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58호(2025. 1. 29. 수요일).
시편 105:16-18.
찬송 13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45년 8월 6일, 8월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위력을 실감한 미국의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신학자들에게 요청하기를 “우리 인류 앞에 가장 무서운 것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인간성의 폭발입니다. 당신들의 하나님께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라 했다 합니다.
2. “세례자 요한의 죽음(14-29절)”을 읽었습니다. 좋은 이웃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대단한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저는 윤동주의 시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한경관에서 4년을 공부했고, 바로 위에 있는 대학원에서 내리 2년을 더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윤동주의 <서시>를 읽곤 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거나, 남다르게 해석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캄캄할수록 더욱 빛나는 별은 그에게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고, 그런 하나님을 우러르는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서 죽어야 할 운명을 짊어진 모든 생명들, 가깝게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정든 반려견과 자주 창가에 와서 노래를 불러주는 산새들을 사랑해야 마땅하지 않나 하는 정도로 말입니다. 한번은 신약을 전공하는 친구들의 느닷없는 방문으로 놀라신 문상희 교수께서 “가끔은 깊은 밤중에 뜰에 나와 하늘을 바라들 보시게.”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의 의미를 알 듯 한 나이가 됐습니다. 하늘의 별들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는 우리들을 비춰주고 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강은 20대 중반부터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두 개의 질문을 앞 장에 옮겼다 했습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소설의 방향을 바꾸었다 말했습니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윤동주의 글쓰기와 만나는 지점이었습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고 말입니다. 아주 가끔은 죽은 자의 반열에 서 계시는 분들, 거창고의 전영창, 연세대의 김찬국, 문상희, 서남동, 성래운, 풀무원의 원경선, 청십자운동의 장기려, 안동 일직교회의 사찰 권정생선생님들이 저 수많은 별들 속에서 우릴 바라보고 계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분들에게서 힘을 얻어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세례자 요한은 제게 있어서는 아픈 중지 손가락입니다. 소위 성공적인 인생이 예약된 듯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첫 결심대로 홀로 외로운 광야의 소리꾼으로 초야에 묻혀 살다가,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에 의해서 목이 잘린 순교의 길로 끝난 인생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세례자 요한의 주검을 들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잘나가는 권력 실세에 맞섰습니다. 헤롯왕은 자신의 동생 빌립보의 아내 곧 제수씨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 지도자로써는 보여서는 안 될 불륜이라 고발한 것입니다.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오.”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헤롯의 마음속에는 늘 이 불편한 진실을 떠들어대는 세례자 요한이 눈의 가시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카이며 동생의 딸인 살로메가 춤을 추자 그녀에게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고, 살로메는 이를 제 어머니인 헤로디아에게 전했으며, 마침내 늘 불편해 했던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 敎唆한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 광야의 소리꾼은 불륜의 두 여인에 의해서 목이 잘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비추어야 할 광야의 외치는 소리꾼이 너무도 허망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생명과 버금가는 가치가 너무도 함량미달인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쳐 생각해 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망함 그 자체인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과정이 반드시 무게를 지녀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3대 박해자라 불리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됐다는 그 이유가, 콜로세움 광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기 전 한 무리의 기독자들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던 그 눈동자와, 객석에서 술과 고기를 뜯던 로마시민의 썩은 동태눈과를 비교할 때, 그 비교 불가한 새벽 별 같은 눈동자 때문이었다고 한 역사가가 남긴 야사에 있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왕이 베푼 연회석에서 교태를 부리는 한 젊은 여인의 춤사위에, 위대한 선지자인 세례자 요한의 생명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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