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09(2024. 12. 11. 수요일).

시편 97:4-6.

찬송 21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는 미국의 소설가로 194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남긴 명언 중에는 "동시대 사람들이나 선대 사람들보다 더 나아지려고 애쓰지 마세요.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세요." 는 말이 있는데, 타인을 비교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어제를 비교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 성장이며 행복일 것이다.

 

2. “인사와 주의 심판(1-12)”을 읽었습니다. 다사다난 했던 2024년도에 교회와 사회에 희망과 위로를 줬던 성경 구절로 로마서 828절을 꼽았는데,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짧은 한 구절도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점이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전제가 되는 앞 구절은 쏙 빼놓고 뒷 구절만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느냐고 말입니다. 요삼서 2절을 그렇게 읽더니만, 아직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라는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아니면 조금 더 양보해서 그 다음 구절, “네 영혼이 잘됨 같이라는 구절만이라도 깊이 묵상했더라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말하기는 힘들 텐데 말입니다. 우리나라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주의를 주기도 했습니다만, 성경구절은 대체로 첫 도입부를 잘 읽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대체로 고린도후서나 디모데후서 등 후서는 전서에서 다 해명하지 못한 내용을 잇고 싶어서 기록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살후는 오히려 살전보다 먼저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신약개론을 배울 때, 이를 뒷받침하는 6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대부분이 평신도로 신학적 논쟁이 무익하기에 현행 정경 순서에 따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우들이 겪은 여러 가지 박해를 두고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괴롭힌 자들을 하나님께서 괴롭게 하시고, 그들은 사도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이를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영원히 멸망하리라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합하도록, 그들의 믿음의 열매가 주님의 능력으로 완성되기를 빌겠다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신만만하게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면 손드세요.”라고 부흥사들이 말할 때, 옆 사람을 두리번거리며 손을 드는 광경이 지금도 진행 중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가진 믿음이 굉장히 대단한 힘이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겠다 말씀합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가진 믿음이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힘에 대해서 자신만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한번 생각해 보시면 잘 압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호언장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비겁하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을 붙잡아 주실 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도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이 모진 박해를 잘 감당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심각한 시련 앞에서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당신의 능력으로 완성해 주실 것을 기도하겠다 약속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08(2024. 12. 10. 화요일).

시편 97:1-3.

찬송 7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네덜란드의 격언에 비에 젖은 자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비가 내릴 땐 비에 젖을까봐 처마 밑이나 우산 속으로 피하지만, 어쩔 수 없이 비에 젖어버렸다면, 오히려 비 맞는 일이 걱정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당당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느 늦여름에 고교시절의 친구 한 녀석이 겨울철 검정 코드를 입고 비에 맞고 학교에 오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인생에 쏟아질 비를 남김없이 다 맞으려는 자세는 매우 당당해 보였었다.

 

2. “권면과 끝 인사(12-28)”을 읽었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 하나하나를 다 묵상하기에는 벅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으로 권면한 16-18절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우리보다는 교회 생활을 오래 전부터 해 온 나라에서는 찬송가에 예배에서 사용되는 여러 가지 내용들이 편집되어 있습니다. 가령 우리 찬송가에도 앞 뒤 첫 장과 마지막 장에 신앙고백인 사도 신조(신경)과 주기도 그리고 십계명이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십계명의 말미에 십계명을 요약한 듯한 예수님의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22:37-40). 그러니까 첫째 되는 계명이 신 6:5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과, 둘째 되는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 19:18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계명(혹은 율법)의 요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엄격하고 무미건조한 법조문으로만 생각했던 십계명이 사실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따뜻하고 달콤한 중심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더 이상 십계명을 마땅히 해야 할 것들과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엄격한 조문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주제로 이해해 보자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저는 하나님의 뜻으로 구체적으로 적시한 구절, 항상 기뻐하는 일,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 그리고 모든 일에서 감사하는 일이야말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항상 기뻐한다는 것에 대해서 역정을 내며 항변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기뻐할 것도 없는데 어떻게 기뻐하느냐는 식으로 반문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어제는 팔십을 눈앞에 둔 일곱 대학 동창들이 모처럼 오찬을 한 후 성공회 대주교좌가 있는 성당 커피숍에서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많은 고비를 넘어온 친구들이었는데, 마지막 고백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는 것이었습니다. 가난을 버티다 못해 일시 후퇴하는 심정으로 군대에 가거나 잠깐 동안의 생계형 일터로 갔던 이야기며, 뒤늦게 손주들에게 몸과 마음을 다 내주며 행복해 하는 바보(?) 할배들의 푼수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모습에서 기쁨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홉 개의 시련과 역경을 뛰어넘고도 남을 단 하나의 재롱과 사랑스러움으로 충분히 기뻐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진짜 기쁨이란 수많은 역경 속에서 찾아오는 한 순간의 사랑과 감사라고 말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그만큼 우리들 삶에는 짊어지고 가기엔 벅차고 벅찬 고갯길이 수도 없이 펼쳐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그 많은 두려움과 염려와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희망이 보인다고 말입니다. 마지막 권면은 범사/凡事에 감사하라는 말씀인데, 크고 작은 일만이 아니라,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부딪히는 일들에서 감사를 찾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욕심 많은 우리들이 저절로 감사한 마음이 되기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원망스럽고 답답한 삶일지라도, 진심으로 찾아보면 놀랍게도 감사할 일이 많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기다려 보면 우리가 힘들어했던 것들이 다 감사로 변해버린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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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07(2024. 12. 9. 월요일).

시편 96:12-13.

찬송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이름 짓기도 유행이다. 한 때 그리고 지금도 비전(Vision)교회가 많이 생겼다. 아마도 큰 꿈을 가진 교회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비전이라는 말에는 환영/幻影이라는 뜻도 있다.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착각으로 생긴 그림자라는 뜻이다. 실제로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왜곡된 모습이 비치기도 한다.

 

2. “주의 재림2(1-11)”을 읽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나 목적을 물으면 대부분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 대답은 너무 황당한 것일 수 있습니다.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준비하고 힘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대답이 공허하게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그 질문을 받게 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이 없이는 천국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꿈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않는다고 하면, 천국은 다른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당장,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데, 그것은 어떻게 설명하느냐고 물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중심 주제임에는 분명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말이 함의/含意하는 뜻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이 종말의 날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멋대로 살다가 어느 날, 이른바 종말의 날이 가까워오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 말로하면 시한부 종말론자들 처럼 정확하게 언제 어디로 주님께서 오실지를 알고 싶어 하는 그 마음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주님이 오시는 것은 도둑처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춤추고 정신없이 세상일에 취해서 살아갈 때 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래서 낮에 속한 사람처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쓰고 살아가자고 말입니다.

    차제에 우리는 종말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적어도 세 가지 종말을 말씀하는데, 첫째는 임박한 종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각자가 육신의 죽음을 맞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의 죽음이 어디쯤 그리고 언제 올지를 모르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임박한 종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을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종말관은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실현된 종말입니다. 실현되었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천국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물론 완전한 천국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보람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은 잠깐 씩 느끼는 것일 수 있으니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가 맛보고 싶은 삶이기도 합니다. 주로 요한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누가복음서에서 말씀하는 미래적 종말입니다. 곧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날로, 최후의 심판을 하시러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우주적 파국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미래적 종말에 관해서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임박한 종말이 가장 중요한 이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세상을 떠나가게 된다면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도, 신실한 믿음을 가질 기회도, 이웃을 사랑할 기회도 없으니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에 취해서 멋대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충실히 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06.

시편 96:10-11.

찬송 2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렐프 왈도 에머슨(1803518824)은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난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인데, 그는 상처 입은 굴이 진주를 만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실패나 상처에도 절망하지 말라는 뜻으로, 우리들 삶이 고단하고 상처투성이일 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힘을 내서 살게 되면 엄청난 기쁨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련과 역경은 피할 수 없다는 것과, 그래도 잘 견디고 이겨내다 보면 분명히 행복한 날이 올 것을 기대하라는 말이었습니다.

 

2. 대림절 둘째주일의 복음서 눅 3:1-14을 본문으로 무엇을 어떻게 회개할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을 꼽으라면 저는 세례자 요한을 꼽고 싶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일등공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의 중요성과 그 내용과 방법을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 준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사야의 예언에서 찾았습니다(4-5, 40:3).

하나님의 구원이란 주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는 일인데,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이 낮아지며, 굽은 것은 곧아지고, 험한 길은 평탄해 지며,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어로 바꿔보면, 모든 차별과 불평등은 제 자리를 찾게 되고, 교만한 사람들은 겸손해 지며, 잘못된 것들은 바르게 펴지고, 험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은 안전해 질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르게 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세상을 위해서 힘써 해야 할 일들이 이런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들이 동참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차별과 불평등으로부터, 교만과 잘못된 제도와 관행들로부터, 그리고 불안하고 두려운 것들로부터, 우리들이 힘써 해야 할 역할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힘들지만 가슴 벅찬 일들입니다.

 

요한은 회개의 삶을 시작하고 실천하라고 명령합니다(6-9).

예전에도 지금처럼 입으로만 회개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회개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삶에서 돌아서는 행동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회개라는 말을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뉘우치는 마음의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거짓과 불의의 시궁창에서 맑고 푸른 하늘을 향해 돌아서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거짓과 사악함에서 과감하게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모든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첫 걸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고 새로움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성도들은 교회당 입구의 세례대에서 성수를 찍어 이마에 성호를 긋습니다. “나는 세례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회개의 삶이란 소극적이거나 억지로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라고 말씀합니다(10-14).

사람들은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의 삶이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옛 생활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때로는 소극적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너무 오랜 세월동안 옛 생활에 길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죄에 죽고 의에 살기로 작정한 이상, 자발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도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누어가질 것을 권고합니다. 속옷 두벌 가진 자는 없는 사람에게 한 벌을 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몇 년 동안 교도소 후원위원으로 활동한 일이 있었는데,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진실 된 마음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령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길들어버린 습관을 끊어버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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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05(2024. 12. 7. 토요일).

시편 96:7-9.

찬송 1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가 있습니다. 빽 파이프 연주를 앞세우고 교기를 든 학생들이 강당에 들어서면서 1859년에 창립된 명문 웰튼 고등학교의 새 학기 개강식이 시작됩니다. 이 학교 출신인 키팅 선생이 영어 교사로 부임합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서게 하는 등, 파격적인 수업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등 다양한 눈을 뜨게 합니다. 그때 나온 유명한 대사가 '카르페 디엠(Carpe Diem)'입니다. 카르페 디엠은 라틴어로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바꿀 수 없고, 미래가 중요하지만 그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며, 나머지는 신에게 맡기는 것 뿐이라고 말합니다.

 

2. “주님의 재림(13-18)”을 읽었습니다. 라틴어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인데, 보다 적극적으로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르페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중요해졌는지 모릅니다. 죽음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종말의 문제에 대해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의식이 다양했습니다. 사실 신앙인이든 아니든 간에 죽음 이후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현세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궁금해 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갖는 것 못지않게 그것을 마음속에서 밖으로 꺼내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지레 그 생각을 꺼내기를 포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좀 더 적극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사도는 이 점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말관을 들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첫째는 죽음 뒤의 삶에 대해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 후에는 절망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삶이 끝나면 하늘나라에 준비된 생명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둘째 죽음은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신앙인들 중에서도 먼저 죽는 이들에 대해서 믿음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삶의 시간의 양이 다를 뿐 모두 죽을 수 밖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자들이 주님 앞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없습니다. 가끔 내가 본 천국이니하면서 죽었다가 천국에 다녀온 듯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다 거짓말쟁이들입니다. 그들이 경험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평소의 상상력이 꿈속에 나타났던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천국 여행을 했다는 분들은 모두 다 그런 범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개인적인 경험들을 존중해 주는 분위기를 틈타서 온갖 돌팔이들이 교회 안에 기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 계시록을 가지고 밥벌이하는 목사들이 많은데,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계시록은 그 첫머리에 하나님께 감춰져 있던 계시를 눈으로 그리고 소리로 들려주셔서 알게 된 내용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계시록을 환상의 책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가 꿈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들었을 때, 그것을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물며 타인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계시록은 대체로 평탄한 시대배경이 아니라, 큰 시련과 역경으로 힘든 배경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박해나 굶주림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을 때가 그 배경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저는 최고의 성경학자인 루터나 칼뱅이 계시록 주석을 포기한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멋대로 해석할 가능성 때문입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가 생각했던 Memento MoriCarpe Diem을 성찰하는 게 좋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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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04(2024. 12. 6. 금요일).

시편 96:4-6.

찬송 49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클라우드 페페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거와 같다. 당신이 계속 페달을 밟는 한, 당신은 넘어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피곤하면 페달을 밟을 수 없게 되고, 그래서 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젊은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그 자전거에 의지해서 달려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신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1-12)”을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교회는 장로교회였는데, 입교(견신례)를 하려면 교리문답을 공부해야 했는데, 그 첫 머리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니라. 고 답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교육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했는데, 아마도 오늘 본문의 정신을 참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지 우리에게서 배웠고, 또 배운 대로 살고 있습니다.”(1)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 강령들이 조목조목 언급되고 있습니다. 음행을 피하고, 각각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기 아내의 몸을 대하고, 이교도처럼 욕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까닭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기독교회가 금욕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살 것과,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손으로 일해서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올바른 도덕적인 삶이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삶일 것입니다.

    제가 설교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린 듯 살고 있을 때, 자나 깨나 유명 인사의 설교집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드는 설교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설교를 듣겠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까? 라는 의문도 생겼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면 주석을 잘 해야 하고, 그래서 성경 언어를 제대로 풀어서 오늘의 상황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하고, 거기에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을 잘 살펴서 그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뜻을 찾아야 하는데, 도무지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갖춘 설교는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천 페이지가 넘는 설교사전이라는 것을 구입했는데, 다양한 설교들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이 도덕적인 설교였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70년대 초기에는 우리 교회가 주로 공자님의 말씀을 설교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었고,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관과 철학을 주로 소개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많이 거리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반성을 하고, 이번에는 정반대로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설교에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이른바 성경본문의 중심 주제를 파악하는 것과 함께,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로 선포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청중의 필요를 채우는 설교 작성법>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경 본문의 중심점을 설교의 중심점으로 옮기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 뒤로는 성경을 건성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한 단락을 읽은 후에 거기까지의 중심점이 무엇인가를 요약하는 훈련에 길들였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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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03(2024. 12. 5. 목요일).

시편 96:1-3.

찬송 8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꿈을 꾸는 줄 알았습니다. 지난밤은 새하얗게 밤을 새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153분이 걸린 시간이었다고 아나운서가 말했을 때, 21:1-14절이 떠올랐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을 찾았을 땐, 모두 옛 생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어부출신 베드로와 나다나엘 요한과 마가는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 주님이 몇 마리나 잡았소?”라고 물었을 때, 한 마디로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오른 편에 던지게 했고,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153이 시간으로 전해왔습니다. 비상계엄 선포에서 비상계엄 해제 결의에 걸린 시간이라고 말입니다.

 

2. “데살로니가를 다시 가보고 싶어 하는 바울(1-13)”을 읽었습니다. 이 구절 안에 궁금하게 하는 동사가 나오는데, 개역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이 동일하게 참고 견딘다는 동사 스테고(στεγω)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참다못하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1, 5). 무엇을 참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합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와 그 일행들은 아테네에 남아 있기로 하고 동역자 디모데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습니다만, 바울 사도가 자신의 마음처럼 달려가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또 다른 사정 때문에 디모데를 보내게 된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가령 적당한 사례가 될지 모르지만, 제가 중학생일 때 전도한 친구가 있는데, 시골 교회의 장로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목사인 제게 자주 불평을 늘어놓곤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 지도자들과는 너무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그런 모습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몇 번 그런 얘기를 나누다가 보니까, 한번 찾아가서 손을 잡고 감사와 격려를 하고 싶은데, 선뜻 그리지 못하는 제 마음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에게는 큰 위로와 기쁨을 준 교회입니다. 아마도 빌립보에서 겪은 시련을 감싸주고, 복음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말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칭찬하고 자랑해 왔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랑스러운 사람들에게서도 부실한 면이 없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책망보다는 격려와 칭찬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평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 내외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믿음 때문에 겪는 시련과 역경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하고 있지만(8), 보통 신자들이라면 신앙으로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느냐며 불평도 하고 응석도 부릴 수 있겠지만, 말없이 묵묵히 잘 참고 견디는 것이 너무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밤낮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편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장래에 그들을 찾아보러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여러분도 서로를 사랑하고 또 모든 사람들도 사랑하기를 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기를 빌고 있습니다. 어제는 한 십여 년감 연락이 없었던 옛 부산 교우가 전화를 해왔습니다. 저보다는 두 살 위라고 했습니다. 104살이신 친정모친을 병간하다가 재작년에 하늘나라로 보내고, 이제는 아들 효도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까 앞으로 맞을 일보다는 지나간 옛 일들이 그립다고 했습니다. 힘들게 살았던 70년대에 부산 YWCA에서 봉사를 많이 하던 분이셨습니다. 팔십하고도 두 해나 더 사셨으니,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다며, 오직 아름다웠던 시절의 고생하던 일들이 생각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대학생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 남다르게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당신 살림살이도 어려웠는데, 시간을 내어 밤새도록 영어책을 녹음해서 전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드린 인사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자랑스럽게 서는 날을 기다리자고 덧붙였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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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02(2024. 12. 4. 수요일).

시편 95:9-10.

찬송 40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변증법의 대가인 철학자 게오르규 헤겔(1770.8-1831.11)변화 자체만큼 영속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쉬지 않고 생겨나는 변화에 우리는 늘 피곤해 하고 또 흔들리기도 하지만, 이런 변화가 없다면 우리 인생은 지루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 없을지 모른다. 변화에 적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부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삶을 흥미롭게 맞이하듯, 익숙한 것과 낯선 것들 사이를 지나갈 때 두려워하지 말고, 전혀 새로운 희망을 기대해 볼 일이 아닐까 싶다.

 

2.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2(13-16)”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기를 원하다(17-2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제가 은퇴를 하면서 세운 계획 중에는 장애인을 위한 설교자가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델성서 강습회에서 만난 장애인 지도 목사님들과 상의를 했는데, 다행히 시각장애인 교회 목사님 한 분과 청각장애인 교회 목사님 한 분이 손을 드셔서, 그분들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앞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을 수 없는 그래서 말까지 할 수 없게 된 장애인 교우들에 대해서 한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자고 다짐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또는 소위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가운데, 제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산재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시각장애인일 경우는 사물이나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정상인과는 너무 다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령 어느 봄 소풍 때 깊고도 넓도다 깊고 넓은 하나님 사랑이란 소창을 하게 되었는데, 깊다는 것과 넓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노래는 깊고도 라고 할 때는 오른 팔을 위로 왼팔을 아래로 쫘악 벌려야 하고, 넓도다 는 두 팔을 서로 양쪽으로 좍 벌리는 동작을 하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는 저를 찾아온 대학생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저에게 오래 전에 가르쳐 준 명곡을 다시 한 번 배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나 조르는 통에 식당에 있는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당에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살아온 세상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 가를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제가 하는 말이 얼마나 이해가 될까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 같은 정상인들이 흔히 잘못하는 일들이 아닐까 하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도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 주었다는 점을 든 것입니다. 우리 정상인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는 그 장점이 때로는 장벽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그런 장벽을 거뜬히 뛰어넘어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 소주라는 곳에서 한 주간 성경을 지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회 시간이 저녁이었는데, 한가한 낮 시간에는 교우들의 초청으로 그룹으로 식사를 하기도 하고, 가정 방문을 하기도 하였는데, 참으로 놀라운 장면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그곳 교우들은 주로 소망교회와 광림교회 출신들이 많이 있었는데, 목사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전문가라는 수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사라는 존경심을 찾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목사의 학교 배경에 대해서 따지는 것이 많았고, 키가 크고 몸이 부대하다는 등 신체적인 흠결도 대화의 소재가 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사도가 지적하는 것은, 유대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같은 동족을 박해한 것처럼, 유대 나라 밖 이방인 크리스천들 역시 자신들의 동족에게서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개인적으로 어떤 흠결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라는 인물을 믿음의 주로 믿는다는 것 때문에 고난의 삶을 당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인에게도 전해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는 순서일 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우주적이었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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