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00,10,10,화요일)
잠언 22:6, 찬송 305장.
제목 : 마땅히 가르칠 부모의 책임들.

1. 삼강이란 덕목을 가르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도자와 백성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킬 도리가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부모와 자녀들 역시 그랬고, 남편과 아내 역시 그랬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가령 부모를 홀대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불효자식이라고 책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분명 부모를 홀대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어느 누구하나 책망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서울 거리에는 제 멋대로 살아가는 젊은이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른과 아이가 구별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도자와 백성이 구별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 마다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2. 좋은 시대라고 부러워하는 이들도 없진 않으나, 조금만 깊이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힘 센 사람이 주인 노릇 하는 기막힌 시대가 되었구나.”하고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 중학교 여학생이 노인을 뒤따라가서 밀쳐 결국 죽게 만드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겠습니까?  지금부터라도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들이 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옛날부터 계속 이 점을 분명히 내다보았습니다. 모든 가정에서 부모가 제 자식을 잘 지도하면 희망이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의 비극도 사실은 가정의 붕괴현상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모든 기본이 되는 교육은 부모의 책임 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기본 교육, 기초 교육, 이것보다 더 중요한 교육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본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일은 부모에게 맡겨진 거룩한 책임입니다.

3. 어떤 것들을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말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우선 바른 말씨를 가르칩시다. 듣기에 저속한 쌍스런 말에서 시작해서 험한 말들이 가득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입에서 이런 말씨가 사라지도록 엄하게 지도합시다. 이런 경우엔 지체 말고 벌금을 물게 하거나 야단을 아끼지 맙시다. 부드럽고 따뜻한 말씨를 권장합시다. 시퍼런 칼보다 더 사람의 심장을 헤집는 말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데, 우리 가정에서 부드러운 말로 본을 보여 줍시다. 사랑과 격려의 말을 사용토록 합시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넓은 마음을 갖도록 격려해야 하겠습니다. 갈수록 자기 중심적인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독불장군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야 하겠는데, 저마다 제 고집대로 살려고 하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 훈련이 필요합니다. 언뜻 보기엔 손해보는 일처럼 생각되기에 잘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외동 아들, 딸로 자라난 세대에게는 정말 어려운 주문입니다. 그래서 칭찬과 모범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어느 불신자 아버지가 자식에게는 교회에 다니도록 권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살벌해서 분명 잘못될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돕지 아니하신다면 아무 것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인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사람들이 된다면, 그들은 필경 제 구실을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하나님께로서는 가능하기 때문에 절망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불안한 생각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4. 자식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가 웃을 때 그들도 웃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슬퍼할 때, 그것은 우리의 슬픔입니다. 우리가 절망하면 그들도 절망하게 됩니다. 그들이 보람과 기쁨 가득한 세상을 달음질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모습에서 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며 또한 위로가 될 일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어른들이 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도 아무 염려 없이 건강하고 당당한 부모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기운차고 사랑스럽게 자라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오늘 11시에는 도수리 사모님(도로우목사님)의 요한 비헤른 봉사상 수상식이 루터신학대학교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부름받은 주님의 작은 종 박성완 목사 드림.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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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2(00,10,9,월요일)
잠언 21:27, 찬송 348장.
제목 : 제물보다는 여러분 자신을 드리십시오.

1. 오늘도 하나님의 은총가운데 살고 있음을 기억하며, 모든 일에 기쁨과 감사함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승리의 날이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용은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축복의 예물이 아니라 저주의 예물이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의 본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묵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흔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에는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훈련을 잘 받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사람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대하는 것을 두렵게까지 하였습니다. 너무 깊이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만, 성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람 대하듯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렇게 불러도 될 분이 아니며, 약속한 것을 함부로 어겨도 될 그런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3. 본문에서 제물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따뜻한 마음이 담긴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 물건의 값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거나 상대방의 필요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우렸느냐에 신경을 씁니다. “저희 가정을 위해서 늘 수고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농사지은 고구마입니다. 드셔 보십시오. 그리고 이것은 제가 수놓은 밥상보입니다.” 어머니를 따라서 어느 병원 원장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어머니께서 선물을 내미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땀흘려 수고한 열매들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뜻에서 선물로 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언제부턴가는 값비싼 물건이면 무엇이나 괜찮다는 식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건 그 자체가 쓸만하면 무방하면 그만이다는 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까지 적용되었을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통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절대로 통할 수 없는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4. 문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제물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이어야 하느냐에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은 선물 그 자체로 무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에는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뇌물이 통할 수 있는 점이 아마도 여기에 있는 듯 합니다. 본문은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한”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비록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지만 악인의 손으로 드리는 제물은 더럽고 추한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결코 받아들이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제물 그 자체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제물을 어떤 사람의 손이 드리고 있느냐에 주목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함께 제물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제물은 하나의 상징일 뿐 정작 하나님이 받고 싶어하는 참된 제물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분명한 얘기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15-22의 말씀인데, “이 형상과 글이 뉘것이냐?”고 물으신 뒤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글이 새겨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우리들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손의 제물을 기뻐하시지만, 그것을 드리는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제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5.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오늘은 많이 힘겨울 수 있습니다. 벅찬 문제들이 여전히 따라 다닐 수 있고, 뜻대로 안 풀리는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여러분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멋진 열매에 대한 큰 기대감이 엷어지는 것에 대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열매 그 자체가 아니라, 여러분이 성실하고 진실 되게 살아가는 마음과 자세를 더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여러분의 삶에서 향기가 풍겨나도록 하기 위해서 너무 오래 지체치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열매의 가치를 깨닫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리게 하실 뿐입니다. 오늘도 열매보다는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승리하는 삶입니다. 오늘도 주안에서 승리하는 기쁨이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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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00,10,8)
찬송 68장. 

잠언 21:26. 

제목 : 두 욕망의 차이.

1. 두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종일토록 “탐하기만”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인데 자신이 가진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施濟)하는”사람입니다. 문자적으로만 생각하면 앞의 사람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쌓아두는 사람이고, 뒤의 사람은 가진 것을 마침내 다 내어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전자는 마침내 부자가 될 사람이고, 후자는 분명히 가난뱅이가 될 사람입니다.

2. 이 본문은 두 사람이 가진 마음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은 하루 종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에 묶여 있습니다. “마음가는 곳에 길이 있다.”고 이런 사람은 삶의 의욕이 강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져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획도 세울 것이고 행동으로 옮기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테니까 그의 생활이 의욕에 차 있다고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소유욕이란 모든 사람이 가진 지극히 정상적인 욕망입니다. 이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인간 세계는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 다음 사람의 마음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풀어놓고 누군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을 찾아서 나누어주는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시주(施主)라는 말을 쓰는데 의미는 비슷합니다. 시주란 절이나 중에게 베풀어주는 것이고, 시제란 구제를 위해서 베풀어주는 일을 말합니다. 소유욕과는 다른데 이런 것을 윤리적인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배려하는 욕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3. 이제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이 가진 욕망의 차이에 대해서 잠깐 머물러 보고 싶습니다.
   소유욕에만 묶여 있는 사람을 ‘자기 중심적’이라고 한다면, 윤리적인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이라고 구별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분명 부자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성공할 확률도 대단히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며 알게 모르게 뒤따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도 있습니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욕망 하는 그 것들이 그 사람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3층짜리 저택에 사는 것이 목표이며,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3층짜리 저택에서 사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며,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목표는 행복하게 사는 가정이지 저택이 아닙니다. 참된 목표는 진리를 깨우치게 가르치는 훌륭한 스승이 되는 것이지 교수의 직함을 내놓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유하고자 했던 것들은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참된 목표를 위한 수단중의 하나라는 점입니다. 3층 저택에서 살아야 행복한지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육선(고기)이 가득하고 다투는 것 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한 것이 나으니라”(잠17:1) 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적과 수단의 혼돈을 지적합니다. 여기에서 자기 중심적인 사람의 문제도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 사람을 윤리적인 욕망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런 사람은 부자가 되기에는 아예 틀린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소유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줄 생각을 벌써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들어오기도 전에 나누어 주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성공하고는 이미 멀어진 사람입니다.
   그 결과 아무도 이런 사람을 뒤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혹시 입으로는 “그 사람 실속없이 살았지만 좋은 사람은 틀림없어.”라고 말할 지 모르겠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면 먹을 것을 선뜻 내놓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함께 울어주는 사람, 어찌 보면 제 자신의 머리를 깎는 일 보다는 자기 주변을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며 마음을 써 주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한가롭기까지 한 사람이고, 자신에 대해서 무대책인 사람이라고 혹평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가족은 항상 피곤할지도 모릅니다. 제 자식에게는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라고 하고는, 엉뚱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기우리고 시간을 다 쏟아 붓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주변 사람들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 좋게 표현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여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런 사람을 닮아가야 옳다고 깨달아 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란, 수단이 아니라 목적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아 두면 그게 얼마나 되겠으며, 올라가면 얼마나 높이 오르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그런 사람을 후세의 사람들은 어떻게 평하는지 미리 알 수 있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守錢奴)니, 사람구실을 하지 못한 자라고 말입니다. 

4. 오늘 우리는 높은 목적이나 목표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수단들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제발 목표를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수단에 머물러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하지?” 순간 순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 모든 수단들은 아름답게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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