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93(2024. 11. 25. 월요일).

시편 94:5-7.

찬송 52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파란 만장한 정치인으로 살았습니다. 당시의 법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사람이 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2대 대통령 선거에서 존 애덤스에게 패해 부통령이 되었으나, 줄곧 반대만을 했었고, 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경쟁자였던 에런 버가 부통령이 되어 사사건건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명언으로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말하라. 매우 화가 나면 백까지 세어라.”는 말이 있는데, 안중근열사가 붓으로 쓴 백인당중 유태화와 흡사한 명언입니다. 쉬운 인생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2. “짐을 서로 지라(1-10)”을 읽었습니다. 교회력 마지막 주간인 왕이신 그리스도의 주간에는 성경 본문들이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세상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성경에서도 탕평본문을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무튼 갈 6:1-10의 본문에서 우리는 서로 짐을 지라는 권고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스도가 왕이신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덕목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그 덕목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판 후에 맞을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맞보기 전에는 부득불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온갖 죄악의 소굴에서 살 수 밖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와 더불어 살던 많은 이웃들, 그 중에는 매우 거룩한 사람들로 알려진 그런 분들이 사실은 범민/凡民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부끄러운 모습들이 들춰지는 것을 볼 때,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그들을 충고하고 타산지석/他山之石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으라 말씀합니다. 그런 다음에 서로 짐을 나누어지라는 권고를 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들 인생살이가 힘겨운 것은 자신이 짊어진 짐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그런 생각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밖을 향해서 원망의 화살을 쏘아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와 부모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짐을 마주 대하면서 많은 생각의 변화가 온 것입니다. 1년에 한 두 차례는 제가 출석하는 교회(2)의 목회자들과 수고하는 제직들을 초대해서 하루를 쉬도록 하곤 하는데, 그럴 때 개인적인 이런저런 고충들을 듣곤 합니다. 속을 썩이는 자녀들이며, 일가 친척에 관해서, 그리고 때로는 경제적인 어려움들까지 말입니다.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힘들지 않은 인생은 하나도 없다는 가르침 말입니다. 허물없다 생각하는 동문수학하던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짐에 대해서 생각을 나누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해의 폭을 넓힐 수가 있습니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는 동안에 아내를 잃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멀쩡하게 병원에 들어섰는데, 임종도 지켜보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가졌던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신앙마저 사라져 버리더라고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사위도 세상을 떠나서 슬퍼할 겨를도 없이 불쌍한 딸과 손주들을 자주 찾아보기로 작정했다 합니다. 그러니 누가 이런 이웃들 앞에서 허튼 자랑을 할 수 있으며, 삶의 무게를 운운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나누라고 하십니다. 어쩌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제게는 오래된 제자 한 분이 40년이 넘게 명절을 챙겨주고 있는데, 시각 장애인입니다. 완전 실명자로 대학을 다닐 때, 자원봉사자를 양성해서 도왔던 것을 잊을 수 없다며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도서관장도 하고 실명자들을 위한 봉사단체의 장도 맡기도 했는데, 제게는 많은 깨우침을 주는 스승이기도 합니다. 캄캄한 세상을 살고 있는 자신보다, 환한 세상을 살아가는 저를 더 걱정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가 강조하는 말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세상 끝날 때까지 사랑과 감사의 끈을 이어가겠다 다짐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정상입니다. 은혜를 감사로 갚을 수도 있고,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도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 심는자는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서 심는자는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가을 햇살이 주님의 사랑처럼 따뜻하게 내려쬐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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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92.

시편 94:1-4.

찬송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70년대 연세대 영문과 이봉구 교수는 자신이 번역한 <영원한 세계의 명시선>의 첫 시로 R. 브라우닝의 피파의 노래를 실었습니다. “때는 봄/ 아침 7/ 언덕엔 이슬방울 진주되어 빛나고/ 종달샌 하늘 높이 나는데/ 달팽인 가시나무 위에 도사렸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온 누리가 평화롭도다브라우닝의 이 피파의 노래는 천국을 옮겨 놓았습니다.

 

2. 오늘은 교회력 상으로 마지막 주일입니다. 구약 사 51:4-6을 본문으로 순간에서 영원으로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까닭은 순간으로 마치기엔 우리 삶이 너무 짧기 때문만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창조된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알게 하신 분은 야훼 하나님으로, “내가 베풀 구원은 영원하고, 내가 세울 정의는 넘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목하는 사람들은 새 역사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4-5).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을 똑 바로 쳐다보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아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똑바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귀를 기우려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느 대기업 사장이 처음으로 봄 대심방에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부인 권사님과 같이 교회 좀 나오시라고 권했답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매 주일 골프장에 가면서 아내를 교회당 정문에서 내려주고 갔다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 천국에 가겠느냐고 하더랍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처럼 그런 자세가 하나님께 통할 것으로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설교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을 듣는다고 합니다. 말씀의 맥락을 따라야 하고 그 중심점을 들어야 합니다.

 

하루살이처럼이 아니라,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라 하십니다(6a ).

어느 유명 설교가의 설교문을 보내왔습니다. 전체적으로 버릴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진공 속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존재하게 했던 역사에 대해서 무관심핳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인식에 있어서도 무책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학을 배울 때, 우리가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은 배경속에 있는 말씀/ Text in Context” 이 설교라고 말입니다. 하릴없이 하나님께서 채찍을 하신다 하며, 난데없이 복을 주신다 하실 리 없으니 말입니다. 그럴만한 배경을 가지고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도외시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가 있으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을까요? 조국의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외치던 은사가 있었는데, 그 배경을 무시한 어리석은 제자들이 빨갱이로 몰았습니다.

 

영원을 품고 정의를 따라 사는 것은 그 자체가 삶의 의미이고 목적입니다(6b ).

흔히들 이생을 순간의 삶이라 하고, 저승을 영원의 삶이라고 갈라냅니다. 마치 이생과 내생이 분리되어 있는 줄로 착각하는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생과 내생을 불연속성인 세계로 보지 않고, 연속선상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생에서도 저승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C. H. 다드는 예수에 의해서 세워진 새로운 현상으로, 제자들에 의해서 계승된 실현된 종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예수의 정신과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파스칼의 말처럼(그의 노름이론), 예수와 더불어 사는 한 영원한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로마 가톨릭의 수도사들처럼 완덕/完德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부족한데로 만족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우리 역사엔 그리고 우리 주변엔 적지 않음을 눈떠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살고 있음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원과 정의를 누리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의 의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591(2024. 11. 23. 토요일).

시편 93:3-5.

찬송 2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솝 우화 중에 접시와 호리병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여우가 두루미를 만찬에 초대하였습니다. 두루미는 잔뜩 치장을 하고 만찬에 참석하였는데,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넓은 접시에 담겨 있었습니다. 맛있게 식사를 마친 여우가 두루미를 보니 식사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긴 부리로 몇 차례 접시를 찍어 보다가 그만둔 것이었습니다. 며칠 수 이번엔 두루미가 여우를 만찬에 초대하여 참석했는데, 이번에는 식탁위에 음식들이 모두 호리병에 들어 있었습니다. 두루미는 맛있게 식사를 했지만 여우는 전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세상 풍조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합니다.

 

2.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심판하시다(1-13)”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다(14-21)”을 읽었습니다. 가끔 흥미로운 질문들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질문들 중에는 과연 하나님다운, 하나님스러운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도 있습니다. 화를 내고 심판하시는 모습과, 사랑과 축복을 하시는 모습 중에서 하나님께 어울리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저는 두 번째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류의 타락이후의 그 많은 영겁을 세월을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신 과정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요엘서의 마지막 말씀을 둘째 단락으로 택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라 콧구멍보다 작은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신다.”거나,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한 사람들만 구원하신다.”는 옹졸한 생각을 고집하는 것을 두고 그리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많은 증거자료들(proof texts)이 없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구원받는 사람 144,000명에 관한 주절입니다(7:1-4).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분들은 매우 위험하고 편협한 분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요나서를 다시 읽어야 합니다(1:1-11). 그래서 신학자들은 성경을 통전적(integrity)으로 읽을 것을 강력 권합니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먼저 보라는 말입니다. 산에는 소나무 한 그루만이 아니라, 수많은 다양한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입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가 기대하는 복과 성경이 말씀하는 복이 같은 것인가? 하는 물음도 필요하고, 하나님은 어찌하여 복을 주시고 싶어 하시는가에 대해서도 진지한 묵상을 가져야 하는 때문입니다. 대체로 모든 종교는 복을 기원하고 또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선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이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대체로 생각하는 복이란 몸이 건강하고 생활 주변이 형통하며, 희망하는 일들이 잘 풀리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른바 사전에서 말하는 그런 류의 복입니다. 이른바 오복이라고 불리는 것들인데, /-/-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 그리고 고종명/考終命을 말합니다. 그대로 해석하면 오래 살고 부를 누리며 건강하고 이웃에게 덕을 끼치고, 제 명에 죽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다를까요? 대표적인 성경 말씀은 마 5:3-11에 나오는데,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 다름은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복은 비교적 개인적으로 누리는 이로움이라고 한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은 개인을 넘어서서 보다 넓은 세상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힘쓰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좀 더 전체적인 성경의 맥락에서 볼 때, 성경이 가르치는 복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기본적인 내용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언 듯 보아서는, 외적인 의미에서는 희생과 봉사가 전부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 삶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훨씬 더 귀하고 값진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나,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세상은 복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590(2024. 11. 22. 금요일).

시편 93:1-2.

찬송 1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35대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는 이런 말을 남겼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포착하지 못할 뿐이다.” 팬데믹 기간이래서 실패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히려 팬데믹 기간이어서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무슨 말인가? 기회는 맑은 날이든 궂은 날이든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이다. 성공을 준비하는 삶의 자세이다.

 

2.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리리라(1-8)”을 읽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육과 혼 그리고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육이란 눈에 보이는 요소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썩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에 반해서 혼이란 인간의 정신적인 요소로 생각과 지성 등을 말하며 인간이나 동물의 내면적 요소를 말할 때 사용합니다. 그러나 영이란 하나님과 관계하는 내면적 요소로, 마음과 의지 등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이런 설명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다만 순전히 설명을 하기 위해서 내놓은 주장입니다. 가령 오늘 본문에서는 야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만민에게 내려주시겠다는 신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을 우리는 성령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이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도 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운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우리들 인간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에 사로잡혀서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할 수 없도록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는 말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야훼의 날이 오기 전에, 곧 말세의 날이 이르면, 우리들 모두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여러 가지 역사/役事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게 되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남녀종들에게도 하늘과 땅의 징조를 보게 된다고 말입니다. 야훼의 날은 무섭고도 두려운 날이 될 터인데, 누구든지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야훼가 구원자이심을 믿고 구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요즘 엔젤라 더크워스의 <그릿/Grit>이라는 책에 빠져 있습니다. 더크워스는 이른바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책을 썼다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재능이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끈기가 있는 사람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재능보다는 끈기와 열성을 더 높게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재능을 더 높게 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이 지향하는 것은 재능을 믿는 사람들은 퇴보하는 경향성이 있는 반면에 끈기가 있는 사람은 발전하는 경향성이 있다고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능과 끈기라는 두 요소를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발적인 내적 욕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발적인 욕망을 자극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소망하는 목표에 이르도록 지탱해 준다고 말입니다. 저는 책을 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우리를 끈기와 열정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에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가르치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게 하고 이해하게 하며 마침내 예수를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게 하신다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힘쓸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재 하셔서, 우리를 지혜로운 사람으로 재능과 끈기를 가진 사람으로 도우시도록 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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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89(2024. 11. 21. 목요일).

시편 92:13-15.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뉴욕 출신의 배우이자 가수 작곡가인 일카 체이스(Ilka Chase)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생은 어느 덧 지나간다. 그러니까 견딜 만하다.” 사람들은 역경을 이기고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견디라는 속내를 비치고 있습니다. 까닭은 우리 인생이란 참고 견디지 않으면 잠시라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다(20-27)”을 읽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쉬운 일이 있는가 하면, 가장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가장 쉬운 일이 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라니 아이러니 합니다. 제게 있어서 그래도 쉬운 일은 설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쉬운 설교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인 것을 매일 깨우치고 있습니다. 1974년부터 전임 전도사로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기 시작해서, 한 주간에도 10번 이상 설교 준비를 해 왔으니까, 그 세월이 50년 계속 진행 중이니, 그게 맞는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하루에 달랑 묵상자료 한 편을 쓰는데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제가 숙제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말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회개를 촉구하는 신탁/神託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제 제가 붙인 제목처럼 인간은 회개하고,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외람되긴 하지만, 그 과제들이 서로가 떠맡은 과제들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고 죄악을 저지르는 존재라는 말이며, 그래서 회개는 응당 서둘러 해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인간이 가장 잘 그리고 가장 쉽게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어느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 꾀병을 핑계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교회에서 돌아온 아내에게 목사님이 무슨 설교를 하셨어?”라고 묻자. “회개하라고 하십디다.” 라고 대답하자, “누구 들으라는 설교야?” 라고 하니까, “당신이지 누구겠어.” 하더랍니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제 구실하며 살자는 말도 그렇습니다. 과연 인간 구실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짓는 일에서 손을 떼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회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회개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가끔 저는 이런 망측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배알이 없으신 분이실까? 하고 말입니다. 하루는 어느 전도사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도대체 인간을 왜 사랑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넘치고 넘치는 사랑인 은총까지 베풀어 주시니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 대답은, “그게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겠어요?” 정말 모처럼 신통한 대답을 했다 지금도 그리 생각합니다. 어땠습니까? 자식이 미울 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그런 자식이 더 불쌍해지고 더 사랑을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부르짖는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15-17). 그리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 불쌍한 생각이 드시어 이렇게 대답하셨다.”(18) 고 말입니다. “흙아, 두려워 말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짐승들아, 두려워 말라. 들판의 목장은 푸르렀고, 나무엔 열매가 열렸다. 무화과나무와 포도 덩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 하나님께 감사하여 기뻐 뛰어라. 너희 하나님께서 가을비를 흠뻑 주시고, 겨울비도 내려 주시고, 봄비도 전처럼 내려 주시리니, 타작마당에는 곡식이 그득그득 쌓이고 독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라.”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원수도 갚아 주시마 약속하신 것입니다. 메뚜기, 누리, 황충이, 풀무치가 먹어 치운 햇수를 세어 갚아주시겠다고 말입니다. 대국/大國이라고 기세등등하게 으스대던 나라들을 한낱 메뚜기와 황충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낱낱이 아뢰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우리의 몫입니다. 자기 몫을 챙겨 따르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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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88(2024. 11. 20. 수요일).

시편 92:13-15.

찬송 2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파스칼(1623. 6-1662, 8)은 프랑스의 수학자 신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등 많은 업적은 물론 명언도 남겼습니다. “마음속에 공허감이 있다면,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앙의 필요를 강조하고 강조하였는데, 그가 젊은이들을 위해서 만든 파스칼의 노름(Pascal’s Gambling)에서는 하나님과 영원을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무한대의 가치를 누리는 사람이라는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2. “돌아오라(12-19)”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론적인 해석자를 신학자라고 부르고, 생활을 위한 해석자를 설교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두 해석자들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을 밝혀서 전달하는 소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두 해석자들은 부단히 서로에게 도움을 주려고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때 신학이 보급되기 전인 초창기의 기독교회에서는 많은 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도행전 교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가령 세례를 예로 들면, 상당기간 동안 교회는 물세례만을 가르치고 시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해서 가르쳐야 했고, 또 실행에 옮겨야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적어도 초대교회 안에서는 약 400년 동안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 관해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성령 하나님이 함께 일하고 계심을 포함시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 28:20에 나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듯 신학자들은 성경의 의미를 자구/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적인 흐름에서 통전적(integrity)으로 이해하도록 권고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결과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원대한 목적에서 기록되었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되었고, 예수는 구약이 예언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라는 신앙 체계를 확립한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용어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중요한 용어 회개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메타노이아 라는 용어인데, 이 용어가 제시하는 개념은 처음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시궁창을 향해서 달려가던 사람이, 그 썩은 시궁창에서 돌아서서 푸른 하늘을 향해서 제자리로 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라는 말은 단순히 마음의 뉘우침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고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거짓과 불의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시고 복을 내리실지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 시온산에서 나팔을 불어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노인들과 어린아이들도 모아들이라고 합니다. 신혼부부도 신방에서 나오고, 제사장들도 울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빌라고 하십니다. 이런 회개는 그동안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다시 얻게 되는 많은 선례/先例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회개의 요청을 하셨고, 그 다음 하나님의 은총 여부는 하나님께 맡기자는 암시입니다. 하나님은 하릴없이 회개를 요구하지 않으셨을 테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나 축복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만을 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인간이 할 일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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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87(2024. 11. 19. 화요일).

시편 92:10-12.

찬송 17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민기(19513- 20247) 1971<그날>이라는 소박한 노랫 말과     가락을 만들었습니다. “꽃밭 속에 꽃들이 한 송이도 없네. 오늘이 그날일까 그날 언제일까. 해가 지는 날 별이 지는 날, 지고 다시 오르지 않는 그날이/ 싸움터에 죄인이 한 사람도 없네. 오늘이 그날일까 그날 언제일까. 해가 지는 날 별이 지는 날, 지고 다시 오르지 않는 그날이/ 마음속에 그님이 돌아오질 않네. 오늘이 그날일까 그날 언제일까. 해가 지는 날 별이 지는 날, 지고 다시 오르지 않는 그날이.” 후렴이 본문보다 세배나 긴 매우 낯선 가사입니다.

 

2. “농사를 망친 농부들의 애곡2(13-2:2)”을 읽었습니다. 농사를 망친 농부들이 걱정하고 염려해야 할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철부지 어린 것들에게 먹일 양식이 없으니, 그보다 더 큰 걱정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 전에 드릴 곡식도 포도주도 모두 떨어졌으니, 슬피 울고 통곡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런 한 두 구절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 신앙 중심을 외치는 이들이 생각보다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해나 곡해는 유대교 신앙 혹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기초가 부실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농부들이 추수를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란, 추수한 농산물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십일조로 따진다면 수확한 곡물의 10%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확한 곡식이 전혀 없었다는 비참한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는 장애인 교회와 정상인 교회 두 곳인데, 교인 수는 1 : 3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의 교회들의 재정 형편을 넘겨짚어 보면, 교인 수에 비례해서 1 : 3 정도가 되어야 정상일 텐데도, 실제는 반대라는 말입니다. 장애인 교회가 재정 형편이 건전하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3명이나 되지만, 모두가 자비량입니다. 재정 관리를 평신도 중에서도 장애인들에게 다 맡겼다고 합니다. 교인 분포는 장애인과 정상인이 1 : 2 정도 됩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이 많은 사람들이 누구일까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죄인처럼 숨죽이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훨씬 더 드릴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농사를 망친 사람들을 주목해서 바라봅니다. 마땅히 슬피 울고 통곡해야 할 사람들이 사실은 아직은 농사를 망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제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단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소집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말입니다. 단식(斷食/ 혹은 금식)하는 까닭은 온전히 하나님께 부르짖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동/擧動하실 날이 눈앞에 이르렀다고 말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하나님께서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오시지 않기를 내심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실 하나님은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칭찬과 은총을 주시는가하면, 이와는 정 반대로 채찍과 저주의 말씀을 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을 찾아오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 것 같습니까? 요엘 선지자는 그 날에 들려올 아비규환의 소리를 정리했습니다. “야훼여, 내가 부르짖습니다. 들판의 목장이 타 버렸습니다. 벌판의 나무들도 모조리 타 버렸습니다. 물줄기들은 모두 마르고, 들판의 목장도 다 타버려, 가축들이 벌판에서 주께 부르짖습니다.” 시온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더욱 두렵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야훼께서 거동하실 날이 왔다. 어둡고 음산한 날, 짙은 구름이 덮인 깜깜한 날, 산들이 까맣게 수도 없이 많은 무리가 덮쳐온다. 이런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천만대에 이르도록 다시없으리라.” 곡식만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목장의 풀들도, 그 풀을 뜯어 먹어야 할 가축들도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날이, 저주의 날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이 사랑가득한 날, 기쁨 가득한 날, 그리고 감사 가득한 날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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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86(2024. 11. 18. 월요일).

시편 92:7-9.

찬송 26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명나라 말기의 문인 홍자성과 환초도인이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채근담菜根譚>은 전편 222, 후편 135조로, 인간의 절실한 고민과 해결을 담은<채근담>은 그 어느 고전보다 쉽고 단순하게 인생의 참뜻과 지혜로운 삶의 자세를 알려주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인생 지침서이다. <채근담>에 이런 말이 전한다. “남의 허물은 용서해야 하지만, 자기의 허물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인가? 언제든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의 허물을 먼저 살피자는 뜻이 아닐까?

 

2. “농사를 망친 농부들의 애곡(1-12)”을 읽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표제어로 울어라!” 라고 붙였습니다. 한 해 농사를 망친다는 것은 다음 추수 때까지 굶주려야 했기에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요? 아마도 제 또래 쯤 되시는 분들은 대부분 경험했을 보릿고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1950년대 60년대 초까지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세끼 밥이 전부였고, 그것도 제대로 먹지 못해 칭얼대는 철부지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농사를 망쳤다고 할 때, 그 부모들의 마음은 한 없이 서글프고 힘겨웠을 것입니다. 가령 저와 같이 9남매들 속에서 자라고 있다 한다면, 불평도 늘어놓았을 것이고, 이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던 어른들은 야단을 치거나 회초리로 입막음을 했을 게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고구마의 크기로 형제들에게 식사량을 정해주시던 어머니께, “엄마, 나도 큰 것 먹을 수 있어.”라고 점잖게 불평을 하기라도 하면, “네 형은 영어를 배우니까 많이 먹어야 하는 거야. 너는 아직 힘든 공부를 하지 않지 않니?” 라고 타이르시던 어머니의 속은 얼마나 아프셨을까를 여든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엘서를 기록했다는 요엘은 브두엘의 아들로 소개되는데, 요엘서는 적어도 주전 830-350년 사이의 광범위한 연대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릴 심판은 여러 종류의 곤충들에 의해서(팥중, 메뚜기, 느치, 황충) 차례로 곡식의 잎을 갉아먹어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백성이 저지른 죄의 값이었습니다(2-4). 외국 군대가 쳐들어 와서 더 이상 포도주를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말씀합니다(5-7). 그리고 어린 시절에 정혼해 두었던 사내가 죽어서 처녀가 검은 상복을 입게 되리라 말씀합니다(8). 곡식과 포도주 등을 성전에 드릴 수 없어서 제사장들도 걱정과 근심에 고개를 떨구고 있으리라 말씀합니다(9). 죄의 값은 모든 사람들의 즐거움과 희망을 앗아간 것입니다(10-12).

    북왕국 이스라엘의 13대 왕 여로보암 2세 때처럼, 영토가 넓어지고, 풍요와 번영의 시대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도덕적인 타락과 우상숭배가 더욱 더 왕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 중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가난과 배고픔의 시절에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좀 도둑은 왕성할지 모르지만, 패륜과 정의롭지 못한 대형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21세기 한국 사회는 이전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한 번영의 축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부패로 썩은 냄새가 도처에서 나는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맡긴 야훼 하나님의 신탁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값은 반드시 물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관한 제1인식인 두려움의 대상을 끝없는 사랑의 화신으로 희석시킨 시대인식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이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죗값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리를 향해 돌아서게 하는 회개의 삶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임을 자각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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