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95(2025. 3. 7. 금요일).

시편 107:35-37.

찬송 1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번잡스러운 것을 잊고 사색에 잠겨보라. 인간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고요를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힘으로 자기 마음속에서 실존의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인간은 독자적인 사상을 덮어 가리려 하는 시대정신에 항거하여 싸워야 한다. 사색은 참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훌륭한 사람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 활동력을 찾아내며, 그 활동력 속에서 고독과 침묵을 인식한다. 삶에 여백이 필요하듯, 사색을 통해 자신을 비워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124.

 

2. “이스라엘이 야훼의 백성으로 뽑히다2(12-16)”을 읽었습니다. 집을 짓는 일이나,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집이건 삶이건 제대로 똑바로 세워질 것은 물론이고, 살아가는 삶이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초가 든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기초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들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의 기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를 대표해서 이스라엘이 축복의 근원으로 하나님과 약속하였고, 그들 이스라엘을 통해서 축복의 통로가 되어 온 세상 만백성을 축복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약속을 따르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은 약속은 오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게 된 약속이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유일무이한 야훼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신실하게 이해하는 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베푸실 모든 축복의 약속을 이행하시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살 땅에서 나는 열매와 술과 기름에 복을 주시고, 짐승들의 새끼가 불어나도록 복을 주시며,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도 없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질병까지도 다 고쳐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건강하고 형통한 축복을 누리며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누릴 복에 대해서 길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살펴보면 뭐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말씀할지 모르겠습니다. 행복은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온한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로버트 브라우닝의 피파의 노래를 영문학자 이봉구 선생은 그의 책 <영원한 세계의 명시>에서 첫째로 선택한 이유를 그래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때는 봄, 아침 일곱 시, 언덕엔 이슬방울 진주되어 빛나고, 종달샌 하늘 높이 나는데, 달팽인 가시나무 위에 도사렸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온 누리가 평화롭도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 풍경을 행복의 첫 번째 장면으로 꼽은 것입니다. ‘이웃집 강아지가 짓고 있다. 산새들은 우리 집 감나무에 앉았다 날아간다. 매화가 꽃을 피려 슬슬 기지개를 켠다. 하나님 변함없이 하늘에 계시니, 나도 세상도 평화롭구나.’ 브라우닝 못지않은 평화와 행복이 우리들 곁에도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복은 저 산 저 너머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행복을 느끼게 하는 눈과 귀가 깨어 있기만 하면 지천에 깔리고 깔린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그때 가난한 이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을 위해서 손을 내밀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을 가르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떠오르는 아침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94(2025. 3. 6. 목요일).

시편 107:32-34.

찬송 4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가장 빨리 잊어야 할 일을 가장 잘 기억한다. 기억은 가장 필요로 할 때 우리를 버리고, 전혀 필요치 않을 때에 우리에게 달려온다. 기억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일에는 자상함을 보이며,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에는 태만하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음으로, 과거의 아픈 기억을 해소할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과거를 붙잡고 과거에 얽매여 상처받고 아프지 마라.”

   윤문원, <지혜와 평정>, p.123.

 

2. “이스라엘이 야훼의 백성으로 뽑히다(6-11)”을 읽었습니다. 흔히들 어떤 조직이나 어떤 일에서 필요한 사람을 뽑아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재를 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가령 제가 초등학생 시절에 우리 학교를 대표해서 군내 초등학교 학술 경연대회에 독창자로 뽑힌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제 생각으로는 서울에서 내려온 여학생 권금자가 저보다는 훨씬 더 노래를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저를 뽑은 것입니다. 그런데 3십리 길 떨어진 군청 소재지인 학교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그 권금자 학생은 그곳까지 와서 대회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금상을 받고 노트 20권을 상으로 받았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뽑으셨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질문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의 모든 백성들 중에서 가장 슬기롭고 착하고 아름다운 백성이어서 그리하신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어떤 일에 뽑힌다고 하면 그래도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능력을 겸비한 사람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이지 절대적인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뽑힌 사람은 어찌 되었건 간에 더욱 겸손해야 할 것이고, 더욱 더 분발해서 더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실하게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소중한 선민으로 택하신 까닭을 조목조목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아서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그들은 아주 작은 민족이라고 말입니다(7). 그것은 그들의 선조와 맺으신 맹세(약속)를 지키시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파라오처럼 강한 이집트 왕의 손에서 노예로 살던 그들을 구출하신 것은 그들의 선조들과 하나님과 사이에 사랑으로 맺는 약속을 잘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신실하게 지켜주시지만, 하나님을 싫어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려 멸망시키시려는 것이다 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사랑으로 맺은 약속이 있었던 것입니다(쉐마, 6:4-9). 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비록 소수민족에 불과하고, 노예로 살고 있는 초라한 사람들에 불과하지만, 그들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민족이 가진 어떤 우수함이나 신실함이나 여러 가지 훌륭한 가치들이 있어서 그들을 보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시절부터 그들과 맺은 신신한 약속,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려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비롯해서, 귀중하고 위대한 직분을 받은 것이나,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건강한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것 등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 어떤 장점이나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보시고 관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우리 믿음의 조상과 맺은 약속을 지키시려는 분명한 목적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쉐마의 교훈대로, 야훼를 유일무이한 하나님으로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 그리고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그런 은총을 받아 누렸고, 누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누릴 것임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잠들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일깨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도 크고 넘치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란 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93(2025. 3. 5. 수요일).

시편 107:29-31.

찬송 25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지혜서에서 회개라는 말을 찾았지만 실패하였다. ‘선입견’, ‘단호함’, ‘성공관리’, ‘설득력’, ‘분별력100여개의 많은 단어들 속에서 회개라는 말은 찾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회개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굳이 그런 말은 입 밖으로 꺼내기를 주저한다는 뜻이다.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꾀병을 앓았다. 교회에서 돌아온 아내에게 목사님이 무슨 설교를 하시던가요?” 묻자, “회개하라. 고 하십디다.”고 하자, “누굴 보고 하는 말입디까?” 하니까, “당신보고 하십디다.”고 대답했다 한다. 우리는 매 순간 회개해야 하며,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

 

2. “돌아오라(12-17)”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첫날인 성회 수요일입니다. 성경에는 요엘이란 이름이 12번 나오는데, 행전 2:16을 제외하고는 요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요엘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어서 그의 시대를 추정하는 것도 어렵다고 얘기합니다. 메뚜기 떼의 재앙이 있고 난 후에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을 말하는데, 이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요엘서에서는 심판의 날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의의 교사인 메시야와 성령을 보내주심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2:23). 그러니까 심판하실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심판하고 돌아설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메뚜기 떼의 재앙과 같은 자연 재앙은 우연히 임하는 것이 아니며, 범죄 하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책이요 경고라는 사실이다. 성회 수요일에는 올리브 나무를 태운 재를 이마에 찍어 바르며 너는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3:19, 3:20) 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성회 수요일에 참된 회개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묵상해야 합니다. 죄의 가공할 능력에 대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본의 아니게 다른 분의 재판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판결이 일찍 끝난 때문인지, 다른 재판장의 모습도 방청할 수 있었는데, 살인죄를 지은 탈북자의 재판이며, 사기를 친 사람의 재판 등 다양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는데, 최후 진술 후에 내리는 선고는 문자 그대로 추상같았습니다. 판사의 한 마디에 몇 년간 영어/囹圄의 몸이 될 수도 있고, 수억 원의 재물을 보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실하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경우에는 엄청난 선처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요엘서 기자는 회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첫째 야훼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옷을 찢을 것이 아니라 심장을 찢으면서 말입니다. 심장을 찢는다는 말은 죄로 말미암아 굳게 뭉쳐있는 심장을 찢어 헐어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야훼 하나님께서 가엾게 여기시어 재앙을 거두실지 누가 알겠느냐고 하십니다. 우리는 회개하면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용서의 깃발은 하나님 손에 들려 있어서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정도로 절실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단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열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단식이란 식음을 전폐하는 일입니다. 식음을 전폐하는 것이란, 가장 어렵고 힘든 그래서 절실한 마음으로 임하는 그런 자세를 가지려고 할 때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회를 여는 것은 온 무리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간구하거나 탄원하라는 의미입니다. 회개란 단순히 입술로 외치는 회개의 말이 아닙니다.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절실한 자세로 하나님께 구하는 일이며, 동시에 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탄원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 회개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일입니다. 죄와 악에서 180도 돌이켜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92(2025. 3. 4. 화요일).

시편 107:26-28.

찬송 56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정직은 사회를 묶는 끈이다. 그것이 없으면 사회는 무질서와 혼란으로 무너질 것이다. 거짓으로 가정을 다스릴 수 없으며, 국가도 마찬가지 이다. 정직을 희생시키는 어떤 변명도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행복한 사람의 무기는 정직함이다. 정직함은 말과 행동을 통해 빛을 발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하라.” 윤문원, <지혜와 평정>, p.153.

 

2.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2(16-25)”을 읽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직접적이고 현실적이며 경험적인 일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일이나, 선생이 제자를 사랑하는 일 등은 직접적이고 현실적이며 경험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직접적이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으며 경험적인 것은 더욱 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자칫 허공을 향한 독백이거나 유명무실한 공염불처럼 되기 십상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태권도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 중의 하나가, 부모님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다는 것에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는 영상입니다. 가령 입단이나 승단을 하게 될 때 가족들을 초청하는 자리에서, 한국식으로 복장을 여민 후 큰 절을 공손하게 하는데, 그 모습에서 부모님들이 뜻밖의 효심을 보고 감동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사랑한다느니, 존경한다느니 하는 말은 없어도, 정성을 다해서 부모님들께 큰 절을 올리는 그 모습 하나로 존경과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온 가족들이 둘러앉아서 아침 가족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회상됩니다. 아버지는 사회를 보시고, 순번을 따라 돌아가면서 대표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한 절씩 돌려가며 읽고, 아버지가 중심 주제를 한 말씀하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끝나는 가족 예배 말입니다. 저는 이 가족예배가 제게 주었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족 예배가 계속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유지되고 이어졌던 것을 회상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규정을 지키는 까닭을 묻게 될 후손들을 위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궁금해 하는 자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야 할 말씀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애급왕 바로 밑에서 수백 년 동안 노예로 살고 있을 때, 야훼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애급을 치사 우리 조상들을 이끌어 내시고, 또 약속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고 복되게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행복한 삶을 계속해서 살 수 있도록 이 계명과 규정을 지키도록 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과 규정들을 지킬 수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삶의 길을 따르려 하지 않고, 제 멋대로 살려고 하고 있는 것을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가령 제가 손에 든 어느 책은 행복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복은 행복하다고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 진다. 행복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행복은 먼 훗날에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다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행복하다고 계속해서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한 행복할까요? 오래지 않아서 작은 낙심과 슬픈 소식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말 허술한 행복이 되고 말 것입니다. 참 된 행복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묵묵하게 계명과 규정들을 지킬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이고 감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저녁 노을처럼 고요해 질 때 우리의 마음에 스며드는 자장가 같은 노래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91(2025. 3. 3. 월요일).

시편 107:23-25.

찬송 56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별력은 사안/事案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능력이다. 타당함, 정당함을 식별하는 실용적인 지혜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옳은지 현명하게 판단하는 것이며, 일을 하는 수단, 순서, 시간, 방법을 계산하는 것이다. 기억력보다는 분별력에 더 높은 가치를 두라. 어떤 일에 있어서는 기억력만으로 족하지만, 어떤 일에서는 분별력이 필수적이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66.

 

2.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1-15)”을 읽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신명기는 모세의 고별 설교로 불립니다. 앞서의 네 권의 책의 요점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중심점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만 섬기라.”이다. 요즘 우리는 법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만인 앞에 법은 평등하다는 구절을 떠올릴 때는 더욱 더 헷갈리는 시간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해석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해를 강요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표제어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세속적인 법의 근본정신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를 원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법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신앙의 법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목적을 둔다면, 사회법은 인간을 사랑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초점을 두고 살아야 할 우리들은 하나님 사랑보다는 재물과 명예를 사랑하는데 취해 있는 것은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을 사랑하는데 목적을 둔 사회법은 그 정신을 잃어버린 채 세속적인 야망을 이루는데 혈안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 본래의 정신과는 달리 이른바 세속적인 출세와 성공에 매몰되어 버렸습니다.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지금이라도 신앙의 법이나 사회법의 정신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신명기서 저자는 행복한 삶의 길을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내리신 분부를 모두들 성심껏 지켜야 한다. 너희의 하나님 야훼께서 분부해 주신 길만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행복하게 살고, 잘 될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고 말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는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쉐마/ שמע(들으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4-9절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들의 신양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인데, “마음을 다 기우리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희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첫째는 자신의 마음에 이 말씀을 새기고, 둘째는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주고, 셋째는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잠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날 때에 항상 들려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손과 이마에 표를 달고, 문설주와 대문에 써서 붙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일이며, 그래야 행복하게 살게 되고, 하나님이 허락한 땅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이 쉐마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외울 수도 있고, 자녀를 가르칠 수도 있으며, 여기저기 써서 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안에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삶에 길들여진다고 말입니다. 마치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가르치는 방법,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 앞자리에 앉고, 그날 배운 내용을 철저하게 복습하고, 공부를 소홀히 하는 친구에게 친절하게 가르치게 되면 저절로 훌륭한 학생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사랑할 수야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공부가 즐겁겠습니까? 쉐마를 억지로라도 실천하다가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억지로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다보면 공부를 잘 하게 되듯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90(2025. 3. 2. 주님의 산상변모주일).

시편 107:19-22.

찬송 94, 263, 47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의무는 인생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에 대한 의무, 인간과 신에 대한 의무. <중략>. 의무감이 없으면 시련이나 유혹이 닥치는 순간 흔들리게 되고 쓰러지게 된다. 반면 의무감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나약한 사람도 강해질 수 있고,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 의무는 옳은 일을 행하게 하는 원천이다. 의무감이 강한 사람은 무엇보다 말과 행동이 진실하다. 옳은 것을 옳은 방법으로 옳은 시기에 말하고 행한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p.150-151.

 

2. 주님의 산상변모 주일의 복음서 눅 9:28-36을 본문으로 주님께서 변모하신 의미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시고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는데, 그곳에서 주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으며, 모세와 엘리야가 곁에 있었는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님의 변모가 전하는 첫째 의미는 주님께서 기도하는 동안에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28-29).

흥미로운 점은 세 명의 제자들이 주님을 주목해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하면 자신이 원하는 소원들을 쉴 새 없이 고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다른 종교의 기도와 비슷한 현상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드려야 할 기도는 할 수 있는 한 주님을 바라보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처럼, 그들 역시 주님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 중에도 주님을 주목해서 바라보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일방적인 우리의 사정이나 목적을 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독특한 우리 크리스천의 기도입니다. 그때 우리는 놀라운 현상들에 눈을 뜰 수 있게 되고, 신비한 현상을 보게 되며, 위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변모가 전하는 두 번째 의미는 십자가를 주제로 토론한 것입니다(30-32).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노예생활에서 자유민으로 해방시킨 지도자로 등장했다면,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850명의 우상의 제사장들을 무찌른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들의 등장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려고 하시는 일 곧 십자가에 대한 것이었다 부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을 향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목표임을 증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소환할 정도로 말입니다. 특히 모세와 엘리야는 죄와 죽음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고민을 한 인물들이었고, 실제로 죄의 값에 대해서 죽음 뿐 이라는 분명한 징벌을 보여 준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으로 섬긴 자들을 하루만에 3천명을 죽이는 벌을 내렸고(32:25-29), 엘리야 역시 우상숭배자 제사장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죽인 것입니다(왕상 18:16-40).

 

주님의 변모사건이 전하는 세 번째 의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33-36).

설악산 신선대에는 너럭바위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데, 직접적인 이름뿐 아니라,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기는 일입니다.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합니다.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는 내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중심 주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닭은 하나님의 실재는 말씀이며, 말씀에 대한 이해와 순종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을 순종한다는 의미도 다시 한 번 숙고해야 하겠습니다. 순종은 자신의 의지나 생각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삼상 15:22) 강조하고 있습니다. 순종을 배울 이유입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우슬초 목사님 시무)에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89(2025. 3. 1. 토요일).

시편 107:16-18.

찬송 3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 구교를 막론하고 한국 기독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김경집교수는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p.7>에서 이렇게 진단한다. “근본주의와 교조주의에 대한 집착이 그 첫째이다. 근본주의는 절대적 진리를 강조하는 종교운동으로, 그 경직성과 배타성이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조주의는 과학적 해명 없이 신앙과 신조에 빠져 도그마화 하며 무빈판적 독단주의에 우려가 많은 폐해를 지적한다.” 문제는 열린 마음으로 신앙의 길을 찾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점이라 하겠다.

 

2.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다(1-22)”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무름 전통/고엘(לאג)의 실례/實例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룻의 시모 나오미는 베들레헴의 유지인 보아스가 자신의 친족 중 가까운 분임을 며느리 룻에게 알리며, 그 분이 룻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인가 무름 전통을 실행할 것임을 말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선민으로써의 자존감과 그 밖의 잃어버린 재산에 대한 권리 행사를 무름이라는 전통을 통해 행사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느 날 보아스는 나오미와 가장 가꺄운 친족을 불러 세우고, 나오미의 가정사를 의논하는 얘기가 오갑니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돌아온 것과 그의 남편 엘리멜렉의 땅을 파려고 내 놨는데, 가장 가까운 당신이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으니 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모압에서 데리고 온 며느리 룻도 떠맡아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친족 중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땅과 사람까지 떠맡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가까운 친족은 땅은 물론 사람도 떠맡을 생각이 없다며, 다음 차례로 권리가 있는 보아스에게 양보합니다. 이를 여러 명의 장로들 앞에서 증언한 것입니다. 이로써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재산과 가족까지 떠맡게 됩니다. 이런 제도는 하나님의 선민이면서 동시에 땅을 선물로 받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신분과 땅에 대한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한 오래 된 전통(25:23-28)을 지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무름 전통이 지켜지지 않게 될 경우에는 희년이라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어서, 땅과 사람까지 그 정통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들의 선민의식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애착의 크기를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와 담판을 가진 가까운 친족은 신발 한 짝을 벗어서 증표로 보아스에게 주었고, 모든 무름 과정은 일단락이 됩니다. 여기에서 저 유명한 신발 벗기운 자라는 유명한 전통도 알 수 있게 됩니다. 더 이상 친족에 대한 의무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말입니다. 마침내 보아스는 많은 사람들과 장로들 앞에서 선언을 합니다. 자신은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에게 속해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에게서 사게 되었다는 것과, 그의 며느리 룻까지도 아내로 얻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고인의 이름을 잇는 자식을 낳도록 해 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당신들이 증인이라고 하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증인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룻은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오벳이었고, 나오미는 그를 아들로 받아들여 키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보아스에게서 낳은 룻의 아들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는데, 그가 유대 나라의 두 번째 왕이 된 바로 그 다윗이었습니다. 우리는 나오미와 룻의 얘기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선민의 계보를 이어가는 안전장치로, 무름이라는 전통을 살펴보았습니다.

 

3. 삼일절입니다. 삼일절의 의미와 정신을 생각하는 날이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