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53(2025. 1. 24. 금요일).

시편 105:1-3.

찬송 47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016년에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란 영화에서 뭣이 중헌디?”라는 대사가 나온다. 극 중 효진이가 아버지 중구한테 하는 말로 정작 중요한 것은 등한시한 채 중요하지 않은 것에 집중하는 현상을 풍자하는 말로 사회적 유행어가 되었다. 효진이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라고 목이 터지라 외친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라고 여운을 남기며 퇴장하는 효진이의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무엇이 중한지 알고 있는 것일까?

 

2. “잔잔해진 풍랑(35-41)”을 읽었습니다. 목회 초년일 때 해군의 상륙정 비슷한 배를 타고 거제도를 여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산 시절이었는데 제가 속해 있던 목양회와 관련을 갖고 있던 군부대를 위문하는 일이었는지는 잘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만, 출렁이는 바다 물결이 두려웠지만 손으로 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배여서 진땀을 흘렸던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눈앞에 바로 육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도는 높았고, 이러다가 배가 바위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배에 승선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루 일과를 마치신 예수님 일행이 호수 건너편 거라사 지방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가셨는데(5:1), 거센 풍랑을 만나 배에는 물이 차오르고 배는 요동치는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고단하셨는지 배의 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셨다는 배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며,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 돌보시지 않습니까? 하고 주님을 흔들어 깨우자, 주님께서 일어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를 향해 고요하라. 잠잠하라 명하시니 바다가 잔잔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왜 이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고 책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 본문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에 곧 난파될 것 같은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접근방법도 있을 것이고,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게 명령하시는 주님의 행동에 대해서 그 신비한 능력을 주목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소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주님의 책망에 대해서 묵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믿음 없음에서 출발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믿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은 항상 특정한 배경을 토대로 진술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개념은 더욱 더 배경 속에서 의미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일반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어진 이 배경 속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평온하기만 하던 호수에 광풍이 불어온다면,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광풍이 불었고, 어찌하여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왔느냐는 식의 원인 찾기 식 접근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자연현상은 얼마든지 우리의 삶에서 찾아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위기와 같은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지, 과연 믿음이 필요한 것인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문제가 왜 생겼느냐? 이런 문제들이 언제쯤이면 다 사라질 것이냐? 등에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그 자체가 문제투성이 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밀어 닥치는 문제를 어떻게 방어하거나 물리칠 수 있느냐는 의지와 믿음의 과제를 일깨우신 것입니다. 제가 살펴본 바로는 주님께서 상당히 화가 나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는 전혀 믿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이는 호수에서 난파직전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자신들의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는 일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옆에 계심을 의지하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나타낼 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곧 믿음으로 하는 행동 말입니다. 자신의 연약한 믿음을 주님 손에 맡기는 찬송을 부를 수도 있고, 제자들의 마지막 행동처럼 주님께 엎드려 도움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행동이란 주님께 맡기는 그런 태도를 말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저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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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2(2025. 1. 23. 목요일).

시편 104:34-35.

찬송 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 준 이는 존 밀턴(1608~1674)이다. 그는 마음가짐에 따라 천국에서 살기도 하고, 또 지옥에서 살게 된다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실낙원>은 이 두 주제를 균형 있게 소개해 주고 있다. 오늘을 천국에서 살고 싶은가? 아니면 지옥에서 살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2. “등불의 비유(21-25)”,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 “겨자씨의 비유(30-32)”비유로 가르치신 예수(33-3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마태복음서에도 등장하는 비유입니다(13:24-30). 두 곳 모두 천국을 설명하는 비유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밭에 뿌려진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긴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치 땅이 저절로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물론 그 과정은 다른 식물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씨에서 싹이 돋아나고 이삭이 패고, 그리고 마침내 그 이삭에서 열매가 맺히더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천국 역시도 우리들 인간의 눈이나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방법으로 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이런 찬송가를 전혀 부르지 않습니다만, 제가 어릴 때는 가장 많이 들었던 찬송가가 <고대가/苦待歌>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가사를 쓰셨다고 하는데, 그 가사를 한번 읽거나 가락을 아시면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 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도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그런데 식민지 수탈을 겪고, 전쟁의 상처를 입은 우리 민족은 주님 나라가 오시기를 눈물로 기도하고 노래하였습니다만, 가혹하게도 그 나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낌새조차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분들에게 있어서는 비슷한 감정으로 눈물로 기도할 것입니다. 엊그제는 저의 종손주가 수술을 받는다 해서 아산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제대로 쉬지를 못해서 태어나자마자 심장에 스텐트 수술을 하였습니다. 혈관이 너무 작아서 특수 플라스틱을 끼웠는데, 벌써 3번째 그걸 갈아 끼우는 수술이었습니다. 제가 10년 전에 받았던 꼭 같은 수술이었는데, 앞으로 성인이 되면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스텐트 수술을 받는다 했습니다. 제 조카들 중에서는 가장 신앙생활을 잘 하는 내외였는데, 이런 심각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들이 우리들 삶에는 많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답답한 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다르게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에게서 남의 일처럼 지나쳐버렸던 것들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따끔하게 가르쳐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의 잘못도 아니고, 너의 부모의 잘못도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신(9:2-3) 주님의 말씀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만사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처지에서는 그 인과관계를 따지기에는 너무 힘들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이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묵상의 제목인 천국의 도래는 막연한 기다림도 아니고, 끝도 없는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 가만히 자라는 씨앗처럼, 지금 여물어가는 곡식 낟알처럼 천국은 자라고 있고, 익어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그 날을 맞이할 정숙한 처녀들처럼 기쁨과 감격으로 기다리자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 배고파 우는 자식들에게,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 배부르게 밥을 먹고 노래도 크게 부를 그런 날이 올 것이다고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기억에 납니다. 천국도 그렇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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