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43(2025. 1. 14. 화요일).

시편 104:7-9.

찬송 4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60년대 한국을 찾은 중국의 석학 임어당이 우리 한국 청년들에게 남긴 말은 지금도 곱씹어볼 충고였습니다. “한국의 농촌 청년들아, 성실한 사람이 대접받는 그런 세상을 희망하며 살아가라.” 성공한 인생은 그런 사람일 테니 말입니다.

 

2. “갈릴레아 전도시작(14-15)”, “첫 번째로 부르심 받은 어부 네 사람(16-20)” 그리고 악령 들린 사람을 고치신 예수(21-28)”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서 큰 유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성경이나 구절에 묶이는 경우입니다. 그 결과 성경을 전체적인 구조나 내용에서 살피는 것이 아니라, 소위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목사 후보는 적어도 인문학적인 소양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공부하고 일하던 분이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가르친 학생들 중에는 군인 장교로 군사 훈련을 시키던 일선 대대장이 신학을 한 경우도 있고, 어느 대 기업에서 영업부장을 하던 이가 신학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성실성과 진정성에 의해서 좌우될 뿐 크게 장단점을 논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께서 첫 번째로 제자들을 부르신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시더니,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후,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그물을 버리고 따랐으며,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자 그들 역시 예수님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체력장이나 전공 필기시험이나 인성 시험과 같은 어떤 일정 기준을 통과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은 부르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르심, 이를 한문자로 하면 소명/召命이라는 말입니다. 왕이 자신의 참모로 일꾼을 부를 때 행하던 방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 천민의 재주 있음을 알게 되자 그를 일꾼으로 불렀습니다. 저 유명한 아산 장 씨 영실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총애를 받았고, 훗날 해시계와 물시계, 천문의기, 기후측정기를 발명하였습니다. 과거 시험으로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장 영실처럼 왕의 부름으로 벼슬을 얻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참모가 되었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주님의 참모로써 일할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를 오늘 본문에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열 두 명의 제자들 중에 4명이라면 3분의 1인 셈인데, 그들이 어부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부출신에 대해서 고평가를 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그들이 하는 일이란 비릿내 나는 물고기를 매만지는 일을 해야 했고, 그물을 던지고 몇 마리가 잡혔는지를 셈해보고는 목표치를 이루지 못했다 싶으면 또 다시 힘겹도록 그물을 물 위로 던져야 하는 벌이가 신통치 않은 직업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난다 싶으면 자주 그물이 찢어져서 고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다시 촘촘하게 땜질을 해야 하는 지루한 일상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필이면 이런 어부출신을 예수님은 참모로 삼으려 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은유적인 표현에 걸맞은 것 말고는 그리 호감이 가는 선택기준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틀어서 생각해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기준은 어떤 공식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원성을 사고 있는 에스 대학 법학과 출신 변호사나 검 판사라는 기준처럼 말입니다. 졸린 눈으로 그물을 깁거나, 하릴없는 사람처럼 빈 그물을 예상하면서 바다에 수차례 던지는 어부노릇을 하며 하루를 소일하듯 보내는 어부에게서 무슨 자질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시하고 있는 제자의 직분은 그런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지루하고 힘들고 큰 벌이가 되지 않는 일일지라도, 성실하고 끈기 있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면 누구나 주님의 참모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세상을 채운다고 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만한 세상을 구성하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참모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어제는 미국 위스컨신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는 엥글러 목사님으로부터 모친께서 93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최근 아드님과 따님이 출산하는 등 기쁜 소식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삼가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그 가족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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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2(2025. 1. 13. 월요일).

시편 104:4-6.

찬송 4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 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밝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기에 십상이다. 그래도 정직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 인류사에 정직하고 솔직하게 산 사람들이 바보 같은 그런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반대로 거짓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은 역사의 뒤안길에 깊이 빠져버렸다.

 

2. “세례자 요한의 선포(1-8)”, “세례를 받으신 예수(9-11)” 그리고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12-1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자주 혼란을 일으키곤 합니다. 비슷비슷한 내용을 서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에서부터, 다른 것도 아니고 성경을 여러 가지 다른 버전으로 기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며, 거기에서 오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 등이 생기는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문제들을 성경의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옳으냐 하는 문제까지 부담스럽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문제투성이는 성경에서도 생기고 있음을 알고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문제는 다 숙제로만 남겨질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어 가면 될 일입니다. 우선 우리는 성경의 출생 배경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1세기 초대 기독교회는 엄청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첫째는 성경의 배경인 유대나라가 로마식민 통치에 반기를 든 소위 유대전쟁으로 인해서 완전히 멸망을 당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주후 70년에 일어난 유대전쟁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물론 유대인의 대부분이 전사하였거나 국외로 피신한 것입니다. 마지막 항쟁 터였던 마사다 전적지를 방문했는데, 비참한 최후를 마친 유대 병사들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이런 전체적인 배경과 함께 기독교회는 뿔뿔이 흩어졌고,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들은 매우 단편적인 문서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즈음에 활동했던 바울 등 초대기독교회 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열정은 대단하였고 그에 힘입어서 단편적인 예수의 가르침들이 초대 기독교회 성도들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셋째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단편들은 각기 다른 관심과 목적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었고, 그런 단편들을 종합하고 정리할 필요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주후 367년경 우여곡절 끝에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이었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 현재의 27권의 신약 성경이 정경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소위 정경화의 과정에는 매우 복잡한 논의를 거쳤는데, 이는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지나친 설명이 뒤따라야하기 때문에 생략하고, 충분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는 정도로 이해를 바라며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래도 궁금해 하는 분들을 위해서는 신약 개론을 공부할 것을 권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서의 첫 장을 여는 내용인데, 우선 마가복음서는 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결론을 짓는 바, 그 특징을 복음의 시작이라고 첫 장에서 알리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이와 대조적인 것은 마태복음서는 그 특징을 계보라고 하고, 누가복음서는 그 특징을 내력이라고 밝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은 항상 이 복음서의 중심 주제는 복음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겠다는 점입니다. 복음이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첫 기쁜 소식으로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의 등장과 그에 의해서 시행된 세례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상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죄를 씻는 의식인 세례의식에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깨끗하고 무흠한 분이 남들처럼 세례를 한번 받으신 것일까요?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셨을까요? 저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그 자체가 죄인이 되시러 오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의 죄를 전부 더 긁어모아서 당신의 어깨에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입니다.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진리입니다. 나와 여러분을 위해서 친히 죄인이 되어주신 주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믿는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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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1.

시편 104:1-3.

찬송 46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1930<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을 펴냈다. 참 당돌한 책이다. 1차 대전(19147- 191811)이 끝난 뒤였다. 전쟁의 상흔과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이 끓는 때, 이 책을 써낸 것이다. 행복은 불행을 이기는 것으로 처방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빠져들지 않고, 열정과 관심을 바깥 세계로 돌리는 것으로 진단한 것이다.

 

2. 주현절 후 첫째주일의 사도서간문 롬 6:1-11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들린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인지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1-4).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지 않고 사는 길을 원했던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쪽에 있는 것으로 죽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세상의 영향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절망했으며, 다시금 옛 생활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어두운 먹구름 가운데 살고 있는 제자들과 크리스천들에게 예수께 받은 세례를 기억나게 하였습니다. 세례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살아나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새로운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먼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세례는 우리에게 먼저 죽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례는 죽음과 다시 삶을 깨닫게 하십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5-8).

본래 우리 인생은 죄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말하고 먹고 마시는 일체의 일들이 죄와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규정하는 말, 하마르티아는 빗나간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학생이 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공부에 매진해야하는데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농부가 그날의 일과를 충실히 해야 하는데 술집에 앉아서 술이나 퍼 마시고 있다면 이것 역시 죄입니다. 목표를 빗나가는 삶, 목적을 잃어버리고 엉뚱하게 살아가는 일은 일체가 죄짓는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바라보게 하셨고, 삶의 의미를 깨워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깨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동료 인간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셋째는 날마다 죄를 이기며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9-11).

아담 이래로 모든 인생은 죄의 저주 아래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포자기와 절망 속에 살고 있는데 반해서, 크리스천들은 죄와 투쟁을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크리스천의 대장이 되셔서 우리들을 격려하시고 돕고 계십니다. 크리스천들이 싸워야 할 대상들은 너무 많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적들로 불신과 탐욕 그리고 무기력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가하면 밖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적들도 많습니다. 불의와 거짓 그리고 어리석고 헛된 유혹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매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라 하십니다. 우리들 자신을 대장 예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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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0(2025. 1. 11. 토요일).

시편 103:21-22.

찬송 45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래위의 발자국>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어려운 시기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간에 주님께서 왜 저와 함께 하지 않으셨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단다. 네 시련의 시기에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바로 내가 너를 업고 갔기 때문이란다.” 매리 스티븐슨의 시로 알려졌습니다.

 

2. “물 위를 걸으시다(16-21)”생명의 빵(22-2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1972학년도는 제게는 잊을 수 없는 한 해입니다. 유신헌법이 발동한 해이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제 이름으로 된 전셋집이 생긴 해여서, 수색에 있는 집에서 통학을 하게 되었는데, 벽돌집으로 2층 왼쪽엔 저의 집, 왼쪽엔 몇 분이 차례로 살게 되었는데, 아마 봄에는 천부교에 다닌다는 한 나이든 부인과 그 병든 따님이 거처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그 집에 심방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래도 신학생이 옆에 사는데 아픈 이웃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조심스럽게 의사를 전하고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심방예배의 격식을 차렸는데, 찬송과 기도 성경을 읽은 후, 조심스럽게 천부교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박태선 장로께서 안수하는 물은 생수가 되어 마시거나 바르면 만병통치가 된다는데 해 보셨느냐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답은 갓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데, 자신에게는 의심이 많아선지 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나고 있어서 손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노라 는 대답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분들에게서 배운 것은, 우리들이 바라는 기적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지만, 오직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 물위로 걸으신 기적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 사전에 약속된 일이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날이 어둑어둑한데도 주님은 오시질 않았습니다. 거기다 거세게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고 합니다. 배는 어느 덧 십여 리쯤 갈릴리 호수 한 복판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어둠은 깊어만 가고,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는데 제자들이 탄 배는 호수 한 복판으로 가고 있다면, 이는 낭패중의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들 삶에는 가끔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팔순 기념으로 아내에게는 이모들과 함께 여행 패키지를 끊어 주었다 합니다. 그리고 내겐 생각해 보라고 말미를 준 상태입니다. 여행을 불과 며칠을 앞두고 막내 이모가 뇌수술을 하게 될 거라고 연락이 왔는데, 의료진이 부족해서 서울 대형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답니다. 아들은 병원 예약을 여기 저기 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모 내외가 치료를 받는 동안 묵을 방을 준비해야 했기에 분주해졌습니다. 여행 취소는 너무 늦어 불가능하다하고, 병원 예약은 힘들고 낭패입니다.

    그 옛날 갈릴리 호수에서 거센 바람을 맞아가며 캄캄한 호수 한 복판으로 밀려가는 배를 탄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본문을 읽게 된 것입니다. 박태선의 천부교를 믿는 한 초라한 부녀를 떠올렸습니다. 이럴 때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삶의 한 복판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제자들 앞에 희미한 물체가 그들에게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배에 탄 제자들에게로 말입니다.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을 자신들이 타고 있는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배는 어느 새 목적지에 가 닿았던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실체적 진실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긴 하였지만, 배가 뒤집혀지거나 제자들 중 일부가 물에 빠져 죽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부재중인 가운데 한동안 절망상태에서 두려움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 전부일 수 있습니다. 천만 다행인 한 일화에 불과하다는 말입니까? 어쩌면 주님께서 제 때에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 일이 날 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를 가르치는 내용입니까? 저는 우리들 인간의 삶의 현장을 일깨워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지 엄청난 불행이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우리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항상 두렵고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동행중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들의 역사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센 파도위의 삶을 살았고, 그래서 그 곳에 파묻혀 죽기도 하고 병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신앙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순교자들이 그랬고, 착한 사마리안도 그랬습니다. 법 없이 살았던 저의 할머니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들 중에는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100살까지 살면 잘 산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다는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기독교인에게만은 말입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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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9(2025. 1. 10. 금요일).

시편 103:18-20.

찬송 4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파커 J. 파머/ Parker J. Palmer(1939~)1997년 미국의 1만 명의 교사들에 의해서 교사 중의 교사로 선정된 파머는 <삶이 네게 말을 걸어올 때/원제 너의 삶이 말하게 하라>는 책이 한국에서도 발행되었는데, 퀘이커 공동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우려라.”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의미 있는 삶을 따르라고 말하는 것 같다.

 

2. “5천명을 먹이시다(1-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공관복음서와 함께 4복음서가 모두 기록한 52개 일화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공관복음서(, , )에서는 모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그 많은 군중들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먹일 수 있겠느냐고 걱정스러운 말씀을 읽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서에서는 주님을 따라나선 배고픈 군중들의 해결하기 힘든 근본적인 문제를 제자들에게 풀어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나, 요한복음서에서는 좀 더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문제, 어디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떡을 살 수 있겠느냐로 해석될 수 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에서는 그 해답으로 200데나리온의 돈만 있으면 되겠다는 빌립의 대답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마가복음서 기자 역시 200데나리온의 돈이 언급되고 있지만,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200데나리온의 돈을 마련할 길이 없다는 해답이 등장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도 우리들 앞에 산재한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지,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현역으로 지역교회를 지도하고 있을 때,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잘 할 수 없었던 것은 물질을 청하는 이들이 찾아올 때입니다. 그 중에 기억하는 분이 있는데, 자신은 태안 어디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했으며, 오랜 질병으로 가족은 다 흩어져버렸고, 자신은 두 달에 한 번씩 서울 어느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그 약으로 살아있는 것 같다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집에 내려갈 차비를 보태달라고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도장 파는 일을 해 보고 싶다며 재료와 도구를 구입하는 자금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 지나서는 전파사를 운영해 보고 싶다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천사를 돕는 것으로 생각했던 당시로써는 이리저리 따져보긴 했지만,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은 화가 났습니다. 언덕배기에 가장 높은 우리 교회를 찾아오려면 힘들 텐데, 큰 교회들이 수두룩한데 거기에서 도움을 받으면 좋지않으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때 그 분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 교회들은 저를 거지처럼 대하고 비참하게 돌려보내버렸습니다. 고 말입니다. 종로 3가에는 노숙자를 위한 점심을 제공하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1130분 정도가 되면 탑골공원 주변에는 긴 줄들이 이곳저곳에 만들어지는데, 그 내용이 괜찮았습니다. 그 분들 중에는 넉넉한 생활을 하면서도, 아내나 며느리 눈치가 보여서 나오는 분들도 적지 않다 했습니다. 그러니 밥 한 그릇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그립고 고픈 때문이었습니다. 200데나리온만이 문제해결의 열쇠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도 삶의 의미가 필요한 현실임을 알릴 방법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3.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당신에게, 부제가 붙은 책 <어른의 인생수업>을 구입했습니다. 50권의 책을 하나하나의 주제로 요약해 묶었는데, 관심을 끌만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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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8(2025. 1. 9. 목요일).

시편 103:15-17.

찬송 4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비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한 서민을 더욱 힘들게 하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그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전당포의 노파 같은 인물은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 확신범이었다. 그러나 살인을 한 후에 그는 자신은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인 것을 깨닫고 오랜 번민과 방황 끝에 자수해서 8년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게 된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태초이래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이유로 죄를 짓고 벌을 받으며 살아간다. 어떤 경우에도 잘못에는 벌이 따른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2.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1-15)”을 읽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밝히는 지식 뿐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그런데 만일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는 공지영 작가의 책을 미리 읽었더라면, 성지 순례가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독교의 성지인 이스라엘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 역사적 지점들을 표시해 두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디가 어딘지 두리번거리다가 하얀 머릿속을 가진 채 돌아와야 했을지 모릅니다. 많은 고증을 거쳤겠지만, 여기가 팔복의 말씀을 전하신 자리 팔복교회입니다. 여기가 주님께서 땀이 핏빛처럼 흘려 기도하신 바로 그 바위 터입니다. 라고 교회도 세우고 동판으로 표식을 해 두었으니, 순례자의 상상의 나래는 풍성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 안나 교회를 찾아가는 노정은 값으로는 사과 한 알이 전부였지만, 제게는 매우 지난/至難한 걸음이었습니다. 바로 그 성당 구역 안에 그 옛날 수 십, 수백 명이 모여 있었던 베데스다 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계단으로 한참 내려가야 썩은 물들이 고여 있는 옛 못 터가 나오는데, 그 자리에는 건물을 둘러싼 5개의 통로형태의 행각이 있었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38년 된 반신불수의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법 큰 규모를 갖춘 2천 년 전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 하시겠습니까? 2천 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시아에서 온 낯선 순례객 한 사람만 서 있으니 말입니다. 그 결정적인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예수님의 도움이 더는 필요 없다는 듯,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현실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38년 된 환자를 불러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그의 모습을 보시고 그의 병이 오래 된 것을 아셨다 하십니다.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는 대답합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베데스다 못에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는데,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깨끗이 낫는다는 전설 말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병자가 얘기한 후에 주님은 그에게 명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자 곧 나아서 걸어가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걸 일러준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소홀히 여겨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가 되는 등 시련을 겪는 원인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안식일에는 해서는 안 될 39가지 금령/禁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무화과 열매 한 알의 무게가 나가는 물건을 들 수 없다는 금령도 있었습니다. 그리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한 사람이 누군지를 말하라고 법석을 떠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었는데, 나중에 성전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네 병이 말끔히 나았으니, 앞으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질병이나 시련 같은 것들은 죄가 가져다 준 형벌로 이해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죄란 우리 인간들이 잘못할 때마다 덮어씌우는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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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7(2025. 1. 8. 수요일).

시편 103:12-14.

찬송 5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쓴 레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이 말 한마디는 명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그리고 이 세계 속에 있는 선함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어야만 합니다. 믿음이야말로 선함이 실현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2.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46-54)”을 읽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문제들 중 심각한 몇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배고픔과 질병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심각한 문제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게 분명합니다. 배고픔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큰 병으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예외이겠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50100보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이 그런 범주에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주변에도 성공했다는 사람이 있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몰랐는데, 뇌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며, 시집간 딸이 사고사로 외손자들을 돌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목회자로 성공했다는 친구가 있는데, 은퇴한 지금도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며 신수 좋은 노년을 즐기는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기초 수급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오래되고 유명한 교파인데 그곳에는 연금제도가 없어서 그렇게 살고 있다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마주쳤던 1세기의 이스라엘 땅에는 지금보다 몇 백배나 더한 배고픔과 질병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섣부른 비난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온통 가난과 질병 얘기뿐이라는 식의 비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다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고, 공동번역 성경에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배고픔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겠지만, 그 어린 아들은 심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난과 질병이 흔해빠진 보편적인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병원에서 얻어들은 얘기입니다만, 열병/熱病이란 복통이든 치통이든 어떤 병이든 열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찬 물수건 요법은 해결책이 아닌 것입니다.

    막강한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왕의 신하는 열병으로 몸부림치는 아들로 인해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어둡고 슬픈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 일행의 동선/動線을 알아냈는데, 자신의 집이 있는 갈릴리 지방을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는 너무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뵙고 거의 죽게 된 아들의 고통을 말씀드리며 아들이 누워있는 가버나움으로 내려와 고쳐주실 것을 간청했다고 말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가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오직 자신의 아들의 긴박한 처지를 해결해 주실 것을 애원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분의 대화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주님의 관심사는 믿음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왕의 신하의 관심사는 자식의 병을 고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뿐입니다. 주님은 집으로 돌아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나중 과정은 성경에서 읽은 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바로 그 시각에 그 아이는 열이 떨어졌고 온 집안이 기뻐 난리가 났을 것이고, 예수님의 관심사대로 그 집안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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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6(2025. 1. 7. 화요일).

시편 103:9-11.

찬송 31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어렵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날마다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남긴 명언인지는 모르나 명언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값진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한다.

 

2. “가나의 혼례(1-11)”을 읽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1979년 여름 저는 혼자서 이스라엘을 방문하였고, 성경에 나오는 유명 순례지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룹 투어를 모집하는 광고가 욥바로 가는 문 주변에 여기 저기 붙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내원도 없이 혼자가 여행하는 것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순례지는 물론 순례자들을 관찰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나라는 비탈진 마을 아래에는 나사렛이 있었는데, 그곳에 규모가 커 보이는 성모 영보성당이 있는데, 거기엔 우리나라 가톨릭에서 기증한 한글로 된 주기도문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두 분의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로 윗마을 가나에서 사온 포도주를 들고, 성당 주변을 다니는 사제복을 입은 신부님께 성만찬을 하는 바람에 마침내 술에 취한 것입니다. 성지순례에서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요단강 하류 <알마그타스>에서는 여러 명의 한국인 순례자들이 한국인 목사에 의해 세례 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지순례에 비기독교인이 갔을 리는 없을 테고, 이미 세례를 받은 교인이 요단 강물로 세례식을 하고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재세례를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차제에 요단강의 세례 터에 대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구가 주장하는 <까스르 엘 야후드>와 요르단이 주장하는 <알마그타스>와 논쟁을 벌였는데, 최종 결론은 요르단 지역인 <알마그타스>의 세례 터를 유네스코가 2015713일에 세례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습니다. 사실 그곳에 흐르는 요단강폭은 불과 10여 미터 밖에 되지 않으며, 논쟁이 된 세례 터들 사이의 거리도 수 미터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가나의 혼례식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기적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고, 물이 포도주가 된 그 위대한 변화를 가장 쉬운 말로 설명했던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가나의 혼례식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포도주가 동이 났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혼례식은 초청된 사람만이 입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모든 피로연 잔치는 계획되고 준비된 상태였는데, 동이 날 수가 없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다른 음식과는 달리 포도주만은 계산이 불가능했을 수 있습니다. 고주망탱이가 되도록 마시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과방/果房을 감독하는 연회장에게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우리 주님의 모친 마리아는 이 문제를 주님께 귀띔해 주었고, 주님은 정결례로 사용하는 항아리 6통에 물을 가득 붓게 하시고, 그 다음에 그것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게 하여, 맛있는 포도주를 가지고 남은 잔치를 잘 치렀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어떻습니까? 살다보면 이런 난처한 일들이 우리들 삶에는 참 많습니다. 그럴 경우 오늘 본문에서처럼,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도 있고, 지혜를 발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여신도회 임원 6명을 오찬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70년도 시절 서양 집을 한 번도 가본 일 없던 여신도회원들은 궁금해 하는 두어 명의 다른 회원들을 데리고 갔더랍니다. 주인 것 까지 7덩이의 스테이크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커피와 쿠키를 대접하고 말았더랍니다. 우리나라 주부였다면, 그럴 경우 기왕 끓인 소고기 무 국에 소금 한 줌 더 넣고 물을 한 바가지 넣어 끓여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훗날 영국의 계관시인 바이런은 케임브리지 대학 종교학 시험에서, 가나의 혼인장치에 대한 의미를 진술하라는 물음에,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그 얼굴이 붉어졌도다.”라는 유명한 답안을 작성해서 높은 학점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주인을 만나기만 하면 만사형통한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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