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36(2025. 1. 7. 화요일).

시편 103:9-11.

찬송 31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어렵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날마다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남긴 명언인지는 모르나 명언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값진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한다.

 

2. “가나의 혼례(1-11)”을 읽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1979년 여름 저는 혼자서 이스라엘을 방문하였고, 성경에 나오는 유명 순례지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룹 투어를 모집하는 광고가 욥바로 가는 문 주변에 여기 저기 붙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내원도 없이 혼자가 여행하는 것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순례지는 물론 순례자들을 관찰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나라는 비탈진 마을 아래에는 나사렛이 있었는데, 그곳에 규모가 커 보이는 성모 영보성당이 있는데, 거기엔 우리나라 가톨릭에서 기증한 한글로 된 주기도문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두 분의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로 윗마을 가나에서 사온 포도주를 들고, 성당 주변을 다니는 사제복을 입은 신부님께 성만찬을 하는 바람에 마침내 술에 취한 것입니다. 성지순례에서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요단강 하류 <알마그타스>에서는 여러 명의 한국인 순례자들이 한국인 목사에 의해 세례 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지순례에 비기독교인이 갔을 리는 없을 테고, 이미 세례를 받은 교인이 요단 강물로 세례식을 하고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재세례를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차제에 요단강의 세례 터에 대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구가 주장하는 <까스르 엘 야후드>와 요르단이 주장하는 <알마그타스>와 논쟁을 벌였는데, 최종 결론은 요르단 지역인 <알마그타스>의 세례 터를 유네스코가 2015713일에 세례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습니다. 사실 그곳에 흐르는 요단강폭은 불과 10여 미터 밖에 되지 않으며, 논쟁이 된 세례 터들 사이의 거리도 수 미터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가나의 혼례식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기적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고, 물이 포도주가 된 그 위대한 변화를 가장 쉬운 말로 설명했던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가나의 혼례식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포도주가 동이 났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혼례식은 초청된 사람만이 입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모든 피로연 잔치는 계획되고 준비된 상태였는데, 동이 날 수가 없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다른 음식과는 달리 포도주만은 계산이 불가능했을 수 있습니다. 고주망탱이가 되도록 마시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과방/果房을 감독하는 연회장에게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우리 주님의 모친 마리아는 이 문제를 주님께 귀띔해 주었고, 주님은 정결례로 사용하는 항아리 6통에 물을 가득 붓게 하시고, 그 다음에 그것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게 하여, 맛있는 포도주를 가지고 남은 잔치를 잘 치렀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어떻습니까? 살다보면 이런 난처한 일들이 우리들 삶에는 참 많습니다. 그럴 경우 오늘 본문에서처럼,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도 있고, 지혜를 발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여신도회 임원 6명을 오찬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70년도 시절 서양 집을 한 번도 가본 일 없던 여신도회원들은 궁금해 하는 두어 명의 다른 회원들을 데리고 갔더랍니다. 주인 것 까지 7덩이의 스테이크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커피와 쿠키를 대접하고 말았더랍니다. 우리나라 주부였다면, 그럴 경우 기왕 끓인 소고기 무 국에 소금 한 줌 더 넣고 물을 한 바가지 넣어 끓여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훗날 영국의 계관시인 바이런은 케임브리지 대학 종교학 시험에서, 가나의 혼인장치에 대한 의미를 진술하라는 물음에,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그 얼굴이 붉어졌도다.”라는 유명한 답안을 작성해서 높은 학점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주인을 만나기만 하면 만사형통한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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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5(2025. 1. 6. 월요일).

시편 103:6-8.

찬송 5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인 짐 콜린스(James C. "Jim" Collins, III, 1958125~ )실패했을 때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성공했을 때는 창문 밖을 바라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책임을 따질 때는 거울에서, 칭찬을 따질 때는 창문 밖에서 그 대상을 찾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동안은 거울보기를 게을리 했는데, 여기 저기 거울을 둬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15-21)”을 읽었습니다. 오늘 16일은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은 주님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뜻으로, 아프리카와 동방 교회가 지키던 예수님의 탄생절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회의 절기들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절기를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제도와 신학을 확립해갔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초대 기독교회는 동방기독교회 뿐 아니라 서방 기독교회에서도 4세기까지는 주현절을 지킬 정도로 중요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렇듯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더욱 강조하게 된 주현절은 교회력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 셈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42:1-4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주현절의 중심점을 매우 잘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표제어를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라고 붙였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일꾼을 소개하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주시고, 마음에 드셔서 뽑으셨다고 선발 배경을 설명까지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일꾼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을 받으셔서, 뭇 민족을 바른 인생 길을 펴 줄 것이라고 하며, 둘째는 큰 소리도 전혀 치지 않아 성품이 부드러우시며, 셋째는 부러진 갈대나 깜빡거리는 등잔불의 심지를 잘라버리지 않으시고, 넷째는 어떤 경우에도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바른 인생 길을 펴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을 세울 때 반드시 참고하면 좋을 그런 내용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구절만을 강조해 왔는데, 이사야는 첫 번째 덕목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신 것과, 부드러운 성품을 둘째 덕목으로 꼽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덕목의 목표는 바른 인생 길을 펴는 것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힘써 해야 할 일이란 이 세상의 뭇 민족들을 바른 인생 길을 펴 주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 찬 세상에서, 바른 인생 길을 펴 주시려고 일꾼을 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희망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분명 암담하기만 한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다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억울한 한 일도 많이 당하는 사람들,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답답함을 얼마나 더 참고 바라봐야 하느냐고 항의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제가 묵고 있는 해운대 강사 숙소를 찾아서 정반대에 위치한 괴정동에서 시각 장애우 제자 한 분이 약속한 시간보다 많이 늦게 도착했을 때 제가 물었습니다. 왜 늦었느냐고. 택시를 탔는데도 그리되었다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짐작하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몇 바퀴 더 돌아서 왔는데, 억울하지 않느냐고 되물었을 때, 그렇게 해서라도 필요한 곳에 잘 사용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도 더 불의한 처우를 받아야 하는 장애인을 등쳐먹는 멀쩡한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들이 나서야 할 차례입니다. 바른 인생 길을 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고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 지도자 만이 아니라, 사회 지도자들도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들임을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많은 세상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른 인생 길이 펴져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34.

시편 103:3-5.

찬송 405, 444, 47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수우족 인디언의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2, 성탄절후 둘째 주일의 구약 열왕기상 3:4-15을 본문으로 일천 번제의 정신을 따라 살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기도에 대한 일화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였습니다. 그밖에 모세의 기도, 사울의 기도, 다윗의 기도, 솔로몬의 기도 등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도들은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 왕에게 하나님은 꿈속에 나타나셨습니다(4-5a).

간절한 마음은 낮과 밤 구분 없이 삶에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일천 번제란 일천 번씩 드린 제사가 아니라, 일천 마리 제물을 번제로 드렸다고 말입니다(대하 1:6). 어느 교우가 875번제 예물이라며 헌금을 드린 것을 알고,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분의 대답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를 모범으로 삼아서 875번째 헌금을 드린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대단히 정성스러운 예물이라고 답한 후, 잘못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공로주의가 될 수 있으며,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일 일천 번을 예물을 드린다고 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29개월을 꼬박 예물을 드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가끔 드린다면 10년도 걸릴지 50년이 걸릴지 모를 것이며, 그걸 세다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왕이니까 할 수 있는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자, 무엇이든 구하면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5b-9).

가장 현명한 신앙인이란 누구일까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도 포함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기도자로 엎드렸습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진정성이 있었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감사했고(6), 둘째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습니다(7). 셋째 지도자로써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9). 솔로몬의 기도는 한 순간의 짧은 생각이나 감상적인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천 번제를 드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생각하고 숙고했던 기도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지혜나 인격은 어떤 한 순간의 깨우침이나,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통해서 뿐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오랜 고독한 기도의 시간이 가르쳐준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기도의 환경은 가난과 질병과 싸우는 보통 사람은 물론 지도자에게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겠습니다.

 

일천 번제의 정신은 행복한 삶(장수, 부귀, 지혜)을 살게 해 주십니다(10-15).

일천 번제의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서 살려는 마음입니다. 누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행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도 하고 묵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 인간의 생각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의 문제는 욕심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십계명에서 열 번째 계명이 욕심을 갖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에서는 탐욕을 금하라고 합니다. 지나친 욕심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가지려는 욕심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하는 욕심을 기를 것을 권고합니다.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르치는 내용이고 주님이 보여주신 삶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33(2025. 1. 4. 토요일).

시편 102:26-28.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다윗 왕이 반지 세공사를 불러 "날 위한 반지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큰 전쟁에서 이겨 환호할 때도 교만하지 않게 하며,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반지 세공사는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으나, 새겨 넣을 글귀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현명하기로 소문난 왕자 솔로몬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때 솔로몬 왕자가 알려준 글귀가 바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이었다 한다. 훗날 이 말의 출처는 유대 경전 주석서인 미드라시/ מִדְרָשׁ이거나 또는 페르시아 우화설이라 한다.

 

2, “믿음의 사람 모세의 특징(23-31)”을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일 것입니다. 이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모세를 주목할 수 있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삶을 살필 때, 우리는 그의 기구한 삶의 자리를 함께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간략하게 그의 삶의 배경을 살피면, 그는 매우 혹독한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모든 유대의 사내아이는 태어나는 즉시 죽임을 당해야 하는 무서운 법령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모친 요게벳과 누이 미리암의 도움이 없었다면 태어나자마자 곧 바로 죽어 흙에 묻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석 달 동안을 집에서 키웠고,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되자, 어린 모세를 나일강변 갈대밭에 숨겨두고, 매일 그 핏덩이를 지켰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귀부인들이 목욕하러 오는 지점에 모세를 숨겨두고 지키던 가운데, 애급 왕 바로의 딸의 눈에 띄어 양자로 왕궁에서 살게 되었고, 특히 누이 미리암은 유모를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친 어머니 요게벳을 유모로 채용하도록 소개합니다(2:1-10). 모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노예로 살아가는 동족들의 처참한 현실에 마음 아파 하다가, 억울하게 고난을 겪는 것을 목격하고 애급 사람을 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으나 발각되어 자기 민족 히브리인들에게 비난을 받고 도망을 쳤는데,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게 됩니다(2:11-25). 그때부터 모세는 허허벌판에서 떨기나무가 불에 타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을 명령 받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십계명을 비롯해서 많은 율법과 성전과 제사 등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민족의 지도자로 살 것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꾼을 삼으실 때, 그 사람의 삶의 자리를 통해서 선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의지나 계획이 우리들 인간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깨닫게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당신이 일꾼으로 삼을 사람에게 아무런 막힘없이 순탄대로를 걸어가도록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은 꼬이고 뒤틀리고 먹먹하게 하는 역사의 고달픈 길을 걷게 하셨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태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서, 출애굽의 과정들에서 직면하게 되는 심각한 위기들이 우리들 신앙인들의 가슴을 두렵고 불안하게 할 뿐 아니라, 절망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세의 일생을 살피다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그 역시 짊어져야 할 멍에는 언제나 무겁고 힘겨우며 절망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 확신하는 대도 불구하고, 너무도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인생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마치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연상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비롯해서 그의 조상 아브라함 그리고 훗날 영웅 대접을 받는 다윗 왕에 이르기까지, 이런 절망의 과정을 겪게 하시는 것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과정이 선택코스가 아니라 필수코스라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 중에는 하나님의 일꾼 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필수코스 앞에서 주저앉지 말아야 할 이유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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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2(2025. 1. 3. 금요일).

시편 102:26-28.

찬송 16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기성 시인은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다운 삶>이라는 시집을 냈다. 지나온 날보다 남은 날이 더 짧은 인류와 지구에 보내는 간절하고 숭고한 메시지를 담은 시집.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바탕으로, 시대정신과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담았다. 시인은 진실은 사라지고 허위가 일상화되어 사기, 파벌 싸움, 살인, 전쟁이 난무하는 현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우리가 아름다운 현재와 미래를 위해 가져야 할 정신과 철학을 자연과 일상 에피소드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그가 보내는 80여 편의 시에 담긴 메시지에 공감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자.

 

2, “믿음의 사람들의 죽음이해(13-22)”을 읽었습니다. 어제 묵상했던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에녹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자신들의 믿음을 의지하며 죽었습니다. 그것을 성경 기자는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거한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본향을 향해가는 노정/路程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땅에서의 삶과 그리고 그 끝인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通過儀禮, rite of passage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였는가를 살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살아가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브라함과 요셉의 죽음이해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종의 믿음의 시험을 받은 사람이라고 본문은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무려 100살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백 살에 얻은 아들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듣습니다(22:1-14).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아들이삭이 죽을죄를 지어서 그 형벌로 죽게 되었다고 하면 마음은 아프지만 체념해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단 하나의 이유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고 나옵니다(22:1-2).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저는 우리들 인간의 죽음 앞에서 우리들이 흔히 고백하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황망/慌忙하다.”는 말입니다. 황당하고 허무하다 등의 감정을 표현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뜻은 바쁘거나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상황에서 쓰이는 것이 올바른 사용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음에 임하는 본인이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어떻든 아브라함은 황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따라서 행동하기로 작정합니다. 사흘 길을 가는 동안 내내 이 무슨 저주스러운 일인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해 왔는데, 그 하나님으로부터 완전 배반을 당하고 말았구나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약속이 과연 믿을만한 것인가? 믿어도 될 것인가? 하고 의심을 불러올 질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이 대목에서 놀라운 진리에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것은 19절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가는 불멸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주어야 하고, 그 다음에 부활한 새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신앙을 아브라함은 가졌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죽음 저편을 내다보는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 다음 요셉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자녀들과 손자들에게 축복한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급을 떠날 것을 예언하고, 자신의 뼈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묻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요셉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며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꽃들이 만개할 것을 내다보았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이런 죽음이해가 절실할 때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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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1(2025. 1. 2. 목요일).

시편 102:23-25.

찬송 3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나를 강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이 남긴 명언입니다. 대부분의 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믿음의 실마리를 찾기 보다는, 절대적인 힘과 지혜의 원천인 하나님에게 믿음을 두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낙심하고 두려운 현실 앞에서도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믿음(1-12)”을 읽었습니다. 저는 재수 삼수를 고향 집에서 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다니던 고향교회에는 서울 의대를 다니는 교회 형을 비롯해서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를 다니는 중학교 동창도 있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이런저런 격려도 받았고, 용기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힘들게 공부했다는 얘기들을 들을 때는 한 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최종 목표지점이 가까이 있을 것이다는 희망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일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 자신의 몫으로 남겨져 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오늘의 본문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의 관심사는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오랫동안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나름 한 가지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첫 구절에서, 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강렬한 섬광과 같은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 때 이후로 저는 믿음은 희망하는 것의 실제 모습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는 증거자료라고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믿음은 먼 미래에 있는 희망사항을 현재의 상태로 가져다 놓아주는 실제모습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에는 대학마다 교복이라는 것을 입었는데, 믿음을 가진 저는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희망하는 대학의 교복을 입고 현재를 살아가는 제 모습을 상상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안개나 구름 같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희망하는 것을 현재의 자리에서 느끼고 누리고 기뻐하는 실제 현상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 속에서나마 느끼고 볼 수 있게 하는 실체라고 말입니다. 오늘 읽은 공동번역 성경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준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보증이나 확증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보상이고 기쁨이며 느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 믿음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벨이 가슴에 품었던 믿음은 가인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아벨의 예물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을 확신하고 드렸으며, 에녹은 죽음 저 편에 이르는 꿈을 현실 속에서 꾸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믿음은 다른 이웃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그의 현제의 삶에서 상상하였고,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의 명령 그 너머에는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을 꿈꿀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제 자신에게 투영해 보았습니다. 곤색 대학생 교복을 입고, 사각 모자를 쓰고, 두툼한 원서를 손에 들고 학교 교정을 거니는 제 모습을 말입니다. 이런 믿음의 환상 외에는 다른 아무 걱정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등록금이 얼마가 될 지라든지, 친척도 지인도 하나 없는 서울 어느 집에서 하숙을 할 것인지에 대한 복잡한 생각도 하나도 없이 말입니다. 대단한 믿음으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파스칼의 놀음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랬던 저를 하나님께서 대견하게 바라보셨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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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0(2025. 1. 1. 수요일).

시편 102:18-22.

찬송 45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자 미상의 복음가 가사를 올립니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이제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려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려네. 세상 죄길 버리고 생명 길을 찾았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려네.” 제목은 <주께서 내길 예비하셨네>였습니다.

 

2, 새해를 맞았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골 2:6-12, 우리가 맞은 한 해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바울 사도를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옥중에 있을 때 만나 바울 사도를 병간하였던 에바브라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에바브라는 바로 골로새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의 신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개념을 처음 대하는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나누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오늘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 역시도 바울 사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한 해,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들의 일생동안 살아갈 주제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주제를 가슴에 깊이 품고 묵상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에바브라를 통해서 소개받은 골로새 교회는 1세기 기독교회를 흔들고 있었던 이단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대체로 이 시기의 이단들이란 헬라 철학에 뿌리를 둔 이단으로(8) 그들의 중심 주제는 영지주의(Gnosticism)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문제는 영적인 지식의 결여에서 오는 것으로 자신들이 가르치는 영지/靈智를 받으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다 해결할 수 있다 가르쳤습니다. 또 다른 이단은 유대적 율법주의에 뿌리를 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유대적 할례 예찬론자들에게 참된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인 세례를 대비시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11-13). 길게 신학적인 진술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도는 새해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살아가는 일이라 말씀합니다. 그것을 사도는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6).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의 생각과 판단대로가 아니라, 주인이신 주님께 물어보고 허락받은 후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입니다. 예전의 머슴들이 그 주인에게 하듯 말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뿌리를 박고서 살아가자는 말입니다(7). 우리가 가진 믿음이란 매우 유동적입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믿음을 가지고 살 듯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반석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믿음에 뿌리를 박고 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가르침을 받은 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7). 사도는 다른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개념을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먹고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죽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나 신념이 흔들리는 가장 큰 약점은 우리의 닻이 그리스도 안에 정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나왔습니다만, 유명한 크리스천 도서가 있습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What would Jesus do?>라는 책입니다. 찰스 먼로 셸던(Charles Monroe Sheldon, 1857-1946)이 쓴 책으로 전통적인 교리 중심으로가 아니라, 현실에 맞게끔 적용 중심으로 많은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묵상하고 판단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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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29(2024. 12. 31. 화요일).

시편 102:15-17.

찬송 40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키스로 유명한 사례는 1979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에리히 호네커가 한 것이다. 브레즈네프는 동독 수립 3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했고, 연설을 마친 뒤 소련과 동독간 우애의 상징으로 동독 서기장 호네커에게 키스를 건넸다. 이로부터 10년 뒤인 1989년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과 입맞춤을 한다. 동독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으로 방문한 고르바초프는 변화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멸망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의 경고에도 개방 요구를 외면하다가 11일 만에 쫓겨나고 베를린 장벽도 무너졌다.

 

2, “화해의 임무(5:15-6:2)”을 읽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설교를 잘 하시는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나중에 그 분의 설교 내용을 연구(?)해 보니까 크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용어에 힘을 주시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요즘 말로하면 임팩트/impact한 강한 느낌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등 1세기 기독교회의 지도자들의 설교를 읽을 때는 글로만 읽어도 강한 임팩트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성경만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전율을 느낄만한 감동을 받곤 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런 범주에 들어간다 하겠습니다. 당시의 크리스천을 두고서 세상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라고 혹평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미쳤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고, 우리가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온전한 것입니다.”(13) 라고 일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5) 고 힘주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화해의 임무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 말자는 말씀을 합니다. 까닭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힙니다. 더 이상 낡은 것에 얽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고, 또 우리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키는 임무를 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케 하셨으니, 이제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를 화해케 하시는 과제를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오래 전에 들은 얘기인데, 화해는 한 판 격렬하게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 제삼자가 끼어들어 중재하는 일인데,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고, 뒤로 물러설 기미가 조금도 없지만, 제삼자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유감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화를 낼 이유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제삼자의 말은 잠자코 들어줄 수도 있고, 그래서 불같은 성미도 차분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남의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본전도 찾기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괜히 잘못하다가는 한 대 얻어맞기까지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해자가 되는 일, 종재자로 끼어드는 일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들 크리스천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주목해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죄를 모르시는 분이셨고, 죄와 상관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을 대신해서, 당신이 죄를 자처하셨고, 온 몸으로 죄를 뒤집어쓰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되었다 말씀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화해의 대사가 되는 일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리석은 악마노릇을 하는 이를 위해서 화해의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3, 무안 공항의 새떼로 인한 사고는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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