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78(2025. 5. 29. 목요일).

시편 119:79-81.

찬송 3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네덜란드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비에 젖은 자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가 내리면 젖지 않으려고 비를 피한다. 그러나 막상 피할 곳도 없고 이미 온 몸이 젖고 나면 비가 전혀 두렵지 않게 된다. 비에 젖듯 우리 삶도 막상 젖으면 두렵지 않게 된다. 고통이나 시련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한동안은 못 견디게 힘들지만, 그 과정을 겪은 후에는 더 이상 두려움도 아픔도 느끼지 않게 되고 담대하게 맞서게 된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262.

 

2. “에스겔이 활동한 시대와 장소(1-4)”환상을 본 에스겔(5-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에스겔은 남왕국 유다의 요시야 왕 때 태어나 주전597년 왕과 다른 관리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하류에 위치한 그발강 가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이런 환상들을 해석하거나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해를 하자고 한다면, 그 환상은 모두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네 생물이 각각 얼굴과 두 날개를 가졌는데, 그 얼굴들은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의 얼굴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보좌를 섬기는 이 네 생물들은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요, 사자는 짐승들의 왕이고, 소는 가축들의 왕이며, 독수리는 새들의 왕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이 땅과 하늘의 왕이신 만왕의 왕이시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지만,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이 땅과 하늘의 왕이시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물들 한 가운데 활활 타는 숯불 같은 모양이 보였는데, 마치 횃불처럼 그 생물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그 불은 번쩍번쩍 빛났고, 번개처럼 이리 저리 번쩍거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가 머지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서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전히 당신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을 통해서 일하실 것을 말씀한다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심판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셨던 과거적 심판도 있고, 바벨론 포로와 같은 현세적인 심판도 있으며, 요한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미래적 심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심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심판은 그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을 알리는 심판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무 소용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심판을 통해서 의도하는 목적은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게 하는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살아가는 축복의 삶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들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자녀들이나 젊은이를 꾸짖는 것은 그들을 화나게 하고 더욱 더 멀리 떠나도록 하려함이 아니라, 본래의 자신/proto type으로 돌아와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역설적인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채찍이나 심판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감정을 품고 더욱 더 빗나가는 길로 치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 하루는 선생님에게서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세워두시고는 가슴을 후벼파는듯한 꾸중을 하신 것입니다. 그 따위로 무슨 대학엘 가겠다고 하느냐는 등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아주 훗날 그 선생님은 제가 목회하는 부산의 교회 예배에 참석하셨고, 그 때의 서운함을 제가 말씀드렸을 때, 그게 선생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훈계였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채찍이 아플수록, 심판이 무서울수록,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3.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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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7(2025. 5. 28. 수요일).

시편 119:76-78.

찬송 45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원말명초(元末明初) 시기에 이루어져 명()나라 홍무(洪武) 26(1393)에 처음 간행되었다는 명심보감/明心寶鑑중국을 넘어 한반도 · 일본 · 베트남 등지에 널리 퍼져있는 동몽서/童蒙書이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비록 환경이 어둡고 괴롭더라도 항상 마음의 눈을 넓게 뜨고 있어라.” 사람이 짐승이나 미물과 다른 것이 예 있음을 알리고 있다.

 

2. “살인자의 도피성(1-7)”을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 율법의 바탕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의 특별한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의 가나안 정착과정은 유대인의 법률이 엄격해야 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가령 간음한 자는 인민재판식으로 즉결 처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 말입니다. 이런 가혹한 처벌은 평화로운 지금도 중동지방에서는 종종 벌어지고 있는데,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간음한 가족을 <명예 살인>하는 일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20장에 보면, 실수로 살인한 사람에게도 피난처를 제공하고 재판을 통해 죗값을 치르게 하는 도피성 제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도피성 제도는(20:1-6) 법과 정의를 유지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소개된 도피성은 6곳으로, 갈릴리의 게데스, 에브라임의 세겜, 유다의 헤브론, 르우벤의 베셀, 길르앗의 라못, 므낫세의 바산 골란이 그곳들입니다(20:7-8). 문제는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자를 위해 도피성을 마련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문자적 적용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세상의 법률과 하나님의 율법이 보여주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가령 십계명을 예로 든다면, 두 돌판 중 첫째 돌 판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따른 계명이고, 두 번째 돌 판에는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데 따른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를 해석한 우리 주님은, 첫 들판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으로, 둘째 돌 판을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으로 풀었던 것입니다(22:37-40). 그런데 첫 돌판을 신 6:4-9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도피성의 규정을 제정하신 것은, 문자적이고 일률적인 법의 적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모든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근본 목적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단 살인자들에 대한 무섭고 엄격한 법 적용에 앞서서 그의 생명을 돌아보게 하는 또 한 번의 고려를 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도피성을 두게 된 장소가 비록 6곳에 불과하지만, 이스라엘 12지파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매우 짧은 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 셋, 요단강 서편에 셋을 두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실수한 살인자들이 도피처로 삼기에는 매우 유리한 장소를 정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법치주의가 작동되는 21세기에, 조령모개/朝令暮改식으로 힘센 사람에 의해서 마음대로 법을 개정하고 집행하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 의한 관세 폭거가 그것입니다. 그동안 세계 경제는 나름 원칙을 가지고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며, 자국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고, 그 손해를 관세로 징벌적 부과하는 무지막지한 불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좋은 제품을 값싸게 팔려고 할 때, 거래가 되는 법인데, 미국의 제조업이 높은 고용비용으로 비싼 물건이 되어 팔리지 않자, 억지로 그 손해를 다른 나라에 물리게 하는 힘에 의한 막무가내 식 관세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미국 남부의 근본주의 기독교를 앞세우는 사람이 말입니다. 전 세계가 트럼프에 의해서 경제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좌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오랜 관행은 반드시 유효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하시는 도피성의 규정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눈을 크게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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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6(2025. 5. 27. 화요일).

시편 119:73-75.

찬송 35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세계에나 약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약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정상이다. 물론 약자가 언제나 옳거나, 억울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약자가 있다면 당신은 약자를 도와야 한다. 인생을 정리할 즈음에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약자를 위해 힘쓴 일이야말로 당신의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 생각할 것이다.

 

2. “잘 살게 되어도 하나님을 잊지 말라(7-20)”을 읽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최근의 한국 기독교회의 침체 내지는 쇠락의 원인은 기도의 응답을 받은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그것은 이미 서구 기독교회가 여러 가지 면에서 안내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기독교회의 기도는 주시옵소서!”였고, 그 중심에는 세속적인 성공과 가치가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기도의 응답을 받은 서구 기독교회는 열정도 식고, 모임도 줄어들며, 선교의 동력도 떨어진 것입니다. 배고픔과 온갖 역경 앞에 서 있을 때는 교회당 마룻바닥에 엎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배가 불러지니까 마룻바닥을 편안한 의자로 바꾸었고, 뒤로 눕듯 젖혀진 몸은 고개만 겨우 숙이고 있으니 찬송도 기도도 매우 불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교회는 동기부여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배고프고 병들어 있을 때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주시옵소서!”가 자연스러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그런 동기부여가 적절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건강해지게 되면 또 그것에 적합한 새로운 동기 부여가 제시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장차 올 천국을 훈련하는 적극적인 방향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래도 한 때 80년대 하반기부터는 대형 병원을 시작으로 안내와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를 양성하고 봉사에 참여케 하였습니다. 1990년대 중순 당시 서울대 병원에는 7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있었는데, 저의 교회 고 김성일 장로님은 봉사회 총회장에 선출되어 수년간 안내와 호스피스 봉사, 장기 기증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마리아회 회장 고 정신숙 집사님은 자신이 자궁암 환자이면서도 별세 한 달여 앞까지 수년 동안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로 기쁘게 섬기다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현저한 양극화현상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敎會間의 양극화는 극심합니다. 그리고 도농간/都農間의 양극화 그리고 성도간의 양극화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교회간의 양극화란 대형 소형 교회간의 양극화를 말하고, 도농간이란 도시와 농촌간의 양극화를, 그리고 개인 간의 양극화는 소위 성공한 교인과 그렇지 못한 교인간의 양극화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양극화 현상은 그 간극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형교회 안에서는 이런 양극화가 세분화되어, 기업체를 운영하는 실업인회가 있는가 하면, 교사회, 법조인회, 그 밖에 다양한 취미 교양 모임들이 생겨나서 전담 목회자를 둘 정도입니다. 이런 모임들이 활발해 지자, 예배가 뒷전으로 밀려난 인상을 주고, 교회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개방되어 있는 남선교회나 여선교회의 역할은 희미해진 듯합니다. 이를 두고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 안으로 깊이 뿌리내렸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꿈은 이 세상 안에서 작은 천국을 이루어보겠다는 것이었는데, 교회가 부유해지고 성공하게 되니까 제 길을 잃어버린 형국이 된 것입니다. 비록 기독교적 정신과 가치관으로 출발하였다고 하지만, 이런 세속화는 본래의 기독교 정신을 망각하기에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살게 되고, 소떼 양떼가 불어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너희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행여나 교만한 생각으로 너희 하나님 야훼를 잊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12-14). 지금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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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5(2025. 5. 26. 월요일).

시편 119:70-72.

찬송 53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큰 뜻을 품고 이를 막는 장벽을 허물 영웅을 기대한다. 그러나 자신과 자기 공동체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갇혀 사는 소인배는 훨씬 더 많다. 수잔 앤터니는 미국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는 날을 꿈꾸었고,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꿈꾸며 비폭력 혁명을 지도하였고, 마틴 루터 킹은 인종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었고, 나이팅게일은 숙련된 간호사가 봉사하는 현대적인 병원을 꿈꾸었고, 조나스 소크는 소아마비를 근절할 꿈을 꾸었다. 그들의 꿈은 이루어졌다.

 

2.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시련을 주시다(1-6)”을 읽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시련의 의미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은 호기롭게 세계 최강이던 이집트의 파라오 왕을 따돌리고 430년의 길고 긴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가슴 벅찬 해방의 행진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시련이 찾아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해방과 시련,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혼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시장으로 열심히 일하기 시작할 때, 철천지 원수 같은 자베르 경감이 나타나듯 말입니다. 우리들 삶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위기의 순간도 그렇게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했던 태도에서 타산지석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위기와 시련에는 그럴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니 말입니다. 신명기서 저자는 모세의 입을 빌어서 이렇게 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2) 어쩌면 이스라엘처럼 우리들 역시도 수도 없이 많은 시련의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항상 우리가 기억하며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명제/命題(proposition)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여부를 시험해 보시는 기회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을 회고하면서 나온 말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적 진실들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지나 온 삶을 돌아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쁜 일들은 물론 슬프고 힘겨웠던 일들까지 말입니다. 그래야 오늘을 딛고 있는 삶이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과거는 과거로써만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무엇인가?>를 쓴 E. H. (1892-1982)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를 그의 책에서 수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온전한 우리의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끊임없이 소환해서 말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갓 들어간 제게 이 책을 강추하신 분은 신약학 주임교수셨는데, 이듬해 금서/禁書가 되어 책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는 세계사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것입니다. 개인은 물론 사회나 국가가 비뚤어지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치달을 때, 이 질문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과거와의 진솔한 대화 없이는 희망적일 수 없다는 말이며,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 대한 객관적이고 진솔한 바탕을 확립하지 않고서는 현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그들 백성 이스라엘을 깨우고자 했던 가르침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빵이 풍부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인류의 오랜 통념을 철저하게 깨부순 사건,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손에 의한 빵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된 양식 만나 때문이었음을 눈뜨게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더 많은 빵을 찾아서 온갖 싸움질을 하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진실에 눈멀어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들은 빵 만이 아니라, 40년 동안 옷이 해어지거나 발이 부르트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눈뜨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 역사가 자랑스럽든 부끄럽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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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4(2025. 5. 25. 부활절 여섯째 주일).

시편 119:67-69.

찬송 39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의 격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기적이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그 어떤 사건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걷고, 푸른 하늘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새들의 노래를 듣는 것이 참된 기적이라는 뜻이리라. 일어나 일하고 노래하는 기적들 속에서 살고 있음을 발견해야 하겠다.

 

2. 부활절 여섯째 주일의 복음서 요한복음 16:25-33을 본문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세상의 풍조를 극복하고, 크리스천의 삶을 산다 라는 의미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 풍조를 거부하고,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주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32-33).

지금은 옛날 동요처럼 생각됩니다만, 1970년대엔 <We shall overcome>이란 노래가 교회와 대학가에서 많이 불렸습니다. 1절만 옮겨보겠습니다.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 day.” 이 노래의 배경은 1955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저항운동은 비폭력적이었지만, 1년 후 미 연방 최고 법원은 인종차별의 위헌성/違憲性을 인정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말씀은, 세상 안에 가득 차 있는 죄와 죽음의 영원한 사슬을 푸시고 참된 자유와 해방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승리는 악에게 지지 않는 일이며, 마침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12:21).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얻는 그 날이 오리라 예언하셨습니다(25-28).

신약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화해자 역할을 하는 중보자/μεσιτης 라는 개념이 6곳에 나오는데, 그를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2:5, 8:6, 9:15). 로마 가톨릭교회나 성공회에서는 예수님과 더불어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이 이런 중보자로 믿는 것은 잘못이며, 조직신학의 대가 박형룡박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12-14장을 요약하면서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으로 무죄한 분만이 중보자의 자격을 갖는다 서술하고 있으며, 고신 55회 정기총회에서는 중보기도 라는 용어를 사용금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당신의 뜻대로 응답해 주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위대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 계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었습니다(29-31).

우리들 크리스천이 가진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힘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세상에 오셨고, 우리들 인간과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구세주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과 같이 부활할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외에 잠시 머무는 땅에서의 행복이나 보람과 기쁨은 지엽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일반종교가 현세적인 축복을 강조하고 인간 중심적 구원을 기대하는 것에 반해서, 기독교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 구원과 내세적인 복락을 지향하는 차별성을 말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기에는 무력한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길 뿐임을 말씀하고 있기에,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신앙의 신비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1980년대 초 부산 남천동 분도수녀원을 몇 차례 방문하였을 때, 그분들의 최고 계율이 나그네 접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나그네를 섬기는 기쁨을 깨달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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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3(2025. 5. 24. 토요일).

시편 119:64-66.

찬송 2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피하지 말고 마주하라.” 제임스 볼드윈이 남긴 명언이다. 볼드윈(1924.8-1987.12)은 흑인 작가로 뉴욕 할렘 가에서 태어났다. 직면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직면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일단 피하고 보는 경향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정공법/正攻法 만이 진정한 해답이다.

 

2. “약한 자의 짐을 져 주어라(1-6)”서로 받아들여라(7-1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요즘 선거철에 많이 등장하는 논쟁거리는, 내용보다는 절차와 같은 형식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신앙의 본질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비본질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무엇이고, 비본질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것과 성경의 중심점은 예수가 인류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일이며, 죽음 이후의 부활을 믿으며, 하나님의 심판 후에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의 중심 주제입니다. 이런 본질적인 것에 동의하는데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는 것이랄지, 교파들이 지향하는 신앙고백의 차이 등과 같은 비본질적인 것을 문제삼아서 마치 이교도처럼 대하고 증오하고 심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교파가 있는가 하면, 그 중요성을 이해하면서도 성경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강조하지 않는 점을 들어서, 신앙고백 자체를 하지 않는 교파들도 있다는 것을 용납하자는 말입니다. 한 때 감리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으면 출교할 기세로 중대 재판을 하였는데, 베트남의 한 한인교회 목사님은 자신들은 사도신경 자체를 고백하지 않는다고 얘기하였습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같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인정하고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참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이 강조해 마지 않는 주제는 약한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강한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들,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들, 경제적으로 강한 사람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 반대 편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강한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현상은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른바 믿음이 강한 사람들 때문에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런 피해자들을 위해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마땅히 지불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약한 자들의 아픔이나 어려움을 대신해서 짊어져 주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세상이라고 무신경하게 지나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힘이 센 사람은 연약한 사람을 붙들어 주어야 하고, 많이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하며,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갖지 못한 사람을 주눅들지 않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사야 61:1-3의 말씀이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10:30-37)가 그런 말씀입니다. 제가 시골교회 목회자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 그랬습니다.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기우러진 운동장에서는 공정이나 상식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부축해 주어야 하고, 무조건 배부른 자들이 배고픈 자들을 먹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시혜를 베푸는 일이 아니라, 무조건 그래야 할 의무이며, 그렇게 할 때 함께 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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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2(2025. 5. 23. 금요일).

시편 119:61-63.

찬송 36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여성 소설가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1873.1-1954.8)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희망은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한 중학교 교사는 한 번도 자신의 학생들에게 희망에 관한 얘기를 해 본 일이 없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사들은 희망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가르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2. “신념의 생활(13-23)”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사용하는 말의 의미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중에는 신앙과 신념과 같은 용어입니다. 우선 신념이란 자신의 노력이나 경험적으로 얻은 가치와 기준에서 얻은 확신이라고 한다면, 신앙은 주로 종교적 맥락에서 하나님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고 신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보다 쉽게 말하면, 신앙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이며, 신념은 자신의 노력과 생각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종종 신념이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까지 고향 교회를 다녔는데, 가끔씩 서울에서 대학 공부를 하시는 선배님이 오셔서 수요 기도회 등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신념으로 말씀하시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과 관계된 내용들이 그랬습니다. 선배님은 그 당시로써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은 대부분이 다 귀하고 좋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좋은 것들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고 인간 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비뚤어지게 사용하는데서 생기는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신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념에 관한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주로 음식에 관한 내용인데, 더러운 음식(개역 개정에서는 속된 음식)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취급하는 내용은 다양하겠습니다만, 제사 음식, 제물로 올려졌다 푸줏간에 나온 소머리, 또는 제사를 지내고 잡은 생선들은 속된 것으로 먹지 말아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바울의 신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로 인해서 소중하게 유지하고 지켜야 할 형제간의 관계를 망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형제를 비판하고 미워하고 소원/疏遠하게 방치하는 것들 말입니다. 저 역시 주초/酒草 문제에 대해서 예민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된 뒤에도 그것을 끊어버리지 못해서 애쓰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동료를 한심하게 생각했었으니 말입니다. 사도의 신념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첫째는 소위 세속적인 음식에 대해서 벗어던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비본질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는 이들 역시, 주님께서 생명을 바쳐 지켜주시고 구원하신 형제자매들이라고 말입니다. 둘째 그러나 동시에 그런 세속적 음식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한 연약한 신앙의 사람들 앞에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비본질적인 것들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실 것입니다. 대부분의 서양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초/酒草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한국 크리스천들 앞에서는 신앙적 양심적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할지라도, 삼간다는 성숙한 신념을 가져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하였던 부산에서는 신 구교 지도자들이 연합해서 <일치회>라는 것을 결성해서 연합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독일에서 온 로마 가톨릭 선교사 하 안토니오라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 모임에 가면 신부님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주초를 하였고, 권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오래 만나다 보니까 전혀 그 같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세속 음식에 대해서 자유로운 형제를 비난하기도 쉽고, 그 문제에 민감한 다른 형제들 앞에서 주저함 없이 먹고 마시는 그런 자세도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사도는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71(2025. 5. 22. 목요일).

시편 119:58-60.

찬송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그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에 남겼다. "그래도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가진 가능성과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들에 대한 찬가. 비록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그런 인간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과 그것의 긍정적인 방향으로서의 발현을 믿는 사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 비판자들은 인간의 탐욕이나 이기심, 어리석음 등을 주장하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능성 또한 있음을 역설하는 게 고무적이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2.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1-12)”을 읽었습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서 예민하다 못해 경기가 날 정도로 집착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력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현상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문제의 한 복판에 믿음이라는 것이 척도처럼 이해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위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로웠으나, 믿음이 적은 이들은 채소밖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제사 음식, 곧 제사를 지낸 후에 이웃 사람들 사이에 나눠먹는 풍습은 근동 아시아 지방에서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크리스천들이 우상 앞에 차려 놓았던 제사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름없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 밖에 어떤 날들은 귀하고 다른 날들은 천하다고 하는 가르침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나 절기와 월삭을 중히 여기는 것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주초문제가 여전히 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저의 형님 친구 분이 담배를 상습적으로 피울 뿐 아니라, 막걸리를 한 잔 마셨다고 해서 성찬 정지 6개월 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친구관계가 좁혀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35개월 복무했던 광주의 기갑학교 교육대대에서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괴물 같은 놈이라고 해서 고참들에게 많은 바보 병신 취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성경이해에 있어서 잘못 가르친 교회 지도자들의 탓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것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에 너무 함몰되어 있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성경 해석의 1차적인 고려 사항인 삶의 배경을 무시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는 건강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든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우리나라 개신교인들 가운데서는 비본질적인 요소들, 가령 성경에서 그런 용어를 찾을 수 없다 해서 삼위일체설이나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는 일부 교파들에 대해서, 그리고 마리아 평생 동정녀설이나 성인 숭배사상 등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물론 이단으로 정죄시 하는 현상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이해나 해석은 각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이나 신학적인 견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그것을 판결해 주실 분은 하나님 한분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을 향해서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비본질적인 견해 차이로 본질적인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경 해석의 문제인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한 복판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우상과 무관한 것을 다 피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모두 굶어죽거나 아무 것도 몸에 걸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고 만들거나 행하는 것들인 때문입니다. 이런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 되시고, 창조하신 것들이라는 확고한 신앙만 있다고 하면, 모두 다 극복할 수 있는 사항들이라고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던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하느냐 여부에 대한 문제는 그 시절에는 소 한 마리를 잡으면 수 십군데 제사상에 올렸다가 푸줏간에 나왔던 것입니다. 명백한 우상의 제물입니다. 우리가 먹는 생선들은 거의 대부분 풍어제라는 제사를 드리고 잡아온 것들이고, 우리가 입는 옷감이나, 타고 다니는 자동차 등등은 모두 제사를 지내고 운행하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다행히 주초 문제가 건강에 나쁘다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이상, 인간의 삶에 백해 무익하다는 것으로, 금하라 말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렇듯 성경의 배경이나 그 성경을 해석하는 우리 시대의 배경을 고려해서 성경의 참된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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