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17(2024. 12. 19. 목요일).

시편 99:6-7.

찬송 48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낮은 단 하나뿐. 그러나 밝은 세상의 빛은 사라진다. 저무는 태양과 함께.

마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가슴은 단 하나뿐. 그러나 한평생의 빛은 사라진다. 사랑이 다할 때면.”

프랜시스 윌리엄 버어딜런의 <밤은 천개의 눈을>이라는 시이다.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단 하나의 태양이 저물면 어둠에 묻히고 말 것이다. 마음엔 천개의 눈이 있다지만, 사랑이 다하면 한 평생의 빛은 사라진다. 몽골에서는 지금도 쏟아질 듯한 별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별 빛 속에서도 기쁨과 희망은 묻혀 있던 추억이 있을 뿐이다.

 

2,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2(10b-16)”을 읽었습니다. 베드로 전 후서는 어느 특정 지역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편지가 아니라, 초대 기독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 서신으로, 특히 베드로 후서에는 알다.” 혹은 지식이라는 단어가 16번이나 나오는 등, 이를 두고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배워서 알게 된 지식이 아니라, 영적이며 그리스도에게 자라가며 얻게 된 경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18). 여전히 초대교회를 흔들고 있었던 문제는 이단적인 주장을 하는 거짓 지도자들로, 그들은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는 거친 말투에 자신들이 어떤 특권이라도 가지고 있는 양, 독설을 퍼붓는 일에 이력이 난 사람들로, “본래 잡혀 죽기 위해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독설가가 광화문 광장을 주름잡고 있는데 그들의 모습에서 기시감/旣視感, Déjà vu을 주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들은 자기들의 불의의 값으로 벌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13). 우리 한국 교회는 자정 능력을 상실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축재와 온갖 거짓말과 방탕한 삶을 사는 지도자들에 대해서 교회가 이를 책벌하지 못하고, 마침내 세속 권력에 교회의 시시비비를 맡기는 형국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세속 재판의 판결에 맡기고서도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으면, 반발하고 엉터리 신앙을 내세우며 자리를 보전하고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도 이런 현상은 일찍부터 비일비재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당시의 문제점을 몇 가지로 그 죄상을 밝히고 있는 데, 첫째는 무위도식/無爲徒食 하는 것을 낙으로 생각하는 것과 둘째는 방탕한 짓을 즐기고 흠과 티를 남기는 자들이며, 셋째는 음욕이 가득한 눈으로 끊임없이 죄를 짓고 허황된 사람들을 유혹하며 넷째는 탐욕에 깊이 빠진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에 알맞은 사람들이라고 규정합니다. 바른 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간 자들이라며, 그 옛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발락 왕에게 고용된 점술가 발람이 하나님의 명령, 저주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하자, 처음에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었다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발락에게로 나아갔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려 하자, 그를 태운 나귀가 천사의 칼을 보고 피하자, 발람이 나귀를 세 번씩이나 채찍으로 저주의 길을 가도록 하였던 고사를 인용하며(22-24), 미친 거짓 예언자들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 선지자나 거짓 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파멸의 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쓴 소리를 하는 어른들이 점점 사라지고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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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16(2024. 12. 18. 수요일).

시편 99:4-5.

찬송 41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즐거운 봄>이라는 시에서 즐거운 봄이 찾아와 온갖 꽃들이 피어날 때에, 그때 내 가슴속에는 사랑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네. 즐거운 봄이 찾아와 온갖 새들이 노래할 때에, 그리운 사람의 손목을 잡고 불타는 이 심정을 호소했음네.” 봄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싹틀 때, 세상이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밖이 아니라 안에서.

 

2,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1-10a)”을 읽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거짓 혹은 가짜라는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잘 분간치 못하고 있습니다. 1968년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친구>라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하늘과 물이 구별되지 않고, 삶과 죽음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혼돈의 시대, 혼란의 시대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사를 보면, 이런 혼돈과 혼란의 모습은 계속 되풀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참과 거짓의 싸움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혼돈은 교회 밖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 후서를 쓴 기자는 이런 거짓 예언자들이 하게 될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첫째는 이단을 몰래 끌어들일 것이며, 둘째는 주님을 부인하고 셋째는 방종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넷째는 탐욕을 채우려고 성도들을 속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벌하셨는지를 열거합니다. 죄지은 천사들을 물 없는 웅덩이에 던져 넣어 심판 때까지 가두시고, 노아 때는 홍수로 가차 없이 벌하시고, 하나님을 배반한 소돔과 고모라를 단죄하여 잿더미로 만드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정의를 부르짖고 하나님께 순종한 노아의 여덟 가족을 살리신 일이며, 착한 롯을 구해내신 일들을 회상케 해 주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친구들의 모임에 나가보면, 건강 다음으로 많이 얘기하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팔십 줄에 들어서면서도 아프지만 않으면 일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곤 하였습니다. 젊은 날에는 교사나 목사다 하면서 물질을 우습게 생각하며 호기롭게 살던 이들도, 어린 손주들에게 아직 살아있다는 기개를 보이려면 수중에 돈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일지 모르겠습니다. 유명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던 분이 물질 앞에서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일 때, 너무 참담한 인생무상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평생을 대학에서 가르쳐 왔으니 연금도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후서 기자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말합니다. 은퇴를 한 주변인들의 말들을 종합하면, 은퇴한 순간에 여러 가지가 단절되는데, 첫 번째는 전화가 현저하게 줄어든다고 했고, 둘째는 이웃들이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 했습니다. 셋째는 가족들도 예전과는 달리 소원하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원인들이 물질적 힘이 떨어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모든 현상들이 다 현실이고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문제의 제일 원인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진단합니다. 전화가 끊기고 무시를 당하고 가족들의 시선이 차가운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자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현상을 선 순환하도록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첫째는 책을 읽는 좋은 기회로 삼자고 제안합니다. 요즘 저는 몇 권의 책을 여기 저기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읽는데 재미가 쏠쏠합니다. 둘째는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거들떠보지 않았던 조카들의 사는 얘기며, 힘들게 살아가는 지인들의 얘기에 마음을 기우리는 것입니다. 꼭 물질적인 관심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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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15(2024. 12. 17. 화요일).

시편 99:1-3.

찬송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명문가 레미 드 구르몽(1858-1915)의 대표적인 시는 <낙엽>인데,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사랑하는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낙엽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다.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쓸쓸하기 때문이리라.

 

2, “그리스도의 영광과 예언의 말씀(16-21)”을 읽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의 지도자들을 제외하고 일반 성도들은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부활사건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허황되고 신화처럼 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지도자들은 이 점에 대해서 매우 진솔한 설명과 확신을 갖게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목회 초년 기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학생 신우회의 초청을 받고 3일 동안 신앙 강좌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게 주어진 주제는 확신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그렇게 진땀을 흘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 신우회를 지도하는 지도목사님이 저를 강권해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개회 예배를 드릴 때 기도하는 학생이 이번 집회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신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부터 저는 시쳇말로 졸아들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확신이라는 것은 말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말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확신은 고사하고, 겨자씨만 한 믿음까지도 그것을 가지고 있다 말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먼저 성경의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 그것부터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결국 믿음이란 ~~~~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저는 베델성서연구 라는 프로그램을 지도하고 있어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내용이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성경을 꿰뚫고 있는 통전적인/integrity 의미를 구속사/救贖史라고 정리하였습니다. 까닭은 창 3장 인류의 타락이래로, 인간은 더욱 더 깊은 죄의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속죄의 제물이 되셔서,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길로 받아주신다고 말입니다.

    여기 까지는 우리가 교회에서 흔하게 들어오던 얘기로 들렸을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든 확신이든 그것은 객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주관적인 것임을 소개하고는, 그래서 다양한 종교와 신앙이 생길 수 있는 것을 그 예시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믿음은 사람의 지혜나 의지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2:8)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하고 천국에 들어가기까지는 계속 그 믿음은 흔들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단단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성령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파스칼의 도박(Pascal’s gambling)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래도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얻을 수 있는 것은 +무한대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먼저 예수의 얘기들은 꾸며낸 신화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 증거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영광스럽고 위대함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건을 들었습니다. 바로 변모산의 경험이었습니다(17:1-13).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을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언하는 말씀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까닭은 믿고 구원에 이르기 위함입니다(20:30-31). 성령의 도우심으로 어떤 이들은 믿음을 갖기도 하고, 확신에 찰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14(2024. 12. 16. 월요일).

시편 98:7-9.

찬송 43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 성공회 사제인 찰스 킹슬리는 제 갈 길을 아는 사람에게 세상은 길을 비켜준다.”고 했다. 우리는 자기 앞에 있는 것이 빛인지 그림자인지 모를 때가 있다. 심지어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할 때가 있다. <중략> 당신이 지금 그 자리에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당신 삶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리 인생은 끊임없이 이것에 대한 물음과 이유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292.

 

2, “하나님의 부르심(1-11)”을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자부심은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이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選民意識에 대해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우리나라의 정변을 보면서 국민에게 선출되었다는 선출직 지도자와 임명직 지도자의 차이는 남달랐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셨다는 소명의식/召命意識에 대해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이 어떻게 다른가 라든지, 어느 것이 상위에 속하느냐는 것은 우리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민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높고 깊은 뜻에 의해서 실행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란, 세상에서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썩을 정욕 때문이 아니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목표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4). 그리고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힘쓸 일들을 조목조목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 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믿음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덕을 추가할 것을 말씀하고, 그 외에 지식과 절제 그리고 인내와 경건,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와 사랑을 더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점입니다.

    누가 복음서 기자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는 중간기/interim period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중간기의 특성은 교회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시대라고 말입니다. 긴 설명은 할 수 없습니다만, 신앙의 어머니 격인 교회에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훈련을 받는 기간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모든 크리스천의 삶의 목표는 세상의 정욕에 취해 썩어질 삶이 아니라, 거룩한/구별된 성품을 갖는 삶에 들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행동강령으로 믿음과 덕, 지식과 절제, 인애와 경건, 그리고 형제우애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힘써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별거하려고 수도사가 되거나, 좀 더 가혹한 생활규칙을 따르는 퀘이커 교도가 되거나 떼제/Taize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단기간이긴 하지만,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800km-40) 길에 참여하는 것도 그런 구체적인 실천 강령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다른 몸짓으로 살아보려는 운동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며, 이를 악용한 사이비들도 독버섯처럼 일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어찌되었건 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은 장려해야 할 것이나, 오히려 세상 한 복판에서 빛과 소금으로(5:13-16) 살려는 의지를 키우는 게 더 중요한 과제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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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13.

시편 98:4-6.

찬송 10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에는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그런가하면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기운을 북돋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의 기운을 북돋는 일이다.”는 말을 남겼다. 요즘은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인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닮아간다 하겠다. 밝은 사람 곁에는 밝은 기운을, 우울한 사람 곁에는 우울함이 전해진다는 뜻이다.

 

2. 대림절 셋째 주일의 구약 습 3:14-20을 본문으로 그 때 우리가 부를 노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스바냐는 아홉 번째 소선지자로 유다가 바벨론이 70년 동안 유폐되기 전에 활동했습니다. 다윗 왕조를 계승한 요시야 왕이 31년간 통치하던 번영의 시기에 활동했습니다(주전 639-608). 그는 나라의 멸망과 수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세상에 만연한 죄악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예언합니다(8).

하나님의 심판에서 열외는 없다는 것이 성경의 중심 주제입니다. 죄악의 크기는 있겠으나 모든 민족이 죄를 범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죄악을 우상숭배라고 일축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상숭배라는 죄목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상숭배를 최악의 죄목으로 지정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배반한 것이고, 어리석게도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평생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키운 부모를 학대하고 내쫓는 자식에게 연을 끊고 법원에 고발한 부모의 얘기를 읽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배반했다고 하면,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사회는 우상숭배자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이런 죄와 죽음에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는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용서받은 기쁨을 노래 부를 날이 오겠다 예언하고 있습니다(14-16).

죄의 용서를 받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몇 년 전 치과 진료를 받으러 종로 5가의 한 병원을 갔는데, 예약 시간이 다 되어 마음이 조급해서 주차 된 한 외제차의 옆모서리를 긁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메모를 남기고 치료 후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별의 별 생각이 다 스쳤는데, 몇 백만 원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고, 혹시 메모지가 바람에 날려 뺑소니 신고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등 이었습니다. 주차장 관리인에게 차주와 연락을 부탁했고, 점잖은 신사분이 나왔습니다. 그리곤 자동차의 흠을 보더니, “괜찮습니다. 스프레이로 해결될 것 같습니다.” 용서의 기쁨을 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훗날 누군가에 의해서 제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면, 상대를 힘들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바냐처럼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감격적 삶은 구원자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계심을 믿을 때입니다(17-20).

제가 흑룡강성 오지로 선교여행을 갔을 때, 그곳 교우들은 오지에 사는 백성들은 정부의 시책이 잘 전달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다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시정을 요구해도 그 지방 토후나 관리들이 고집을 부리면 바꿀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태평양의 한 작은 섬에서는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숨어사는 패잔병들이 있었다 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이 들려왔지만, 여전히 듣지도 믿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입니까? 구원의 소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찌되는 것입니까? 기쁨도 감격도 없는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제외되는 것입니까? 천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 복음을 들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믿음을 순전히 선물이라 고백했습니다(2:8). 그래서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12(2024. 12. 14. 토요일).

시편 98:1-3.

찬송 58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W. 영안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반복된 생활이다. 좋은 일을 반복하면 좋은 인생을, 나쁜 일을 반복하면 불행한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대표적인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지 모른다.

 

2. “게으름에 대한 경고(6-15)”을 읽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가장 안타까운 사람을 꼽으라면 게으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게으름이란 하늘 일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으름은 자신에게 주어진 천금 같은 인생이라는 기회를 아무런 생각 없이(?) 낭비해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크리스천들 가운데도 적지 않다는 말입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교양과목으로 <보건학>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의과대학 교수님이 가르치셨습니다. 위생관념이나 건강에 관한 상식 등을 기대하고 수업에 들어갔는데, 인생 계획표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까 일일 계획표, 주간 계획표, 한 달 계획표, 일 년 계획표, 그리고 일생 계획표를 작성하는 연습이 전부였습니다. 지난 달 5월에 졸업 50주년 재상봉 동문의 날에 옛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총장께서 제공하는 식사와 학교 행사에 참석, 학교에 발전기금을 증정하는 순서를 가졌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동문 문고>를 책으로 발간했을 때, 저도 서 너 페이지 학창시절의 일화를 소개하는 글을 썼을 때, 이 보건학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일일 계획표는 시간 단위로 매우 촘촘하게 하루 계획을 하는 것에 비해서 일생 계획표는 아주 큼직한 제목들이 들어가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목을 배우면서 저는 허울만 좋은 계획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계획을 세우려고 노력했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에게 생긴 긍정적인 습관이 새벽형 인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대학시절에는 자정까지 책상을 지키는 것이었고, 새벽 4시에 기상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되어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는 것에 신체적으로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이 일일 계획표가 가르친 효과였고, 꼼꼼히 일기를 쓰는 것도 포함되었습니다.

    사도는 우리들 크리스천이 게을러서는 안 될 이유를 너무도 자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서라 말씀합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며 자신의 빵을 달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어린 사람이거나 병들었거나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은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질 수는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취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속담까지 소개합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은 일하지 않는 대신에 남의 일에 참견하는 못된 버릇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사람이 하는 일이란 긁어 부스럼을 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둘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행을 하자고 썼습니다. 가끔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수단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타종교에서는 이런 엉터리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크리스천들 역시 그런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죄인인 때문입니다. 선행으로 도토리 키 재기를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선행에 힘써야 합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모습이고, 더 나아가서 천국에서의 삶이 그런 모습인 때문입니다. 저는 마음이 여유로울 만 한 사람인데도 매우 인색한 사람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선한 일에 매우 소극적인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국경없는 의사회의 눈물겨운 활동 소식을 들을 때, 정기적인 후원은 못하더라도 단 한번쯤은 후원금을 쾌척할 수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은 생각 통장> 갖기를 권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사람다운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11(2024. 12. 13. 금요일).

시편 97:10-12.

찬송 9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단테는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해낸다. 나에게는 오직 전진뿐이다. 이런 신념을 지니는 습관이 목표를 달성시킨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니까 인간은 단단한 마음먹기에 따라서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격려를 하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는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욕망이 있는데, 긍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희망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2. “구원에 대한 감사(2:13-17)”기도의 부탁(3:1-5)”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누구도 구원받을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재판정에 들어선 사람이 재판장의 선고를 들어야만 유무죄가 갈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나 심판의 저주를 알 수는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내용을 오늘 묵상에서 살필 수가 있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을 택하셔서 구원을 얻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해 주셨고, 진리를 믿게 하셨습니다.”(13) 그런데 이런 편지는 순전히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현재의 믿음을 보고서 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신뢰할 만한 선배 목사님께서 어느 신학대 교수의 이름을 거명하시며, 세브란스 병원에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며 기독교회의 신앙을 부인하며 별세했다 하셨습니다. 총칼 앞에서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하는 외부 압력에 굴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으로 자신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고 가르쳐왔던 신앙을 부인했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는 기독교의 신앙과는 무관한 채로 죽은 것이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이나,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인정하고 고백한다면, 앞으로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도우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들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가능하다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하면서도 진실 된 고백적인 삶이 뒤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 다른 말로하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일관된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자신의 의지나 노력 혹은 선행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오직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를 죄로부터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함없으신 사랑 곧 은혜와 긍휼의 사랑이 뒷받침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성경적 주장은, 인간은 잘못된 길로만 달려가는 존재로, 타락 이래로 인간이 해온 일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밖에는 달리 맞을 게 없는 절망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런 기독교의 구원을 얘기할 때는 사다리를 타고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야한다는 불교나 비롯한 일반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인간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구원관을 말하곤 합니다. 이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에는 너무도 무력하고 항상 죄 가운데 머물러 살 뿐이라고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사성 팔정도라는 것을 가르치는데, 이런 주장은 말로만 가능할 뿐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똑 바로 생각하고, 어떻게 똑 바로 말하며, 어떻게 똑 바로 살아갈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외에는 그런 놀라운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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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10(2024. 12. 12. 목요일).

시편 97:7-9.

찬송 58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덴마크의 동화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184512월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성냥팔이 소녀는 추운 겨울 날 거리에서 성냥을 팔면서, 따뜻한 집안의 풍경에 넋을 잃는다. 그 모습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슬퍼한다. 세상일들이 비슷하다. 나만 제외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찾아보면 나에게도 행복한 구석이 반드시 있다. 따뜻한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니 따뜻한 마음을 갖도록 기도할 일이다.

 

2.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1-12)”을 읽었습니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뒤편에는 가짜 예수의 묘가 있습니다. 학생들을 데리고 그곳 주변을 둘러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분명 한국인으로 33살에 애매한 병으로(?) 죽었는데, 평소 자신을 예수라고 불렀다 합니다. 비석은 오석으로 보통 비석보다는 조금 더 컸던 기억이 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가짜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니 말입니다. 누가 봐도 허무맹랑한 데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은,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옛날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던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싶어 한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회에 가짜 뉴스가 횡행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가짜 뉴스가 답답하기만 한 사람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때문이 아닐까요? 또 한 가지는 이런 현상을 틈타서 돈벌이가 되겠다 싶어 하는 장사꾼의 탈을 쓴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어느 시대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를 살피게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는 매우 슬프게도 장사꾼의 탈을 쓴 종교가들이었다고 사도는 밝힙니다. 저는 부산 목회시절에 부산시 교회 연합회가 주관하는 집회에서 이름을 대면 알만한 주강사로 온 신 아무개라는 사람이 자신은 예수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했노라고 너스레를 떠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고는 더 이상 이런 사람을 목사로 보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보다도 자신이 더 훌륭하다는 뜻으로 말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 열광하고,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따르는 것일 것입니다.

    거짓이라도 믿고 싶은 심정을 여러분은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도는 이런 사람들이 놀랍게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예배당 중앙에 십자가를 걸어두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요즘은 십자가도 걸지 않은 교회당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로 스크린을 내린 뒤 그 스크린에 목사의 얼굴을 크게 비추는 것이 미안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면 예수님, 하나님 행세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확연한 것은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들 중에서는 그런 사람이 전혀 찾을 수 없는데 비해서, 조금 교회당이 크다고 생각하는 교회의 목사님들에게서는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런 교회 중의 한 교회가 주일 예배실황을 송출하고 있었는데, 그 목사는 웃저고리도 벗고 노타이에 운동화까지 신고 부지런히 제단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거나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기물들은 거룩할 성/자를 붙이는데, 그래서 예배 인도자들은 정장을 하고 최대한 종의 자세로 예배를 섬기는 것이 전통이었는데 말입니다. 사도는 이런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거짓 종교가들은 자신을 신으로 섬기게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런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런 자들은 사탄의 힘에 붙들려 있는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하는 거짓 된 기적과 표징과 놀라운 일들에도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혼미한 마음을 주시어 거짓된 것을 믿도록 허락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불의와 거짓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의의 세력이 없다면 어떻게 진리를 찾아 나설 갈급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거짓은 오래 된 현상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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