴롭고 슬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랬다 하십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당연히 질문하게 됩니다. 아무리 인간 세상이 얽히고 설킨 게 많고 많아서, 복잡하고 문제투성이가 됐다 하더라도, 하나님만은 평안하셔야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박복/薄福해서 이렇게도 험하게 살고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는 훨씬 더 평안하게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어느 대통령에게 질문을 했다 합니다. 대통령이 되시고 청와대에서 지낸 첫날밤이 평안하셨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합니다. 대통령쯤 되면 모든 골치 아픈 문제는 다 장관들에게 맡기고 유유낙낙/唯唯諾諾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정 반대더라고 말입니다. 바람만 불어도 고기 잡는 어민들은 무사하신가 걱정이고, 비만 많이 와도, 아니면 비가 아니 와도, 그것도 대통령 때문이 아닌가 걱정이 되더라고 말입니다. 한 순간도 편한 마음이 아니더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마땅히 그러셔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9남매를 두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새벽기도가 2시간으로 모자라더라. 너희들 그리고 그 새끼들 하나하나 이름만 외우려 해도 시간은 물론 가슴이 졸여서 눈물 마를 날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때 우리 인생살이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셈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세상 물정 모르던 부모님 슬하에서 살던 시절이었다고 말입니다. 나이를 먹고 식솔을 거느리고 직장의 요직을 맡게 되면서부터는 근심걱정 떠날 날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또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아직 우리에게는 저 높은 곳에 하나님이 계시니 걱정 보따리 다 둘러메고 하나님 앞에 풀어놓을 수 있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하나님은 얼마나 고단하실까 그런 생각쯤은 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말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힘들게 해 드리지 말아야지 생각해 보자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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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13(2025. 3. 25. 화요일).

시편 110:4-7.

찬송 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나이 하나하고 스물이었을 때, 어느 어진이가 하는 말을 나는 들었다. ‘돈이야 금화이건 은화이건 주어 버릴지라도 네 마음만은 결코 주어서는 안 되고, 보석이야 진주건 루비건 주어 버릴지라도 네 생각만은 자유분방해야 하느니라그러나 내 나이 하나하고 스물이었으니 나에겐 소용없는 말이 되었지” A. E. 하우스만,

이봉국 편, 영원한 세계의 명시, p.125.

 

2. “거짓 예배2(21-34)”을 읽었습니다. 개역 개정판의 번역과 공동번역의 번역이 그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오늘 본문 첫 구절을 대조해서 비교해 보겠습니다. 먼저는 개역 개정판 다음은 공동번역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선언한다. 친교제에다 번제를 보태어 바치고, 그 고기를 처먹어라.” 우선 어투가 부드러운 개역개정에 비해 공동번역은 거칠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거짓 예배라는 표제어에 딱 어울리는 것은 공동번역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메튜헨리의 주석을 옮겨보겠습니다. “그들이 성전을 악행으로 더럽히는 한, <중략> 그들이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한, 그들이 드리는 제물들은 그들의 죄를 속해주지 못할 것이고, 열납되지도 못할 것임을 그들에게 보여주신다. <중략> 너희가 좋다면 계속해서 제사를 드리고 이런 제사를 드린 후에는 저런 제사를 또 드려라. 너희가 드려야 할 번제물(이것은 온전히 불살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다)을 화목제물(제사를 드리는 자가 제물 중에서 상당한 몫을 차지할 수 있었다)로 돌려서 고기를 먹으라. 왜냐하면 한두 끼를 푸짐하게 고기를 먹는 것이 너희가 희생제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유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렇게 방종하게 살아가는 동안에는 희생제사를 통해서 그 밖의 다른 유익을 얻기를 기대하지 말라.” 이런 주석이라고 하면, 어느 번역이 의미가 통하고, 분위기에 맞는다 할까요? 단연 공동번역입니다. 희생제사는 불에 온전히 살라야 하기 때문에 먹을 것이 전혀 없었지만, 당시의 제사는 제사장들이 먹기 위해서 적당히 불살랐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젯밥에만 마음이 있었던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짓 예배가 들통이 났고, 엉터리 제사장들이 판을 치고 있었음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튜헨리는 오늘의 본문을 해석하면서, 하나님께서 바라신 것은 순종이었고, 그들과 다투신 것은 불순종 때문이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설교 준비도 어렵고 성경 이해도 힘들어서 부산의 감림산 기도원이라는 곳에 가서 한 사흘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묵는 숙소가 맨 위에 자리 잡았는데, 유명 강사가 집회를 인도한다고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면서 고성능 확성기로 빨리 내려오라고 독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려갔는데, 제가 맨 나중에 예배당에 들어온 것인지 강대 바로 밑을 제외하고는 자리가 다 들어차 있었습니다. 강사는 한얼산의 욕쟁이 이아무개목사님이라고 했습니다. 2시간을 설교하는데, 과거에 깡패 짓하던 시절의 얘기로 도배를 했습니다. 온갖 신소리를 다 동원했는데, 할 것이 없었는지 자신을 초청한 기도원 원장인 이 아무개 수사를 험담하는 것입니다. 곱살하게 생겨서 몇 놈은 정신 못 차리게 했을 거라는 등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원 재건축을 위한 헌금 모금을 위한 순서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눈감게 하였고 헌금 액수를 말하고 손을 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10만원에서 출발해서 30만원 50만원 70만원 100만원 단위로 올라갔을 때입니다. 몇이나 손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강사의 다음 말이 압권이었습니다. 손을 내리기 전에 빨리 가서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 오라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지루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망측스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중세 교회가 면죄부를 팔아 아름답고 커다란 성당과 교회들을 그렇게 지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성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활태도가 잘못되었는데, 예배라고 제대로 드릴 수 있을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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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12(2025. 3. 24. 월요일).

시편 110:1-3.

찬송 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없이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했다면, 그 당혹감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어느 누구도 믿지 않겠다고 단절을 선포하기도 한다. 누군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누구라도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을 뿐이다. 설령 아픔이 있을지라도 누구나 배신할 수 있다고 받아들여보자.”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93.

 

2. “거짓 예배(1-15)”을 읽었습니다. 주일이 되면 예배하러 이곳저곳에서 신자들이 모여듭니다. 성장/盛裝을 하고 가족들의 손을 잡고 예배당에 들어서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기도를 드린 후 교우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마침내 찬송가 전주가 들리고 교우들이 일어나서 찬송을 부름으로 예배는 시작됩니다. 예배의 형식이야 각 교파나 교회 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만, 예배의 형식과 내용은 하나님과 예배자들 사이의 교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독일의 뉴런버그의 공원에서 그해의 <교회의 날>행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외국에서 찾아온 손님이라고 해서 회중석 두 번째 줄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바로 제 앞에는 당시 수상이었던 슈미트 씨가 있었고, 국회의장이라는 분도 그 옆에 있었습니다. 예배 인도자들이 입장을 하는데, 화려한 옷을 입고 엉덩이춤을 추며 개회 찬송을 부르는 탄자니아에서 온 성가대의 노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쁘고 즐거운 표정일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속한 루터교회는 예배에는 회중이 참여하는 부분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부분으로 나뉩니다. 회중이 참여하는 부분을 제사적요소라고 부르는데, 찬송과 기도 그리고 감사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요소들은 일어나서 진행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예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참여하시는 부분을 성례전적 요소라고 하는데, 성경 봉독과 설교 그리고 축복선언과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자에게 베푸시는 은총의 요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예언자 예레미야는 큰 소리로 외치게 하십니다.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말한다. 너희는 생활 태도를 고쳐라. 그래야 나는 너희를 여기에서 살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배하러 들어오던 사람들은 무척 당황했을 것이며 놀랬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생활 태도를 고치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배자들은 빈말을 하고 있다 지적하시는데, 여기는 야훼의 성전이다. 이 말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배하러 오는 백성들에게 듣기 힘든 말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 태도를 고쳐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배자들 사이에 억울한 일을 만드는가 하면,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기도 하고, 죄 없는 사람을 피 흘려 죽게도 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하면서, 여기는 야훼의 성전이라는 빈말만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허사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훔치고 죽이고 간음하고 위증하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면서도 성전에 와서는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말만 하고,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타이르고 불러서 그리 말라고 하였지만 듣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옛날 여호수아 시대부터 사무엘 시대까지 회막이 있던 곳(21:29, 삼상 4:3), 실로에서, 제사장의 아들들이 여인들을 겁탈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도, 성전 그 자체를 믿고 안심하다가 실로의 회막에 있던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기는 벌을 받았습니다. 예언자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은 생활태도를 고치지 않는 한 그런 예배는 하나님을 우롱하는 짓이며, 거짓되고 헛된 예배라고 준엄하게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실로처럼 그들도 다 쫓아내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사람처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거짓과 불의 등 온갖 잘못을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지 않는 한, 모든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일 뿐일 테니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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