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18(2024. 12. 20. 금요일).

시편 99:8-9.

찬송 27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시인이며 하버드 대학에서 18년을 가르친 롱펠로우/H. W. Longfellow(1807-1887)은 미국 시인으로써는 가장 국민적 사랑과 존경을 받았는데, 그런 그 역시도 힘들고 쓸쓸한 삶은 피해 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시 <비 오는 날>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날은 춥고 어둡고 쓸쓸도 하다. 비 내리고 바람은 쉬지도 않고 넝쿨은 아직 무너져 가는 벽에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건만, 모진 바람 불 때마다 죽은 잎새 떨어지며 날은 어둡고 쓸쓸도 하다. <중략> 조용하거라 슬픈 마음들이여! 그리고 한탄일랑 말지어다. 구름 뒤에 태양은 아직 비치고, 그대 운명은 뭇 사람의 운명이려니. 누구에게나 반드시 얼마간의 비는 내리고, 어둡고 쓸쓸한 날 있는 법이니.”

 

2,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지도자들3(17-22)”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감상할 때 늘 느끼며 아쉬운 현상 중 하나는 대부분이 도덕적인 결말을 보는 것 뿐 아니라, 너무 간단히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인은 죽거나 처벌을 받으며, 고생 고생하던 선인은 웃고 만다는 것입니다. 지루할 정도로 길고 긴 투쟁의 과정들이 전체 내용을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들 인생도 그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누릴 행복한 순간이나 악인이 받게 될 형벌은 너무 짧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망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됩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르겠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겪고 마침내 이룬 행복이 천년만년 누릴 수 있도록 행복의 이야기들을 늘어트리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가령 천국의 삶을 성경에서 길게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 것 말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살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지도자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할 것인지를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동안 힘들게 신앙생활을 지켜온 사람들이나, 심지어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볼 내용들 말입니다. 베드로 후서 기자는 이런 자들은 물 없는 샘이며,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은 깊은 암흑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형벌의 원인으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견뎌내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들을 육체의 방탕한 정욕으로 유혹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로는 자유를 외치나, 자신들은 불의와 죄악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애석하고 서글픈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추한 삶에서 떠나 살던 사람들이, 다시금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세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일들이라고 고발합니다. 그것은 처음보다 더 나빠진 상태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유명한 깡패 두목이 회개하고 신학교를 들어가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다시 깡패 두목으로 다시 나타난 경우입니다. 이를 두고 개가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에 비유하였고, 돼지가 몸을 씻고 다시 오물진창에 뒹구는 것과 같다 비유합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 거짓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아무리 변신을 꾀한다 한들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들이나, 깨끗이 씻은 몸을 다시 진창에 뒹구는 돼지들과 같은 길을 걸어갈 뿐이라고 말입니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거짓 선지자나 지도자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신학적인 이론을 앞세우기도 하고, 아무나 말할 수 없는 성경의 고전어를 앞세우는 사람들에게서, 참과 거짓을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인가 하는 기준 말입니다. 이른바 지도자들의 삶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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