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40(2025. 1. 11. 토요일).

시편 103:21-22.

찬송 45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래위의 발자국>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어려운 시기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간에 주님께서 왜 저와 함께 하지 않으셨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단다. 네 시련의 시기에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바로 내가 너를 업고 갔기 때문이란다.” 매리 스티븐슨의 시로 알려졌습니다.

 

2. “물 위를 걸으시다(16-21)”생명의 빵(22-2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1972학년도는 제게는 잊을 수 없는 한 해입니다. 유신헌법이 발동한 해이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제 이름으로 된 전셋집이 생긴 해여서, 수색에 있는 집에서 통학을 하게 되었는데, 벽돌집으로 2층 왼쪽엔 저의 집, 왼쪽엔 몇 분이 차례로 살게 되었는데, 아마 봄에는 천부교에 다닌다는 한 나이든 부인과 그 병든 따님이 거처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그 집에 심방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래도 신학생이 옆에 사는데 아픈 이웃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조심스럽게 의사를 전하고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심방예배의 격식을 차렸는데, 찬송과 기도 성경을 읽은 후, 조심스럽게 천부교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박태선 장로께서 안수하는 물은 생수가 되어 마시거나 바르면 만병통치가 된다는데 해 보셨느냐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답은 갓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데, 자신에게는 의심이 많아선지 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나고 있어서 손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노라 는 대답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분들에게서 배운 것은, 우리들이 바라는 기적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지만, 오직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 물위로 걸으신 기적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 사전에 약속된 일이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날이 어둑어둑한데도 주님은 오시질 않았습니다. 거기다 거세게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고 합니다. 배는 어느 덧 십여 리쯤 갈릴리 호수 한 복판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어둠은 깊어만 가고,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는데 제자들이 탄 배는 호수 한 복판으로 가고 있다면, 이는 낭패중의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들 삶에는 가끔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팔순 기념으로 아내에게는 이모들과 함께 여행 패키지를 끊어 주었다 합니다. 그리고 내겐 생각해 보라고 말미를 준 상태입니다. 여행을 불과 며칠을 앞두고 막내 이모가 뇌수술을 하게 될 거라고 연락이 왔는데, 의료진이 부족해서 서울 대형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답니다. 아들은 병원 예약을 여기 저기 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모 내외가 치료를 받는 동안 묵을 방을 준비해야 했기에 분주해졌습니다. 여행 취소는 너무 늦어 불가능하다하고, 병원 예약은 힘들고 낭패입니다.

    그 옛날 갈릴리 호수에서 거센 바람을 맞아가며 캄캄한 호수 한 복판으로 밀려가는 배를 탄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본문을 읽게 된 것입니다. 박태선의 천부교를 믿는 한 초라한 부녀를 떠올렸습니다. 이럴 때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삶의 한 복판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제자들 앞에 희미한 물체가 그들에게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배에 탄 제자들에게로 말입니다.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을 자신들이 타고 있는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배는 어느 새 목적지에 가 닿았던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실체적 진실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긴 하였지만, 배가 뒤집혀지거나 제자들 중 일부가 물에 빠져 죽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부재중인 가운데 한동안 절망상태에서 두려움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 전부일 수 있습니다. 천만 다행인 한 일화에 불과하다는 말입니까? 어쩌면 주님께서 제 때에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 일이 날 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를 가르치는 내용입니까? 저는 우리들 인간의 삶의 현장을 일깨워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지 엄청난 불행이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우리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항상 두렵고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동행중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들의 역사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센 파도위의 삶을 살았고, 그래서 그 곳에 파묻혀 죽기도 하고 병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신앙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순교자들이 그랬고, 착한 사마리안도 그랬습니다. 법 없이 살았던 저의 할머니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들 중에는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100살까지 살면 잘 산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다는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기독교인에게만은 말입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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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9(2025. 1. 10. 금요일).

시편 103:18-20.

찬송 4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파커 J. 파머/ Parker J. Palmer(1939~)1997년 미국의 1만 명의 교사들에 의해서 교사 중의 교사로 선정된 파머는 <삶이 네게 말을 걸어올 때/원제 너의 삶이 말하게 하라>는 책이 한국에서도 발행되었는데, 퀘이커 공동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우려라.”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의미 있는 삶을 따르라고 말하는 것 같다.

 

2. “5천명을 먹이시다(1-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공관복음서와 함께 4복음서가 모두 기록한 52개 일화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공관복음서(, , )에서는 모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그 많은 군중들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먹일 수 있겠느냐고 걱정스러운 말씀을 읽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서에서는 주님을 따라나선 배고픈 군중들의 해결하기 힘든 근본적인 문제를 제자들에게 풀어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나, 요한복음서에서는 좀 더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문제, 어디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떡을 살 수 있겠느냐로 해석될 수 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에서는 그 해답으로 200데나리온의 돈만 있으면 되겠다는 빌립의 대답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마가복음서 기자 역시 200데나리온의 돈이 언급되고 있지만,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200데나리온의 돈을 마련할 길이 없다는 해답이 등장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도 우리들 앞에 산재한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지,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현역으로 지역교회를 지도하고 있을 때,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잘 할 수 없었던 것은 물질을 청하는 이들이 찾아올 때입니다. 그 중에 기억하는 분이 있는데, 자신은 태안 어디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했으며, 오랜 질병으로 가족은 다 흩어져버렸고, 자신은 두 달에 한 번씩 서울 어느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그 약으로 살아있는 것 같다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집에 내려갈 차비를 보태달라고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도장 파는 일을 해 보고 싶다며 재료와 도구를 구입하는 자금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 지나서는 전파사를 운영해 보고 싶다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천사를 돕는 것으로 생각했던 당시로써는 이리저리 따져보긴 했지만,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은 화가 났습니다. 언덕배기에 가장 높은 우리 교회를 찾아오려면 힘들 텐데, 큰 교회들이 수두룩한데 거기에서 도움을 받으면 좋지않으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때 그 분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 교회들은 저를 거지처럼 대하고 비참하게 돌려보내버렸습니다. 고 말입니다. 종로 3가에는 노숙자를 위한 점심을 제공하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1130분 정도가 되면 탑골공원 주변에는 긴 줄들이 이곳저곳에 만들어지는데, 그 내용이 괜찮았습니다. 그 분들 중에는 넉넉한 생활을 하면서도, 아내나 며느리 눈치가 보여서 나오는 분들도 적지 않다 했습니다. 그러니 밥 한 그릇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그립고 고픈 때문이었습니다. 200데나리온만이 문제해결의 열쇠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도 삶의 의미가 필요한 현실임을 알릴 방법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3.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당신에게, 부제가 붙은 책 <어른의 인생수업>을 구입했습니다. 50권의 책을 하나하나의 주제로 요약해 묶었는데, 관심을 끌만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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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8(2025. 1. 9. 목요일).

시편 103:15-17.

찬송 4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비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한 서민을 더욱 힘들게 하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그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전당포의 노파 같은 인물은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 확신범이었다. 그러나 살인을 한 후에 그는 자신은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인 것을 깨닫고 오랜 번민과 방황 끝에 자수해서 8년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게 된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태초이래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이유로 죄를 짓고 벌을 받으며 살아간다. 어떤 경우에도 잘못에는 벌이 따른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2.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1-15)”을 읽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밝히는 지식 뿐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그런데 만일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는 공지영 작가의 책을 미리 읽었더라면, 성지 순례가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독교의 성지인 이스라엘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 역사적 지점들을 표시해 두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디가 어딘지 두리번거리다가 하얀 머릿속을 가진 채 돌아와야 했을지 모릅니다. 많은 고증을 거쳤겠지만, 여기가 팔복의 말씀을 전하신 자리 팔복교회입니다. 여기가 주님께서 땀이 핏빛처럼 흘려 기도하신 바로 그 바위 터입니다. 라고 교회도 세우고 동판으로 표식을 해 두었으니, 순례자의 상상의 나래는 풍성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 안나 교회를 찾아가는 노정은 값으로는 사과 한 알이 전부였지만, 제게는 매우 지난/至難한 걸음이었습니다. 바로 그 성당 구역 안에 그 옛날 수 십, 수백 명이 모여 있었던 베데스다 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계단으로 한참 내려가야 썩은 물들이 고여 있는 옛 못 터가 나오는데, 그 자리에는 건물을 둘러싼 5개의 통로형태의 행각이 있었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38년 된 반신불수의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법 큰 규모를 갖춘 2천 년 전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 하시겠습니까? 2천 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시아에서 온 낯선 순례객 한 사람만 서 있으니 말입니다. 그 결정적인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예수님의 도움이 더는 필요 없다는 듯,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현실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38년 된 환자를 불러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그의 모습을 보시고 그의 병이 오래 된 것을 아셨다 하십니다.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는 대답합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베데스다 못에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는데,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깨끗이 낫는다는 전설 말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병자가 얘기한 후에 주님은 그에게 명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자 곧 나아서 걸어가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걸 일러준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소홀히 여겨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가 되는 등 시련을 겪는 원인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안식일에는 해서는 안 될 39가지 금령/禁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무화과 열매 한 알의 무게가 나가는 물건을 들 수 없다는 금령도 있었습니다. 그리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한 사람이 누군지를 말하라고 법석을 떠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었는데, 나중에 성전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네 병이 말끔히 나았으니, 앞으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질병이나 시련 같은 것들은 죄가 가져다 준 형벌로 이해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죄란 우리 인간들이 잘못할 때마다 덮어씌우는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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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7(2025. 1. 8. 수요일).

시편 103:12-14.

찬송 5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쓴 레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이 말 한마디는 명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그리고 이 세계 속에 있는 선함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어야만 합니다. 믿음이야말로 선함이 실현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2.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46-54)”을 읽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문제들 중 심각한 몇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배고픔과 질병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심각한 문제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게 분명합니다. 배고픔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큰 병으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예외이겠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50100보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이 그런 범주에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주변에도 성공했다는 사람이 있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몰랐는데, 뇌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며, 시집간 딸이 사고사로 외손자들을 돌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목회자로 성공했다는 친구가 있는데, 은퇴한 지금도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며 신수 좋은 노년을 즐기는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기초 수급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오래되고 유명한 교파인데 그곳에는 연금제도가 없어서 그렇게 살고 있다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마주쳤던 1세기의 이스라엘 땅에는 지금보다 몇 백배나 더한 배고픔과 질병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섣부른 비난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온통 가난과 질병 얘기뿐이라는 식의 비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다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고, 공동번역 성경에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배고픔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겠지만, 그 어린 아들은 심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난과 질병이 흔해빠진 보편적인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병원에서 얻어들은 얘기입니다만, 열병/熱病이란 복통이든 치통이든 어떤 병이든 열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찬 물수건 요법은 해결책이 아닌 것입니다.

    막강한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왕의 신하는 열병으로 몸부림치는 아들로 인해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어둡고 슬픈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 일행의 동선/動線을 알아냈는데, 자신의 집이 있는 갈릴리 지방을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는 너무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뵙고 거의 죽게 된 아들의 고통을 말씀드리며 아들이 누워있는 가버나움으로 내려와 고쳐주실 것을 간청했다고 말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가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오직 자신의 아들의 긴박한 처지를 해결해 주실 것을 애원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분의 대화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주님의 관심사는 믿음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왕의 신하의 관심사는 자식의 병을 고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뿐입니다. 주님은 집으로 돌아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나중 과정은 성경에서 읽은 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바로 그 시각에 그 아이는 열이 떨어졌고 온 집안이 기뻐 난리가 났을 것이고, 예수님의 관심사대로 그 집안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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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6(2025. 1. 7. 화요일).

시편 103:9-11.

찬송 31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어렵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날마다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남긴 명언인지는 모르나 명언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값진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한다.

 

2. “가나의 혼례(1-11)”을 읽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1979년 여름 저는 혼자서 이스라엘을 방문하였고, 성경에 나오는 유명 순례지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룹 투어를 모집하는 광고가 욥바로 가는 문 주변에 여기 저기 붙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내원도 없이 혼자가 여행하는 것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순례지는 물론 순례자들을 관찰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나라는 비탈진 마을 아래에는 나사렛이 있었는데, 그곳에 규모가 커 보이는 성모 영보성당이 있는데, 거기엔 우리나라 가톨릭에서 기증한 한글로 된 주기도문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두 분의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로 윗마을 가나에서 사온 포도주를 들고, 성당 주변을 다니는 사제복을 입은 신부님께 성만찬을 하는 바람에 마침내 술에 취한 것입니다. 성지순례에서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요단강 하류 <알마그타스>에서는 여러 명의 한국인 순례자들이 한국인 목사에 의해 세례 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지순례에 비기독교인이 갔을 리는 없을 테고, 이미 세례를 받은 교인이 요단 강물로 세례식을 하고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재세례를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차제에 요단강의 세례 터에 대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구가 주장하는 <까스르 엘 야후드>와 요르단이 주장하는 <알마그타스>와 논쟁을 벌였는데, 최종 결론은 요르단 지역인 <알마그타스>의 세례 터를 유네스코가 2015713일에 세례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습니다. 사실 그곳에 흐르는 요단강폭은 불과 10여 미터 밖에 되지 않으며, 논쟁이 된 세례 터들 사이의 거리도 수 미터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가나의 혼례식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기적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고, 물이 포도주가 된 그 위대한 변화를 가장 쉬운 말로 설명했던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가나의 혼례식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포도주가 동이 났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혼례식은 초청된 사람만이 입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모든 피로연 잔치는 계획되고 준비된 상태였는데, 동이 날 수가 없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다른 음식과는 달리 포도주만은 계산이 불가능했을 수 있습니다. 고주망탱이가 되도록 마시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과방/果房을 감독하는 연회장에게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우리 주님의 모친 마리아는 이 문제를 주님께 귀띔해 주었고, 주님은 정결례로 사용하는 항아리 6통에 물을 가득 붓게 하시고, 그 다음에 그것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게 하여, 맛있는 포도주를 가지고 남은 잔치를 잘 치렀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어떻습니까? 살다보면 이런 난처한 일들이 우리들 삶에는 참 많습니다. 그럴 경우 오늘 본문에서처럼,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도 있고, 지혜를 발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여신도회 임원 6명을 오찬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70년도 시절 서양 집을 한 번도 가본 일 없던 여신도회원들은 궁금해 하는 두어 명의 다른 회원들을 데리고 갔더랍니다. 주인 것 까지 7덩이의 스테이크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커피와 쿠키를 대접하고 말았더랍니다. 우리나라 주부였다면, 그럴 경우 기왕 끓인 소고기 무 국에 소금 한 줌 더 넣고 물을 한 바가지 넣어 끓여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훗날 영국의 계관시인 바이런은 케임브리지 대학 종교학 시험에서, 가나의 혼인장치에 대한 의미를 진술하라는 물음에,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그 얼굴이 붉어졌도다.”라는 유명한 답안을 작성해서 높은 학점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주인을 만나기만 하면 만사형통한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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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5(2025. 1. 6. 월요일).

시편 103:6-8.

찬송 5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인 짐 콜린스(James C. "Jim" Collins, III, 1958125~ )실패했을 때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성공했을 때는 창문 밖을 바라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책임을 따질 때는 거울에서, 칭찬을 따질 때는 창문 밖에서 그 대상을 찾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동안은 거울보기를 게을리 했는데, 여기 저기 거울을 둬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15-21)”을 읽었습니다. 오늘 16일은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은 주님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뜻으로, 아프리카와 동방 교회가 지키던 예수님의 탄생절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회의 절기들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절기를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제도와 신학을 확립해갔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초대 기독교회는 동방기독교회 뿐 아니라 서방 기독교회에서도 4세기까지는 주현절을 지킬 정도로 중요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렇듯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더욱 강조하게 된 주현절은 교회력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 셈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42:1-4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주현절의 중심점을 매우 잘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표제어를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라고 붙였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일꾼을 소개하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주시고, 마음에 드셔서 뽑으셨다고 선발 배경을 설명까지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일꾼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을 받으셔서, 뭇 민족을 바른 인생 길을 펴 줄 것이라고 하며, 둘째는 큰 소리도 전혀 치지 않아 성품이 부드러우시며, 셋째는 부러진 갈대나 깜빡거리는 등잔불의 심지를 잘라버리지 않으시고, 넷째는 어떤 경우에도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바른 인생 길을 펴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을 세울 때 반드시 참고하면 좋을 그런 내용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구절만을 강조해 왔는데, 이사야는 첫 번째 덕목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신 것과, 부드러운 성품을 둘째 덕목으로 꼽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덕목의 목표는 바른 인생 길을 펴는 것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힘써 해야 할 일이란 이 세상의 뭇 민족들을 바른 인생 길을 펴 주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 찬 세상에서, 바른 인생 길을 펴 주시려고 일꾼을 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희망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분명 암담하기만 한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다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억울한 한 일도 많이 당하는 사람들,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답답함을 얼마나 더 참고 바라봐야 하느냐고 항의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제가 묵고 있는 해운대 강사 숙소를 찾아서 정반대에 위치한 괴정동에서 시각 장애우 제자 한 분이 약속한 시간보다 많이 늦게 도착했을 때 제가 물었습니다. 왜 늦었느냐고. 택시를 탔는데도 그리되었다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짐작하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몇 바퀴 더 돌아서 왔는데, 억울하지 않느냐고 되물었을 때, 그렇게 해서라도 필요한 곳에 잘 사용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도 더 불의한 처우를 받아야 하는 장애인을 등쳐먹는 멀쩡한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들이 나서야 할 차례입니다. 바른 인생 길을 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고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 지도자 만이 아니라, 사회 지도자들도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들임을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많은 세상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른 인생 길이 펴져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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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4.

시편 103:3-5.

찬송 405, 444, 47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수우족 인디언의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2, 성탄절후 둘째 주일의 구약 열왕기상 3:4-15을 본문으로 일천 번제의 정신을 따라 살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기도에 대한 일화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였습니다. 그밖에 모세의 기도, 사울의 기도, 다윗의 기도, 솔로몬의 기도 등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도들은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 왕에게 하나님은 꿈속에 나타나셨습니다(4-5a).

간절한 마음은 낮과 밤 구분 없이 삶에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일천 번제란 일천 번씩 드린 제사가 아니라, 일천 마리 제물을 번제로 드렸다고 말입니다(대하 1:6). 어느 교우가 875번제 예물이라며 헌금을 드린 것을 알고,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분의 대답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를 모범으로 삼아서 875번째 헌금을 드린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대단히 정성스러운 예물이라고 답한 후, 잘못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공로주의가 될 수 있으며,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일 일천 번을 예물을 드린다고 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29개월을 꼬박 예물을 드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가끔 드린다면 10년도 걸릴지 50년이 걸릴지 모를 것이며, 그걸 세다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왕이니까 할 수 있는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자, 무엇이든 구하면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5b-9).

가장 현명한 신앙인이란 누구일까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도 포함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기도자로 엎드렸습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진정성이 있었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감사했고(6), 둘째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습니다(7). 셋째 지도자로써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9). 솔로몬의 기도는 한 순간의 짧은 생각이나 감상적인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천 번제를 드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생각하고 숙고했던 기도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지혜나 인격은 어떤 한 순간의 깨우침이나,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통해서 뿐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오랜 고독한 기도의 시간이 가르쳐준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기도의 환경은 가난과 질병과 싸우는 보통 사람은 물론 지도자에게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겠습니다.

 

일천 번제의 정신은 행복한 삶(장수, 부귀, 지혜)을 살게 해 주십니다(10-15).

일천 번제의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서 살려는 마음입니다. 누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행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도 하고 묵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 인간의 생각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의 문제는 욕심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십계명에서 열 번째 계명이 욕심을 갖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에서는 탐욕을 금하라고 합니다. 지나친 욕심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가지려는 욕심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하는 욕심을 기를 것을 권고합니다.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르치는 내용이고 주님이 보여주신 삶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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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3(2025. 1. 4. 토요일).

시편 102:26-28.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다윗 왕이 반지 세공사를 불러 "날 위한 반지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큰 전쟁에서 이겨 환호할 때도 교만하지 않게 하며,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반지 세공사는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으나, 새겨 넣을 글귀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현명하기로 소문난 왕자 솔로몬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때 솔로몬 왕자가 알려준 글귀가 바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이었다 한다. 훗날 이 말의 출처는 유대 경전 주석서인 미드라시/ מִדְרָשׁ이거나 또는 페르시아 우화설이라 한다.

 

2, “믿음의 사람 모세의 특징(23-31)”을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일 것입니다. 이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모세를 주목할 수 있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삶을 살필 때, 우리는 그의 기구한 삶의 자리를 함께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간략하게 그의 삶의 배경을 살피면, 그는 매우 혹독한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모든 유대의 사내아이는 태어나는 즉시 죽임을 당해야 하는 무서운 법령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모친 요게벳과 누이 미리암의 도움이 없었다면 태어나자마자 곧 바로 죽어 흙에 묻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석 달 동안을 집에서 키웠고,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되자, 어린 모세를 나일강변 갈대밭에 숨겨두고, 매일 그 핏덩이를 지켰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귀부인들이 목욕하러 오는 지점에 모세를 숨겨두고 지키던 가운데, 애급 왕 바로의 딸의 눈에 띄어 양자로 왕궁에서 살게 되었고, 특히 누이 미리암은 유모를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친 어머니 요게벳을 유모로 채용하도록 소개합니다(2:1-10). 모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노예로 살아가는 동족들의 처참한 현실에 마음 아파 하다가, 억울하게 고난을 겪는 것을 목격하고 애급 사람을 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으나 발각되어 자기 민족 히브리인들에게 비난을 받고 도망을 쳤는데,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게 됩니다(2:11-25). 그때부터 모세는 허허벌판에서 떨기나무가 불에 타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을 명령 받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십계명을 비롯해서 많은 율법과 성전과 제사 등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민족의 지도자로 살 것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꾼을 삼으실 때, 그 사람의 삶의 자리를 통해서 선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의지나 계획이 우리들 인간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깨닫게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당신이 일꾼으로 삼을 사람에게 아무런 막힘없이 순탄대로를 걸어가도록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은 꼬이고 뒤틀리고 먹먹하게 하는 역사의 고달픈 길을 걷게 하셨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태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서, 출애굽의 과정들에서 직면하게 되는 심각한 위기들이 우리들 신앙인들의 가슴을 두렵고 불안하게 할 뿐 아니라, 절망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세의 일생을 살피다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그 역시 짊어져야 할 멍에는 언제나 무겁고 힘겨우며 절망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 확신하는 대도 불구하고, 너무도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인생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마치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연상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비롯해서 그의 조상 아브라함 그리고 훗날 영웅 대접을 받는 다윗 왕에 이르기까지, 이런 절망의 과정을 겪게 하시는 것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과정이 선택코스가 아니라 필수코스라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 중에는 하나님의 일꾼 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필수코스 앞에서 주저앉지 말아야 할 이유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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