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88(2025. 2. 28. 금요일).

시편 107:13-15.

찬송 5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복장은 본래는 화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디아스포라가 된 후에는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 중세 기독교에 의해서 강제로 마치 죄수처럼 검은 옷과 검은 모자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1215년 제 4차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유대인과 무슬림의 옷에 특별 식표를 달아 어디에서든지 이들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고, 1217년 영국 왕 헨리 3세는 유대인의 옷에 십계명의 뱃지를 달도록 명하였고, 1269년 프랑스 왕 루이스 9세는 유대인의 식표를 상의 앞뒤에 달도록 명하였다. 독일의 나치는 유대인들의 앞가슴에 커다란 별을 붙이게 하였다.

 

2. “밤을 타서 보아스와 가까워지다(1-18)”을 읽었습니다. 유행가 가수 박상철의 <쿵짝 쿵짝>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품바가 품바가 돌아간다. 세상살이 힘들다고 포기 말아요. 살다 보면 좋은날 있을 테니까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이 쿵짝이라는 말은 상대방과 죽이 잘 맞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시모와 며느리가 쿵짝을 하는 흥미로운 일화가 나옵니다. 인생 선배일 뿐 아니라, 유대의 풍습과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시모 나오미가, 이방 나라에서 온 며느리 룻을 가르치는 얘기인데, 제가 요즘 소개하는 유대인의 전통 희년과 무름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소유했던 땅을 회복시켜주는 것만이 아니라, 어렵게 된 처지의 친족을 책임져 주는 일입니다. 히브리어로는 고엘(לאג) 무름이라는 전통인데, 25:23-28에 근거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제도를 가장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일화가 나오미의 둘째 며느리 룻의 경우라 하겠습니다. 청상과부가 된 룻을 남편의 친족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이가 합법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전통인 것입니다. 시모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그 시작을 잘 알려줍니다. 보리밭 추수하는 일터에서 주인과 일꾼들이 잠을 자는 것은 일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일터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 습관을 따른 것인데, 주인 보아스의 침상을 미리 알아둔 후, 목욕을 하고 곱게 단장을 한 룻이 깊은 밤중에 보아스의 발밑 이불자락을 들치고 들어가 잠을 자는 것입니다. 한 밤중에 한기를 느낀 보아스가 일어나 살펴보니 웬 젊은 여자가 자신의 발밑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보아스와 룻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룻의 의지를 알게 됩니다. 보아스는 룻의 사람됨을 칭찬합니다. 시모의 권유를 따라 젊은 사람에게 개가/改嫁해 가지 않고, 시모를 지극정성 섬길 뿐 아니라, 낯선 시모 나라의 전통까지 따르는 것에 감동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무름의 전례대로 룻의 장래를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보아스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어젯밤의 일이 새어나게 구설수에 오르게 될까 염려하며, 이른 아침에 룻이 얼굴을 가릴 때 쓰는 장옷을 벌려서 보리 여섯 되박을 담아주고 시모에게로 되돌려 보냅니다. 룻은 이 모든 일들을 시모에게 고하였고, 보아스가 무름을 위해서 힘써줄 것을 확신하며 룻을 격려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검토하거나 배울 때 놓쳐서는 안 될 것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현재의 삶과는 너무 다른 오랜 옛날에 있었던 전통이나 법과 같은 것들인데, 시대가 지난 사건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있어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손사래 치거나, 무시하려고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무름이나 희년과 같은 전통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깨우침입니다. 저는 2002년 토론토와 필라델피아를 왕복하는 주말여행이 있었습니다. 우리 묵상식구인 엥글러 목사님이 한국 선교를 마치고 미국 지역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때 토론토에서 성경강습회를 인도하고 있는 제게 목사 임명식에 와서 축사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자 적어서 참석했었는데, 행사를 마치고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 일행 중에는 약 40, 50명쯤 되는 유대인 젊은이들이 검은 두루마기와 검은 모자를 쓰고 검색대를 프리패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유대인들이 그만큼 신뢰를 얻고 있다는 반증이었습니다. 9.11사태가 일어나고 나서 전 세계의 공항은 삼엄한 검색이 실시되어 모욕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때 유대인 젊은이들은 복장이며 모습이 일반인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길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하나님이 뽑으신 사람이다.”라며 자신을 과시하는 듯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전통을 지키고 있는 지 궁금해졌습니다.

 

3. 묵상식구 엥글러 목사님이 외손자가 세례를 받는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중국 치치하얼의 김태성목사님께서 여러분에게 안부인사 전해왔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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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87(2025. 2. 27. 목요일).

시편 107:10-12.

찬송 48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목표는 깨어나면 사라지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사람들에게 삶의 목표, 혹은 일하는 목표가 무엇이냐 물으면, 직장을 구하거나 사업을 위해서 그리고 악기를 배우는 것 등을 얘기한다. 그런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세웠느냐 물으면 대답을 잘 하지 못한다. 목표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와 함께 또 중요한 것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일이다. 무엇을 할까?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성공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새삼스럽지만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할 것 같다.

 

2. “룻이 밭에서 보아스를 만나다2(14-23)”을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과 차별되는 독특한 법과 전통이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할 때 많은 오해가 발생하고, 심각하게는 편협한 시각을 갖게 됩니다. 가령 희년이랄지, 수혼법, 무름 전통, 그리고 고르반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습니다. 가령 오늘 본문에는 20절에 나오는 떠맡아 줄 사람이라는 낯선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레 25:23-28에 근거하는 내용입니다. 토지의 소유권에 관한 것으로, 유대인들은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정착할 때에 열 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있는 유대인들의 땅은 자신들이 일구었거나 매입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거져 얻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땅을 지킬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팔거나 빼앗겼을 경우, 그것을 다시 찾는 기회를 주었는데, 그 하나가 희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일가친척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이가 대신 무르기 위해서 사 주는 전통이었습니다. 이를 무름이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는 고엘(לאג)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친족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는 어떤 관계인지는 찾을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무름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아스나 나오미는 알고 있었다는 구절이 본문에 나옵니다(20). 그러니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가지는 것은 물론,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아스가 식사 시간에 룻으로 하여금 일꾼들 곁에서 빵을 실컷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머슴들에게 내린 명령 중에는, 이삭줍기는 보릿단에서 멀리 떨어진 빈 밭이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보릿단 곁을 다닐 수 있게 하였고, 심지어 보릿단에서 이삭을 빼내어 흘려주라고 한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일을 시모에게 고하자 시모는 자신과 보아스와의 관계를 들려준 것입니다.

     룻에 대한 시모의 걱정거리는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보아스의 진정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오미와 룻의 행적을 통해서 유대인의 가족 관계와 그것을 지키려는 끈질긴 노력을 알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택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호하고 지키시려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힌다는 점에서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지난/至難한 삶의 모퉁이에서 어떻게 섭리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유목민에서 농경사회로 정착하는 어려움은 물론,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 풍파 속에서 그들 서로가 감싸주고 보듬어 주는 제도와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이 율법이나 전통과 같은 제도를 통해서 보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백성이라고 하는데(εκκλησια), 이에 대한 보증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과연 희년의 법을 명목상/名目上으로만 지키고 있을 뿐 아무런 효과나 이익이 없다는 점이 그렇고, 무름 전통과 같은 교인 상호간의 연대성/連帶性이 전무하다는 것이나, 고르반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 강령도 없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εκ καλεω)으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전통들을 우리들의 삶에서도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율법 못지않게 전통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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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86(2025. 2. 26. 수요일).

시편 107:7-9.

찬송 473.

성경 룻 2:1-1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이솝 우화의 백미이다. 토끼의 자만심이나 거북이의 끈질김이 초점이라 할 수 있으나, 토끼는 거북이만을 보고 달렸고, 거북이는 최종 결승점을 보고 달렸다는 데 승패가 갈렸던 것이다. 우리는 목표지점을 제대로 보고 달리고 있는가? 아니면 경쟁자만 의식하며 달리고 있는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2. “룻이 보아스를 만나다(1-13)”을 읽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나, 사람과 신과의 만남, 그 밖에 운명적인 만남과 같은 다양한 만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이런 만남을 약속되거나 의도적인 만남을 의미하는 meet와 우연한 만남을 의미하는 encounter로 구별해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의 둘째 며느리 룻과 베들레헴의 부자 보아스 사이의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의도적인 만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만남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만남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경우에만 그 만남들은 가치 있는 것이 되고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나오미와 룻은 거지 신세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그들을 내치지 않고 보듬어 주었습니다. 마침 보리를 수확하는 철이어서 룻은 보리 이삭이라도 줍겠다고 시모에게 청했고, 시모는 허락했는데 공교롭게도 남편의 일가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에서 자기 밭에서 추수하는 것을 감독하기 위해서 왔는데, 전통적인 유대인의 인사를 일꾼들과 나눕니다. “야훼께서 자네들과 함께 하여 주시기를 바라네.” 그러나 일꾼들은 야훼께 복을 받으십시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젊은 여인 룻이 눈에 띄어 묻습니다. “저 젊은 여인은 누구인가?”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온 여인이라고 하며, 이삭을 줍게 해달라고 사정해서 들어주었는데 아침부터 지금까지 앉지도 않고 일하는 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아스는 롯을 불러 다른 사람 밭에 가지 말고 내 밭에서 이삭을 주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머슴들이 성가시게 하지 않도록 일러놓겠다고 하면서, 네 시모를 극진히 섬기는 이야기며, 자기 고향을 버리고 낯선 시모의 땅에 와서 고생하는데, 하나님께서 어찌 갚아주시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목이 마르거든 머슴들이 길어다 놓은 항아리에서 물을 마시라고 권합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아랍 세계에서는 수혼법이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형의 아들을 낳아주는 전통일 뿐 아니라, 친족 가운데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책임지고 돌봐주는 것 까지도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오미의 시댁으로 가장 가까운 친족인 보아스는 나오미의 가정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우리나라 속담은 어떤 절망 속에서도 기적 같은 희망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상상력을 전해주고 있는데, 나오미와 룻의 가정을 통해서도 이를 배우게 됩니다. 제가 은퇴를 하고 고향에 가서 살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바로 아래 동생에게 속내를 비쳤을 때, 동생 장로는 한 마디로 그러지 마십시오. 이곳은 형님의 고향이긴 하지만, 이제는 말벗이 될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망해서 찾아오는 고향처럼 여길까 생각되니, 살던 곳 주변에서 여생을 보내십시오.”라고 권했습니다. 그 동생의 말이 지금도 얼마나 고맙게 생각되는지 모릅니다. 늙고 병들어 고향을 찾는 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서글퍼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경우를 보면 그래도 힘든 세상살이에서 지치고 낙담했을 때, 내치지 않고 받아주는 곳은 고향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고향에는 또 다른 희망이 생길 수 있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마지막 붙잡을 수 있는 곳은 고향의 산과 강 그리고 낯익은 얼굴들이었다고 말입니다. 고단한 삶을 짊어지고 헤매는 나오미와 룻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과 평안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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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85(2025. 2. 25. 화요일).

시편 107:4-6.

찬송 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삶이 고통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모든 주요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다. 구체적인 표현이 다를 뿐이다. 불교는 그런 교리를 직접 가르치고, 기독교는 십자가로 보여준다. 유대인은 오랫동안 고통을 견뎌온 조상들의 행적을 기리며 기억한다. 삶이 고통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인 종교적 교리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쉽게 상처입고 잘 망가진다. 누구도 노화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생에서는 이런 암울한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제대로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던 피터슨, <12가지 인생의 법칙>, pp. 464-465.

 

2. “룻과 나오미2(15-22)”을 읽었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시인이 말하는 그 때란 어느 때를 가리키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가장 힘든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생활을 하던 시절이 가장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회상합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배우고 있는 과목이 훗날 내게 무슨 도움이 될까 전혀 감조차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삶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첫 삶의 터전이 되었던 북아현동 깊숙이 자리 잡은 <인우학사>에서 방을 데울 연탄난로를 개인이 사서 연탄불을 지펴야 할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이곳에서 묵을 날이 몇 날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눠 부담할 수 있는 룸메이트도 없을 때 말입니다. 19702-4월은 혹독한 추위로 밤새 떨었던 추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맛보았던 식당이 있는 빌딩 벽에서 맞았던 아침 햇살의 고마움은 평생을 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확실성을 가슴에 가득 안고 살아갈 때,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생각하는 결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 불어 닥칠지 전혀 알 수 없을지라도 최선의 길을 고집하는 자세 말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가장 훌륭한 답이 된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도 가르쳐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젖먹이 어린 아이로 살아가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우리가 만일 룻의 처지였다고 가정한다면, 여러분은 동서/同壻인 오르바처럼 개가/改嫁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친정을 택하는 것이 최선일까요? 아니면 혼자인 시모를 모시고 그분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동행하며 일생을 살겠다 택하는 것이 최선일까요? 그 대답은 저로써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의 목표가 있고, 생각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을 택하든 그 책임을 오롯이 자신이 짊어지면 무방한 것이니 말입니다. 롯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나님이 제 하나님이십니다. 어머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고, 어머님 곁에 같이 묻히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됩니다. 죽음 밖에는 아무도 저를 어머님에게서 떼어 내지 못합니다.”<공동번역 성경>. 그렇게 해서 시모 나오미와 둘째 며느리 룻은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룻은 시모와 일생을 함께 하겠다 결심하고 실천한 것일까? 라고 말입니다. 몇 가지 가능한 대답이 있습니다. 첫째는 결혼의 의미를 시모에게서 잘 배운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물론 아랍 세계에서도 이런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삶의 의미를 바꾸고 싶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이방인 남편 기룐과 일생을 같이하겠다 결심하였을 때, 그녀에게 다른 인생이란 추호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곤 합니다. 룻이 새로운 삶을 택하지 않고 과부인 시모를 따라 살겠다는 의지와 결심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인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순수한 신앙적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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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84(2025. 2. 24. 월요일).

시편 107:1-3.

찬송 46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 7:7-8<마법의 기도문>처럼 사용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는 이를 만나보자.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을 쉽게 들어주는 신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을 때도 아버지 하나님께 섣불리 은총을 구하지 않았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기도가 매일 응답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 간청이 적절하지 않았기에도 그렇지만, 또 실패나 큰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하나님께 물리적인 법칙을 깨트리고 도와달라는 말 자체가 부당한 일이다. /앞에 수레를 매달 수 없듯이 문제를 마법적으로 해결해 달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문제를 해결할 강한 의지와 올바른 성품, 지치지 않는 힘을 기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편이 낫다. 아니면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하는 게 더 낫다.” 이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조던 B. 피터슨, 강주헌 역, <12가지 인생의 법칙>, p.491.

 

2. “룻과 나오미(1-14)”을 읽었습니다. 성경도 다른 기록과 마찬가지로 시대 정황을 비롯한 이른바 삶의 자리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속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소위 배경 속에서 본문”(Text in Context)란 말인데,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말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룻기도 예외는 아닙니다. 때는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영웅들이 죽고 사사들이 활동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전 1,200-1020경으로,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는 오랜 가뭄으로 살 수가 없어서 두 아들을 데리고 이방인이 살고 있던 모압 지방으로 살길을 찾아 떠나야 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유목민으로 살았으나, 가나안에 정착하면서부터는 농경사회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땅에 씨앗을 뿌려 곡식을 기르고, 무화과와 포도나무를 길러 과일을 먹으며, 올리브 열매를 짜서 기름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러자니 농경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름진 땅을 유지하는 것인데, 그 필수요건은 충분한 비가 내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가뭄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는데 엘리야 시절에는 36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았던 때를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도 22살까지는 농촌에 살면서 농사일을 거들기도 하였는데, 비가오지 않으면 온 나라가 난리가 났습니다. 기우제를 드리고 심지어 교회에서까지 비를 내려달라고 철야기도회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엘리멜렉 가정은 그래도 큰 호수가 있는 사해 주변의 모압 땅이 피난처로는 적합하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낯선 이방인의 땅에서 가장인 엘리멜렉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떠나게 되고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두 아들은 성실하게 보여서 그 지방 모압 여인 중에서 며느릿감을 찾았고 10년쯤 되었는데, 이번에는 두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 세 과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기구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나오미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기근을 피해 모진 목숨을 살려보려고 찾아온 이방 땅 모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남은 것은 이방 여인 두 며느리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고향에서 들려온 소식은 고향에 풍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낯선 남의 땅에서 살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웁니다. 문제는 두 며느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의논을 합니다. 처음에는 두 며느리가 시모의 고향 길에 동행을 합니다. 그런데 시모인 나오미는 생각을 거듭해도 이게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상과부를 둘씩이나 데리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일뿐더러, 그 젊디젊은 며느리들의 남은 인생을 망치게 할 수 없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권합니다.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두 며느리는 시모를 껴안고 울면서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른바 저유명한 수혼법/嫂婚法 이야기입니다. 형수와 관계를 해서 형의 아들을 낳아주는 규정으로 아랍세계에서는 널리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모가 동생을 낳아서 두 형수에게 아들을 낳아줄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 말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하나님께 저주 받은 사람인 것을 토로하며 간곡하게 권하였는데, 큰 며느리 오르바는 시모를 껴안고 작별인사를 하고 친정으로 돌아갔고, 룻은 시모를 떠나지 않겠다고 남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절망만을 안고 살아갈 룻의 일생이 내다보이는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선물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고단하고 캄캄한 룻의 삶과 역사는 오래진 않은 훗날 이스라엘의 영웅이고 왕 중의 왕인 다윗 가문을 일으켜 세우게 된다고 말입니다. 이로부터 적어도 100년 후에(3) 다윗이 룻의 태에서 출생하였다는 말입니다. 절망과 혼돈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게 되는 사건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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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83(2025. 2. 23. 주현절후 일곱째 주일).

시편 106:46-47.

찬송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그가 만년에 쓴 작품으로, 네프로도프와 카추샤의 연애를 말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당시의 교회를 비판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가 당시 교회가 의식, 기만에 찬 예배, 교회 안에서의 우상숭배 등에 대해서 교회를 헐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교회의 권위와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진리에서 벗어난 모습이었고, 죄의 심연에 빠져있는 교회가 다시 부활해야 세상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 주현절 후 일곱째 주일의 사도서간 고전 15:21-26을 본문으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부활은 설명이 가능한 일이 아니고 신비입니다. 크리스천들이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또한 신비입니다. 부활 신앙은 가장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고, 가장 위대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은 세상 안에 살고 있습니다(21-23).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만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세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인간다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세계를 향해서 머리와 가슴을 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이나 희망을 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 차원 높은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두 종류의 사람을 우리는 비난할 수도 없고, 폄하할 수도 없습니다. 둘 사이에는 죽는 순간까지 서로 논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를 두고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은 사유/思惟의 영역이 다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보편적인 인간은 이성의 영역에만 만족하는데 반해, 신앙인들은 이른바 하나님의 영역에까지 확장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이성의 영역에 만족하지 않고 훨씬 더 넓은 세계를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축복입니다(24-25).

부활 신앙은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이 혼재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심지어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도 부활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잘 가늠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 신앙을 줄기차게 붙들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고서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사람의 사고/思考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고의 영역으로 불려 들어간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확실한 특징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세시대나 선지자들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눈으로 체험하였으나, 그 이후의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부활 신앙의 첫 열매이며 첫 대상입니다(26).

부활은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무덤에서 일어나신 사건 말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한 부활하신 날을 2천년 동안 지켜온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고전 15:20). 그러므로 이제는 죄와 죽음의 노예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 자유인으로 살아갈 특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힘을 가진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우리에게 주신 이 부활신앙을 끝까지 고백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과,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기는 것뿐입니다.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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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82(2025. 2. 22. 토요일).

시편 106:44-45.

찬송 6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곳에서나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당신이 도움을 주었는데도 상대방이 당신을 공격한다면, 그 공격은 당신을 향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났거나 무력함과 싸우는 중일 것이다. 그 사람의 분노를 막지 말라. 당신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 이제 당신이 도울 차례다.”

켄트 케이스, 문채원역, <그래도>, p.99.

 

2.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35-37)”,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38-40)” 그리고 과부의 헌금(41-4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셋째 단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첫 번째 오해는 나라에 세금을 내고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 세금을 낼 필요가 있느냐는 것과, 내고 싶으면 내고 내기 싫으면 내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둘째 오해는 헌금을 강요하듯 할 수 없지 않으냐? 자발적으로 하는 헌금만이 올바른 헌금이라는 생각입니다. 첫째 오해는 평신도들의 입장이고, 둘째 오해는 목회자들의 오해입니다. 세금의 본래 목적은 국가나 지방정부 그리고 임의 단체에 이르기까지 구성원들이 일정한 세금과 회비를 냄으로 그 단체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모든 국민에게 납세의 의무를 지우는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국방, 치안 질서, 교육시설, 경제개발 등과 같은 나라의 큰 공공사업을 위해 다양하게 쓰이고 있으며, 기후 위기 대응 등 국가 간의 협력 사업이나, 대외 구호 원조 사업 등에 쓰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정한 수입이 있는 국민에게 원천징수하는 갑근세나 재산세 교육세 등이 강제로 징수하고 불응할 때는 각종 제재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회는 성경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이 주신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신 만물을 사용하고 있으며 당연히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의미로 헌금을 드려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가령 11조는 의무헌금이고, 감사의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의무감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전 입구에 놓여 있던 헌금궤에 헌금을 넣는 부자들과 과부의 모습을 관찰하신 주님께서 부자의 많은 돈과 과부의 동전 두 닢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헌금은 그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헌금에 대한 이해와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헌금에 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흥미로운 것은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드린 헌금 액수를 예수께서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그러니까 부자는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다고 했고, 과부는 겨우 두 렙돈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많은 헌금 함 중에서 여인들의 뜰 가까운 곳에는 13개의 헌금함이 있는데, 그 중에서 자진해서 헌금을 드리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 드린 헌금은 소제로 바치는 제물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국제주석 마가복음의 주석자 그닐카는 신약 주석가 Billerbeck을 인용하며, 당시에는 한 사제가 헌금을 받으며 헌금액을 알렸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람이나 관찰자는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래서 부자는 공개적으로 밝힌 헌금 액수 때문에 더 큰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부자는 비록 많은 헌금을 드렸을지라도 자신의 넉넉함 중에서 드린 것이라는 것과, 과부는 가난하고 구차한 살림살이 속에서 어쩌면 전 재산과 같은 헌금을 드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부자의 헌금하는 자세에서는 일상적이고 당연한 신앙적인 자세가 풍겨지는데 반해서, 과부는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을 드려야 하는 때문에 그만큼의 절실함과 간절함이 묻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부자에게서는 마치 자신의 삶에서 차지하는 하나님의 비중은 크고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과부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그녀의 삶을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무겁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젊은 날에 저 역시도 오지랖이 넓은 체 했는지, 어려운 이웃을 보면 가진 돈을 긁어서 도우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아내 몰래 그런 일을 했었는데, 솔직히 훗날 후회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관리하는 구호 기관을 선호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된 구호나 헌금은 최선을 다하는 마음과 자세라는 것을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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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81(2025. 2. 21. 금요일).

시편 106:41-43.

찬송 41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란 정말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이성적이지 못하고 논리적이지도 못하며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참기 어렵다. 그대로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란 우리가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사랑은 모두가 주고 받아야할 선물이다.”    캔트케이스, 문채원역, <그래도>, p.27.

 

2. “첫째가는 계명(28-34)”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파 사람들과의 부활에 대해서 토론하시는 것을 보고나서 마음이 감동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율법에 대한 이해를 주님과 공유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쉐마를 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야훼 하나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보다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율법학자는 반색을 하며,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다른 분은 없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고 대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말씀하시자, 더 이상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했습니다. 어쩌면 성경에서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나눈 대화중에서 이처럼 쿵짝이 잘 맞았던 적은 없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분이 주고받는 얘기가 따뜻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 혹은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서로가 의견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고, 확인해 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오랜 교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속에 간직한 신앙의 내용이나 태도가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난다고 한다면 이처럼 큰 낭패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우선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학자라고 했는데, 원어 성경에는 율법학자는 서기관/ γραμματεως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학자나 서기관은 동종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신약에서 자주 섞어서 사용하는 율법과 계명은 어떻게 같고 다른지도 구별해야 하겠습니다. 율법νομος 와 계명εντολη 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점과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무려 613개나 되는 방대한 내용으로 잘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간략하게 줄인 것이 계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10가지로 줄인 십계명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10가지 계명을 단 두 가지로 줄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613가지나 되는 율법이나 10가지 계명 그리고 이를 가장 간략하게 줄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고 있는 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혹자는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누가 형제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이미 살인한 것과 진배없으니 말입니다. 누가 있어 음욕을 품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이미 간음한 것과 같으니 말입니다. 누가 탐욕을 품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는 이미 율법과 계명을 위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율법학자를 칭찬하신 것은 이렇게 똑똑하게 율법과 계명을 분별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군계일학처럼 생각되어서도 그렇고, 그가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있다.”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율법을 아는 것에서 끝날 수 있음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으로 천국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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