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80(2025. 5. 31. 토요일).

시편 119:85-87.

찬송 34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독립기념일에 태어난 미국 제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1872.7-1933.1)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어느 누구든 자신이 받은 것으로 인해 존경받지 않는다. 존경은 자신이 베푼 것에 대한 보답이다.” 여기저기서 받은 각종 상이든, 높은 지위를 받았다고 으스대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역사에 등장시키신 것이다.

 

2.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다(4-17)”을 읽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역할이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나와 같이 이방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매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지자들의 외침은 대체로 시급하고 절박한 것이었고,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백성들의 태도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오늘의 현대 크리스천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국 교회에서는 설교단에 오르는 목사에게 사탕 하나를 입에 물린다고 합니다. 그 사탕이 다 녹기 전에 설교를 끝내라고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 보다 더 합니다. 외부 설교자로 가게 되면, 담임목사님이 우리 교회는 설교를 20-30분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아예 어느 교회에서는 설교가 25분이 되면 조용한 찬송이 반주됩니다. 그러면 목사는 서둘러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하루 종일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설교 시간으로 배정된(?) 30분도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쁘고 중요한 일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장애인 교회 중에서도 청각장애인 교회는 설교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일들을 다 접어둔 분들처럼 느긋하게 여유로운 청강 자세를 가집니다. 제가 항상 우렁찬 박수를 받는 설교단은 청각 장애인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솔직담백하게 에스겔 선지자를 파송하는 이유와 목적을 밝힙니다. 첫째는 귀에 생소/生疏하게 들리는 듯 멀뚱한 사람들이나 외국인에게가 아니라, 들을 마음이 없어서 멋쩍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낸다고 말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황소고집을 뒤집어 쓴 사람들이어서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셋째는 그들은 얼굴이 두꺼운 자들로 반항하는 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넷째는 포로로 잡혀온 자신의 백성들에게 듣든 말든 이렇게 전하라고 콕 찍어서 말씀합니다. “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말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를 먹으며 40년을 살았으면서도, 빵으로 대체할 수 없는 생명의 양식을 거부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시련의 때 포로가 되어 비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 감동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납득도 이해도 안 되는 일입니다. 아주 오래 전 풀무원 원경선 원장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뽑아내는 일은 하나님조차도 버거워하시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습니다. 10계명을 분류한 희랍정교회 등 기독교회는 9째와 10째 계명으로 탐욕을 꼽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을 탐내지 말라.” 그랬습니다. 듣고 싶은 말은 하나님만 바라보라.”가 아니라,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였던 것입니다. 나이 들어도 여전히 물질의 욕망에서 그리고 권력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욕/老慾에 찬 사람들이 추한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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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9(2025. 5. 30. 금요일).

시편 119:82-84.

찬송 3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고든 리빙스턴(1938-2016)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야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이 모여 인생의 지도를 만들어 간다.” 존스 홉킨스 의대를 졸업한 후 베트남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 후, 미국으로 돌아와 정신과 의사로 33년간 일하는 동안에,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 큰 아들의 자살, 둘째 아들은 백혈병으로 자신의 골수이식을 받았으나 1년 만에 죽었다.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책을 출간했다.

 

2.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다(2:1-3:3)”을 읽었습니다. 신학 대학생이나 신학 대학원생을 입학사정을 할 때, 매우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인터뷰(면접)입니다. 그런데 지원 동기를 묻게 되는데, 많은 학생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 인도함 중에는 여기 저기 다 실패를 경험한 후의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길로 몰고 가셨다고 말입니다. 이런 학생들의 나중은 대체로 참혹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중에는 매우 극적인 삶을 희망하곤 합니다. 선명한 기도의 응답으로부터, 극적인 반전, 기적 같은 치유경험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고 대부분이 허세를 부리는 경우들입니다. 한때 종로 2가의 대형서점을 운영했던 한 지인은 우연히 어느 일간지의 <무슨 열매>에 간증기를 연재하게 되었는데, 내놓을 게 없어서 난감해 할 때, 글 쓰는 작가가 한 두 마디 운을 떼시라 해서, “거지 신세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니까, 한 편의 길고 긴 소설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제게 남긴 말은 제 얘기는 짜가들이 많습니다.”였습니다. 어려움이 계속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산삼 21뿌리를 보여주셔서 그곳에 가서 캐다가 문제를 해결했다는 일화를 소개하시는 목사님은, 걸핏하면 산삼 환상 얘기를 꺼내십니다. 그래서 제게 그 설교의 모니터링을 부탁받은 저는 그러지 마시라.”고 완곡하게 충고를 드렸습니다. 에스겔은 또렷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목숨을 걸고 예언자의 길을 걸을 수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성경의 인물과 자신을 일체화시키고 싶은 욕망이 낳은 큰 불상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진위를 가릴 기준이 있습니다. 그걸 에스겔에게서 찾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에스겔의 경우입니다. 첫째는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2). 둘째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역적의 무리들에게로 파송하신 것입니다(3-5). 셋째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6-7). 넷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들으라 하십니다(8-10). 다섯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으라 해서 받아먹자 꿀처럼 달았다. 했습니다(3:1-4). 에스겔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신에 의한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밝히고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대상들을 향해서 임무를 받았으며, 현실적인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나아갈 때,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꿈꾸는 야망이나 출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가 되는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죽을 수도 있다는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 안에 있으면 만사형통이 정상적이라는 사람들 말입니다.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삶의 양식/樣式은 소금과 빛이 되는 일로, 자기희생이 전제된다는 말씀입니다.

 

3. 오늘 서울 주성 청각장애인교회 지도자들을 아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장애인들을 섬기는 일이 힘든 것은 소통의 문제와 경제적인 열악함이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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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8(2025. 5. 29. 목요일).

시편 119:79-81.

찬송 3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네덜란드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비에 젖은 자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가 내리면 젖지 않으려고 비를 피한다. 그러나 막상 피할 곳도 없고 이미 온 몸이 젖고 나면 비가 전혀 두렵지 않게 된다. 비에 젖듯 우리 삶도 막상 젖으면 두렵지 않게 된다. 고통이나 시련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한동안은 못 견디게 힘들지만, 그 과정을 겪은 후에는 더 이상 두려움도 아픔도 느끼지 않게 되고 담대하게 맞서게 된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262.

 

2. “에스겔이 활동한 시대와 장소(1-4)”환상을 본 에스겔(5-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에스겔은 남왕국 유다의 요시야 왕 때 태어나 주전597년 왕과 다른 관리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하류에 위치한 그발강 가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이런 환상들을 해석하거나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해를 하자고 한다면, 그 환상은 모두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네 생물이 각각 얼굴과 두 날개를 가졌는데, 그 얼굴들은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의 얼굴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보좌를 섬기는 이 네 생물들은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요, 사자는 짐승들의 왕이고, 소는 가축들의 왕이며, 독수리는 새들의 왕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이 땅과 하늘의 왕이신 만왕의 왕이시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지만,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이 땅과 하늘의 왕이시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물들 한 가운데 활활 타는 숯불 같은 모양이 보였는데, 마치 횃불처럼 그 생물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그 불은 번쩍번쩍 빛났고, 번개처럼 이리 저리 번쩍거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가 머지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서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전히 당신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을 통해서 일하실 것을 말씀한다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심판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셨던 과거적 심판도 있고, 바벨론 포로와 같은 현세적인 심판도 있으며, 요한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미래적 심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심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심판은 그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을 알리는 심판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무 소용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심판을 통해서 의도하는 목적은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게 하는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살아가는 축복의 삶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들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자녀들이나 젊은이를 꾸짖는 것은 그들을 화나게 하고 더욱 더 멀리 떠나도록 하려함이 아니라, 본래의 자신/proto type으로 돌아와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역설적인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채찍이나 심판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감정을 품고 더욱 더 빗나가는 길로 치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 하루는 선생님에게서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세워두시고는 가슴을 후벼파는듯한 꾸중을 하신 것입니다. 그 따위로 무슨 대학엘 가겠다고 하느냐는 등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아주 훗날 그 선생님은 제가 목회하는 부산의 교회 예배에 참석하셨고, 그 때의 서운함을 제가 말씀드렸을 때, 그게 선생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훈계였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채찍이 아플수록, 심판이 무서울수록,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3.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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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7(2025. 5. 28. 수요일).

시편 119:76-78.

찬송 45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원말명초(元末明初) 시기에 이루어져 명()나라 홍무(洪武) 26(1393)에 처음 간행되었다는 명심보감/明心寶鑑중국을 넘어 한반도 · 일본 · 베트남 등지에 널리 퍼져있는 동몽서/童蒙書이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비록 환경이 어둡고 괴롭더라도 항상 마음의 눈을 넓게 뜨고 있어라.” 사람이 짐승이나 미물과 다른 것이 예 있음을 알리고 있다.

 

2. “살인자의 도피성(1-7)”을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 율법의 바탕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의 특별한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의 가나안 정착과정은 유대인의 법률이 엄격해야 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가령 간음한 자는 인민재판식으로 즉결 처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 말입니다. 이런 가혹한 처벌은 평화로운 지금도 중동지방에서는 종종 벌어지고 있는데,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간음한 가족을 <명예 살인>하는 일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20장에 보면, 실수로 살인한 사람에게도 피난처를 제공하고 재판을 통해 죗값을 치르게 하는 도피성 제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도피성 제도는(20:1-6) 법과 정의를 유지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소개된 도피성은 6곳으로, 갈릴리의 게데스, 에브라임의 세겜, 유다의 헤브론, 르우벤의 베셀, 길르앗의 라못, 므낫세의 바산 골란이 그곳들입니다(20:7-8). 문제는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자를 위해 도피성을 마련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문자적 적용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세상의 법률과 하나님의 율법이 보여주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가령 십계명을 예로 든다면, 두 돌판 중 첫째 돌 판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따른 계명이고, 두 번째 돌 판에는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데 따른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를 해석한 우리 주님은, 첫 들판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으로, 둘째 돌 판을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으로 풀었던 것입니다(22:37-40). 그런데 첫 돌판을 신 6:4-9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도피성의 규정을 제정하신 것은, 문자적이고 일률적인 법의 적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모든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근본 목적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단 살인자들에 대한 무섭고 엄격한 법 적용에 앞서서 그의 생명을 돌아보게 하는 또 한 번의 고려를 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도피성을 두게 된 장소가 비록 6곳에 불과하지만, 이스라엘 12지파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매우 짧은 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 셋, 요단강 서편에 셋을 두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실수한 살인자들이 도피처로 삼기에는 매우 유리한 장소를 정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법치주의가 작동되는 21세기에, 조령모개/朝令暮改식으로 힘센 사람에 의해서 마음대로 법을 개정하고 집행하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 의한 관세 폭거가 그것입니다. 그동안 세계 경제는 나름 원칙을 가지고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며, 자국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고, 그 손해를 관세로 징벌적 부과하는 무지막지한 불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좋은 제품을 값싸게 팔려고 할 때, 거래가 되는 법인데, 미국의 제조업이 높은 고용비용으로 비싼 물건이 되어 팔리지 않자, 억지로 그 손해를 다른 나라에 물리게 하는 힘에 의한 막무가내 식 관세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미국 남부의 근본주의 기독교를 앞세우는 사람이 말입니다. 전 세계가 트럼프에 의해서 경제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좌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오랜 관행은 반드시 유효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하시는 도피성의 규정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눈을 크게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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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6(2025. 5. 27. 화요일).

시편 119:73-75.

찬송 35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세계에나 약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약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정상이다. 물론 약자가 언제나 옳거나, 억울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약자가 있다면 당신은 약자를 도와야 한다. 인생을 정리할 즈음에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약자를 위해 힘쓴 일이야말로 당신의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 생각할 것이다.

 

2. “잘 살게 되어도 하나님을 잊지 말라(7-20)”을 읽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최근의 한국 기독교회의 침체 내지는 쇠락의 원인은 기도의 응답을 받은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그것은 이미 서구 기독교회가 여러 가지 면에서 안내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기독교회의 기도는 주시옵소서!”였고, 그 중심에는 세속적인 성공과 가치가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기도의 응답을 받은 서구 기독교회는 열정도 식고, 모임도 줄어들며, 선교의 동력도 떨어진 것입니다. 배고픔과 온갖 역경 앞에 서 있을 때는 교회당 마룻바닥에 엎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배가 불러지니까 마룻바닥을 편안한 의자로 바꾸었고, 뒤로 눕듯 젖혀진 몸은 고개만 겨우 숙이고 있으니 찬송도 기도도 매우 불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교회는 동기부여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배고프고 병들어 있을 때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주시옵소서!”가 자연스러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그런 동기부여가 적절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건강해지게 되면 또 그것에 적합한 새로운 동기 부여가 제시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장차 올 천국을 훈련하는 적극적인 방향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래도 한 때 80년대 하반기부터는 대형 병원을 시작으로 안내와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를 양성하고 봉사에 참여케 하였습니다. 1990년대 중순 당시 서울대 병원에는 7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있었는데, 저의 교회 고 김성일 장로님은 봉사회 총회장에 선출되어 수년간 안내와 호스피스 봉사, 장기 기증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마리아회 회장 고 정신숙 집사님은 자신이 자궁암 환자이면서도 별세 한 달여 앞까지 수년 동안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로 기쁘게 섬기다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현저한 양극화현상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敎會間의 양극화는 극심합니다. 그리고 도농간/都農間의 양극화 그리고 성도간의 양극화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교회간의 양극화란 대형 소형 교회간의 양극화를 말하고, 도농간이란 도시와 농촌간의 양극화를, 그리고 개인 간의 양극화는 소위 성공한 교인과 그렇지 못한 교인간의 양극화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양극화 현상은 그 간극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형교회 안에서는 이런 양극화가 세분화되어, 기업체를 운영하는 실업인회가 있는가 하면, 교사회, 법조인회, 그 밖에 다양한 취미 교양 모임들이 생겨나서 전담 목회자를 둘 정도입니다. 이런 모임들이 활발해 지자, 예배가 뒷전으로 밀려난 인상을 주고, 교회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개방되어 있는 남선교회나 여선교회의 역할은 희미해진 듯합니다. 이를 두고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 안으로 깊이 뿌리내렸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꿈은 이 세상 안에서 작은 천국을 이루어보겠다는 것이었는데, 교회가 부유해지고 성공하게 되니까 제 길을 잃어버린 형국이 된 것입니다. 비록 기독교적 정신과 가치관으로 출발하였다고 하지만, 이런 세속화는 본래의 기독교 정신을 망각하기에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살게 되고, 소떼 양떼가 불어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너희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행여나 교만한 생각으로 너희 하나님 야훼를 잊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12-14). 지금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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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5(2025. 5. 26. 월요일).

시편 119:70-72.

찬송 53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큰 뜻을 품고 이를 막는 장벽을 허물 영웅을 기대한다. 그러나 자신과 자기 공동체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갇혀 사는 소인배는 훨씬 더 많다. 수잔 앤터니는 미국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는 날을 꿈꾸었고,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꿈꾸며 비폭력 혁명을 지도하였고, 마틴 루터 킹은 인종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었고, 나이팅게일은 숙련된 간호사가 봉사하는 현대적인 병원을 꿈꾸었고, 조나스 소크는 소아마비를 근절할 꿈을 꾸었다. 그들의 꿈은 이루어졌다.

 

2.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시련을 주시다(1-6)”을 읽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시련의 의미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은 호기롭게 세계 최강이던 이집트의 파라오 왕을 따돌리고 430년의 길고 긴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가슴 벅찬 해방의 행진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시련이 찾아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해방과 시련,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혼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시장으로 열심히 일하기 시작할 때, 철천지 원수 같은 자베르 경감이 나타나듯 말입니다. 우리들 삶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위기의 순간도 그렇게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했던 태도에서 타산지석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위기와 시련에는 그럴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니 말입니다. 신명기서 저자는 모세의 입을 빌어서 이렇게 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2) 어쩌면 이스라엘처럼 우리들 역시도 수도 없이 많은 시련의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항상 우리가 기억하며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명제/命題(proposition)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여부를 시험해 보시는 기회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을 회고하면서 나온 말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적 진실들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지나 온 삶을 돌아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쁜 일들은 물론 슬프고 힘겨웠던 일들까지 말입니다. 그래야 오늘을 딛고 있는 삶이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과거는 과거로써만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무엇인가?>를 쓴 E. H. (1892-1982)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를 그의 책에서 수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온전한 우리의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끊임없이 소환해서 말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갓 들어간 제게 이 책을 강추하신 분은 신약학 주임교수셨는데, 이듬해 금서/禁書가 되어 책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는 세계사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것입니다. 개인은 물론 사회나 국가가 비뚤어지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치달을 때, 이 질문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과거와의 진솔한 대화 없이는 희망적일 수 없다는 말이며,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 대한 객관적이고 진솔한 바탕을 확립하지 않고서는 현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그들 백성 이스라엘을 깨우고자 했던 가르침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빵이 풍부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인류의 오랜 통념을 철저하게 깨부순 사건,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손에 의한 빵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된 양식 만나 때문이었음을 눈뜨게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더 많은 빵을 찾아서 온갖 싸움질을 하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진실에 눈멀어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들은 빵 만이 아니라, 40년 동안 옷이 해어지거나 발이 부르트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눈뜨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 역사가 자랑스럽든 부끄럽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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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4(2025. 5. 25. 부활절 여섯째 주일).

시편 119:67-69.

찬송 39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의 격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기적이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그 어떤 사건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걷고, 푸른 하늘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새들의 노래를 듣는 것이 참된 기적이라는 뜻이리라. 일어나 일하고 노래하는 기적들 속에서 살고 있음을 발견해야 하겠다.

 

2. 부활절 여섯째 주일의 복음서 요한복음 16:25-33을 본문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세상의 풍조를 극복하고, 크리스천의 삶을 산다 라는 의미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 풍조를 거부하고,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주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32-33).

지금은 옛날 동요처럼 생각됩니다만, 1970년대엔 <We shall overcome>이란 노래가 교회와 대학가에서 많이 불렸습니다. 1절만 옮겨보겠습니다.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 day.” 이 노래의 배경은 1955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저항운동은 비폭력적이었지만, 1년 후 미 연방 최고 법원은 인종차별의 위헌성/違憲性을 인정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말씀은, 세상 안에 가득 차 있는 죄와 죽음의 영원한 사슬을 푸시고 참된 자유와 해방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승리는 악에게 지지 않는 일이며, 마침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12:21).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얻는 그 날이 오리라 예언하셨습니다(25-28).

신약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화해자 역할을 하는 중보자/μεσιτης 라는 개념이 6곳에 나오는데, 그를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2:5, 8:6, 9:15). 로마 가톨릭교회나 성공회에서는 예수님과 더불어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이 이런 중보자로 믿는 것은 잘못이며, 조직신학의 대가 박형룡박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12-14장을 요약하면서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으로 무죄한 분만이 중보자의 자격을 갖는다 서술하고 있으며, 고신 55회 정기총회에서는 중보기도 라는 용어를 사용금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당신의 뜻대로 응답해 주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위대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 계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었습니다(29-31).

우리들 크리스천이 가진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힘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세상에 오셨고, 우리들 인간과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구세주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과 같이 부활할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외에 잠시 머무는 땅에서의 행복이나 보람과 기쁨은 지엽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일반종교가 현세적인 축복을 강조하고 인간 중심적 구원을 기대하는 것에 반해서, 기독교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 구원과 내세적인 복락을 지향하는 차별성을 말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기에는 무력한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길 뿐임을 말씀하고 있기에,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신앙의 신비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1980년대 초 부산 남천동 분도수녀원을 몇 차례 방문하였을 때, 그분들의 최고 계율이 나그네 접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나그네를 섬기는 기쁨을 깨달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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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3(2025. 5. 24. 토요일).

시편 119:64-66.

찬송 2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피하지 말고 마주하라.” 제임스 볼드윈이 남긴 명언이다. 볼드윈(1924.8-1987.12)은 흑인 작가로 뉴욕 할렘 가에서 태어났다. 직면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직면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일단 피하고 보는 경향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정공법/正攻法 만이 진정한 해답이다.

 

2. “약한 자의 짐을 져 주어라(1-6)”서로 받아들여라(7-1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요즘 선거철에 많이 등장하는 논쟁거리는, 내용보다는 절차와 같은 형식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신앙의 본질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비본질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무엇이고, 비본질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것과 성경의 중심점은 예수가 인류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일이며, 죽음 이후의 부활을 믿으며, 하나님의 심판 후에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의 중심 주제입니다. 이런 본질적인 것에 동의하는데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는 것이랄지, 교파들이 지향하는 신앙고백의 차이 등과 같은 비본질적인 것을 문제삼아서 마치 이교도처럼 대하고 증오하고 심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교파가 있는가 하면, 그 중요성을 이해하면서도 성경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강조하지 않는 점을 들어서, 신앙고백 자체를 하지 않는 교파들도 있다는 것을 용납하자는 말입니다. 한 때 감리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으면 출교할 기세로 중대 재판을 하였는데, 베트남의 한 한인교회 목사님은 자신들은 사도신경 자체를 고백하지 않는다고 얘기하였습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같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인정하고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참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이 강조해 마지 않는 주제는 약한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강한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들,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들, 경제적으로 강한 사람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 반대 편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강한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현상은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른바 믿음이 강한 사람들 때문에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런 피해자들을 위해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마땅히 지불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약한 자들의 아픔이나 어려움을 대신해서 짊어져 주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세상이라고 무신경하게 지나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힘이 센 사람은 연약한 사람을 붙들어 주어야 하고, 많이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하며,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갖지 못한 사람을 주눅들지 않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사야 61:1-3의 말씀이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10:30-37)가 그런 말씀입니다. 제가 시골교회 목회자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 그랬습니다.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기우러진 운동장에서는 공정이나 상식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부축해 주어야 하고, 무조건 배부른 자들이 배고픈 자들을 먹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시혜를 베푸는 일이 아니라, 무조건 그래야 할 의무이며, 그렇게 할 때 함께 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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