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16(2024. 12. 18. 수요일).

시편 99:4-5.

찬송 41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즐거운 봄>이라는 시에서 즐거운 봄이 찾아와 온갖 꽃들이 피어날 때에, 그때 내 가슴속에는 사랑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네. 즐거운 봄이 찾아와 온갖 새들이 노래할 때에, 그리운 사람의 손목을 잡고 불타는 이 심정을 호소했음네.” 봄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싹틀 때, 세상이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밖이 아니라 안에서.

 

2,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1-10a)”을 읽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거짓 혹은 가짜라는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잘 분간치 못하고 있습니다. 1968년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친구>라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하늘과 물이 구별되지 않고, 삶과 죽음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혼돈의 시대, 혼란의 시대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사를 보면, 이런 혼돈과 혼란의 모습은 계속 되풀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참과 거짓의 싸움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혼돈은 교회 밖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 후서를 쓴 기자는 이런 거짓 예언자들이 하게 될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첫째는 이단을 몰래 끌어들일 것이며, 둘째는 주님을 부인하고 셋째는 방종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넷째는 탐욕을 채우려고 성도들을 속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벌하셨는지를 열거합니다. 죄지은 천사들을 물 없는 웅덩이에 던져 넣어 심판 때까지 가두시고, 노아 때는 홍수로 가차 없이 벌하시고, 하나님을 배반한 소돔과 고모라를 단죄하여 잿더미로 만드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정의를 부르짖고 하나님께 순종한 노아의 여덟 가족을 살리신 일이며, 착한 롯을 구해내신 일들을 회상케 해 주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친구들의 모임에 나가보면, 건강 다음으로 많이 얘기하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팔십 줄에 들어서면서도 아프지만 않으면 일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곤 하였습니다. 젊은 날에는 교사나 목사다 하면서 물질을 우습게 생각하며 호기롭게 살던 이들도, 어린 손주들에게 아직 살아있다는 기개를 보이려면 수중에 돈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일지 모르겠습니다. 유명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던 분이 물질 앞에서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일 때, 너무 참담한 인생무상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평생을 대학에서 가르쳐 왔으니 연금도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후서 기자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말합니다. 은퇴를 한 주변인들의 말들을 종합하면, 은퇴한 순간에 여러 가지가 단절되는데, 첫 번째는 전화가 현저하게 줄어든다고 했고, 둘째는 이웃들이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 했습니다. 셋째는 가족들도 예전과는 달리 소원하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원인들이 물질적 힘이 떨어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모든 현상들이 다 현실이고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문제의 제일 원인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진단합니다. 전화가 끊기고 무시를 당하고 가족들의 시선이 차가운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자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현상을 선 순환하도록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첫째는 책을 읽는 좋은 기회로 삼자고 제안합니다. 요즘 저는 몇 권의 책을 여기 저기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읽는데 재미가 쏠쏠합니다. 둘째는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거들떠보지 않았던 조카들의 사는 얘기며, 힘들게 살아가는 지인들의 얘기에 마음을 기우리는 것입니다. 꼭 물질적인 관심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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