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05(2024. 12. 7. 토요일).

시편 96:7-9.

찬송 1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가 있습니다. 빽 파이프 연주를 앞세우고 교기를 든 학생들이 강당에 들어서면서 1859년에 창립된 명문 웰튼 고등학교의 새 학기 개강식이 시작됩니다. 이 학교 출신인 키팅 선생이 영어 교사로 부임합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서게 하는 등, 파격적인 수업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등 다양한 눈을 뜨게 합니다. 그때 나온 유명한 대사가 '카르페 디엠(Carpe Diem)'입니다. 카르페 디엠은 라틴어로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바꿀 수 없고, 미래가 중요하지만 그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며, 나머지는 신에게 맡기는 것 뿐이라고 말합니다.

 

2. “주님의 재림(13-18)”을 읽었습니다. 라틴어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인데, 보다 적극적으로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르페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중요해졌는지 모릅니다. 죽음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종말의 문제에 대해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의식이 다양했습니다. 사실 신앙인이든 아니든 간에 죽음 이후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현세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궁금해 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갖는 것 못지않게 그것을 마음속에서 밖으로 꺼내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지레 그 생각을 꺼내기를 포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좀 더 적극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사도는 이 점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말관을 들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첫째는 죽음 뒤의 삶에 대해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 후에는 절망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삶이 끝나면 하늘나라에 준비된 생명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둘째 죽음은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신앙인들 중에서도 먼저 죽는 이들에 대해서 믿음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삶의 시간의 양이 다를 뿐 모두 죽을 수 밖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자들이 주님 앞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없습니다. 가끔 내가 본 천국이니하면서 죽었다가 천국에 다녀온 듯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다 거짓말쟁이들입니다. 그들이 경험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평소의 상상력이 꿈속에 나타났던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천국 여행을 했다는 분들은 모두 다 그런 범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개인적인 경험들을 존중해 주는 분위기를 틈타서 온갖 돌팔이들이 교회 안에 기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 계시록을 가지고 밥벌이하는 목사들이 많은데,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계시록은 그 첫머리에 하나님께 감춰져 있던 계시를 눈으로 그리고 소리로 들려주셔서 알게 된 내용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계시록을 환상의 책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가 꿈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들었을 때, 그것을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물며 타인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계시록은 대체로 평탄한 시대배경이 아니라, 큰 시련과 역경으로 힘든 배경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박해나 굶주림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을 때가 그 배경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저는 최고의 성경학자인 루터나 칼뱅이 계시록 주석을 포기한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멋대로 해석할 가능성 때문입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가 생각했던 Memento MoriCarpe Diem을 성찰하는 게 좋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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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04(2024. 12. 6. 금요일).

시편 96:4-6.

찬송 49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클라우드 페페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거와 같다. 당신이 계속 페달을 밟는 한, 당신은 넘어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피곤하면 페달을 밟을 수 없게 되고, 그래서 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젊은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그 자전거에 의지해서 달려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신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1-12)”을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교회는 장로교회였는데, 입교(견신례)를 하려면 교리문답을 공부해야 했는데, 그 첫 머리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니라. 고 답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교육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했는데, 아마도 오늘 본문의 정신을 참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지 우리에게서 배웠고, 또 배운 대로 살고 있습니다.”(1)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 강령들이 조목조목 언급되고 있습니다. 음행을 피하고, 각각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기 아내의 몸을 대하고, 이교도처럼 욕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까닭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기독교회가 금욕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살 것과,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손으로 일해서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올바른 도덕적인 삶이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삶일 것입니다.

    제가 설교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린 듯 살고 있을 때, 자나 깨나 유명 인사의 설교집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드는 설교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설교를 듣겠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까? 라는 의문도 생겼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면 주석을 잘 해야 하고, 그래서 성경 언어를 제대로 풀어서 오늘의 상황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하고, 거기에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을 잘 살펴서 그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뜻을 찾아야 하는데, 도무지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갖춘 설교는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천 페이지가 넘는 설교사전이라는 것을 구입했는데, 다양한 설교들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이 도덕적인 설교였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70년대 초기에는 우리 교회가 주로 공자님의 말씀을 설교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었고,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관과 철학을 주로 소개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많이 거리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반성을 하고, 이번에는 정반대로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설교에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이른바 성경본문의 중심 주제를 파악하는 것과 함께,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로 선포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청중의 필요를 채우는 설교 작성법>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경 본문의 중심점을 설교의 중심점으로 옮기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 뒤로는 성경을 건성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한 단락을 읽은 후에 거기까지의 중심점이 무엇인가를 요약하는 훈련에 길들였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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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03(2024. 12. 5. 목요일).

시편 96:1-3.

찬송 8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꿈을 꾸는 줄 알았습니다. 지난밤은 새하얗게 밤을 새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153분이 걸린 시간이었다고 아나운서가 말했을 때, 21:1-14절이 떠올랐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을 찾았을 땐, 모두 옛 생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어부출신 베드로와 나다나엘 요한과 마가는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 주님이 몇 마리나 잡았소?”라고 물었을 때, 한 마디로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오른 편에 던지게 했고,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153이 시간으로 전해왔습니다. 비상계엄 선포에서 비상계엄 해제 결의에 걸린 시간이라고 말입니다.

 

2. “데살로니가를 다시 가보고 싶어 하는 바울(1-13)”을 읽었습니다. 이 구절 안에 궁금하게 하는 동사가 나오는데, 개역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이 동일하게 참고 견딘다는 동사 스테고(στεγω)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참다못하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1, 5). 무엇을 참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합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와 그 일행들은 아테네에 남아 있기로 하고 동역자 디모데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습니다만, 바울 사도가 자신의 마음처럼 달려가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또 다른 사정 때문에 디모데를 보내게 된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가령 적당한 사례가 될지 모르지만, 제가 중학생일 때 전도한 친구가 있는데, 시골 교회의 장로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목사인 제게 자주 불평을 늘어놓곤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 지도자들과는 너무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그런 모습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몇 번 그런 얘기를 나누다가 보니까, 한번 찾아가서 손을 잡고 감사와 격려를 하고 싶은데, 선뜻 그리지 못하는 제 마음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에게는 큰 위로와 기쁨을 준 교회입니다. 아마도 빌립보에서 겪은 시련을 감싸주고, 복음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말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칭찬하고 자랑해 왔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랑스러운 사람들에게서도 부실한 면이 없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책망보다는 격려와 칭찬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평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 내외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믿음 때문에 겪는 시련과 역경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하고 있지만(8), 보통 신자들이라면 신앙으로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느냐며 불평도 하고 응석도 부릴 수 있겠지만, 말없이 묵묵히 잘 참고 견디는 것이 너무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밤낮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편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장래에 그들을 찾아보러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여러분도 서로를 사랑하고 또 모든 사람들도 사랑하기를 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기를 빌고 있습니다. 어제는 한 십여 년감 연락이 없었던 옛 부산 교우가 전화를 해왔습니다. 저보다는 두 살 위라고 했습니다. 104살이신 친정모친을 병간하다가 재작년에 하늘나라로 보내고, 이제는 아들 효도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까 앞으로 맞을 일보다는 지나간 옛 일들이 그립다고 했습니다. 힘들게 살았던 70년대에 부산 YWCA에서 봉사를 많이 하던 분이셨습니다. 팔십하고도 두 해나 더 사셨으니,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다며, 오직 아름다웠던 시절의 고생하던 일들이 생각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대학생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 남다르게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당신 살림살이도 어려웠는데, 시간을 내어 밤새도록 영어책을 녹음해서 전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드린 인사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자랑스럽게 서는 날을 기다리자고 덧붙였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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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02(2024. 12. 4. 수요일).

시편 95:9-10.

찬송 40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변증법의 대가인 철학자 게오르규 헤겔(1770.8-1831.11)변화 자체만큼 영속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쉬지 않고 생겨나는 변화에 우리는 늘 피곤해 하고 또 흔들리기도 하지만, 이런 변화가 없다면 우리 인생은 지루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 없을지 모른다. 변화에 적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부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삶을 흥미롭게 맞이하듯, 익숙한 것과 낯선 것들 사이를 지나갈 때 두려워하지 말고, 전혀 새로운 희망을 기대해 볼 일이 아닐까 싶다.

 

2.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2(13-16)”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기를 원하다(17-2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제가 은퇴를 하면서 세운 계획 중에는 장애인을 위한 설교자가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델성서 강습회에서 만난 장애인 지도 목사님들과 상의를 했는데, 다행히 시각장애인 교회 목사님 한 분과 청각장애인 교회 목사님 한 분이 손을 드셔서, 그분들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앞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을 수 없는 그래서 말까지 할 수 없게 된 장애인 교우들에 대해서 한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자고 다짐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또는 소위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가운데, 제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산재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시각장애인일 경우는 사물이나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정상인과는 너무 다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령 어느 봄 소풍 때 깊고도 넓도다 깊고 넓은 하나님 사랑이란 소창을 하게 되었는데, 깊다는 것과 넓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노래는 깊고도 라고 할 때는 오른 팔을 위로 왼팔을 아래로 쫘악 벌려야 하고, 넓도다 는 두 팔을 서로 양쪽으로 좍 벌리는 동작을 하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는 저를 찾아온 대학생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저에게 오래 전에 가르쳐 준 명곡을 다시 한 번 배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나 조르는 통에 식당에 있는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당에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살아온 세상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 가를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제가 하는 말이 얼마나 이해가 될까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 같은 정상인들이 흔히 잘못하는 일들이 아닐까 하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도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 주었다는 점을 든 것입니다. 우리 정상인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는 그 장점이 때로는 장벽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그런 장벽을 거뜬히 뛰어넘어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 소주라는 곳에서 한 주간 성경을 지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회 시간이 저녁이었는데, 한가한 낮 시간에는 교우들의 초청으로 그룹으로 식사를 하기도 하고, 가정 방문을 하기도 하였는데, 참으로 놀라운 장면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그곳 교우들은 주로 소망교회와 광림교회 출신들이 많이 있었는데, 목사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전문가라는 수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사라는 존경심을 찾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목사의 학교 배경에 대해서 따지는 것이 많았고, 키가 크고 몸이 부대하다는 등 신체적인 흠결도 대화의 소재가 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사도가 지적하는 것은, 유대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같은 동족을 박해한 것처럼, 유대 나라 밖 이방인 크리스천들 역시 자신들의 동족에게서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개인적으로 어떤 흠결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라는 인물을 믿음의 주로 믿는다는 것 때문에 고난의 삶을 당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인에게도 전해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는 순서일 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우주적이었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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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01(2024. 12. 2. 화요일).

시편 95:7-8.

찬송 50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100달러 화폐 속에 있는 얼굴의 주인공 벤자민 프랭클린(1706.1-1790.4)은 수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그 중에 하나는 돈이면 무엇이든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인데,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건강, 성공, 출세 등 모든 다른 것들도 대입해 볼 수 있다.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 말이다.

 

2.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1-12)”을 읽었습니다. 바울의 선교여행 기록을 읽을 때는 사도행전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상호 보완적인 내용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첫 관문이었던 빌립보에서의 선교는 문자 그대로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매로 치고 손과 발을 쇠사슬로 묶어서 빌립보 감옥에 가두는 등의 경험이 고스란히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6:11-40).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곳 빌립보의 유력인사가 미친 여인을 점쟁이로 고용 돈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를 불쌍히 여긴 바울사도가 그 여인은 고쳐주자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되어 수입이 끊어진 때문에 바울을 고소해서 시련을 당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선행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돈벌이 수단을 끊어버린 악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런 몸을 가지고 또 다시 찾아간 곳이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어떻게 전도사역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빌립보에서 사도 일행이 겪은 시련에 대해서 보고 겸 해명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1-4).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는 약 100마일(160km) 떨어진 곳으로, 바울 사도의 행적이 데살로니가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솔직하게 빌립보에서 겪은 시련에 대해서 솔직하게 보고합니다.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엇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의 복음 선교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두 번째는 사도의 선교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5-6), 세 번째는 사도의 참된 권위는 명령과 책망으로가 아니라, 유모가 자녀를 기름과 같다고 말입니다(7-8), 넷째는 복음 전파를 이유로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힘쓴 것은 그들이 증인이라고 말입니다(9-10), 마지막으로 선교의 최종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히 사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제가 39주간 중국과 몽골 그리고 베트남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성경 세미나를 지도하였는데, 여름에는 의료 미용 안경 한의학 등 봉사자들과 함께 참여해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고 합니다만, 사실은 저는 고용된 선교사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비용은 한 독지가가 전액을 부담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한 다음에 정산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나름 많은 선교지 지도자들이 한국에 와서 한 단계 높은 신학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재정지원이 없었다면 단 한걸음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선교활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의 선교활동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온 삶을 헌신하며 선교에 임할 수 있었을까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지는 타종교와 타문화라는 것 때문에 항상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제가 목격한 경우에는 우리 기독교회가 타종교와 타문화에 대해서 공격적이고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교지에 조용히 적응해가기 보다는 땅밟기를 한다든지, 마귀 소굴이라며 사원에 불을 지르라고 한다든지 해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선교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진지한 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참여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 선교지의 사람들과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강하고 전투적인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인격적이고 희생적이며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는 않으면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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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00(2024. 12. 2. 월요일).

시편 95:4-6.

찬송 20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제2대 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1735-1826)는 다음 명언을 남겼습니다. “슬픔은 인간에게 진지한 생각의 습관을 가지게 하고, 이해력을 감화하여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기쁨과 환희에 비하면 슬픔이란 매우 부정적이고 어두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부정적인 현상들이 우리를 생각 깊은 사람이 되게 하고, 분별력과 마음을 유연하게 하는 큰 선물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택해야 할 것이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일지 모르겠습니다.

 

2. 대림절 첫 주간에 데살로니가 전서를 읽게 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서신은 신약성서 27권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은 신약 개론을 배울 때 첫 번째로 강조하는 내용인데,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 감옥에서 큰 고생을 겪은 후 데살로니가로 이동을 했고, 당시 교회가 겪었던 박해와 여러 가지 논쟁에도 불구하고 잘 감당하는 모습이 사도를 감동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전도하던 기간에 데살로니가 전서룰 기록해서 보낸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심정을 다음 두 마디 말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도할 때마다 그들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나님 앞에서 기억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줄여 말하면,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게 되고, 기도할 때마다 그들의 삶을 기억한다고 말입니다. 마치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연인을 대하는 것 같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칭찬을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다는 것과(4), 둘째는 환란 속에서도 믿음의 본을 보였다는 점(6-7), 셋째는 믿음의 소문이 온 아가야에 퍼졌다는 점(8)이었습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누군들 칭찬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오늘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행한 칭찬과 비길 수 있는 게 있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택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은 물론 믿음의 본까지 되었다는 것 역시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칭찬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가진 믿음이 온 지역 사회에 두루 퍼졌다는 것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보다는 두 살 위인 고향 교회 형님이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신이 대구 모 부대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 연병장에 수천 명의 군인들이 정훈교육을 받는다 해서 나갔다 합니다. 그런데 그때 강사로 오신 한 시골학교 교장선생님이 예화를 하고 있었는데, 감동적인 얘기여서 귀기우려 들어보니까 그 얘기의 주인공이 저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고등학교 공부를 하겠다고 타지에 가서 구걸하듯 고생고생해서 공부를 마치더니, 고등학교 공부 10년 만에 서울 유수의 신학대학에 들어가 1등을 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참고서 한 권 살 돈이 없는 가난뱅이 학생이 크게 출세를 한 때문이라 들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의 교장선생님은 저보다는 훨씬 더 유명한 대학에 입학한 제자들도 많았지만, 저를 칭찬한 것은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훗날 당신 가족들에게 자신의 교육이 실패하지 않은 첫 번째 이유로 목사를 길러낸 것을 드셨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가 되기 위해서 꾸준히 한 길을 걸어간 제가 미더워보이셨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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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99.

시편 95:1-3.

찬송 29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격언 중에 지금 사랑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손에 닿는 곳에 있는 것을 사랑하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가르침이다. 이는 포기도 아니고 현실과의 타협도 아니라, 오히려 성숙함을 의미한다. 너무 높고 멀리 있는 목표보다, 지금 누리는 삶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가르침이다.

 

2. 누가의 해를 여는 대림절 첫째 주일 사도서간문 살전 3:9-13을 본문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만, 사랑 역시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스럽기 때문에 하는 사랑과, 사랑하고 싶지 않은데도 사랑해야 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기원은 하나님께로 부터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요일 4:7).

요한 1서 기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말씀합니다(요일 4:7).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할 때 가장 적절한 용어가 은총과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은총의 사랑이고, 동시에 긍휼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은총이라는 사랑을 베푸시는데, 이 은총이란 말은 넘치고 넘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이 용어를 카리스(Χαρις)라고 부릅니다. 또한 하나님은 긍휼이라는 사랑을 하시는데, 이 긍휼이라는 말은 끝도 없이 기다려주시고 참아 주시는 사랑을 뜻합니다. 신약에서 긍휼이라는 말을 엘레오스(Ελεος)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사랑에 빗대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은총과 긍휼이라는 사랑으로 하나님께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쁨 못지않게 아픔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11-12a).

많은 목사들이 결혼식 주례사를 하는데, 주례사의 대부분의 주제가 사랑을 강조하곤 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한 면만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목사 초년기에 부산 YWCA에서 주관하는 규수학당에 한 3년 동안 강사로 나갔었는데, 그때 제게 주어진 주제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사랑은 밝고 아름다운 사랑만이 아니라, 오히려 어둡고 아픈 사랑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연애할 때의 사랑은 꾸민 앞면을 보여주니까 사랑할 수 있으나, 시간과 함께 허물과 약점이 보이는 뒷면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은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라 했고,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쓸 사랑이란 아름답게 꾸민 앞면만이 아니라, 허물투성이인 뒷면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삶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12b-13).

크리스천이란 어떤 사람이냐고 가끔 질문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전염된 사람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영리 정부기구 라는 단체가 있습니다(NGO).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굿 네이버스>, <월드비전>,

<기아대책>, 그리고 <홀트아동복지회> 등이 국내에서 결성한 단체이고, <유니세프>, <국경없는 의사회>, <세이브더 칠드런> 같은 외국에서 생겨난 것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기구들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일에 힘쓰고 있는 기구들로 1년에 수천억 원의 후원금을 모아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도 네 곳에 월 3만원을 후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NGO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한 사람들로, 사랑의 실천이 자신들의 신앙의 현주소라 믿으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보다 더 가치 있고 보람있는 삶은 없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우슬초목사님 시무)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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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98(2024. 11. 30. 토요일).

시편 94:21-23.

찬송 34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겸손'이란 어떤 것일까.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겸손'이란 단어는 '아나브'이다. '아나브'라는 단어는 겸손함, 온유함, 온화함이란 뜻을 갖고 있다. 민수기 123절 말씀은 모세의 성품을 표현한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여기서 '온유함''아나브'이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모세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라고 이 '아나브''겸손'으로 번역해 놓았다. '아나브'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사용된 책은 바로 잠언서다. 우리가 알다시피 잠언서는 겸손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는 책이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모세는 무능력하고 다혈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나브'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모세가 항상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와 죄악된 행동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또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 이스라엘의 죄악을 사해주기를 간절히 구했던 것이다. 김만준 목사 / 덕수교회

 

2. 왕이신 그리스도의 주간 여섯째 주제는 그리스도의 겸손(1:1-11)”을 읽었습니다. 겸손이라는 주제는 낮은 사람의 경우는 비굴함을 느끼게 하지만, 높은 사람의 경우에는 속이 꽉 들어찬 수박과 같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겸손이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훈련되어 온 듯한 생활 습관과 같으나, 건강하고 성공했다는 사람들에게서는 매우 보기 힘들고 기대조차도 하기 힘든 모습일지 모르겠습니다. 엊그제는 지인 장로님과 긴 통화를 하였는데, 주변 지인들의 근황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모이는 자리에서 예외없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유명 인사들과의 친밀한 교제 등을 늘어놓아 주변을 주눅들게 하던 분이, 요즘은 무슨 병으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며 초대를 거절하더라는 얘기도 들어 있었습니다. 117년 만의 기록적인 폭설에 친척 중에는 농장 비닐 하우스가 내려앉았다고 한숨을 쉬는 얘기가 들려오더니, 바깥 출입을 절대 삼가라며 낙상은 노인들의 치명적인 명줄 당기는 사고라며 전화를 몇 통 받았는데, 참으로 소박하고 따뜻한 소시민의 모습이었습니다.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 내놓을 자랑거리가 없으니, 약함에 길들여진 일상들이 겸손에 빗대어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겸손의 삶을 사셨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작당이라도 하듯, 만삭인 임산부가 누울 방 한칸을 내어주지 않아서, 마굿간의 말들과 함께 누웠다가 아이를 낳아 구유에 뉘였다는 얘기는, 우리가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얘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오신 분이시니, 서른 세 해 짧은 삶을 사시면서도, 땀 냄새 가득 풍기는 시골 농부와 어부 또는 양치기 돼지치기들과 어울려 먹고 자고 하신 삶을 살았으나, 누구도 그리고 아무도 이를 겸손이라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보다 더 적절한 겸손의 예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겸손은 힘겨운 인생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병들어 힘들다고, 짊어진 멍에가 너무 벅차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겸손이라는 것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겸손의 모습을 다 긁어 모아 본 듯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신 분이 당신의 높은 신분과 자격을 다 내려놓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일이며, 그것도 가장 무력한 인간들과 같은 존재가 되신 일, 당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일을 꼽으신 것입니다. 그랬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리스도를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올리시고, 뛰어난 이름을 주셨는데, 하늘 위 땅 아래 모든 존재들이 입을 모아 그의 이름을 주님이라고 찬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주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겸손은 일부러 낮은체 하거나, 잘하면서도 잘못하는 체 하는 그런 유의 꾸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솔직해 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말하는 것이며, 몸이 아프면 아프다가 말하는 일이며,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이 힘이 없다고, 죽을 것 같다고, 너무 외롭고 슬프다고 말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위로와 희망 그리고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런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를 남김없이 보여주시는 때문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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