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03(2025. 3. 15. 토요일).

시편 109:4-6.

찬송 20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 강의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를 용문행 전철에서 93/325 페이지 읽었다. 유서를 써들고 다니는 얘기가 나오는데, 까닭은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라고 이야기한다.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이 하는 자기변명처럼 들린다.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보려는 호스피스 환자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2. “너희가 겪은 일을 자손에게 가르쳐라(18-25)”을 읽었습니다. 영국 기자가 우리나라의 6.25동란 후를 취재하면서 남긴 글을 읽었습니다. 그 배고픔과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자녀 교육을 위해서 힘쓰는 우리 민족이 위대해 보였다고 말입니다. 어린 시절 큰 집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천자문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형님 또래의 고만고만한 동네 아이들을 모아두고 천자문을 시작으로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는 책을 가르쳤습니다. 그 다음에는 계몽편, 명심보감, 소학 등의 순서로 공부하였고, 이 과정이 끝나면 논어, 맹자 등 어려운 과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다 공부하면 학부형들이 준비한 책거리라는 잔치를 벌여서, 동네 어린 아이들까지 몰려들어서 떡 한 개씩을 받아먹곤 했습니다. 그러니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쁜 시절에, 자녀 교육에 주목을 하고 온 사회가 힘을 모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일찍부터 일정한 시험을 거쳐 관리로 등용하는 과거시험 제도가 있었는데, 고려 광종 9958년에 군주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처음 과거제를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이 과거 시험은 3년에 1번씩 치르는 것이 원칙으로 간지가 자(), (), (), ()인 해에 시험을 보았는데 이를 식년시(式年試)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신분제였던 반상제/班常制에서 극심했던 빈부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사회적 계급을 타파하고 신식 교육이 상륙하면서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때가 구한말이었고, 기독교회의 선교로 연희전문 이화전문 등 교육기관이 개설되고 교육이 장려되었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가난과 무력감으로 절망적이었던 암울한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교육을 통해서 신분상승을 꾀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교육은 우리 사회의 최고의 꿈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이런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우친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정교육을 통한 자녀교육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쉐마 교육입니다. 그들은 교육 내용이 분명하였고, 그 방법 또한 철저하였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비록 2천년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는 디아스포라로 살았지만, 가장 위대한 민족 중의 하나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근대 민주주의 입장에서 보면, 신정/神政국가라는 아랍 세계와 궤를 같이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은 국가적 권력으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자발적인 의사로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교육방법에 대해서는 높은 점수를 주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교육을 시행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교육의 목적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성취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집에서나 여행 중이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있을 때에도 교육의 목적인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입시키고 있는 점입니다. 이런 교육방법은 철저하지 않으면 효과를 볼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풀무원이 의정부에 있을 때 두어 번 농어촌 교회 지도자를 위한 동계 성경 강습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구석구석 기둥 기둥마다, “욕심 뽑기라는 문구가 붙여져 있었는데, 원장님의 말씀으로는 그게 어렵다고 하셨고, 성공하지 못했다 하셨습니다. 그 당시 풀무원 공동체살림이 있었는데, 어른들은 공동체 정신을 이해하고 협조적이었지만, 어린 아이들은 도무지 교육이 백해무익하더라는 말입니다. 교수가정의 아이들은 공동체 정신을 따라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데, 택시 운전수 아들이 메이커 정품만 고집하더라는 것입니다. 기왕 할 바에는 철저하게 실천에 옮겼어야 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02(2025. 3. 14. 금요일).

시편 109:1-3.

찬송 3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비난은 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비난하는 사람, 비난을 퍼트리는 사람, 그리고 그 비난을 듣게 될 당사자이다. 이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상처를 입는 사람은 누구일까? 비난을 시작한 사람이다. 이발소에는 여러 명의 이발사들이 저마다의 솜씨를 뽐내는데, 말 꽁지를 한 이발사가 정기적으로 쉬는 날에, 손님들 중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중 제일 젊은 이발사가 뜬금없이 말 꽁지를 한 부재중인 이발사를 비난하는 말을 퍼부었다. 그 젊은 이발사가 불쌍해 보였다.

 

2. “마음의 할례(12-22)”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른바 삶의 연륜이란 게 쌓이면서 배우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겉모습보다는 속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마음을 알아내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귀로 듣게 되는 말이 있는가 하면, 그 말이 담고 있는 뜻이 따로 있어서 그 진정성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지난 3년 동안 러시아의 침공으로 촉발된 러-우 전쟁은 바로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생각합니다. 이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지 못합니다만, 알려지기로는 우크라이나가 보유하고 있던 수백 개의 핵탄두를 미국과 북대서양 조약기구가 보증을 서는 조건으로 폐기했던 것 같은데, 이번 전쟁을 통해서 그 보증이라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은 며칠 전 미국 백악관에서 미국의 무기와 탄약을 도움 받고자 했을 때, 미국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팻싱한 채로 러시아와 종전으로 가는 회담을 추진하는 것에 반발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중재에 대해서 두 번 다시 속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을 TV영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나 문서로써는 그 진정성을 담보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를 통해서 아주 정곡/正鵠을 찌르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질문으로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십니다. 대답이 뒤따르는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보여주신 모범된 길을 따르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요,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그분을 섬기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들의 선조를 택하신 단 하나의 이유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받을 할례는 마음의 껍질을 벗기는 일, 곧 고집을 꺾는 일이며, 참된 사랑에 눈을 뜨는 일, 누구에게 충성해야 할지를 깨닫고, 그리고 찬양의 대상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몸에 새겨진 할례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인양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144,000명의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자긍심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을 뛰어넘었을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은 자신들이 아니면 찬양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껍질을 벗기는 일이었습니다. 인간 중심적인 고집을 꺾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참 사랑의 길, 곧 뇌물을 받지 않고 사람을 대하고,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세워주시며, 떠돌이에게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삶의 본을 배우고 따르라고 말입니다. 80년대에 신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학교과서를 집필하신 쟁쟁한 분들이 둘러 앉아 있었는데, “당신이 알면 얼마나 알아!”하는 말투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신만을 내 세우는 훌륭한(?)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독일에서 공부했다는 어떤 분은 자신만이 가진 새로운 정보를 십이분 활용하면서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에서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의 껍질을 벗기지 못한 소시민적 거드름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분이 새로운 정보를 조금이라고 소개하고 나누고 싶어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마음의 껍질을 벗겨버리기까지는 하나님의 마음이나 사랑을 느낌조차 갖지 못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01(2025. 3. 13. 목요일).

시편 108:11-13.

찬송 47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한두 가지 결점은 갖고 있게 마련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자제하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가볍게 처신해 놓고 뒤늦게 후회한 적이 다들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에는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후회하고 반성할 일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은 아마 눈을 씻고 찾아봐도 만나기 힘들 것이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지지를 받을 수도 없고, 늘 가치 있는 존재일 수도 없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람을 사랑하라.”

켄트 케이스, 그리도/Anyway, pp. 28, 31.

 

2. “모세가 죄지은 백성을 위하여 빌다(23-29)”다시 만든 계약 판을 계약 궤에 모시다(1-5)”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관계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맺으신 것으로, 그런데 이 계약은 구두로 맺은 것으로, 3대에 걸쳐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던 것이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계약 관계를 출애굽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구체적인 율법으로 확정하셨고, 그것을 문서화하는 것이 바로 돌비에 새긴 십계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계약이 먼저였고, 기록은 아주 훗날에야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으로 화가 난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십계명 두 돌 판을 금송아지 상을 깨트리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요약된 율법인 십계명을 다시 돌 판에 새기게 된 것입니다. 십계명을 새긴 돌 판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고 해서, 계약 관계가 그 정신에 있어서 훼손되거나 사라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돌에 새긴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계약관계의 중요성과 가치는 그것이 종이나 돌 판에 새겨졌다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기억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이런 의미를 가득 담은 말씀을 하였고(고후 3:3),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뜻으로 이른바 돌비와 심비/心碑를 대조시켰던 것입니다. 율법의 뿌리와 정신을 항상 기억할 이유입니다.

    계약을 파기하는 것과 계약서를 찢어버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약속은 그것을 파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와 그것을 그의 아들 이삭과 그리고 그의 손자 야곱에게 다시 확인해서 세운 약속이었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마음에 품었던 신뢰와 우정 그리고 온갖 사랑과 감사를 하나하나 기막힌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두 가지만 살펴본다면, 그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풍족하게 잘 살고 있었던 갈대아 우르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전혀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가나안으로 떠나라고 하실 때,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 그리고 자존심까지도 다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가나안을 향했을 때, 아브라함 부부, 부친인 데라, 그리고 조카 롯이 전부였습니다(11:27). 다른 하나는 75세에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강가의 모래알 같이 많은 후손을 약속했는데, 그래서 25년이나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린 것입니다. 아랍세계의 관습에 따라 아들을 낳지 못하자 가나안에 정착한지 10년째인 86세에 첩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16:3), 하나님은 적자인 이삭을 낳을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25년을 기다려 얻은 아들 이삭을 뜬금없이 예루살렘의 가장 높은 언덕 모리아에 가서 제물로 바치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한 번도 물어보지도 않을 채 사흘 길을 걸어서 그곳에 도착해서 제물로 드리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수 염소로 대신 하게 하신 사건입니다(22:1-19). 어느 학자는 이를 두고 아브라함은 자식을 죽일 뻔 하였을 뿐이나, 하나님은 자식을 진짜로 죽이시기까지 했다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맺은 약속을 어떻게 계약서 한 장을 찢거나 불태웠다고 파기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금 새로 다듬은 두 개의 돌판에 계약서를 새겨 주신 것은 당연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다시 두 개의 돌판을 다듬어 호렙산으로 갔고, 하나님께서 새겨주신 율법판을 준비해 두었던 법궤에 모셨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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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00(2025. 3. 12. 수요일).

시편 108:8-10.

찬송 21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분노라는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매우 위험한 순간이다. 아무리 절제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단 한 번의 분노로 자신의 인격과 삶을 송두리째 불태워버릴 수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는 흑인 장군 오셀로가 베니스의 원로원 의원 브라반시오의 영애인 데스데모나와 눈이 맞아 베니스의 관습을 무시한 채 그와 혼인을 했는데, 늘 흑인이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기수인 이아고는 오셀로의 부관으로 승진할 기회에 캐시오가 가로챘다고 생각, 케시오와 데스데모나가 불륜 관계라고 헛소문을 퍼트린다. 이에 격분한 오셀로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다. 그런데 아내의 시녀 에밀리아가 이아고가 꾸민 거짓말임을 폭로하자 슬픔과 치욕감에 스스로 자결하고 만다.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더라면, 아쉬움이 큰 작품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들 인간이다.

 

2. “모세가 죄지은 백성을 위하여 빌다(13-21)”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품 그리고 행동이 속 좁은 노인네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속을 썩혀드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건으로 모세가 계명을 받으려 호렙산에 올라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입니다(32:1-35).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상을 만들고 숭배한 사건이었으니, 하나님께서 화가 얼마나 나셨으면 그 백성들을 없애버리려 하셨다고 기록하셨을까? 그리고 저 백성이 얼마나 고집이 센가를 내가 이제 알았다. 말리지 마라. 내가 저들을 멸하여 하늘 아래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게 하리라.”(14)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는 분이신데 말입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맺으신 약속은 어떻게 하고 싹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까?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모세의 기록입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이스라엘을 보았을 때, 말할 수 없는 좌절감과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을지라도 전하는 모세는 숨을 한 번 더 쉬고 목구멍으로 그 말씀을 삼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필 수 있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글을 멈추게 하지 않으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처럼 표현했던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신탁(oracle)을 신의 계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마 5:18에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말씀하실 때의 일점일획이란 문자 그대로 한 글자 한 획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의미를 말한다 하겠습니다. 가령 우리는 수백 가지의 번역본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맥상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주제는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전이해/前理解를 가지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사복음서가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설교자의 말씀을 듣고도, 전혀 다르게 수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은 문자가 아니고, 그 중심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하나님을 속 좁은 노인네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맥락적 이해가 중요합니다. 저의 어머니처럼 촌로들은 욕설도 사랑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을 때 퍼붓듯하는 말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큰일 납니다. 저의 큰 아버지는 육시/戮屍를 할 놈들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구나 그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 끔찍한 말을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일꾼 아론을 없애버리려 하셨을까요? 이렇게 화난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모세는 40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야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속을 썩여드린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서, 죄에 가담하지 않았던 모세가 대신 속죄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킨 하나님은 금송아지를 불에 녹여 가루를 만들어 산 아래 개울로 흘려보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저의 부친이 생전에 사랑하신 찬송가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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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99(2025. 3. 11. 화요일).

시편 108:5-7.

찬송 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계발과 성장에 도움을 주려는 대부분의 심리학책들에서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역사나 역사의식에 대한 관심이 턱없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저성장 기조나 가계부채의 증가, 실업률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에 대해서, 쉽게 바뀔 것 같지 않은 외적 환경은 방치해 두고, 나 중심의 마음과 성장에 눈을 돌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 결과 불안의 이유나 마주하는 무수한 갈등으로 내면화한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려는 노력이 심리학을 발전시켰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란 당장 눈앞에서 전개되는 문제들만이 아니라, 다가올 가깝고 또 먼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점에서 역사의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겠다. 그래야 균형 잡힌 삶이 가능할 것이다.

 

2. “승리는 야훼께서 주신 것(1-6)” 모세가 죄지은 백성을 위하여 빌다(7-12)”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독실한 신앙인들은 무슨 일이건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흔히 연예인들에게서 보아왔던 대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이런 큰일을 해냈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래서 비기독교인들은 의례히 하는 말이라고 빈정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설교단에서 외치는 교회 지도자들은 열심히 성공과 출세주의를 말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고 참고 기다리면서 성공에 이르라고 격려합니다. 마치 성공과 실패의 책임은 사람에게 달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의 설교에서는 설교의 절반 이상이 입지전적인 인물들의 성공담으로 시간을 채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질문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교적 불운한 환경에서도 성공하고 출세하는데 반해, 또 다른 사람은 충분히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되는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들 삶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해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 닿을 듯한 큰 성을 점령하고 장대한 아낙 군사들을 이길 터인데, 이는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불길이 되어 너희 앞장을 서서 건너가셔서, 그들을 멸하시고 너희 앞에 무릎 꿇게 하실 것이다.” 고 말입니다. 이는 너희가 착하고 마음이 곧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악할 뿐 아니라, 일찍이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맺은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너희는 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집이 센 백성인 것을 분명히 알아두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 자신의 노력을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설명이 불가할 때는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운이 좋아서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런 막연한 운 빨에 대해서 굳이 설명을 해야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려 4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어느 날 가나안 땅을 향해 해방의 탈출을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정규 군인으로 훈련받은 적도 없었고, 군사 조직도 무기나 마병도 준비되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과 군대로 무장한 가나안 땅의 여러 나라들을 하나하나 무찔러서 그 너른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불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오랜 연단을 겪은 그들을 드디어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라는 설명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성경의 중심주제 만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야훼 하나님이 예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98(2025. 3. 10. 월요일).

시편 108:1-4.

찬송 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고비를 넘겼다.”는 우리말이 있다. 고비란 몽골어로 황무지라는 뜻이고, 식물 이름으로 고사리의 사촌쯤 되는 식물인데, 영어로는 펀(Fern)으로, 고사리에 비해 줄기가 많이 부드럽고 특이한 향이 있다. 어린 순은 나물로 먹거나 국을 끓여먹고, 뿌리줄기는 감기 발열과 피부 발진, 기생충 등을 다스리는 데 쓴다. '사물의 가장 긴요한 기회나 막다른 절정', 또는 '어떤 일에서 매우 어려운 순간이나 국면'이란 뜻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말의 뿌리는 불상/不詳이다.

 

2.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시련을 주시다(1-20)”을 읽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광야라는 자리 자체가 시련일 것입니다. 인생 그 자체가 시련이듯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생활 40년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여부를 시험해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 혹은 시련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였던 것입니다. 가령 우리 주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가게 되셨는데, 그것은 마귀의 시험을 받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때의 시험도 유혹이 아니라 시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삶에서 겪게 되는 이런저런 시련은 앞으로 직면하게 될 문제들을 감당할 수 있는지 우리의 능력을 테스트 받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시험이 배고픔의 시련이었습니다. 60, 70년대를 지나신 분들은 다들 경험하신 일이긴 합니다만, 그때는 논에서 나는 벼나 밭에서 나는 작물들의 수확이 변변치 않을 뿐 더러, 흉년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때의 배고픔은 사람들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절망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힘들었던 시절을 잘 버텨주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부친이 별세하셔서 가족들을 부양하는 일이 힘들어 솔직히 군대에 징집되어 가는 게 어깨가 가벼워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훈련소에서의 배식/配食시간에는 웃지 못 할 촌극도 일어났습니다. 특히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서울에서 온 친구들은 배식 당번에게 온갖 눈치를 보내며 자신의 급식 그릇에 꾹꾹 눌러 담아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논산 훈련소 제25연대에서 6주간 훈련을 받았는데, 그 배식시간을 의연하게 통과하려는 오기로 포켓용 신약성경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배고픔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도전한 첫 승리였습니다.

    이렇듯 광야에서의 배고픔의 시련은 그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였고, 그 결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받아먹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게 뭐야?” 라는 의미를 가진 만나는 아침마다 주변에 하얗게 내려 있었습니다. 이런 시련을 잘 겪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먹을 것 때문에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훗날 주님께서 돌을 떡덩이로 바꿔보라는 사탄의 유혹에 빵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위대한 승리의 말씀을 하신 움직일 수 없는 전거(典據)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련들은 종종 시련이 아니라 유혹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이끌려 광야로 나가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그랬는데, 주님은 시련과 유혹도 거뜬하게 물리치셨습니다. 오히려 이로써 주님은 마귀와의 대결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교훈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신앙적인 교훈을 현실 생활에서 적용하려다가 실패하는 경우들이 종종 발견됩니다. 신앙을 무슨 마술이나 기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해야 할 일에는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부지런히 어린 자식에게 일어나는 것과 세수하는 것, 밥 먹는 것과 학교에 가는 것, 숙제하는 것과 일터를 구하는 것 등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그것은 부모의 역할과 자녀의 역할이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과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깨우쳐주신다고 말입니다. 역할 분담의 의미와 목적을 배움으로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익혀가라고 말입니다. R. 브라우닝의 <피파의 노래>에서처럼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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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97(2025. 3. 9. 사순절 첫째 주일).

시편 107:41-43.

찬송 49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잘 사는 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많이 쓰는 말입니다. 한 인간으로 서건 한 신앙인으로 서건, 의미가 없는 삶이라면 헛된 것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힘을 씁니다. 자신에겐 박/하게, 그러나 남에게는 후/하게 살았던 현동완 YMCA 총무나 원경선 풀무원 원장, 그리고 <강아지 똥>을 쓴 권정생 안동 일직교회의 종지기처럼 말입니다.

 

2. 사순절 첫째주일의 구약성경 신 26:1-11을 본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해서 탐구하려는 자세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대신 남들과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곤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엇을 주셨는지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갈 터전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기억하게 하십니다(1-4).

17년 전 2008년 은퇴를 7년 앞두고 내 집을 하나 마련하겠다고 아산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너른 잔디밭이 있는 집을 희망해서 그런 집을 골라 구입했는데, 2년 된 새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1년에 서너 번 오더니 몇 년 전부터는 한두 번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채전과 꽃밭 그리고 잔디밭에 쉼 없이 돋아나는 잡풀을 뽑는데 죽을 맛이라고 말입니다. 은퇴 후 10년을 혼자 살다시피 하는데 제게는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20여 년간 고향집에서 지낸 것을 제외하면, 평생을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등을 기댈 곳이 그리웠고, 텃밭을 일구고 잔디를 깎는 소일거리 등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내 이름으로 등록된 터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과 즐거움인지 모릅니다. 하물며 남의 땅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야 훨씬 더했겠지요. 그러나 현실에 적응하느라 감사와 기쁨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감사제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도록 하는 장치였습니다(5-8).

우리 인간의 삶에는 통과의례라는 것이 있는데, 태어남과 어른이 됨, 그리고 결혼과 장례가 그것들입니다. 이런 통과의례의 중심점은 변화하는 인생의 의미를 감사로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태어남은 부모의 은덕을, 어른이 되는 것은 스승과 사회의 보호를, 결혼은 가정의 신성함을, 그리고 장례는 자연으로의 순환을 기억하는 의식입니다. 이를 이스라엘 신앙에서는 감사제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햇곡식을 거둔 후에 드리는 첫 추수절로 초실절과 유월절에서 50일이 되는 오순절이 그런 절기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념하는 생일이나 성인식과 결혼식과 장례식 등도 감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본래의 의미나 정신은 퇴색해 버리고, 부모나 스승 사회나 국가에 대한 감사보다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잘못된 풍조가 불어 닥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게 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9-11).

가나안 땅을 밟았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의 실체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씀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막과 다름없는 불모지/不毛地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에 배신감마저 들었습니다. 제가 묵었던 옛 예루살렘 성내의 루터란 게스트 하우스의 관목/灌木과 잔디는 바닥에 비닐류를 깔고 흙을 부어 심었다 했습니다. 이런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소개한 첫 성경 구절은 출 3:8이었고,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예레미아와 에스겔에 언급되었습니다. 오랜 번민 끝에 깨우쳤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실재적인 묘사가 아니라 신앙적인 묘사라고 말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 만 바라볼 수 밖이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실재와는 다른 이 세상에서 가장 척박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외엔 다른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릴 수 없는 땅이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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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96(2025. 3. 8. 토요일).

시편 107:38-40.

찬송 45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훌륭한 인간관계는 춤과 같다. 인간관계도 춤을 추듯 리듬을 타고 상대를 배려하며 상대의 스텝에 자신을 맞추어야 원활하게 잘 이루어진다. 누구나 자신과 교류하는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말투, 태도, 걸음걸이, 몸짓, 사고방식까지 서로 모방하게 된다. 누군가 당신의 앞길에 재를 뿌리는 사람이 있다면 멀리하라. 그렇지 않다면 그로 인해 당신의 꿈은 날아가 버릴 것이며, 전진할 수도 성장할 수도 없게 된다.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될 때, 나의 항해에 순풍의 역할을 할 사람인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닻의 역할을 할 사람인지 생각해 보라.” 윤문원, <지혜와 평정>, p.90.

 

2. “야훼의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우상을 부숴라(17-26)”을 읽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들을 알지 못하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령 힘든 공부를 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이 힘겹게 인내하고 노력해서 공부하는 것이고, 마지막 어려운 순간에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그런 정도로 말입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도서관 문이 닫히는 11시가 되어 백양로를 걸어 나올 때는 대부분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지금 내가 공부하는 철학이며 독일어며 심지어 생물학 같은 공부는 앞으로 더 많은 신학을 공부하거나 목회를 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될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왜 이런 공부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드는 생각은 이렇게 여러 날 그리고 많은 시간 장차 제 앞길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공부를 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들을 정리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대학생활을 하도록 지도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들 삶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에 관여하시고 동행하여 주시는가 하고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공부를 마쳤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심지어 목회에서 은퇴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우친 게 아닌가 말입니다. 대학시험 전날 밤 여관에서 마지막으로 풀었던 수학 문제가 바로 시험에 출제되었던 것이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여관에서 처음 풀었던 문제가 합격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뿐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 사고들이 줄을 지어 기억되었을 때, 저의 삶의 순간순간에 하나님은 늘 함께 계셨고, 동행하여 주셨다고 말입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독일어나 생물학과 같은 공부가 사실은 매우 요긴하게 사용되었음도 말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도 모세를 비롯해서 많은 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이나 우상 숭배 앞에서 비틀거리게 될 때에 대한 말씀에서, 크게 공감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들 인생의 미래는 아무리 가까운 것이든 저 멀리 있는 것이든, 전혀 감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낯선 것들인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장 1시간 후에 어떤 일이 우리들 앞에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 미래를 이렇게 저렇게 준비해야 한다고 충고하거나 가르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젊은이라고 한다면, 그런 저런 말씀들을 가슴에 깊이 새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여간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를 중학생 때 가르쳤던 선배이신 국어 선생님은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제자들을 집에 초대하고 된장국 밥을 먹게 하시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몇 번이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앞이 아무리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저 유명한 Carpe diem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오늘을 잡아라/ Seize the day 이지만, 그 의미는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 앞에 주어진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대하는 삶이야말로 택함 받은 사람다운 모습일 테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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