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48.

시편 104:22-24.

찬송 18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1788122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가 남긴 시 <꽃처럼 저버린 사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그 아름다움 한창 피어날 때/저버린 그대/잠든 그대 위엔 묘석일랑 놓지 못하게 하리라/그대를 덮은 잔디 위엔 ///가엾은 그대여!/혹시나 그 발걸음이 고이 잠든 그대를 /깨울까 하여이니라.”

 

2. “가나의 혼인잔치(1-11)”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한번 입력된 자료는 고치기가 참 어려운 것을 느낍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이 그런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난처한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주님의 일화입니다. 혼인잔치의 과방에서 흘러나온 얘기를 주님께서 모친을 통해 듣게 된 것입니다. “포도주가 부족하다니 이를 어쩌나?” 이스라엘과 서양에서는 피로연이나 식사 초대는 미리 참석자 명단이 확인되고 준비하는 게 상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임금의 혼례식에는 초청 확인을 했는데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혼주/婚主가 화가 나서 시장과 거리에서 사람들을 갑자기 초청하고 난리법석을 떠는 얘기가 나옵니다. 1995년 겨울 학기를 미네소타 주의 쌍둥이 도시 중 하나인 세인트폴에서 예배학을 공부할 때, 저의 주임 교수님이 매 주일 저를 픽업해 주셔서 여러 교회들의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어느 날은 시내를 지나가시다가 이 주변에 큰 호텔이 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따님 결혼 피로연을 열었는데, 100명을 초대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피로연에 초대된 손님들은 양가의 혼주가 50명씩 초대했다고 하며 평생에 기억할 즐거운 시간을 가졌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과방을 호텔 측에서 맡고 공급하기 때문에 가나의 혼인잔치의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러나 혼주의 집에서 피로연을 가질 땐 가끔 포도주가 부족해지는 경우가 있다 했습니다. 어디나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모자라게 된다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습니다. 이런 낭패를 대학교의 시험문제에 까지 등장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바이런이 살던 19세기에 케임브리지 대학 종교학 시험지에 등장한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일화는 신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 말입니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은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그의 시가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람인데, 그는 일찍부터 그의 떡잎을 소개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앞서의 문제지를 받고는 2시간 동안이나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시험 감독인 교수가 와서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네. 한 줄이라도 써야 하지 않겠나?” 했더랍니다. 그래서 그가 몇 자 시험지에 옮겼는데, 그게 바로 저 유명한 물이 제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란 정말 한 줄의 시 같은 명답이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멋지고 슬기로운 신앙적 의미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항상 이 구절은 바이런을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들 인생길에는 가나안 잔치집이 당면했던 문제들이 생기곤 합니다. 예수님의 문제풀이 방식을 바이런은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문제가 닥쳤을 때, 우선 두려움에 사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곤 당황하게 되고, 원망과 불평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도 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런의 문제풀이방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눈뜨게 합니다. 문제 앞에서 불안해하고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이런은 시험 시간 2시간을 다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가지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포도 알갱이가 밀폐된 옹기그릇에서 숙성하면 발효되어 포도주가 되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생길의 골목골목 마다 우리의 자취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현실입니다. 저는 이런 신앙적 의미를 시 121편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첫 공식 설교를 이 구절에서 찾아냈습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고 말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문제 앞에서 발버둥을 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해답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의 한 복판에서 우리가 뚫어져라 바라볼 분은 천지를 지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신데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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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7(2025. 1. 18. 토요일).

시편 104:19-21.

찬송 4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이런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폭풍의 들판에도 꽃이 피고, 지진 난 땅에도 샘이 있고 초토 속에서도 풀은 솟아난다. 이같이 자연은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어떠한 슬픔, 고난 속에서도 쓰러지지 말고, 사랑과 생명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 “안식일의 주인(23-28)”오그라든 손을 펴주신 예수(1-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우리 기독교회의 가르침은 불편한 진실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제가 대학 3학년 때 청량리 밖에 있는 삼육대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국 신학대학의 기숙사 현황을 정리할 과제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전하지 않아서, 공문서를 띄우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아서 발품을 팔아야 했습니다. 삼육대학교를 방문했던 날은 공교롭게도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오후 430분 까지만 시간을 내 줄 수 있다는 기숙사 사감 교수님의 언질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얘기가 길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오후 430분이 되자 교수님은 벌떡 일어나시며 이제 일몰이 가까웠으니 안식일을 지키러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요일 오후 일몰 시간부터 토요일 일몰시간까지가 안식일이라는 것을 그때 제대로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도 성경에 있는 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안식일은 어떤 날입니까? 그리고 왜 기독교회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대신 지키는 것입니까? 아주 많이 들었던 질문입니다. 우선 안식일은 십계명에 속하는 한 계명으로,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레 되는 날 쉬셨으니 인간들도 쉬라는 명령으로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의 정신은 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쉬느냐를 가르치는 방안으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가지 시행세칙이 있습니다. 참고하도록 10가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 바느질 2) ()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 6) 체질 7) 반죽 8) 빵을 굽는 9) 양털 깎는 10) 그것을 빠는 일. 안식일은 근본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쉬라는 데 방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의 논쟁 중에 안식일 논쟁이 가장 많은 것은, 누구나 객관적으로 문제를 삼기에 적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초대기독교회 이래로 안식일을 대신해서 주일을 지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금요일 저녁에서 토요일 오전에 적당한 시간을 공지해서 드렸는데,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곳에서는 대부분 회당과 산헤드린 의회(유대인의 전통과 신앙을 해석하는 법정)이 있었는데, 주전 400년경에 팔레스타인 안에는 약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 자신도 갈릴리 변두리를 다니실 때 회당에서 예배드리신 일들과 사도 바울 등이 소아시아를 전도 여행할 때 유대인의 회당에서 설교하는 일화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새롭게 탄생한 기독교 공동체는 이런 회당의 제도나 전통을 받아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특한 점은 유대인처럼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후 첫날 곧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해서 기도모임을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안식후 첫날인 일요일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써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초대 기독교회는 안식후 첫날인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주후 140년 순교자 저스티누스의 <변증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예배와 성찬의 예배를 따로 드렸다고 말입니다. 차제에 안식일이 최근 기독교인들에게 너무 피곤한 날이 되어서, 그 본래의 취지가 퇴색하고 있다 합니다. 오히려 주일에는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고, 한 주간 내내 생활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도록 교회가 영향력을 주어야 하겠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3. 나랏일이 너무 흉흉해서 산불로 고생을 하실 캘리포니아의 묵상식구 최상준 박사님과 신용우 박사님께 심심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한인 공동체와 미국인에게 피해가 최소화 되기를 바라며 빠른 복구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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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6(2025. 1. 17. 금요일).

시편 104:16-18.

찬송 1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동성애자들은 으레 동성애는 타고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미국 국립암연구소의 분자 생물학자이자 남성 동성애자인 딘 해머가 1993년에 내놓은 연구 결과를 근거로 한다. 태아기를 함께 보낸 일란성쌍둥이는 성적 지향조차 그에 근접할 정도로 일치해야 한다. 2000년 이후 발표된 세 건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란성쌍둥이의 동성애 성향 일치 비율은 10% 안팎에 불과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는 큰 문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2. “레위를 부르심(13-17)”단식에 대한 질문(18-22)”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신앙생활에는 특별한 규제나 원칙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대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 오랜 시간 지속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신앙하는 내용에 큰 문제가 없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내용 못지않게 그 방법에서 오는 문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제 친구 한 분은 교회의 제도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의 행태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갖고 제게 여러 차례 질문을 했습니다. 얘기를 듣는 중에 많은 반성을 하였고, 고쳐야 할 문제들이 한 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평신도 일꾼들의 직분에 관한 것들이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른바 장로와 권사제도에 대한 것인데, 교회에서는 나름대로 교회법을 가지고 관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게 정당하지도 않고, 투명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 매관매직하는 듯 하다는 점입니다. 교회 출석이나 봉사 생활 그리고 교회를 짓고 관리하는 등 재정에 관한 기여도 등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외에 목사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우선한다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언제나 빼놓을 수 없는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단식에 관한 질문을 제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둘 다 맞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단식으로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70년대 그리고 80년대까지만 해도 저의 고향교회 등은 금식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웬만한 문제만 생기면 목사님들은 사흘간 금식기도를 권유했습니다. 교인들이 따라만 준다면 참 좋은 충고라고 생각합니다. 3일만 금식하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되고, 무엇보다도 혈기가 죽고 겸손모드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좋은 신앙생활은 없다 하겠습니다. 저 역시도 금식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면서도, 다른 종교인들처럼 금식을 권하지도 가르치지도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는 금식을 우리만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저도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금요 철야기도회를 정기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금식기도를 한 적도 있었지만 매 주마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방언기도를 공식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소극적으로 신앙을 가르친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금식기도를 적극적으로 말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저항(?)이 많았을까 짐작이 갑니다. 주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금식할 때와 금식해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제자들의 공동체를 혼인 잔치에 온 신랑과 그 신랑의 친구들에 비유합니다. 혼인잔치는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풍성한 음식도 준비하고 노래와 춤도 마련된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웃음과 즐거움이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혼인잔치와 같은 예수 공동체가 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금식의 성격이 어둡고 무겁고 때로는 슬픔과 비장함도 짙게 묻어 있는 자리라고 할 때, 금식은 혼인잔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삶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니 절망과 탄식의 자리에선 금식이, 혼인자리에서는 기쁨 가득한 노래가 어울린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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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5(2025. 1. 16. 목요일).

시편 104:13-15.

찬송 41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대학생 시절에 주일학교 소창곡/小唱曲으로 자주 불렀던 <오 자유>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 기도하리 기도하리 나는 기도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주시는 내 주님께.” 참된 자유는 우리 주님께서 주신다는 의미였습니다.

 

2.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1-12)”을 읽었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뇌졸중이라고 부르는데 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생기는 질병으로, 그 결과 뇌손상으로 인해서 생기는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중풍 혹은 뇌졸중으로 인해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는데, 마당이 너른 집안에서 모였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많아 입구에는 더 이상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담요에 네 사람이 한 귀퉁이씩 붙잡고 온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 앞으로 갈 수 없음을 알자, 지붕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그 구멍으로 환자를 밑으로 내려 주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사람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중얼거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서 네 요를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것이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들고 집으로 가거라.”하시니, 중풍병자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갔고, 사람들은 놀라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적을 경험하거나 목격할 때, 신비한 능력에 경탄을 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질병 뿐 아니라, 우리들 삶에서는 많은 순간에 신비경험을 하곤 합니다. 사고 위험이 높은 자동차를 운전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찔했던 순간들을 가끔 경험하게 됩니다. 새벽 운전을 선호하는 저의 경우는 대형 트럭들을 만날 때가 많은데, 그 운전하시는 분들이 젊다는 것에 놀라게 되고,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거칠게 운전한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선지 몇 번이나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저의 차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 적이 더러 있었습니다. 물론 측면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고 말입니다. 식은땀이 온 몸에 주르르 흘렸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우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중풍 환자와 그를 돕는 데 사람의 이웃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씀입니다. 병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병자 뿐 아니라, 그를 도우려는 네 사람의 이웃들의 마음 또한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집의 지붕이 어떤 재질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리고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지붕으로 올라갔을 것이고,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줄에 매달아 내렸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믿음은 자신의 희망사항만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긍휼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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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4(2025. 1. 15. 수요일).

시편 104:10-12.

찬송 4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70년대에 나온 노래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어디가 길이냐. 어디가 길이냐 말해다오.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니, 내게 오라.”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청력검사에서 이젠 시력검사를 하라 합니다.

 

2. “많은 병자를 고치신 예수(29-34)”, “전도 여행(35-39)”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40-45)”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셋째 단락입니다. 요즘 의료대란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저의 처제가 김해에서 살고 있는데, 몇 차례 혼절을 한 일이 있어서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뇌에 혈액 공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서울로 가서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으라고 떠넘기는 인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에 사는 형부는 좀 더 힘이 셀까해서 부탁을 해 왔는데, 저는 그런 일은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아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제 아들이지만 성품이 차분하고 말에 설득력이 있어서 그런지 첫 번째 전화를 한 건대 병원에서 진료 날짜를 잡아 주어 지난 13일에 상경해서 MRI 등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그날로 다시 집으로 내겨갔는데, 환자의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는지, 걱정하지 말고 추이를 지켜보자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답니다. 저는 그 의사 선생님의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지만,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나병환자를 주님께서 고쳐주셨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에는 유독 치유기사가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화는 우리들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나병이란 현대 의학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의사 한센1841~1912에 의해서 병의 원인과 치료약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한센씨병이라(Hansen's disease)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시 <보리피리>의 작가 한 하운은 평생을 이 나병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발병하지 않고 있는 질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세기의 세계는 이 나병의 위력에 맥을 추지 못하고 있었으며, 주님은 이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고 청하였고,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가 깨끗이 나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나환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깨끗해 진 것을 증명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병에서 자유해진 사람에게 함구령을 내리고, 모세의 정결례 규정을 따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제물을 드리는 법을 따르게 한 것입니다(13:8). 이는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순결과 윤리라는 면에서 산모나 시체를 만졌거나 나병처럼 특정 질병에 걸렸거나 유출병 등을 앓았던 사람들에게 회복됨을 공식적으로 알리게 하였고, 제사를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나병에서 깨끗해진 사람은 예수님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일어났던 기적을 온 동네방네 퍼트리고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히 질문하게 됩니다. 주님은 왜 이 놀라운 일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금했을까요? 마치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도 이를 세 번씩이나 감추도록 명하신 소위 <메시아 비밀> 의도와 비슷한 게 아닐까 합니다. 마가복음서에는 3차례의 메시아 비밀의 말씀이 있는데(8:31, 9:31, 10:33-34), 주님은 이를 은폐에 붙이신 것입니다. 이를 브레데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심을 십자가와 부활로 증명되기 전에 사람들이 알게 될 경우에 오히려 예수를 살아있는 신으로 섬기는 오해를 낳을 것을 염려해서 비밀에 붙였다는 주장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주장할 가치가 있다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예수님의 기적 행위가 자칫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우치기 전에 엉뚱한 오해나 곡해에 말릴 것을 사전에 막고자 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신학을 통해서 이해를 넓히는 순 기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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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3(2025. 1. 14. 화요일).

시편 104:7-9.

찬송 4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60년대 한국을 찾은 중국의 석학 임어당이 우리 한국 청년들에게 남긴 말은 지금도 곱씹어볼 충고였습니다. “한국의 농촌 청년들아, 성실한 사람이 대접받는 그런 세상을 희망하며 살아가라.” 성공한 인생은 그런 사람일 테니 말입니다.

 

2. “갈릴레아 전도시작(14-15)”, “첫 번째로 부르심 받은 어부 네 사람(16-20)” 그리고 악령 들린 사람을 고치신 예수(21-28)”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서 큰 유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성경이나 구절에 묶이는 경우입니다. 그 결과 성경을 전체적인 구조나 내용에서 살피는 것이 아니라, 소위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목사 후보는 적어도 인문학적인 소양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공부하고 일하던 분이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가르친 학생들 중에는 군인 장교로 군사 훈련을 시키던 일선 대대장이 신학을 한 경우도 있고, 어느 대 기업에서 영업부장을 하던 이가 신학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성실성과 진정성에 의해서 좌우될 뿐 크게 장단점을 논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께서 첫 번째로 제자들을 부르신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시더니,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후,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그물을 버리고 따랐으며,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자 그들 역시 예수님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체력장이나 전공 필기시험이나 인성 시험과 같은 어떤 일정 기준을 통과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은 부르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르심, 이를 한문자로 하면 소명/召命이라는 말입니다. 왕이 자신의 참모로 일꾼을 부를 때 행하던 방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 천민의 재주 있음을 알게 되자 그를 일꾼으로 불렀습니다. 저 유명한 아산 장 씨 영실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총애를 받았고, 훗날 해시계와 물시계, 천문의기, 기후측정기를 발명하였습니다. 과거 시험으로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장 영실처럼 왕의 부름으로 벼슬을 얻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참모가 되었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주님의 참모로써 일할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를 오늘 본문에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열 두 명의 제자들 중에 4명이라면 3분의 1인 셈인데, 그들이 어부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부출신에 대해서 고평가를 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그들이 하는 일이란 비릿내 나는 물고기를 매만지는 일을 해야 했고, 그물을 던지고 몇 마리가 잡혔는지를 셈해보고는 목표치를 이루지 못했다 싶으면 또 다시 힘겹도록 그물을 물 위로 던져야 하는 벌이가 신통치 않은 직업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난다 싶으면 자주 그물이 찢어져서 고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다시 촘촘하게 땜질을 해야 하는 지루한 일상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필이면 이런 어부출신을 예수님은 참모로 삼으려 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은유적인 표현에 걸맞은 것 말고는 그리 호감이 가는 선택기준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틀어서 생각해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기준은 어떤 공식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원성을 사고 있는 에스 대학 법학과 출신 변호사나 검 판사라는 기준처럼 말입니다. 졸린 눈으로 그물을 깁거나, 하릴없는 사람처럼 빈 그물을 예상하면서 바다에 수차례 던지는 어부노릇을 하며 하루를 소일하듯 보내는 어부에게서 무슨 자질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시하고 있는 제자의 직분은 그런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지루하고 힘들고 큰 벌이가 되지 않는 일일지라도, 성실하고 끈기 있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면 누구나 주님의 참모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세상을 채운다고 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만한 세상을 구성하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참모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어제는 미국 위스컨신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는 엥글러 목사님으로부터 모친께서 93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최근 아드님과 따님이 출산하는 등 기쁜 소식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삼가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그 가족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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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2(2025. 1. 13. 월요일).

시편 104:4-6.

찬송 4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 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밝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기에 십상이다. 그래도 정직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 인류사에 정직하고 솔직하게 산 사람들이 바보 같은 그런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반대로 거짓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은 역사의 뒤안길에 깊이 빠져버렸다.

 

2. “세례자 요한의 선포(1-8)”, “세례를 받으신 예수(9-11)” 그리고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12-1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자주 혼란을 일으키곤 합니다. 비슷비슷한 내용을 서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에서부터, 다른 것도 아니고 성경을 여러 가지 다른 버전으로 기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며, 거기에서 오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 등이 생기는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문제들을 성경의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옳으냐 하는 문제까지 부담스럽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문제투성이는 성경에서도 생기고 있음을 알고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문제는 다 숙제로만 남겨질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어 가면 될 일입니다. 우선 우리는 성경의 출생 배경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1세기 초대 기독교회는 엄청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첫째는 성경의 배경인 유대나라가 로마식민 통치에 반기를 든 소위 유대전쟁으로 인해서 완전히 멸망을 당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주후 70년에 일어난 유대전쟁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물론 유대인의 대부분이 전사하였거나 국외로 피신한 것입니다. 마지막 항쟁 터였던 마사다 전적지를 방문했는데, 비참한 최후를 마친 유대 병사들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이런 전체적인 배경과 함께 기독교회는 뿔뿔이 흩어졌고,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들은 매우 단편적인 문서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즈음에 활동했던 바울 등 초대기독교회 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열정은 대단하였고 그에 힘입어서 단편적인 예수의 가르침들이 초대 기독교회 성도들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셋째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단편들은 각기 다른 관심과 목적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었고, 그런 단편들을 종합하고 정리할 필요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주후 367년경 우여곡절 끝에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이었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 현재의 27권의 신약 성경이 정경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소위 정경화의 과정에는 매우 복잡한 논의를 거쳤는데, 이는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지나친 설명이 뒤따라야하기 때문에 생략하고, 충분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는 정도로 이해를 바라며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래도 궁금해 하는 분들을 위해서는 신약 개론을 공부할 것을 권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서의 첫 장을 여는 내용인데, 우선 마가복음서는 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결론을 짓는 바, 그 특징을 복음의 시작이라고 첫 장에서 알리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이와 대조적인 것은 마태복음서는 그 특징을 계보라고 하고, 누가복음서는 그 특징을 내력이라고 밝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은 항상 이 복음서의 중심 주제는 복음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겠다는 점입니다. 복음이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첫 기쁜 소식으로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의 등장과 그에 의해서 시행된 세례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상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죄를 씻는 의식인 세례의식에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깨끗하고 무흠한 분이 남들처럼 세례를 한번 받으신 것일까요?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셨을까요? 저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그 자체가 죄인이 되시러 오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의 죄를 전부 더 긁어모아서 당신의 어깨에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입니다.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진리입니다. 나와 여러분을 위해서 친히 죄인이 되어주신 주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믿는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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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1.

시편 104:1-3.

찬송 46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1930<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을 펴냈다. 참 당돌한 책이다. 1차 대전(19147- 191811)이 끝난 뒤였다. 전쟁의 상흔과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이 끓는 때, 이 책을 써낸 것이다. 행복은 불행을 이기는 것으로 처방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빠져들지 않고, 열정과 관심을 바깥 세계로 돌리는 것으로 진단한 것이다.

 

2. 주현절 후 첫째주일의 사도서간문 롬 6:1-11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들린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인지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1-4).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지 않고 사는 길을 원했던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쪽에 있는 것으로 죽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세상의 영향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절망했으며, 다시금 옛 생활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어두운 먹구름 가운데 살고 있는 제자들과 크리스천들에게 예수께 받은 세례를 기억나게 하였습니다. 세례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살아나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새로운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먼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세례는 우리에게 먼저 죽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례는 죽음과 다시 삶을 깨닫게 하십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5-8).

본래 우리 인생은 죄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말하고 먹고 마시는 일체의 일들이 죄와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규정하는 말, 하마르티아는 빗나간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학생이 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공부에 매진해야하는데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농부가 그날의 일과를 충실히 해야 하는데 술집에 앉아서 술이나 퍼 마시고 있다면 이것 역시 죄입니다. 목표를 빗나가는 삶, 목적을 잃어버리고 엉뚱하게 살아가는 일은 일체가 죄짓는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바라보게 하셨고, 삶의 의미를 깨워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깨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동료 인간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셋째는 날마다 죄를 이기며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9-11).

아담 이래로 모든 인생은 죄의 저주 아래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포자기와 절망 속에 살고 있는데 반해서, 크리스천들은 죄와 투쟁을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크리스천의 대장이 되셔서 우리들을 격려하시고 돕고 계십니다. 크리스천들이 싸워야 할 대상들은 너무 많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적들로 불신과 탐욕 그리고 무기력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가하면 밖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적들도 많습니다. 불의와 거짓 그리고 어리석고 헛된 유혹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매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라 하십니다. 우리들 자신을 대장 예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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