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37(2025. 1. 8. 수요일).

시편 103:12-14.

찬송 5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쓴 레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이 말 한마디는 명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그리고 이 세계 속에 있는 선함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어야만 합니다. 믿음이야말로 선함이 실현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2.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46-54)”을 읽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문제들 중 심각한 몇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배고픔과 질병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심각한 문제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게 분명합니다. 배고픔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큰 병으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예외이겠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50100보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이 그런 범주에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주변에도 성공했다는 사람이 있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몰랐는데, 뇌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며, 시집간 딸이 사고사로 외손자들을 돌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목회자로 성공했다는 친구가 있는데, 은퇴한 지금도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며 신수 좋은 노년을 즐기는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기초 수급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오래되고 유명한 교파인데 그곳에는 연금제도가 없어서 그렇게 살고 있다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마주쳤던 1세기의 이스라엘 땅에는 지금보다 몇 백배나 더한 배고픔과 질병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섣부른 비난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온통 가난과 질병 얘기뿐이라는 식의 비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다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고, 공동번역 성경에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배고픔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겠지만, 그 어린 아들은 심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난과 질병이 흔해빠진 보편적인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병원에서 얻어들은 얘기입니다만, 열병/熱病이란 복통이든 치통이든 어떤 병이든 열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찬 물수건 요법은 해결책이 아닌 것입니다.

    막강한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왕의 신하는 열병으로 몸부림치는 아들로 인해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어둡고 슬픈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 일행의 동선/動線을 알아냈는데, 자신의 집이 있는 갈릴리 지방을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는 너무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뵙고 거의 죽게 된 아들의 고통을 말씀드리며 아들이 누워있는 가버나움으로 내려와 고쳐주실 것을 간청했다고 말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가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오직 자신의 아들의 긴박한 처지를 해결해 주실 것을 애원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분의 대화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주님의 관심사는 믿음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왕의 신하의 관심사는 자식의 병을 고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뿐입니다. 주님은 집으로 돌아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나중 과정은 성경에서 읽은 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바로 그 시각에 그 아이는 열이 떨어졌고 온 집안이 기뻐 난리가 났을 것이고, 예수님의 관심사대로 그 집안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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