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56(2025. 1. 27. 월요일).

시편 105:10-12.

찬송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옛 시조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데, 엊그제 소개한 이조년의 <다정가>를 비롯해서 정몽주의 <단심가> 이방원의 <하여가>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김상헌(金尙憲, 1570~1652)<가노라 삼각산아>가 그런 시조들이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하여라.” 김상헌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그는 신흥 청나라보다는 기왕의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했던 탓에 병자, 정묘호란시 척화대신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면서 지은 처량한 시조이다. 명나라면 어떻고 청나라면 어떠냐마는, 정세분석에 실패한 약소국의 한 정치가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하겠다.

 

2.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 살아난 야이로의 딸(21-43)”을 읽었습니다. 예전에 단골로 다니던 어느 이발소는 장로님이 운영하셨는데, 저보다는 10여년 연배여선지 옛날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특히 현신애 권사님에 대해서는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시며 일화들을 소개하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밀가루 같은 흰 가루를 물에 버무려서 사람들의 환처에 붙여주고 치유기도를 하셨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효과가 대단해서 사람들이 그 권사님의 은사집회에는 구름처럼 몰려다니곤 했다 하셨습니다. 이런 은사집회를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고통스러워하는데 그것을 보고만 있을 가족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유명하다는 의원을 다 찾아다니고 효험이 있다는 것이라면 풀뿌리 미물이라도 다 잡아 먹일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옷에 손이라도 갖다 대면 낳을 것 같다는 생각해서 찾아온 한 여인과 당시 회당장으로 존경받는 한 사람이 자신의 어린 딸을 위해 주님을 찾아온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많은 노력을 해왔으며, 마지막으로 주님을 찾아 나선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회당장은 주님 발 앞에 엎드려서 주님께서 손만 얹어주시면 고칠 것 같다고 제안을 합니다. 주님은 그를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행 속에는 또 다른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열 두해나 하혈을 해서 창백한 얼굴로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출혈이 멈출 것으로 믿고 그리하였는데, 주님께서 그녀의 소원대로 손을 대자 출혈이 멈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에서 기적의 힘이 나가는 것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복잡한 사람들 속에서 생길 수 있는 일로 생각하고 대답했으나, 주님은 의도적으로 당신의 옷을 만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여인은 주님께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고, 주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옷을 만지는 것이 병 고침을 받는 길이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현신애 권사님이 진흙을 이겨 그것을 눈에 발라 병을 고친 사건에서 모방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만 생각해선 안 됩니다. 그 여인이 믿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에서 최선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실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에워싼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잡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리고의 맹인처럼, 주님을 향해 소리를 지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열 문둥이들처럼 멀리서나마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외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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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5(2025. 1. 26. 주현절후 셋째 주일).

시편 105:7-9.

찬송 23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대학에 가면 꼭 들어보고 싶은 과목이 있었는데, 철학강의였습니다. 그런데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그 교수님이 쓴 여러 권의 책들을 읽고 감동을 받아 선뜻 그 분의 과목을 신청했는데, 너무 감성적이어서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세간의 인기와는 달리 그 교수님의 강의에 들어오는 철학과 학생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2. 주현절 후 셋째 주일의 구약 느헤미야 8장을 본문으로 율법을 가르친 학사 에스라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연구한 김형준목사님은 <섬기는 사람 느헤미야>에서, 특히 오늘 본문인 8장을 열면서 말의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Boys, be ambitious!를 외쳤던 삿보로 농과대학에서 초빙교수로 3년여를 가르쳤던 윌리엄 클라크 박사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1961년 거창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던 때에 이 말씀을 들으며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서광이 비치는 감격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는 목적은 단지 기억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미래를 꿈꾸기 위함입니다(1-3).

주전 586년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노예들은 3차에 걸쳐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느헤미야는 3차 귀환 때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하여 주전 445년 경 돌아왔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역사는 다분히 인간에 의해서 출발하고 전개되며 결론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진행과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승리의 역사든 실패의 역사든,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굵직한 역사는 우연같은 필연이 있었는데,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참여 혹은 역사 개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데, 우리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더 빛나는 미래를 꿈꿀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 남동쪽 앞 기드론 골자기 기혼샘 옆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해뜰때부터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학사 에스라에 의해서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사람들의 자세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수용적이어야 했습니다(5-6).

공부 잘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저의 25년간의 노 하우에 의하면 선생님의 열굴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한 마디도 놓치지 않을 자세로 말씀을 빨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제가 아산에 터를 잡고서 처음 한 일은, 마을 어린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광고를 낸 일이었습니다. 딱 한번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지금도 가장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들에게 다음 월말고사에 나올 문제를 가르치는 선행학습을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왕도(王道)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목사가 전도하려고 아이들을 꾀이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했습니다. 제가 연세대학 총장 최우등 장학금을 두 번씩이나 받았다는 것을 밝혔는데도 말입니다. 공부는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일지 모릅니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매일 매일 배운 것을 잘 복습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 아멘으로 응답했다 말합니다.

 

학사 에스라의 교수법은 알아듣기 쉬운 가르침이었습니다(8-10).

학생들의 실력이 오르지 않는 원인에는 가르치는 교사의 책임도 있습니다. 제가 대학 1학년때 남대문 지역의 껌팔이 구두닦이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에서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열정은 지금도 자랑스러운 추억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만난 설교자들 중에 가장 쉬운 설교를 잘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동화작가 출신이어선지는 몰라도 누가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택하셨고, 문맥의 흐름도 간결하고 명료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분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낱말도 꼭 영어단어를 덮어 쓰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사족이지요. 강의도 쉽게 가르치시는 분도 있고 일부러 어렵게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서 기자는 에스라의 율법 해석은 알아듣고 깨칠 수 있도록 풀이하여 주었다.”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어린아이나 노인들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설교하는 지도자가 존경을 받는 풍토가 기대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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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3(2025. 1. 24. 금요일).

시편 105:1-3.

찬송 47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016년에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란 영화에서 뭣이 중헌디?”라는 대사가 나온다. 극 중 효진이가 아버지 중구한테 하는 말로 정작 중요한 것은 등한시한 채 중요하지 않은 것에 집중하는 현상을 풍자하는 말로 사회적 유행어가 되었다. 효진이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라고 목이 터지라 외친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라고 여운을 남기며 퇴장하는 효진이의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무엇이 중한지 알고 있는 것일까?

 

2. “잔잔해진 풍랑(35-41)”을 읽었습니다. 목회 초년일 때 해군의 상륙정 비슷한 배를 타고 거제도를 여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산 시절이었는데 제가 속해 있던 목양회와 관련을 갖고 있던 군부대를 위문하는 일이었는지는 잘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만, 출렁이는 바다 물결이 두려웠지만 손으로 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배여서 진땀을 흘렸던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눈앞에 바로 육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도는 높았고, 이러다가 배가 바위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배에 승선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루 일과를 마치신 예수님 일행이 호수 건너편 거라사 지방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가셨는데(5:1), 거센 풍랑을 만나 배에는 물이 차오르고 배는 요동치는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고단하셨는지 배의 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셨다는 배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며,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 돌보시지 않습니까? 하고 주님을 흔들어 깨우자, 주님께서 일어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를 향해 고요하라. 잠잠하라 명하시니 바다가 잔잔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왜 이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고 책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 본문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에 곧 난파될 것 같은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접근방법도 있을 것이고,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게 명령하시는 주님의 행동에 대해서 그 신비한 능력을 주목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소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주님의 책망에 대해서 묵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믿음 없음에서 출발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믿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은 항상 특정한 배경을 토대로 진술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개념은 더욱 더 배경 속에서 의미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일반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어진 이 배경 속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평온하기만 하던 호수에 광풍이 불어온다면,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광풍이 불었고, 어찌하여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왔느냐는 식의 원인 찾기 식 접근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자연현상은 얼마든지 우리의 삶에서 찾아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위기와 같은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지, 과연 믿음이 필요한 것인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문제가 왜 생겼느냐? 이런 문제들이 언제쯤이면 다 사라질 것이냐? 등에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그 자체가 문제투성이 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밀어 닥치는 문제를 어떻게 방어하거나 물리칠 수 있느냐는 의지와 믿음의 과제를 일깨우신 것입니다. 제가 살펴본 바로는 주님께서 상당히 화가 나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는 전혀 믿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이는 호수에서 난파직전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자신들의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는 일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옆에 계심을 의지하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나타낼 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곧 믿음으로 하는 행동 말입니다. 자신의 연약한 믿음을 주님 손에 맡기는 찬송을 부를 수도 있고, 제자들의 마지막 행동처럼 주님께 엎드려 도움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행동이란 주님께 맡기는 그런 태도를 말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저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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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2(2025. 1. 23. 목요일).

시편 104:34-35.

찬송 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 준 이는 존 밀턴(1608~1674)이다. 그는 마음가짐에 따라 천국에서 살기도 하고, 또 지옥에서 살게 된다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실낙원>은 이 두 주제를 균형 있게 소개해 주고 있다. 오늘을 천국에서 살고 싶은가? 아니면 지옥에서 살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2. “등불의 비유(21-25)”,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 “겨자씨의 비유(30-32)”비유로 가르치신 예수(33-3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마태복음서에도 등장하는 비유입니다(13:24-30). 두 곳 모두 천국을 설명하는 비유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밭에 뿌려진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긴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치 땅이 저절로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물론 그 과정은 다른 식물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씨에서 싹이 돋아나고 이삭이 패고, 그리고 마침내 그 이삭에서 열매가 맺히더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천국 역시도 우리들 인간의 눈이나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방법으로 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이런 찬송가를 전혀 부르지 않습니다만, 제가 어릴 때는 가장 많이 들었던 찬송가가 <고대가/苦待歌>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가사를 쓰셨다고 하는데, 그 가사를 한번 읽거나 가락을 아시면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 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도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그런데 식민지 수탈을 겪고, 전쟁의 상처를 입은 우리 민족은 주님 나라가 오시기를 눈물로 기도하고 노래하였습니다만, 가혹하게도 그 나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낌새조차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분들에게 있어서는 비슷한 감정으로 눈물로 기도할 것입니다. 엊그제는 저의 종손주가 수술을 받는다 해서 아산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제대로 쉬지를 못해서 태어나자마자 심장에 스텐트 수술을 하였습니다. 혈관이 너무 작아서 특수 플라스틱을 끼웠는데, 벌써 3번째 그걸 갈아 끼우는 수술이었습니다. 제가 10년 전에 받았던 꼭 같은 수술이었는데, 앞으로 성인이 되면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스텐트 수술을 받는다 했습니다. 제 조카들 중에서는 가장 신앙생활을 잘 하는 내외였는데, 이런 심각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들이 우리들 삶에는 많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답답한 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다르게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에게서 남의 일처럼 지나쳐버렸던 것들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따끔하게 가르쳐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의 잘못도 아니고, 너의 부모의 잘못도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신(9:2-3) 주님의 말씀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만사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처지에서는 그 인과관계를 따지기에는 너무 힘들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이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묵상의 제목인 천국의 도래는 막연한 기다림도 아니고, 끝도 없는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 가만히 자라는 씨앗처럼, 지금 여물어가는 곡식 낟알처럼 천국은 자라고 있고, 익어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그 날을 맞이할 정숙한 처녀들처럼 기쁨과 감격으로 기다리자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 배고파 우는 자식들에게,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 배부르게 밥을 먹고 노래도 크게 부를 그런 날이 올 것이다고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기억에 납니다. 천국도 그렇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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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1(2025. 1. 22. 수요일).

시편 104:31-33.

찬송 40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2015) 미국의 엥거스 디턴(1945~) 프린스턴대 교수는, 미국 사회의 절망사/Deaths of Despair 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한다. 절망사란 자살 마약 알코올 중독으로 죽는 것을 지칭하는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18년 동안에 죽은 미국인의 숫자보다 절망사로 죽은 미국인의 수가 더 많았던 점을 꼽았다. 우리나라도 지금 절망사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하니 걱정이 많다.

 

2.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1-9)”, “비유로 말씀하는 이유(10-12)” 그리고 씨 뿌리는 비유의 설명(13-2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비유로 하신 말씀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것은 비유라는 표현 방법이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유란 사람들의 삶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평범한 일들에 당신의 말씀을 얹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그 진정한 의미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주님은 문학적인 방법을 응용할 줄 아는 분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의 얘기를 시작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얘기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인 농부는 씨를 바구니에 담아서 여기저기에 뿌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길바닥에 뿌려진 씨는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 흙이 얇은 땅에 뿌려진 씨는 싹은 나왔지만, 해가 나와서 그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자 말라서 죽었버렸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오긴 했지만, 가시들로 인해서 숨이 막혀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은 싹이 나고 잘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었는데, 삼십 배 육심배 그리고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서는 마지막으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고 말씀을 끝맺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목적으로 하신 말씀일까요?

    듣기에 따라서는 시간 낭비일 것 같은 흔해 빠진 일상의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농촌에서 자란 농부나 그의 자녀들에게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 들을 구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고 하셨을 때는 잠깐이나마 정색을 하게 되고 생각을 곧추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씨뿌리는 농부들의 이야기에서는 그들의 삶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농사법이 발전하지 않아서, 씨를 뿌리는 방식이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아무 곳에서 씨를 뿌려서 많은 낭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1세기 팔레스타인의 농사법임은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길이나, 얇은 흙이 있는 곳, 가시덤불 그리고 옥토에 씨가 뿌려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씨가 자라기도 하고 낭비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옥토에 뿌려진 씨들로 인해서 곡식을 거둘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저는 무슨 말이든 하릴없이 내뱉는 말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평행귀를 이루는 다른 공관복음서를 보면(13:1-9, 8:4-8), 이 본문은 천국을 설명하는 말씀에서 나온 한 일화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듣게 말씀하시려고 꺼내신 비유라는 점입니다. 그 옛날의 사람들이나 우리는 천국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한 두 마디 말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았으며, 자칫 오해와 곡해가 가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는 천국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성장하는 나라이며, 어떤 경우에도 실패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농부는 많은 실패를 겪었습니다. 길가에 떨어지는 씨처럼, 흙이 얇은 자갈밭에 떨어진 씨처럼, 그리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처럼 말입니다. 그런 실패로 낙심할 수 있고, 때론 절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옥토에 떨어진 씨처럼 상상 이상의 엄청난 수확을 가져오는 결과가 온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천국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엄청난 열매를 거두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아, 그대들은 낙심할만한 세상에서도 절대로 낙심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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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0(2025. 1. 21. 화요일).

시편 104:28-30.

찬송 1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곡 <동심초>는 설도薛濤(770?~830)란 당나라 시인의 춘망사春望詞를 김 억이 번역한 시를 김성태가 곡을 붙였습니다. “꽃잎은 하욤업시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업네 서로서로 맘과맘 맺지 못하고 얽나니 풀잎사귀 쓸데잇는고(중외일보, 1930. 9. 4). 꽃잎은 하욤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다 기약이 없네. 무심다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가피의 풀잎만 뭐라 맺는고. (학등, 1934. 6. 6). 꽃잎은 하욤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랴는고.(망우초, 1934. 9. 10). 바람에 꽃이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맘은 맺지 못하고한갓되이 풀닢만 맺으랴는고.(동심초, 1943. 12. 31)”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에 배운 노래로, 이 노래 때문에 제가 변성기를 맞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 “바알세불과 성령(20-30)”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인가?(31-35)”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성령을 훼방한 죄, 또는 성령 모독죄에 대한 묵상입니다. 이 내용은 공관복음서에서 모두 취급하고 있는데, 그 배경은 조금씩 다릅니다(12:31, 3:28, 12:10). 바알세불은 에글론에 거주하던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신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유대인들과 함께 예수님 역시도 귀신의 왕으로 불렀습니다(10:25, 3:22, 11:15). 예수님은 바알세불을 사탄과 동일시하였습니다(12:26, 3:23, 11:18). 그러니까 바알세불은 유대인들은 물론 예수님도 심각하게 경계하는 우상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거나 공격할 때는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들을 쫓아내는 활동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처럼, 당신을 바알세불의 하수인으로 공격할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귀신 나라의 혼란을 얘기하는 것은 흥미로운 대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대로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잘못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기독교회는 이른바 성령 모독죄에 대해서 막연한 설명을 하고 있는바,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베푸신 기적들을 바알세불의 힘에 의해 일어난다고 주장한 사람들에게 성령 모독죄를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해석하면 성령 모독죄란 이 땅에 계셨던 당시의 예수님께 대적했던 바리새인들에게 해당하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모독죄는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특수한 성령 모독죄는 교회시대를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에는 재현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당시의 지상 사역과 성령의 권능을 통한 그분의 기적사건이 또 다시 재현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이후 교회시대의 사람들은 이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 시대에서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죄란 하나도 없으며, 누구든지 무슨 죄라도 고백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중심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적으로 거듭난 신자들은 성령 모독죄를 범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받은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들 안에 내주하신 성령님이 계시며, 또 성도들은 그분에 의해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고후 5:17).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령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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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9(2025. 1. 20. 월요일).

시편 104:25-27.

찬송 41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한국인의 특성에 대해서 정/을 말하곤 합니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조년은 <다정가/多情歌>라는 시조를 남겼습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들어 하노라정이 넘치는 것을 감사하고 그걸 탓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2. “호숫가에 모인 군중(7-12)”열 두 사도(13-19)”을 읽었습니다. 내일은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취임식 날입니다. 조각/組閣이 되었고, 그들의 면면이 공개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본문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발하신 기준이 흥미롭습니다.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공동번역), “자기가 원하는 자들”(개역성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첫째 말씀을 전하게 하는 일, 둘째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고, 개역성경에서는 첫째 자신과 함께 있는 것, 둘째 보내사 전도하는 것, 셋째 귀신을 내쫓은 권능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열 두명의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또 다른 어부였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빌립(갈릴리 사람)과 바돌로메, 알패오의 아들 마태(레위라고도 불리며 세리였음)와 야고보, 도마 다대오 혁명당원인 시몬과 가룟 유다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성향이나 출신 배경 등을 밝히지 않고 있어서, 정확한 분류가 어렵습니다. 대체로 어부가 5, 세리가 1, 열심당원 2, 그리고 나머지 4명은 시골 촌뚜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에는 적어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몇 명 있었던 것 같고, 세속적인 직업인 세리가 1명 그 밖에 열심당원이 2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12사도들의 사회적 배경은 당시나 지금이나 내세울 만한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나,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대단한 스펙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일은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는 뜻이며,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고3이었을 때, 생기부에 장래 희망사항을 목사라고 적은 학생이 귀했던 모양입니다. 저를 가르쳤던 고교 교장선생님은 저의 생기부를 보고, 당신 가족들에게 그 얘기를 자랑스럽게 하셨다는 후문을 그 분의 가족에게서 들었습니다. 1960년대는 모두가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어서, 어떤 직업을 생각하든 부자가 되거나 출세하는 일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에서만은 목사 지망생은 교우들에게 큰 칭찬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을 사실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의 교회지도자는 너무도 열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12사도에게서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꾼은 누구라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부나 농부 그리고 세리같은 직장인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열심당(진보성향의 젊은이)까지도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지도자들 대부분은 출신 배경도 개인적인 흠결도 적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삼손과 다윗도 그런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바꾸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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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8.

시편 104:22-24.

찬송 18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1788122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가 남긴 시 <꽃처럼 저버린 사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그 아름다움 한창 피어날 때/저버린 그대/잠든 그대 위엔 묘석일랑 놓지 못하게 하리라/그대를 덮은 잔디 위엔 ///가엾은 그대여!/혹시나 그 발걸음이 고이 잠든 그대를 /깨울까 하여이니라.”

 

2. “가나의 혼인잔치(1-11)”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한번 입력된 자료는 고치기가 참 어려운 것을 느낍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이 그런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난처한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주님의 일화입니다. 혼인잔치의 과방에서 흘러나온 얘기를 주님께서 모친을 통해 듣게 된 것입니다. “포도주가 부족하다니 이를 어쩌나?” 이스라엘과 서양에서는 피로연이나 식사 초대는 미리 참석자 명단이 확인되고 준비하는 게 상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임금의 혼례식에는 초청 확인을 했는데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혼주/婚主가 화가 나서 시장과 거리에서 사람들을 갑자기 초청하고 난리법석을 떠는 얘기가 나옵니다. 1995년 겨울 학기를 미네소타 주의 쌍둥이 도시 중 하나인 세인트폴에서 예배학을 공부할 때, 저의 주임 교수님이 매 주일 저를 픽업해 주셔서 여러 교회들의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어느 날은 시내를 지나가시다가 이 주변에 큰 호텔이 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따님 결혼 피로연을 열었는데, 100명을 초대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피로연에 초대된 손님들은 양가의 혼주가 50명씩 초대했다고 하며 평생에 기억할 즐거운 시간을 가졌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과방을 호텔 측에서 맡고 공급하기 때문에 가나의 혼인잔치의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러나 혼주의 집에서 피로연을 가질 땐 가끔 포도주가 부족해지는 경우가 있다 했습니다. 어디나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모자라게 된다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습니다. 이런 낭패를 대학교의 시험문제에 까지 등장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바이런이 살던 19세기에 케임브리지 대학 종교학 시험지에 등장한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일화는 신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 말입니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은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그의 시가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람인데, 그는 일찍부터 그의 떡잎을 소개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앞서의 문제지를 받고는 2시간 동안이나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시험 감독인 교수가 와서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네. 한 줄이라도 써야 하지 않겠나?” 했더랍니다. 그래서 그가 몇 자 시험지에 옮겼는데, 그게 바로 저 유명한 물이 제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란 정말 한 줄의 시 같은 명답이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멋지고 슬기로운 신앙적 의미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항상 이 구절은 바이런을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들 인생길에는 가나안 잔치집이 당면했던 문제들이 생기곤 합니다. 예수님의 문제풀이 방식을 바이런은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문제가 닥쳤을 때, 우선 두려움에 사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곤 당황하게 되고, 원망과 불평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도 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런의 문제풀이방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눈뜨게 합니다. 문제 앞에서 불안해하고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이런은 시험 시간 2시간을 다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가지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포도 알갱이가 밀폐된 옹기그릇에서 숙성하면 발효되어 포도주가 되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생길의 골목골목 마다 우리의 자취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현실입니다. 저는 이런 신앙적 의미를 시 121편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첫 공식 설교를 이 구절에서 찾아냈습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고 말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문제 앞에서 발버둥을 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해답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의 한 복판에서 우리가 뚫어져라 바라볼 분은 천지를 지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신데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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