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일(/) 주 일 이 름 성 경 본 문 설 교 제 목 주 요 활 동 계 획
1. 5/12. 6 성탄 후 둘째주일 왕상 3:4-15 솔로몬의 일천번제의 의미. 모친 26주기, 주성농인교회 설교, 검진(1.9-심장)
1.12/12.13 주현절후 첫째주일 6:1-11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1.19/12.20 주현절후 둘째주일 2:1-11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삶. 왕십리루터교회예배, 사위생일(23), 현빈생일
1.26/12.27 주현절후 셋째주일 8:1-3,5-6,8-10 율법을 가르친 학사 에스라. 검진/혈약-소변(27일 비뇨),CT-MRI-뼈스캔(영상).
2. 2/ 1. 5 주현절후 넷째주일 고전 13:1-13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면. 주성농인교회 설교, 검진-소변(6,비뇨기)
2. 9/ 1.12 주현절후 다섯째주일 5:1-11 어부를 제자로 부르시다.  
2.16/ 1.19 주현절후 여섯째주일 17:5-8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왕십리루터교회설교,
2.23/ 1.26 주현절후 일곱째주일 고전 15:21-26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3. 2/ 2. 3 주님의 산상변모주일 9:28-36 주님께서 변모하신 의미. 성회수요일, 주성농인교회 설교, 여을생일(8),
3. 9/ 2.10 사순절 첫째주일 26:1-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  
3.16/ 2.17 사순절 둘째 주일 3:17-4:1 우리가 가진 시민권. 왕십리루터교회예배, 건대건정기
3.23/ 2.24 사순절 셋째 주일 15:1-3,11-32 잃은 양과 잃은 아들을 찾으시는 주님.  
3.30/ 3. 2 사순절 넷째 주일 12:1-6 야훼 하나님을 감사할 이유. 박지예생일(2),
4. 6/ 3. 9 사순절 다섯째 주일 3:8-14. 온전한 의을 바라보며. 주성농인교회 설교, 검진(10).
4.13/ 3.16 종려주일 12:20-36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예수를 바라보라.  
4.20/ 3.23 주님의 부활절 주일 65:17-25 새하늘과 새땅을 만드시는 야훼. 왕십리루터교회예배,
4.27/ 3.30 부활절 둘째주일 1:1-8 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5. 4/ 4. 7 부활절 셋째주일 21:1-14 믿음의 길. 주성농인교회 설교,
5.11/ 4.14 부활절 넷째주일 20:17-35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설교. 부친 59주년추모예배(15),
5.18/ 4.21 부활절 다섯째주일 21:1-7 새 하늘과 새 땅. 왕십리루터교회예배,
5.25/ 4.28 부활절 여섯째주일 16:25-33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처럼.  
6. 1/ 5. 6 부활절 일곱째주일 1:12-26 새로운 제자 진용. 주성농인교회 설교, 장은진생일(8),
6. 8/ 5.13 성령강림절 주일 2:14-21 성령이 임재한 베드로의 변화.  
6.15/ 5.20 성령강림절후 첫째주일 8:48-59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 왕십리루터교회예배,
6.22/ 5.27 성령강림절후 둘째주일 65:1-9 하나님이 벌하시는 사람들. 박지훈생일(27),
6.29/ 6. 5 성령강림절후 셋째주일 5:1,13-25 그리스도인이 누릴 자유.  
7. 6/ 6.12 성령강림절후 넷째주일 10:1-20 70인의 전도대원들의 활약상. 주성농인교회 설교, 검진(10,심장내과).
7.13/ 6.19 성령강림절후 5째주일 19:9-18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  
7.20/ 6.26 성령강림절후 6째주일 1:24-29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 왕십리교회 설교,
7.27/*6. 3 성령강림절후 7째주일 11:1-13 기도를 제대로 배우자.  
8. 3/*6.10 성령강림절후 8째주일 1:2,12-14,2:18 진정으로 헛된 삶이란. 주성농인교회 설교,
8.10/*6.17 성령강림절후 9째주일 11:1-16 믿음이란 무엇인가? 여름생일(10)
8.17/*6.24 성령강림절후 10째주일 12:49-53 역설적인 가르침.  
8.24/ 7. 2 성령강림절후 11째주일 66:18-23 하나님은 벌도 하시고 일꾼도 삼으신다. 봉희생일(27).
8.31/ 7. 9 성령강림절후 12째주일 13:1-17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  
9. 7/ 7.16 성령강림절후 13째주일 14:25-35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주성농인교회 설교,
9.14/ 7.23 성령강림절후 14째주일 34:11-24 자기 양떼를 찾으시는 하나님.  
9.21/ 7.30 성령강림절후 15째주일 딤전 2:1-15 기도를 배우자. 왕십리교회 예배.
9.28/ 8. 7 성령강림절후 16째주일 16:19-31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10. 5/ 8.14 성령강림절후 17째주일 1:1-4, 2:1-4 오래 참으신 야훼의 뜻. 주성농인교회 설교, 가을생일(10), 검진(9).
10.12/ 8.21 성령강림절후 18째주일 딤후 2:1-13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  
10.19/ 8.28 성령강림절후 19째주일 18:1-8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자. 왕십리교회 예배.
10.26/ 9. 6 성령강림절후 20째주일 4:1-15 인생의 갈림길.  
11. 2/ 9.13 성령강림절후 21째주일 살후 1:1-5,11-12 부르심에 합당한 자. 주성농인교회 설교,
11. 9/ 9.20 교회력마지막 셋째주일 20:27-40 부활논쟁의 허와 실. 박지유생일(13),
11.16/ 9.27 교회력마지막 둘째주일 4:1-6 야훼 하나님이 오시는 날. 왕십리교회 예배.
11.23/10. 4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 23:27-43 십자가 상에서 주님을 만난 행운아. 귀빠진날(25),
11.30/10.11 대림절 첫째 주일 21:1-11 세상이 꿈꾸는 왕의 행렬. 주성농인교회 설교,
12. 7/10.18 대림절 둘째주일 11:1-10 평화의 나라를 희망하자.  
12.14/10.25 대림절 셋째주일 5:7-11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 왕십리교회 예배,
12.21/11. 2 대림절 넷째주일 1:18-25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을 맞이하자.  
12.25/11. 6 주님의 성탄절 1:1-14 하나님의 현존과 함께. 주성농인교회 설교, 성탄선물.
12,28/11. 9 성탄절후 첫째 주일 63:7-14 넘치고 넘치는 은총의 하나님.  

1. <누가의 해>를 맞아 주일 설교계획은, 구약-사도서간-복음서를 윤번으로 본문을 정하였고, 설교제목은 도중에 바뀔 수 있습니다.

2. 주요 활동계획란에는 앞으로 제가 설교할 교회와 저의 가족행사 계획이 소개될 수 있습니다.

3. 성구집은 기독교 한국루터회가 발행한 <교회력에 따른 오늘의 기도와 성경봉독문>을 택했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28(2024. 12. 30. 월요일).

시편 102:12-14.

찬송 46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시인이며 교사였던 W. 휘트먼은 [풀잎]이라는 시집으로 유명해 졌는데, 그의 시 <첫 민들레>는 이렇게 시작된다. “겨울이 끝난 자리에, 소박하고 신선하게 아름답게 솟아나서, 유행 사업 정치 이 모든 인공품일랑 없었든 양, 아랑곳없이 수풀 소북이 거린 양지 바른 모서리에 피어나, 동트는 새벽처럼 순진하게, 금빛으로 고요히, 새 봄의 첫 민들레는 이제 믿음직한 그 얼굴을 선보인다.” 동트는 새벽처럼 순진한 민들레가 보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2, “찬송의 노래(1-5)”하나님께서 잔치를 베푸심(6-9)”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어제 성탄절 후 첫째주일에 로마 가톨릭 교회 소속인 평화 방송에서는 희년 장엄 개막 미사를 실황으로 중계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희년은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다음 해 곧 50년이 되는 해를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희년에는 안식년처럼 밭에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어 소출을 거둘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풀려나고 그 이전 50년 동안 가난 등의 이유 때문에 팔린 땅이 제 주인에게 다시 돌아갑니다. 그래서 희년은 모든 사람이 해방되는 해, 모든 자연 세계가 제자리로 회복되는 해를 말합니다. 즉 자유를 되찾아 주는해방과 원래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는회복이 희년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0년마다 한번 찾아오는 희년이 너무 길어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매 25년마다 생활 속에서 희년을 경험하도록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는데, 2,000년에 이어 2,025년인 올해도 희년 장엄 개막식을 성탄절 후 첫 주일에 거행한 것입니다. 이런 제도의 개선이나 발전은 그 정신이 옳다고 한다면 좋은 취지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희년의 정신인 자유와 해방을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구현해 내느냐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겪고 있는 수많은 부자유와 얽매임에서 그들을 풀어주는 실질적인 제도와 행동이 뒤 따라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희년 장엄미사를 시청하면서, 우리 교회가 먼저 가난하고 병든 교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싶어 하는 희년의 정신이 크리스천들의 마음에 절절한 울림으로 스며들어가기를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자고 권고합니다. 그 까닭을 원수의 나라가 멸망당한 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노래라고 말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번역 출판 되었던 성서 주해/The Interpreter’s Bible에 의하면,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던 에돔일 수도 있고, 시리아의 니느웨나 바벨론일 수도 있다고 부연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들의 힘이나 손으로 승리한 기쁨이 아닐지라도, 모든 승리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임으로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인간의 염원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고 생각되는 때문입니다. “거만한 자들의 도시를 돌무더기로 만드셨고,” “요새화된 도시는 터만 남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재건되지 아니할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일희일비하는 속 좁은 존재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의 노래가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고 회한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든 이유가 이런 태도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원수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는 때문에 말입니다. 영세민에게 도움을 주시고, 고생하는 빈민들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너무 기쁘다고 자만하지도 말아야 하고, 너무 슬프다고 너무 절망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145편을 참고해서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3, 어제 본문은 출 3:1-3, 11-15이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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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27.

시편 102:8-11.

찬송 49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은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극작가인데, 그의 시 <피파의 노래>는 불후의 명작이다. “때는 봄, 아침 7, 언덕엔 이슬방울 진주되어 빛나고, 종달샌 높이 나는데, 달팽인 가시나무 위에 도사렸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온 누리가 평화롭도다.” <피파의 노래>는 매우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 소개되고 있다. 모두 다 힘겹게 자신의 삶을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나자 세상은 일순간에 달라졌다.

 

2, 성탄 후 첫째주일의 구약 말씀 출 13:1-3, 11-15을 본문으로 전통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규칙적인 생활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마침내 전통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어나고 잠자는 것은 물론, 식사 나 아침 산책 등을 규칙적으로 하는 동안에 습관이 생기고, 그 습관은 그 사람과 가족의 전통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좋은 습관이 생기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1-2).

19703월 어느 신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수님은 서른 명 남짓한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어제 교회에 갔지요? 어떻게 갔습니까?” 한 학생이 머리를 긁적이며 저는 주일학교 부장인데요.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교회로 향했어요. 당연히 습관처럼 말입니다.” “습관처럼 이라....” 신앙생활을 습관처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교수님은 진지하게 토론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습관의 중요성에 대해서. 특히 삶에서 중요한 것일수록 습관적인 것이 중요하다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양치기 모세가 광야를 지나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는 기록을 읽었습니다. 호렙산은 많은 산들 중의 하나의 산이 아니었습니다. 그 호렙산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산이었습니다. 훗날 모세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 습관처럼 호렙산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감격을 약속하셨습니다(11-12).

430년이란 길고 긴 세월동안 이스라엘은 이집트 왕 바로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고작 35년 동안 나라를 빼앗겼던 동안에, 이름을 빼앗기고, 말을 빼앗기고, 모든 땅과 권리를 다 빼앗겼습니다. 그렇다면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사람들은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많은 빼앗긴 것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빼앗겼던 것을 뼈저리게 슬퍼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회복과 그 감격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인지, 예배를 왜 드려야 하는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올바른 지, 우리의 예배는 그 정신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찬송과 기도에서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이 아닙니다. 예배자들이 자신의 감성을 만족시키려는 표현이며, 기도 역시 기도자 중심적입니다. 예배의 정신이 실종되었습니다.

 

예배는 선조들이 습관처럼 모셨던 야훼 하나님이 그 주인이십니다(13-15).

요즘 우리 사회는 법조문이 아니라, 법의 정신을 살피는 일에 초미의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까닭은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때문입니다. 제가 영등포 공고에서 교생 실습을 하고 있을 때, 제 친구 한 사람이 계엄사로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겪었습니다. 평상시에 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유신 시절에는 통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한 없이 무섭기만 하거나, 반대로 한없이 자비한 분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실 정도로 깊고 넓은 은총의 사랑을 가지신 분으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동행하실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백 년 수천 년을 예배해온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길 것을 다짐하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흘러도 가나안의 우상들과는 다른 야훼 하나님을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26(2024. 12. 28. 토요일).

시편 102:4-7.

찬송 30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아 살해(infanticide)는 의도적으로 가족이 젖먹이를 죽이는 것이다. 옛 사회에서 일부 영아 살해가 허용되었었으나 지금은 비도덕적이며 범죄 행위의 하나로 간주된다. 하지만 영아 살해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서구 사회에서는 부모의 정신과 질환이나 폭행 등에 의해서 나타나는 반면, 후진국에서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남아 선호 사상 때문에 여아 살해의 비율이 남아 살해의 그것보다 높게 나타난다.

 

2, 오늘은 우리 모두가 짧은 시간이나마 그 옛날 아기 예수를 대신해서 죽임을 당한 많은 베들레헴의 영아들을 위해 슬픔을 품어보아야 할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별을 따라 유대나라 왕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어린 유대 왕자를 만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왕은 화근/禍根을 없애버린다는 생각에 베들레헴 주변의 두 살 미만의 사내 영아/嬰兒들을 살해하라 명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류사에 이보다 잔악한 살인사건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또래라는 것이 죽임을 당한 이유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동방박사 이야기가 주는 장엄한 서사/敍事에 매몰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동방의 어느 문명사회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찬양하고 축하하기 위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당시로써는 가장 귀한 선물을 들고 찾아와 경배를 드렸다는 것에 취해 버렸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화려하고 극적인 장면 뒤에 숨겨져 있었던 수많은 영아들이 무참히 죽어야 했고, 그 어미들의 애끓는 통곡을 귀 막고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역설/逆說인가 하는 점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이 영아들의 희생과 그 부모들의 아픔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깐이긴 하지만 대신 짊어져 주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생각합니다. 그는 북 아프리카 리비아란 나라에서 예루살렘을 찾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피가 흘러서 명절을 지키러 왔는지, 아니면 돈벌이를 찾아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가족들도 성경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보통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내와 아들까지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어, 훗날 바울은 시몬의 아들 루포를 자신의 친구라고 했고, 그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기억해 주었습니다(15:21, 16:13). 우리의 신앙이란 기억에 많이 의존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테제의 노래 가운데,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라는 게 있는데,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던 우편에 달린 강도가 한 부탁이었습니다(23:42).

    이 영아 살해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서 기자는 그 모친들의 울부짖음을 라헬이 베냐민을 출산하면서 숨을 거두면서 흘린 눈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라헬로 그녀는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 요셉은 아버지 집 라반의 집에서 출산하였으나, 둘째 아들 베냐민은 야곱이 자기 집으로 돌아온 후에 출산하였는데 그곳이 벧엘에서 24km 떨어진 에브랏이었습니다(35:18). 훗날 예레미야는 라헬이 자식을 두고 죽는 어미의 마음을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식을 생각하며 우는 어미들의 마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31:13-20). 몽골에 가면 지금도 마을 뒷산 작은 봉오리에 돌무더기들이 있는데, 어린아이들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어린 아이들의 무덤은 땅에 묻지 않고 항아리나 돌무더기를 쌓아 두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보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그를 사랑했던 어미들이 찾아와 어루만져주도록 배려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영아 살해 사건은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 철부지 생명들이 철든 어른들을 위해서 제물이 된 사건으로도 해석되고, 순백의 천진난만한 생명들이, 온갖 죄악으로 점철된 죄인들을 대신한 산 제물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동안 그들을 잊고 살았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르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25(2024. 12. 27. 금요일).

시편 102:1-3.

찬송 49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깊고 푸른 밤>, <오렌지카운티> 등 수 십 편의 미국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릴리 톰린(1938년생)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왜 누군가가 그 일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항상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바로 그 누군가에 속한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중요하고 값진 일을 누군가에게 기대는 보편적인 심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늦게라도 깨달았다면 그 일을 즉각 착수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내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될 테니 말이다.

 

2,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이며, 요한복음서와 계시록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사도 요한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역사적인 인물, 곧 나라를 구한 영웅호걸들이나, 선정을 베풀었던 왕등 지도자들을 위인이라고 부르며 어린 아이들에게 본받기를 권장하곤 합니다. 이른바 위인전의 주인공들에 대한 찬양을 계속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위인들과 같은 분들에 의해서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이야기가 나다나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소설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그들의 옛 생활로 돌아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와 야고보의 형제들은 갈릴리 호수에 배를 띄우고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처음엔 낯선 얼굴처럼 보였던 모양입니다. 의례적인 인사로 고기 좀 잡았느냐 물었고 그들은 실망한 낯빛을 하며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잡지 못했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오른 쪽에 던져보라는 말씀을 하셨고, 베드로는 주님 말씀을 따라 오른 쪽에 던졌는데, 무려 153마리의 많은 고기들이 그물에 가득 찼습니다. 그때에야 그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 번씩이나 당신의 양떼를 잘 먹이고 돌볼 것을 부탁하신 후 베드로와 얘기를 하신 장면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 속에 나오는 인물은 가룟 유다에 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관심사는 주님을 배반하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팔아넘겼던 가룟 유다가 훗날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관심 말입니다. 어쩌면 이 본문은 오늘 우리들을 위해서 준비된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역시 진정한 관심 필요한 관심보다는 아무 쓸모없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 시간과 정열을 낭비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런 악행 자들이나 원수들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하게 끝날 것인가 하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들이 어찌되건 그게 너희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핀잔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완곡한 말씀을 들은 후에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가짜 소식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한 번 주님이 재림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있다 할지라도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다시 확언을 하신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긴 가룟 유다가 짊어질 형벌과 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 말씀은 우리가 두고두고 묵상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많은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준엄한 선고를 받게 되고 그에 걸맞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인데, 그들에 대한 관심을 어느 정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쓸데없는 관심일랑 꺼 버리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도움을 줄 수도,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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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24(2024. 12. 26. 목요일).

시편 101:7-8.

찬송 29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우화 작가이며 시인인 장 드 라퐁텐(1621-1695)인내는 모든 문을 연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아무리 힘든 인생길이라 하더라도, 참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 쪽으로든 문이 열리게 되고, 새 희망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바울은 참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라는 진리를 말할 수 있었으리라.

 

2, 우리 교회력에는 주일과 일반적인 축일에 관한 성경읽기가 있고, 제자들이나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소축일도 있습니다. 루터교 교회력에서는 순교자들과 복음서 기자들을 기념하는 성경읽기를 권장하는데, 오늘은 성 스데반의 순교를 기념하는 성경읽기가 있어서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스데반은 초대 기독교회가 뽑은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초대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는데, 일손이 부족해서 사도들까지 이 구제활동에 시간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구제하는 일은 그 직무에 합당한 일꾼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집사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현실 적응력에 민감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집사로 선출되기 전의 스데반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으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였다고 합니다(8). 그리고 그는 구약의 주요 말씀들을 꿰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마침내 유대교 지도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성모독죄라는 죄명을 받게 되어 체포되었고,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스데반은 이방인인 그리스인의 혈통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은 유대인 공회인 산헤드린에서 행한 변증이면서 설교라고 볼 수 있는 기록으로, 그는 그의 설교의 말미에 매우 의미 있는 한 마디를 남겼는데, 그것은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7:56)는 말씀입니다. 이를 두고 신약 학자들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 이외의 사람이 인자라는 호칭을 예수께 붙인 유일한 경우라고 하면서, 이는 종교사에 있어서 예수의 직무와 의미는 유대교적 메시야라는 관점 이상으로 이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극찬하고 있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차제에 저는 순교자를 많이 배출한 충청남도에 사는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앙의 정점이야말로 순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 한 순간에 국가의 시책에 반기를 들었다는 죄목으로 많은 크리스천들이 순교하였던 역사가 그것입니다. 부모제사를 무시했다고 오해한 때문에 온 가족이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고, 애국자들이 많이 있는 집단이라는 이유로 교회당에 감금되어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고,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학살당한 순교자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종교적으로 배타적인 지역에 선교를 떠났다가 화를 입은 순교자들도 적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그 밖에도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가족들이나 지역민에게서 따돌림과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스데반들이 소리를 죽여 주님, 저를 기억하옵소서!” 라는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들에게 하늘 문은 활짝 열려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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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23(2024. 12. 25. 성탄절).

시편 101:5-6.

찬송 20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정치가 존 사이먼(1873. 2 - 1954. 1.)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지혜의 핵심은 올바른 질문을 할 줄 아는 것이다.” 미국 미네소타 주의 루터세미너리에 갔을 때, 예배학 교수님은 개회기도를 하시면서, “주님, 오늘도 저희에게 질문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질문, 그것도 올바른 질문을 하는 삶이라면 잘 살고 있는 것일 겁니다.

 

2, 성탄절의 복음서 요 1:1-14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현존인 성경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현대인들은 검증 가능한 것만을 진리라고 추구하는 특성이 있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야말로 우리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십니까?

 

낯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오신 우리 하나님(1-3).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성탄절에 타향에 살고 있던 가족들이 부모님 집에 모여서 옛날에 다녔던 교회에서 성탄절 예배를 드리는 전통이 있습니다.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인다는 설렘과 함께 성탄 트리 밑에는 가족의 이름이 쓰인 선물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가족 상봉일이거나 선물을 주고받는 날일까요?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기뻐하는 날임을 다시 한 번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고, 지금도 그런 하나님들이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십니다.

 

빛과 생명으로 하나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4-5).

암흑과 같은 세상은 절망과 슬픔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빛이 비치는 곳에는 희망과 기쁨이 솟아납니다. 어느 해 성탄절에 고등학교 선생님의 안내로 한센씨 병을 앓는 마을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10여명이 모여서 성탄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느 성도의 오두막을 예배당으로 삼고 드리는 감격적인 예배였습니다. 따스한 햇볕은 아기 예수님의 눈길 같았고,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은 아기 예수의 숨결 같았습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는 교우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찬웃음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찬란한 빛과 생명이 그곳 예배자들의 얼굴에 꽃처럼 피어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초라한 오두막 예배당에 풍성하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성탄 찬송을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기운차게 불렀습니다.

 

말씀에서 주님을 만나는 행복한 사람들을 닮아야하겠습니다(9-14).

여전히 세상에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해 겨울 주번 사령실 앞에 교회에 갈 병사들이 집합했습니다. 주번 사령은 기독교인이 아닌 듯 했습니다. 지휘봉으로 병사들의 머리를 조롱하듯 치면서, 나이롱(가짜) 크리스천을 찾고 있었습니다. 고참이기도 하고 민간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처지가 된 저는 조급한 마음에 모두 진실한 크리스천이라고 대답하는 제게, 성경책 내놔! 하셨습니다. 제 가슴에는 영어 신약성경이 있었고, 그걸 내놓자, 꼴에 영어성경책이라! 뒤적이며 조롱하였습니다. 저는 두 번째 통독중인 제 성경에는 밑줄이 많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제 신앙은 정말 죽으면 죽으리라!” 였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시간이 없을 만큼 힘들었던 군 생활에서, 2년이 넘도록 무자격 전도사로 일했던 그 시절은 말씀 속에는 주님이 계셨습니다.

 

3,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절 인사말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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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22(2024. 12. 24. 화요일).

시편 101:3-4.

찬송 22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캘빈 쿨리지(1872-1933)는 잠자다가 대통령이 된 인물로 유명한 미국의 제30대 대통인데, 그는 고향에서 휴양 중에 전임자인 하딩 대통령의 부고를 듣고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 대통령이다. 그가 남긴 명언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받은 것으로 인해 존경받지 못한다. 존경은 자신이 베푼 것에 대한 보답이다.”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존경이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베풀었는가에 따라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지위나 학식 그리고 재산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다.

 

2, “크고 흰 옥좌에서의 심판(20:11-15)”새 하늘과 새 땅(21:1-8)”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은 이사야서 66:22과 요한계시록 21:1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가령 황금 길과 수정 바다와 같은 구절을 비롯해서 묘한 화초 향기와 청아한 음악 소리, 가난과 슬픔 그리고 어둠이 없는 곳 등이 그런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표현들이 추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할 말은 주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가 거느리시니”(390/444-)는 가장 확실한 천국에 대한 묘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천국이라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비록 문제투성이는 말할 것도 없고, 불공평과 불의한 세상 한 복판을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실존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라고 한다면, 안심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 구절은 이전에 보았던 하늘과 땅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도 요한의 선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같이 계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같이 계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3-4)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최근 저의 주변에는 저를 비롯해서 고령으로 성인병을 앓는 분들은 물론 생후 2살도 안 된 어린 손자가 무서운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걱정과 근심에 쌓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육신의 건강이나 물질의 축복 그리고 꼬리가 아니라 머리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만 생각하는 분위기도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저런 시련의 강을 건너갈 때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길이라는 믿음이 있느냐는 자각을 가지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육신이 병드는 일, 물질적인 고통 그리고 한없이 추락하는 인생길은 피할 수 없는 데, 그런 일들로 인해서 우리의 신앙이 쇠락하는 것은 가장 슬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련과 역경을 맞서 싸울 수 있는 믿음,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나 굶주린 맹수 앞에서 우리의 목숨이 경각에 놓이게 될 때도, 의연하게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떠져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문제를 대하고 시련을 마주하는 자세를 위해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수많은 시련과 유혹의 강들을 이겨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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