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60(2025. 1. 31. 금요일).

시편 105:22-24.

찬송 37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화가 프리다 칼로는 <부러진 척추-1944년 작> 라는 그림을 남겼다. 여섯 살에는 소아마비에, 열여덟 살에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척추가 탈골되고 아홉 달을 석고 보정기를 착용하였다. 혼자서 겪어야 했고, 너무 오래 혼자였기에 가장 잘 아는 자신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했다. 어둠과 빛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붓을 들 용기가 생겼다 한다.

 

2. “물 위를 걸으신 기적(45-52)”게넷사렛에서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53-5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특히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 무슨 생각을 할까요? 저는 이런 기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기적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곤 합니다. 기적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는 때문일 것입니다. 저의 바로 밑 아우가 유명 강사가 치유은사를 베푸는 집회에 온 가족이 참석하면서 자기는 집을 보라고 두고 떠나갔더라고 합니다. TV도 없던 시절이라 무료해서 뒤척거리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이, “모든 식구들은 천당을 가려고 집회에 참석했는데 자신만은 지옥에 가라고 두고 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교회로 갔는데, 예배는 끝나고 희망자들에게 안수기도를 하고 있었다 했습니다. 그래서 안수기도를 받고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시치미를 떼고 있었는데, 오른 발 오금이 자연스럽게 오므려지더라는 것입니다. 동생은 오른 발 오금에 큰 혹이 하나있어서, 병원에서 물을 빼보기도 하고 수술도 했는데 조금 있으면 다시 물이 차올라 그 큰 혹 때문에 다리를 접을 수 없어서 불편하기도 하고 이게 장애로 남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그 혹이 떨어져버리고 오금쟁이를 펴고 접을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때 저는 많이 놀랐고 또 서운했습니다. 기적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나는 언제나 예외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니까 제 삶에도 셀 수 없이 많은 기적이야기들이 써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죽음의 고비고비가 인생길 모퉁이마다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기적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우리들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 이를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완전한 기적이야기에 빠져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힌트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 한 복판에 떠 있는 배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기도하시겠다며 산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성경 기자는 새벽 4시쯤으로 기억하는 때에 갈릴리 호수에 역풍이 불어 배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만, 문제가 생길 때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있을 때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주님께서 부재/不在 중일 때가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으면서도 마치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처럼 불안에 휩싸였고, 사색/死色이 역력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으로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물 위를 걸어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훗날 이때의 경험을 말하기를 유령/幽靈인줄 알았고, 냅다 비명을 질렀다고 했습니다. 물위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존재란 죽은 혼령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가 그 유령이 제자들 곁을 지나가시려고 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비명을 지르는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그리고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쳤고, 제자들은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했습니다. 제자들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게 된 것이고, 주님이 배위에 오르시자 그 세차게 불던 바람이 멈추게 된 기적 말입니다. 이런 기적을 저는 극적인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실제 상황이 아니라 연극에서나 볼 수 있는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기적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기적이해입니다. 사실 우리들 삶은 기적의 연속이라고 말입니다. 어느 과학자의 말입니다. 우리들 인간은 기적 속에서 매 순간을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숨 쉬며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산소인데, 대기권에는 78%의 질소와 21%의 산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우리는 4배나 많은 질소가 아니라 4배나 적은 산소를 마심으로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뿐이 아니라 우리들 몸에 치명적인 병원균이 가득한 공기 속에서 그것들을 잘 걸러내면서 호흡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적들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잠자는 삶에서,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소위 극적인 기적에 호들갑을 떨지 말고, 매순간이 기적임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59(2025. 1. 30. 목요일).

시편 105:19-21.

찬송 42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 세계 배고픈 사람들의 60%는 분쟁지역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예멘, 남수단, 콩고민주공화국, 시리아 등이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들을 도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의 얘기는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배고픔, 폭력, 무지함, 질병의 공포 속에 사는 이들이 우리의 관심대상입니다.

 

2. “5천명을 먹이신 기적(30-44)”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네 복음서에서 다 취급하고 있습니다(14:13-24, 9:10-17, 6:1-14). 그것은 이미 1세기 기독교 세계에서는 잘 알려진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배고픈 사람들, 허기진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적지 않습니다. 사람의 기호는 바뀌는 것 같습니다. 옛 허리우드 극장은 실버 극장과 낭만 극장으로 개조되었고, 55세 이상이면 2천원으로 영화를 그것도 50, 60년대에 개봉되었던 영화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퇴 후 여러 해 동안 많은 명화들을 보러 다니곤 했습니다. 덕분에 묵상자료에도 여러 편의 명화들을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부터 위험지구로 판단 지금은 1도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탑골공원 주변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그 주변에는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급식소가 있는데, 1130분이 되면 어디서 왔는지 엄청나게 긴 줄이 만들어졌고, 도시락을 받아든 노인들이 탑골공원 안으로 모여들곤 합니다. 잘 차려입은 노인이 옆에 있어서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신수도 좋으신데 어떻게 여기서 점심을 드십니까? 그분은 공무원으로 연금도 받고 계셨는데,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해서 아침을 먹고 이곳으로 나온다 했습니다. 처음에는 노숙자를 위한 급식소였는데, 누구든 노인이면 다 받을 수 있고 먹을 만 하다고 합니다. 배가 고픈 이들보다는 정이 고프고 친구가 고픈 분들에게 좋은 봉사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고맙게도 서울 안에는 이런 무료 급식소가 수십 개가 된다고 합니다. 배가 고프고 정이 고프고 이웃이 고픈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널려 있는 것입니다.

    저와 같은 해방둥이 세대들은 배고픔을 경험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던 시골에도 거지들이 있어서 때가 되면 분유 깡통을 든 분들이 집들을 돌면서 밥구걸을 하였습니다. 1960년 봄날은 내내 밥을 먹지 못해서 쑥으로 연명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저와 중학교를 졸업한 누이가 쑥을 캐러 십여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큰 자루를 등에 매고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그 한 해 저는 중학교 입학도 미뤄야 했고, 누이도 공부를 접어야 했습니다. 저에게 배고픈 추억은 아름다운 추억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우선 제가 지금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이 그 때 몇 달을 먹었던 쑥버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절절한 갈망이 생겼던 것도, 아홉 자식을 오직 희생으로 길러주셨던 부모님의 은혜를 제대로 목격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5천명이나 되는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우리 주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거대한 군중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불쌍하게 바라보셨다고 복음서 기자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서 주라는 말씀이십니까?” 제자들이 되물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란 돈은 신체 건장한 일꾼의 하루 품삯이었으니까, 오늘날의 화폐로 계산을 해 보면, 최소한 2천만 원에 해당되는 큰 액수입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해 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은 5천명의 군중들을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소년이 바친 보리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축사하신 후 그들에게 나눠주라 하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들이 열 두 광주리를 채웠으니 말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첫째는 배고픈 세상을 바라보라 하심이고, 둘째는 주님은 배고픈 이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점이며, 셋째는 한 소년의 헌신에서 기적의 실마리가 열렸다는 점이며, 넷째는 하나님은 곤궁한 우리 인생들의 문제에 해답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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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8(2025. 1. 29. 수요일).

시편 105:16-18.

찬송 13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4586, 8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위력을 실감한 미국의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신학자들에게 요청하기를 우리 인류 앞에 가장 무서운 것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인간성의 폭발입니다. 당신들의 하나님께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라 했다 합니다.

 

2. “세례자 요한의 죽음(14-29)”을 읽었습니다. 좋은 이웃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대단한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저는 윤동주의 시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한경관에서 4년을 공부했고, 바로 위에 있는 대학원에서 내리 2년을 더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윤동주의 <서시>를 읽곤 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거나, 남다르게 해석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캄캄할수록 더욱 빛나는 별은 그에게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고, 그런 하나님을 우러르는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서 죽어야 할 운명을 짊어진 모든 생명들, 가깝게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정든 반려견과 자주 창가에 와서 노래를 불러주는 산새들을 사랑해야 마땅하지 않나 하는 정도로 말입니다. 한번은 신약을 전공하는 친구들의 느닷없는 방문으로 놀라신 문상희 교수께서 가끔은 깊은 밤중에 뜰에 나와 하늘을 바라들 보시게.”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의 의미를 알 듯 한 나이가 됐습니다. 하늘의 별들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는 우리들을 비춰주고 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강은 20대 중반부터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두 개의 질문을 앞 장에 옮겼다 했습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소설의 방향을 바꾸었다 말했습니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윤동주의 글쓰기와 만나는 지점이었습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고 말입니다. 아주 가끔은 죽은 자의 반열에 서 계시는 분들, 거창고의 전영창, 연세대의 김찬국, 문상희, 서남동, 성래운, 풀무원의 원경선, 청십자운동의 장기려, 안동 일직교회의 사찰 권정생선생님들이 저 수많은 별들 속에서 우릴 바라보고 계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분들에게서 힘을 얻어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세례자 요한은 제게 있어서는 아픈 중지 손가락입니다. 소위 성공적인 인생이 예약된 듯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첫 결심대로 홀로 외로운 광야의 소리꾼으로 초야에 묻혀 살다가,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에 의해서 목이 잘린 순교의 길로 끝난 인생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세례자 요한의 주검을 들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잘나가는 권력 실세에 맞섰습니다. 헤롯왕은 자신의 동생 빌립보의 아내 곧 제수씨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 지도자로써는 보여서는 안 될 불륜이라 고발한 것입니다.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오.”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헤롯의 마음속에는 늘 이 불편한 진실을 떠들어대는 세례자 요한이 눈의 가시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카이며 동생의 딸인 살로메가 춤을 추자 그녀에게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고, 살로메는 이를 제 어머니인 헤로디아에게 전했으며, 마침내 늘 불편해 했던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 敎唆한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 광야의 소리꾼은 불륜의 두 여인에 의해서 목이 잘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비추어야 할 광야의 외치는 소리꾼이 너무도 허망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생명과 버금가는 가치가 너무도 함량미달인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쳐 생각해 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망함 그 자체인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과정이 반드시 무게를 지녀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3대 박해자라 불리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됐다는 그 이유가, 콜로세움 광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기 전 한 무리의 기독자들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던 그 눈동자와, 객석에서 술과 고기를 뜯던 로마시민의 썩은 동태눈과를 비교할 때, 그 비교 불가한 새벽 별 같은 눈동자 때문이었다고 한 역사가가 남긴 야사에 있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왕이 베푼 연회석에서 교태를 부리는 한 젊은 여인의 춤사위에, 위대한 선지자인 세례자 요한의 생명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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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7(2025. 1. 28. 화요일).

시편 105:13-15.

찬송 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만과 편견>은 영국의 제인 오스틴의 연애소설이다. 남녀 사이에 나누는 사랑이야기는 여러 가지 주제를 내포하는데, 서로 자신만의 꿈을 꾼다는 데서 많은 오해와 편견을 낳는다. 통속적으로는 부유하고 세력을 가진 사람은 일단 오만하게 보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내면이 드러날 수 있다. 그래서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는 것은 상대의 진정성을 발견하게 될 때, 오만과 편견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이런 순수와 진심 앞에서 위대한 사랑이 꽃필 수 있다.

 

2.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1-6)”열 두 제자의 파견(7-1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저는 고향 교회에서 배출한 첫 번째 목사입니다. 제가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 개금동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을 때, 고향 교회에서 수석 장로님을 부산으로 보내서 저를 목사로 청빙하고 싶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도 저는 소위 백색전화기를 130만원을 주고 교단에서 사 주셔서 전화로도 말씀하실 수 있었는데, 연로하신 수석장로님이 저를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향 교회는 장로교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재정이 어려워선지 합동과 통합으로 왔다 갔다 하던 참이었습니다. 장로님은 루터교회도 괜찮으니까 박목사가 오겠다고 하면 따르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만, 조심스럽게 거절했습니다. 저는 루터교회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것도 마음에 걸리지만, 그것보다는 루터교회의 신학과 특히 예배가 너무 좋아서 떠날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는데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완곡하게 거절하고 장로님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고향 교회에서 몇 명의 목사님들이 나왔는데, 그 중에 통합 장로교회 목사님 한 분이 아주 유명해졌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나기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부흥강사협의회 회장이 되어 있었고, 자신이 이끄는 부흥회에서는 그 교회의 모든 문제가다 해결된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잘 아는 교회 동생이었습니다. 그 분의 아버지도 언변이 좋으신 분인데 마을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한 채 별세하셨습니다. 아무튼 저는 고향에 내려가면 옛 교우들이 겨우 아는 척을 할 뿐 가까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훗날 가족들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제가 출세를 하지 못해서라는 것입니다. 명성을 얻지 못한 사람이 끼일 자리란 없구나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도 그런 느낌을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무시나 소외의 아픔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면 이런 말씀을 꺼낼 이유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주된 활동은 복음을 전할 목적에서 설교를 하는 것과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마도 나사렛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신 후에 일어난 일화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해석하시는 것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는가?” 서로 물었고, 그 다음에는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의 형제와 자매들에 대해서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의 지혜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현상적/現象的인 것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말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소위 보리와 밀 그리고 감자 등 양식의 많고 적음이며 심지어 숟가락 수도 알아맞힐 수 있는 정도로 매우 가까운 이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속사람 곧 그의 지혜나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심각하고 치명적인 그들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은 알맹이가 빠진 허깨비들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한 인간을 지배하는 것, 한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인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허깨비들 가운데서는 참으로 필요한 기적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볼품없는 허깨비들이 믿음과 진리 그리고 은총과 감격을 받아들일 통로를 가로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허깨비들이 무엇인지를 눈떠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알고 있는 것들이 허깨비들임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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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6(2025. 1. 27. 월요일).

시편 105:10-12.

찬송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옛 시조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데, 엊그제 소개한 이조년의 <다정가>를 비롯해서 정몽주의 <단심가> 이방원의 <하여가>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김상헌(金尙憲, 1570~1652)<가노라 삼각산아>가 그런 시조들이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하여라.” 김상헌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그는 신흥 청나라보다는 기왕의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했던 탓에 병자, 정묘호란시 척화대신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면서 지은 처량한 시조이다. 명나라면 어떻고 청나라면 어떠냐마는, 정세분석에 실패한 약소국의 한 정치가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하겠다.

 

2.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 살아난 야이로의 딸(21-43)”을 읽었습니다. 예전에 단골로 다니던 어느 이발소는 장로님이 운영하셨는데, 저보다는 10여년 연배여선지 옛날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특히 현신애 권사님에 대해서는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시며 일화들을 소개하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밀가루 같은 흰 가루를 물에 버무려서 사람들의 환처에 붙여주고 치유기도를 하셨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효과가 대단해서 사람들이 그 권사님의 은사집회에는 구름처럼 몰려다니곤 했다 하셨습니다. 이런 은사집회를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고통스러워하는데 그것을 보고만 있을 가족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유명하다는 의원을 다 찾아다니고 효험이 있다는 것이라면 풀뿌리 미물이라도 다 잡아 먹일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옷에 손이라도 갖다 대면 낳을 것 같다는 생각해서 찾아온 한 여인과 당시 회당장으로 존경받는 한 사람이 자신의 어린 딸을 위해 주님을 찾아온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많은 노력을 해왔으며, 마지막으로 주님을 찾아 나선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회당장은 주님 발 앞에 엎드려서 주님께서 손만 얹어주시면 고칠 것 같다고 제안을 합니다. 주님은 그를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행 속에는 또 다른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열 두해나 하혈을 해서 창백한 얼굴로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출혈이 멈출 것으로 믿고 그리하였는데, 주님께서 그녀의 소원대로 손을 대자 출혈이 멈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에서 기적의 힘이 나가는 것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복잡한 사람들 속에서 생길 수 있는 일로 생각하고 대답했으나, 주님은 의도적으로 당신의 옷을 만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여인은 주님께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고, 주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옷을 만지는 것이 병 고침을 받는 길이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현신애 권사님이 진흙을 이겨 그것을 눈에 발라 병을 고친 사건에서 모방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만 생각해선 안 됩니다. 그 여인이 믿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에서 최선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실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에워싼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잡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리고의 맹인처럼, 주님을 향해 소리를 지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열 문둥이들처럼 멀리서나마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외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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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5(2025. 1. 26. 주현절후 셋째 주일).

시편 105:7-9.

찬송 23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대학에 가면 꼭 들어보고 싶은 과목이 있었는데, 철학강의였습니다. 그런데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그 교수님이 쓴 여러 권의 책들을 읽고 감동을 받아 선뜻 그 분의 과목을 신청했는데, 너무 감성적이어서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세간의 인기와는 달리 그 교수님의 강의에 들어오는 철학과 학생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2. 주현절 후 셋째 주일의 구약 느헤미야 8장을 본문으로 율법을 가르친 학사 에스라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연구한 김형준목사님은 <섬기는 사람 느헤미야>에서, 특히 오늘 본문인 8장을 열면서 말의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Boys, be ambitious!를 외쳤던 삿보로 농과대학에서 초빙교수로 3년여를 가르쳤던 윌리엄 클라크 박사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1961년 거창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던 때에 이 말씀을 들으며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서광이 비치는 감격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는 목적은 단지 기억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미래를 꿈꾸기 위함입니다(1-3).

주전 586년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노예들은 3차에 걸쳐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느헤미야는 3차 귀환 때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하여 주전 445년 경 돌아왔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역사는 다분히 인간에 의해서 출발하고 전개되며 결론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진행과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승리의 역사든 실패의 역사든,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굵직한 역사는 우연같은 필연이 있었는데,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참여 혹은 역사 개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데, 우리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더 빛나는 미래를 꿈꿀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 남동쪽 앞 기드론 골자기 기혼샘 옆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해뜰때부터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학사 에스라에 의해서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사람들의 자세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수용적이어야 했습니다(5-6).

공부 잘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저의 25년간의 노 하우에 의하면 선생님의 열굴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한 마디도 놓치지 않을 자세로 말씀을 빨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제가 아산에 터를 잡고서 처음 한 일은, 마을 어린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광고를 낸 일이었습니다. 딱 한번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지금도 가장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들에게 다음 월말고사에 나올 문제를 가르치는 선행학습을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왕도(王道)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목사가 전도하려고 아이들을 꾀이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했습니다. 제가 연세대학 총장 최우등 장학금을 두 번씩이나 받았다는 것을 밝혔는데도 말입니다. 공부는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일지 모릅니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매일 매일 배운 것을 잘 복습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 아멘으로 응답했다 말합니다.

 

학사 에스라의 교수법은 알아듣기 쉬운 가르침이었습니다(8-10).

학생들의 실력이 오르지 않는 원인에는 가르치는 교사의 책임도 있습니다. 제가 대학 1학년때 남대문 지역의 껌팔이 구두닦이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에서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열정은 지금도 자랑스러운 추억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만난 설교자들 중에 가장 쉬운 설교를 잘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동화작가 출신이어선지는 몰라도 누가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택하셨고, 문맥의 흐름도 간결하고 명료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분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낱말도 꼭 영어단어를 덮어 쓰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사족이지요. 강의도 쉽게 가르치시는 분도 있고 일부러 어렵게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서 기자는 에스라의 율법 해석은 알아듣고 깨칠 수 있도록 풀이하여 주었다.”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어린아이나 노인들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설교하는 지도자가 존경을 받는 풍토가 기대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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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3(2025. 1. 24. 금요일).

시편 105:1-3.

찬송 47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016년에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란 영화에서 뭣이 중헌디?”라는 대사가 나온다. 극 중 효진이가 아버지 중구한테 하는 말로 정작 중요한 것은 등한시한 채 중요하지 않은 것에 집중하는 현상을 풍자하는 말로 사회적 유행어가 되었다. 효진이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라고 목이 터지라 외친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라고 여운을 남기며 퇴장하는 효진이의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무엇이 중한지 알고 있는 것일까?

 

2. “잔잔해진 풍랑(35-41)”을 읽었습니다. 목회 초년일 때 해군의 상륙정 비슷한 배를 타고 거제도를 여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산 시절이었는데 제가 속해 있던 목양회와 관련을 갖고 있던 군부대를 위문하는 일이었는지는 잘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만, 출렁이는 바다 물결이 두려웠지만 손으로 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배여서 진땀을 흘렸던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눈앞에 바로 육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도는 높았고, 이러다가 배가 바위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배에 승선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루 일과를 마치신 예수님 일행이 호수 건너편 거라사 지방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가셨는데(5:1), 거센 풍랑을 만나 배에는 물이 차오르고 배는 요동치는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고단하셨는지 배의 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셨다는 배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며,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 돌보시지 않습니까? 하고 주님을 흔들어 깨우자, 주님께서 일어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를 향해 고요하라. 잠잠하라 명하시니 바다가 잔잔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왜 이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고 책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 본문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에 곧 난파될 것 같은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접근방법도 있을 것이고,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게 명령하시는 주님의 행동에 대해서 그 신비한 능력을 주목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소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주님의 책망에 대해서 묵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믿음 없음에서 출발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믿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은 항상 특정한 배경을 토대로 진술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개념은 더욱 더 배경 속에서 의미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일반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어진 이 배경 속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평온하기만 하던 호수에 광풍이 불어온다면,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광풍이 불었고, 어찌하여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왔느냐는 식의 원인 찾기 식 접근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자연현상은 얼마든지 우리의 삶에서 찾아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위기와 같은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지, 과연 믿음이 필요한 것인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문제가 왜 생겼느냐? 이런 문제들이 언제쯤이면 다 사라질 것이냐? 등에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그 자체가 문제투성이 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밀어 닥치는 문제를 어떻게 방어하거나 물리칠 수 있느냐는 의지와 믿음의 과제를 일깨우신 것입니다. 제가 살펴본 바로는 주님께서 상당히 화가 나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는 전혀 믿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이는 호수에서 난파직전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자신들의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는 일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옆에 계심을 의지하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나타낼 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곧 믿음으로 하는 행동 말입니다. 자신의 연약한 믿음을 주님 손에 맡기는 찬송을 부를 수도 있고, 제자들의 마지막 행동처럼 주님께 엎드려 도움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행동이란 주님께 맡기는 그런 태도를 말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저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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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2(2025. 1. 23. 목요일).

시편 104:34-35.

찬송 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 준 이는 존 밀턴(1608~1674)이다. 그는 마음가짐에 따라 천국에서 살기도 하고, 또 지옥에서 살게 된다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실낙원>은 이 두 주제를 균형 있게 소개해 주고 있다. 오늘을 천국에서 살고 싶은가? 아니면 지옥에서 살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2. “등불의 비유(21-25)”,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 “겨자씨의 비유(30-32)”비유로 가르치신 예수(33-3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마태복음서에도 등장하는 비유입니다(13:24-30). 두 곳 모두 천국을 설명하는 비유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밭에 뿌려진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긴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치 땅이 저절로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물론 그 과정은 다른 식물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씨에서 싹이 돋아나고 이삭이 패고, 그리고 마침내 그 이삭에서 열매가 맺히더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천국 역시도 우리들 인간의 눈이나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방법으로 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이런 찬송가를 전혀 부르지 않습니다만, 제가 어릴 때는 가장 많이 들었던 찬송가가 <고대가/苦待歌>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가사를 쓰셨다고 하는데, 그 가사를 한번 읽거나 가락을 아시면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 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도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그런데 식민지 수탈을 겪고, 전쟁의 상처를 입은 우리 민족은 주님 나라가 오시기를 눈물로 기도하고 노래하였습니다만, 가혹하게도 그 나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낌새조차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분들에게 있어서는 비슷한 감정으로 눈물로 기도할 것입니다. 엊그제는 저의 종손주가 수술을 받는다 해서 아산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제대로 쉬지를 못해서 태어나자마자 심장에 스텐트 수술을 하였습니다. 혈관이 너무 작아서 특수 플라스틱을 끼웠는데, 벌써 3번째 그걸 갈아 끼우는 수술이었습니다. 제가 10년 전에 받았던 꼭 같은 수술이었는데, 앞으로 성인이 되면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스텐트 수술을 받는다 했습니다. 제 조카들 중에서는 가장 신앙생활을 잘 하는 내외였는데, 이런 심각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들이 우리들 삶에는 많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답답한 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다르게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에게서 남의 일처럼 지나쳐버렸던 것들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따끔하게 가르쳐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의 잘못도 아니고, 너의 부모의 잘못도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신(9:2-3) 주님의 말씀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만사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처지에서는 그 인과관계를 따지기에는 너무 힘들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이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묵상의 제목인 천국의 도래는 막연한 기다림도 아니고, 끝도 없는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 가만히 자라는 씨앗처럼, 지금 여물어가는 곡식 낟알처럼 천국은 자라고 있고, 익어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그 날을 맞이할 정숙한 처녀들처럼 기쁨과 감격으로 기다리자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 배고파 우는 자식들에게,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 배부르게 밥을 먹고 노래도 크게 부를 그런 날이 올 것이다고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기억에 납니다. 천국도 그렇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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