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13(2025. 7. 3. 목요일).

시편 121:1-2.

찬송 4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허공으로 화살을 쏘았네, 어딘지 모르지만 땅에 떨어졌네. 너무도 빨리 날아갔기에 눈은 그것을 따라갈 수 없었네. 나는 허공에다 노래를 불렀네. 어딘지 모르지만 땅에 떨어졌네. 날아가는 노래를 따라갈 만큼 누군들 날쌘 눈을 지닐 수 있을까? 먼먼 훗날 참나무에 박힌 부러지지 않은 그 화살을 찾았네. 한 친구의 가슴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 있는 나의 노래도.” H. W. 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를 옮겨보았습니다. 우리들 삶이란 헛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과부와 재판관(1-8)”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미국 대법원의 재판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헌법과 법률에 의해서 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재판을 한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법관들의 정치 성향에 따라서 재판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법은 공정성을 잃고 사법부의 위상은 크게 흔들릴 수 밖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재판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올바른 판결이 아니라 굽은 판결을 내리는 그런 재판관 말입니다. 왜 이런 위인들이 존재할까요? 악은 왜 존재할까요? 하나님께서 눈을 감고 계시는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잘못을 하는 사람을 학교 선생님이나 아버지가 즉결처분을 내리듯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든 지금은 즉결처분이란 재수 없는 사람이 비둘기의 똥을 맞듯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세상에 가득한 죄인들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청문회에 나오면 곧 바로 죄인이 됩니다. 털고 또 털고 파고 또 파기 때문이 아닙니다. 청문회를 피한 사람들이 의인노릇을 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억울한 일로 견딜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예나 제나 과부는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문제의 핵심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밤낮없이 재판관의 대문 앞에 앉아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달라고, 그리고 바른 판단을 내려줄 때까지 탄원하겠다고 말입니다.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소원은 고약한 재판관까지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점을 파고들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간절함과 절실함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4가지 결심을 한 것을 저의 스크랩북에서 찾아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절심함으로 살자였습니다. 오늘 <과부와 재판관 비유>는 이런 간절함과 절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우리의 간절함과 절실함을 고할 수 있느냐 입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한 학기를 마쳤을 때, 나름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생각했지만, 장학생이 되고 말고는 교수님들의 평가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교수실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들어와요! 라는 소리에 문을 열고 보니 교수님들이 회의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오겠습니다 라고 하자, 들어왔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주시지 않으면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교수님들의 선처를 구합니다. 라는 두 마디 말을 하고 도망치듯 문을 닫았습니다. 그 당시에 저의 형편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저를 도와줄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실을 찾았고, 제 얼굴에는 간절함과 절실함이 가득 배어있었다고 훗날 지도 교수님이 귀띔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과부는 자신을 절망에서 구해 줄 사람은 재판관 밖에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간절함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모델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기도를 듣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812(2025. 7. 2. 수요일).

시편 120:4-7.

찬송 23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옛 제자들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행복하세요?” “어느 정도는.” “그 행복 리스트를 말씀해 주세요.” 그래서 그동안 느꼈던 생각들을 리스트화 해 보았습니다.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맛있게 마실 때, 거실 창밖이 환히 보이도록 블라인드를 당길 때, 채전에서 자라는 부추나 고추 등 작물들이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랐다 생각이 들 때, 잔디를 깎고 그것들을 햇볕에 말리려 그대로 남겨둘 때, 음식물 쓰레기를 마을 공동 쓰레기통에 얌전히 버릴 때, 힘들여 읽고 생각하고 기록한 오늘의 묵상자료를 맨 처음 읽어주는 이름들이 여전할 때 등 등. 셀 수 없이 많은 리스트들이었습니다.

 

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20-37)”을 읽었습니다. 사람의 아들 곧 인자/人子라는 표현은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일컫는 매우 독특한 표현입니다. 마침 <당당 뉴스>에 실린 최재석 칼럼에 예수님은 왜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을까?” 라는 글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구약성서 에스겔서에서 처음 인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에스겔서에 무려 90번 이상 나옵니다(2:1). 이때의 인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대를 향한 말이었습니다. 그 후 400년 동안 사용하지 않던 인자 칭호는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다니엘서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는 메시아를 인자 같은 이”(7:13)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다니엘서의 인자 칭호를 채용합니다. 공관복음서에 69, 요한복음서에 13회 나옵니다. 이렇듯 4복음서에 등장하는 인자칭호는 예수님만이 자신의 호칭하며 사용하였습니다. 4복음서 외에는 4번 등장하는 이 인자호칭은 스데반의 환상(7:56), 시편 8:4를 인용한 히 2:6, 7:1을 암시하는 계 1:1314:14으로, 이 모두에서 언급된 인자호칭은 분명히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아란 칭호를 피하고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저 유명한 윌리엄 브레데의 <메시아 비밀>/ 8:29-30, 1:44이 암시하는 것처럼, 신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현실정치에 참여해서 로마의 세력을 물리칠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메시야를 기대했는데, 정작 주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시는 등 진정한 의미에서 초역사적 구원자로써 메시아를 알리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브레데의 주장은 여전히 논쟁가운데 있습니다.

    가끔 생각하는 것입니다만, 신학자들을 비롯해서 성경을 해석해서 전달해야 하는 일선 목사들은, 자신들의 이해의 범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술하려고 힘씁니다. 마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시계가 그의 주인 격인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듯 말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접근해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고 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만든 주인에 목적(?)에 충실한 일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런 시각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인자가 오시는 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킬 말만 늘어놓고 있다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 날을 번개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번쩍 거리는 것과 같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노아의 때에 일어났던 사회 현상을 소환하십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집을 사고 고치는 일에 혼을 쏙 빼놓고 살던 그 때에, 홍수가 온 세상을 덮어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키듯, 그리고 롯이 소돔에서 경험했던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든 사람이 멸망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경고하십니다. 그 날이 오면 지붕에 올라간 사람이나, 밭에 있던 사람들이 재물을 건지겠다고 집안으로 가지 말라시며, 침상에 누워있던 두 사람 중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두며, 맷돌질 하는 두 여인 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둘 것이라고 말입니다. 심판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그 날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날에 대책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씀입니다. 일찍부터 준비했어야 합니다. 마치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3. 엊그제는 복숭아를 20여개 수확하였는데 맛은 들었는데 크기도 꼴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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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11(2025. 7. 1. 화요일).

시편 120:1-3.

찬송 30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크게는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형성되기도 하고, 작게는 독특한 습관이나 성격이 생기게도 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생긴 못된 성격이 있는데, 생각없이 말을 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합니다. 진담을 농담처럼 하는 사람이며, 상대방의 호의를 아주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넘겨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존중은 고사하고 함부로 대한다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이 싫어지고, 고쳐지지 않고 계속 반복될 때는 날씨 얘기만 하는 사람으로 분류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속내를 주고받을 좋은 친구란 한두 명으로 충분하다는 말이 마음에 듭니다. 그럼에도 좋은 친구가 많다 자랑하는 것은 헛소리라고 말입니다.

 

2. “나병환자 열 사람(11-19)”을 읽었습니다. 제겐 나병환자 하면 떠오르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장마비가 퍼붓던 어느 여름 밤, 저의 앞집 엄씨네 집에서 슬피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머니는 이튿날 그 집 작은 아들이 어딘가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아들을 더는 숨길 수가 없어서 가족들이 마지막 밤을 그렇게 울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장면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경남 거창 외곽의 한 작은 마을에서 성탄절 예배를 드린다고 교감 선생님이 학생 몇을 데리고 가셨는데, 따라 가서 보니까 나환자 촌이었습니다. 코가 없는 분들과 손목이 없는 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많이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돼지와 닭을 키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나 중심의 세상이 아니라, 상대 중심의 세상을 바라볼 눈을 뜨게 되었고, 목사의 삶이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목회 초기부터 시각 장애우를 위한 봉사단체를 만들고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은퇴 후에는 장애인 교회에서 자비량 설교 목사로 10년째 일하고 있지만, 마음처럼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천형/天刑처럼 무거운 멍에를 매고 살아가는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난 길로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던 주님은 한 나환자 촌을 지나가시게 되었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큰 소리로 외치는 나환자 열 명을 만나셨는데,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명하시자 그들이 떠나갔는데, 가는 도중에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사람은 주님께 되돌아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나환자는 이방인이었다 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화는 난치병으로 알려진 나환자를 주님께서 고치셨다는 치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은총을 입은 사람 열 명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엄청난 은총에 감사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일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다를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을 입었다고 하면 평생을 그 은혜 갚기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되돌아보면 제게도 참 고마운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가족과 친지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납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돈 10,000원으로 대학 4년을 졸업하기로 어머니와 약속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하루 이틀 여관신세를 지고 밥을 사먹다 보니까 일주일이면 그 돈을 다 쓸 것 같았습니다. 그 절박한 시점에 저를 도와준 분이 신촌 로터리에서 노고산으로 올라가는 언덕에 있던 신촌감리교회의 허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저를 위해서 평소에 사이가 안 좋으신 북아현동에 있는 <인우학사>의 사감께 머리를 숙이고서 힘든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제가 가졌던 돈으로 2달치 식비를 낼 수가 있었고, 그 뒤에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공부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를 열심히 섬겨 은혜를 갚겠다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학기만 교회학교 교사로 섬겼을 뿐, 루터교회를 알게 되면서부터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그 목사님과 교회를 잊고 살았습니다. 무정하고 비정하게 말입니다. 여러 해가 지나서 그 분의 아드님이 중앙대 교목실장으로 계셨을 때, 옥수동교회에 설교자로 한 번 모신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많이 도와 주셨는데, 한 두 번 찾아뵙는 것이 전부였으니,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 들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도 받은 은혜를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갚으라.”고 말입니다.

 

3. 여름 한 복판에 들어섰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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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10(2025. 6. 30. 월요일).

시편 119:174-176.

찬송 3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세상을 구경만 할 수 있다면 고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이란 남의 것을 구경하면서 동시에 내 인생도 남에게 보여줘야 한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구경하고 구경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함께 부딪히며 밀치며 뒤얽혀서 연기를 해야 한다. 배우로서 연기를 한다는 의식도 없이 우리는 어쨌든 슬프거나 즐겁거나 쉴 새 없이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이 세상에서 누구는 선한 배역을 맡고, 누구는 악역을 하면서 남의 미움을 받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면, 우리가 진정 동정하거나 우러러봐야 할 인간은 누구여야 할까?”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p.36.

 

2. “죄의 유혹과 용서(1-4)”, “믿음의 힘(5-6)” 그리고 종의 의무(7-1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믿음의 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성경에는 매우 드문 얘기이지만, 본문에는 큰 믿음에 대한 실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고쳐보려고 예수님을 찾았던 한 가나안 여인이, 우여곡절 끝에 많은 장벽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나아갔는데, 큰 믿음을 가졌다는 칭찬을 들을 뿐 아니라, 딸의 병을 고친 것입니다(15:21-28). 믿음이란 자/로 재거나 저울로 달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우 의례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믿음을 가진 것일까 하는 물음말입니다.

    먼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알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은총은 무한해서 셈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고 넘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런 말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만이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믿음을 두고 도박하는 심정에 비유했습니다. 저 유명한 <파스칼의 도박>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믿음을 신비한 것이라 풀이했습니다. 믿음은 이성의 영역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신앙의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라고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이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니 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듭니다. 믿음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말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치 미친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해명합니다(2:8). 이제 적용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말도 안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고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결론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들만이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행하실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들 뜻대로 될 것이라 잘못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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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09.

시편 119:171-173.

찬송 5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잡한 완행열차 안에서 자리 양보를 받은 권정생은 양보한 여인에게 혹시 교회 다니느냐 물었고, 반색하는 그 여인은 시골교회 집사라고 했다. 어느 날 바쁘게 농사일에 정신이 없는데, 거지 한 사람이 구걸하러 와서 퉁명스럽게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데 대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꼭 예수님을 닮아서 쌀 한 바가지를 퍼들고 나가보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대성 통곡을 했다 한다. 그 뒤로는 거지는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보이게 되었다 한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pp.116-117.

 

2.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의 사도서간문 갈 5:1, 13-15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자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자유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능력이며(Freedom), 동시에 억압하는 제한이 없는 상태를(Liberty) 말합니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원죄/原罪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해석합니다. 이 거룩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자유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1).

상해 임시정부를 폄하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친일파의 전형적인 주장입니다. 그들은 열혈 독립 운동가들의 희생과 노력에 의해서 광복을 찾은 것이 아니라, 미국 등 세계열강의 공로로 해방을 맞았다고 주장합니다. 일견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조국을 되찾으려는 선열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열강에 의해서 자주권을 상실한 민족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넓은 틀에서 생각하면,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죄로부터의 자유라고 하겠습니다. 죄의 속박에 붙잡혀 있는 동안은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주차 실수로 다른 자동차에 흠집을 냈습니다. 목격자도 CCTV도 없었습니다. 그냥 도망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피해 자동차에 저의 전화번호를 남겼고 수리비를 지불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둠에서 광명을 찾는 자유를 실감하였습니다.

 

주어진 자유를 육정이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명하십니다(13).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거룩한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고속도로(아우토반/ Autobahn)는 약 70%18,000km가 무제한 속도이지만, 권장속도는 130km입니다. 저를 초청한 바바리안 주의 작은 마을 노이엔데텔샤우의 베커 박사는 사랑하는 아내를 이 아우토반에서 잃었다 술회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지킬 매우 간단한 약속을 어긴 불법 차량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제한적인 자유는 엄중한 책임이 뒤따라야 합니다. 경계해야 하고 명심 또 명심할 것은 육정/肉情이라 했습니다. 존경까지 받던 권력자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육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권세의 힘을 약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종노릇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처음에만 반짝 시늉을 낼 뿐, 곧 바로 권력자의 본색을 들어내곤 하였습니다. 초심을 잃지 말라 귓전에 소리쳐도 소용이 없곤 했습니다.

 

이웃 사랑은 모든 율법의 핵심입니다(15).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두 가지 지켜야 할 대/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6:4-9),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이웃에 대해서 질문을 해왔습니다. 마치 자신의 이웃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지식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고,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10:25-37). 저도 이 말씀을 들었던 어린 시절에는 저만은 예외인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철이 들면서 저 역시 사마리아 사람처럼 손을 내밀어야 할 이웃이 너무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작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도, 손을 잡아주고 곁에 앉아 주어야 할 이웃들도 너무 많습니다. 어린 자식에게 자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든든한 부모가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이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따뜻한 손을 뻗을 이웃들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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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08(2025. 6. 28. 토요일).

시편 119:168-170.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제일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많다. 그래서 주야장천(晝夜長川) 기도에 열심이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들이 드리는 성공과 출세 중심의 기도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불리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며, 그 분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 하셨다. 물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도 했고, 용서받은 것처럼 이웃도 용서하고, 시험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구해 달라 기도하라 명하셨다. 다시 생각해 보자.

 

2. “부자와 나자로(19-31)”을 읽었습니다. 삶의 자리, 혹은 삶의 배경은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가늠하기에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거나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환경을 찾아서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부자와 나자로의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라, 픽션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게 될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적합한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인 부자와 거지 나자로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매우 설득력 있는 그래서 흥미를 백배 끄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호화생활을 즐기는 한 부자가 등장하는데, 매일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다 했습니다. 이런 부자는 대체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부를 대물림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자수성가한 부자는 마음이나 생활을 여유롭게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1세기의 환경을 고려한다면 오늘날처럼 갑작스럽게 부자가 되기는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부잣집 대문간에서 거지노릇을 하는 나자로가 등장하는데, 온 몸에 부스럼 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고, 부잣집 식탁에서 떨어진 음식 쓰레기로 겨우 연명을 하고 있었고, 개들이 와서 부스럼 병으로 헐어버린 상처를 핥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오래지 않아 죽게 되었고, 거지는 천사의 안내를 받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데, 부자는 지옥/게헨나에서 멀리 떨어져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자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너무 반가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나자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몇 방울 찍어 자신의 혀끝을 적셔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그게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아직 세상에서 자신처럼 허세나 부리며 어리석게 살고 있는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나자로를 보내어, 제발 이곳으로 오지 못하도록 경고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라고 단칼에 거절합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우선 주인공들이 부자는 익명/匿名으로, 거지는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부자는 자신의 이름이 천년만년 모든 사람들이 기억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의 이름은 세상에서는 무명의 존재처럼 여겨졌으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원히 기억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목할 것은 부자와 거지에게 내려진 상벌의 문제입니다. 부자가 남다르게 크게 악행을 한 것 같지 않았는데 결론은 지옥행이었고, 그 반대로 거지는 별로 대단한 삶을 산 것 같지 않았는데 천국행이었다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왤까요? 부자와 거지의 인생관에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부자는 매일이 천국 같은 삶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에 대해서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늙어서 죽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기를 쓰고 오래 살고 건강해지는 것이라면 온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다가 몸보신 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다 쏟았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거지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상한 음식과 한 모금의 물로 주린 배와 마른 혀를 축이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거지 나자로는 이 세상에서 단 하루도 희망이 없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 순간 하늘을 향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천국을 그리면서 천국에서 살아갈 꿈을 꾸게 되었고, 천국에서 사는 사람다운 품성을 갖추려고 힘썼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자의 인생관은 이 세상에서의 환락에, 거지의 인생관은 하늘나라 천국에서의 새로운 삶의 희망으로 갈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둘의 삶의 방향은 정반대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자세입니까? 아니면 거지처럼 천국만이 희망입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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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07(2025. 6. 27. 금요일).

시편 119:165-167.

찬송 43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이 참으로 귀엽고 예쁘고 깨끗하여라. 너를 보고 있으면 서러움이 나의 가슴 속까지 스며든다. 언제나 하나님이 밝고 곱고 귀엽게 너를 지켜주시길. 네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나는 빌고만 싶다.”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로렐라이 언덕>의 독일 시인이었습니다.

 

2. “율법과 하나님의 나라(16-17)”간음의 행위(18)”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자신들만의 특별한 계율을 가지고 있는데,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에게 모든 책임과 상벌이 부과된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상과 벌을 인간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 맹자의 도덕률이라 할 수 있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비롯해서 불교의 사성팔정도/四聖八正道 역시 사람이 그 행위의 주체가 되면서 동시에 책임을 오롯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구약성경 역시도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본래 구약 성경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내용으로 하는데, 유대교가 율법을 지나칠 정도로 의지하게 된 데에는 대체로 유목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갑자기 농경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교도인 현지인들의 삶을 따라하게 된 것으로 꼽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정성스럽게 땀 흘려 농사를 지어도 제대로 수확을 하지 못하자, 이교도인 현지인들의 자문도 받고 적극적인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들은 옛날 우리나라 농촌에서 하듯 벼농사를 하는 논의 물고에 떡이나 생선을 차려놓고 농사가 잘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며 절하는 관습처럼 말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인하기 어려운 것을 틈타 이교도들이 우상에게 빌면서 시원한 장래 일을 읊어주는 무당의 역할에 속아 넘어간 것도 한 몫을 했다 생각합니다. 어느 총리부인이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장래일이 너무 불안하고 궁금하니까 무당을 찾는 것이라고, 그리고 역술을 적극적으로 배운 것이라 말하듯 말입니다.

    이런 율법주의는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이미 정상적인 야훼 신앙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과 이성을 분별하지 못하고, 신앙의 밖으로 튕겨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저의 할머니가 뒤늦게 기독교 신앙을 가졌는데, 옛 습관 손을 합장하고 삼신할머니에게 빌던 자세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제가 바로잡아 드렸던 추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세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내 정성이나 노력에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있는지를 살피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과 정신으로 살아가시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며, 언제나 세상과 함께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며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정성이나 노력 여하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달라지거나, 구원을 받고 안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의해서만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일입니다. 가령 공부하는 학생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대학 4년 대학원 2년을 공부하는 동안, 늘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때 제가 결심한 것은 매일 30분간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 들어서면 긴 백양로 오른 쪽에는 학생회관이 있었고, 거기에 작은 기도실이 있었는데, 기도실 벽면 중앙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머리와 두 팔이 아래로 축 쳐진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성화만을 30분간 쳐다보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화에서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매우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루를 이겨냈고, 6년을 이겨냈습니다. 내가 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 성화를 머릿속에 그리며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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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06(2025. 6. 26. 목요일).

시편 119:162-164.

찬송 374.

성경 눅 16:1-9.

제목 마지막 권한 행사(?)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족하는 마음은 항상 편안하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은 항상 불안하고 쫓기며 흔들린다. 무엇이 이처럼 만족을 빼앗아 가 버린 것일까? 그것은 분명 우리가 지닌 욕심이다. 욕심이 작으면 만족은 그만큼 커지고, 행복도 가까워진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마음은 빈 방과 같다. 그래서 텅 빈 방에는 햇빛이 가득하지 않은가? 행복은 바로 그곳에 있다고 했고, 행복은 깃털보다 가볍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담을 줄 모르고, 불행은 태산보다 무겁지만 벗을 줄을 모른다고 장자는 한탄했다.”

윤재근,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배운다, pp.107-108.

 

2. “약은 청지기(1-9)”을 읽었습니다. 신학생으로 출석한 왕십리 루터교회는 학생회와 주일학교를 제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주일학교와는 달리 학생회는 생각보다 힘이 들었습니다. 질문이 많았습니다. 학교생활을 그렇게 한다면 모두 다 좋은 학생으로 성장했을 것인데, 그게 어려웠던지 교회에 와서 그 뒤풀이를 하는 듯 했습니다. 어느 주일 <공과공부>를 하는데, 성경 본문은 기억나지 않지만,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어 단어 하나를 외우게 해 주고 싶다는 心算에서, 우선순위란 영어로 priority라는 말을 가르쳤습니다. 세상에는 그리고 누구 앞이든 수많은 일들이 널려 있는데, 그것들 중에서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을 잘 가릴 수만 있어도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질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느 여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자신에게는 중요한 것이 너무 많다고 운을 뗀 후에, 예쁜 옷을 사 입는 것도, 영화관에 가 보고 싶은 것도, 잘 생긴 남학생과 사귀는 것도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면서, 그래서 어느 것을 택할까 고민이 많다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했지요. 어찌하여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갈 준비를 하는 것은 빠져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했던 대답은 이랬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앞에 놓여있는 것들치고 중요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서도 먼저 할 것을 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중요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것, 그리고 더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입니다. 훗날 그 여학생은 제가 개척하던 부산으로 자신의 약혼자(공군 대위)를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프라이오리티를 늘 명심하고 살았다고 감사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오늘도 해야 할 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취사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느낌을 주님의 말씀에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한 청지기는 주인에게서 쫓겨날 형편에 몰리게 되었고, 마침내 주인의 해고 통보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즘 말로하면 직장에서 잘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한 시점에서 삶의 방향을 일시에 멈추고, 새로운 삶을 향해 돌아서야만 할 경우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 때의 황당함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떤 특정인에게 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 본문은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불의한 청지기의 입장에 서서 우리 주님께서 절망하고 있는 주인공을 편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의 말 하듯 하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비난의 화살을 사방으로부터 받고 있는 이 장본인의 처지가 되어서 변명한다는 것은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몇 가지 대안이 제시됩니다. 땅을 파는 농부가 돼 볼까 하는 생각은 자신이 체력이 달리는 것을 알고 무력해 집니다. 여기 저기 손을 벌이는 빌어먹을 생각은, 평생 처음 해 보는 일이어서 창피함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절망합니다. 그런데 마침내 묘책을 생각했는데, 그동안 자신에게 수도 없이 간청을 하던 사람들이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불러들여 주인에게 진 빚을 탕감해 주는 방법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주인의 허락 하에서 가능한 일이었는데, 주인의 허락없이 그렇게 한다면 불법이고 불의한 일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청지기는 아직은 그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기름 백말을 진 사람에게는 오십 말로 고쳐 쓰게 하고, 밀 백 섬을 빚진 자에게는 팔십 섬으로 고쳐주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을 약삭빠른 사람이라고 평하시며, 그를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칭찬하신 것은 그 청지기가 자신의 권한을 남용했다거나 불법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탕감해 주는 권한이 아직 남아 있을 때, 그것을 활용해서 자신의 살 길을 찾으려는 그 모습을 주목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사람의 처세술을 칭찬하신 것은, 세속의 자녀들이 흔히 하고 있는 거래방식이 빛의 자녀들보다 약고 현명한 것을 보신 것이고, 더 넓게는 세속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의 가치를 높게 인정하신 것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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