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69(2024. 11. 1. 금요일).

시편 89:42-45.

찬송 57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리 선데이는 1880년대에 미국의 내셔널 리그 (야구)의 외야수였으며 20세기의 초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전도자였다. 그가 남긴 명언으로 많은 사람이 재능의 부족보다 경험의 부족으로 실패한다.” 라는 말을 남겼다. 재능이 중요치 않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경험의 부족이 치명적인 문제가 되곤 한다. 경험을 잘 살리는 것이 훌륭한 재산이 된다.

 

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변론하시다(1-8)”을 읽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중에는 선지자 혹은 예언자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는 별 볼일 없는 인간에 불과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때문입니다. 그들은 밤에 꾸는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탁/神託을 백성들에게 전하곤 합니다. 때로는 준엄하게 때로는 사랑에 넘치는 음성으로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 인류 역사에 항상 존재해 왔던 무당이나 박수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선교의 부름을 받고 몽골 울란바토르에 갔을 때, 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무당이 제사를 지내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벽돌로 울타리를 쳐 두었는데, 어린 아이도 뛰어넘어갈 정도로 아주 낮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운데는 미국의 인디언들의 이동식 천막집이 한 채 있었고, 여기저기에 짐승을 불태운 흔적들이 있었고, 짐승의 뼈들이 그 해골과 함께 뒹굴고 있었습니다. 몽골에서는 무당을 영험한 능력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권력다툼으로 살벌한 몽골의 군주 징기스칸(태무진)은 무당 코코추의 도움을 받아 정신적으로 큰 힘을 얻었고, 세계 정벌에 나설 때에도 늘 자신의 곁에 무당을 대동하였다고 합니다. 이후로 무당들의 부정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몽골인들은 무당의 말을 하늘의 말처럼 따랐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은 거세다 합니다. 예나 제나 사람들은 무당은 하늘과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짜 무당들이 성행하는 이유입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무당을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구약시대에도 선지자 군/에는 참된 이들과 거짓된 이들이 혼재/混在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지, 마귀의 말인지를 구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의 도덕성과 생활 태도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예로 들게 하는 사람들이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경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리우스는 도덕적이었으나 그에 비해서 아타나시우스는 불량했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를 두고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때부터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까지 55년 동안 긴 논쟁을 하였는데, 진리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택한 것입니다.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변론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하시는 변론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괴롭게 한다는 원성에 대한 변론의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탓하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해야 성난 가슴이 가라앉고 풀린다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버스 안에서 누군가를 원망하는 혼잣말을 하는 아낙을 쳐다보곤 합니다. 행색을 보아선 고달프게 살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 원망의 대상이 남편일 수도 있고 자식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혼잣말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소리일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러세요? 저는 너무 힘들어요.” 마치 하나님이 일부러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변명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을 애급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모세와 아론 그리고 미리암을 항상 앞세웠다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공의롭지 못하다는 불평에 대해 변호하십니다. 모압왕 발락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싯딤에서 길갈까지의 일들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발람을 고용했는데, 발람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직전에 마지막으로 진을 쳤던 싯딤에서 저주 대신에 축복하였던(33:49)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미가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제물에 대해서 충고합니다. 그것은 1년 된 송아지나,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난뱅이이거나, 병든 환자이거나, 힘이 다한 맹수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힘쓸 일이었습니다.

 

3. 오늘은 만성절/All saints day 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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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68(2024. 10. 31. 목요일).

시편 89:38-41.

찬송 9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관계의 명언집>을 낸 레스 가블린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이상으로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그렇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줌으로 절망에서 희망을 찾은 이가,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 사람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다시 세워준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면 말이다.

 

2. “베들레헴에서 다스릴 자가 나오리라(1-5, 10-15)”을 읽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 혹은 빵집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8km에 위치합니다. 제가 그곳을 찾았을 1979년도와 1983년도에는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자리에 지은 탄생교회는 처음엔 말을 타고서도 교회당을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고딕형태의 출입문이 있었는데, 누군가의 깨달음으로 어른이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으로 고쳐졌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옛날의 출입구가 그대로 보이도록 말입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가 생긴 연유입니다. 세상의 구세주, 세상의 참된 임금님을 만나려는 자는 반드시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여미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베들레헴은 지금도 라헬의 무덤이 있고, 룻과 보아스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이곳에서 기름 부음을 받았고, 예수님이 태어난 곳입니다. 역시 예수님이 탄생한 자리는 거의 지하 2층쯤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것은 텔(tel)현상으로 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 도시들은 전략적으로 높은 곳에 성벽을 쌓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무너지고 또 세워지는 동안에 옛 도시는 마치 땅 속으로 깊이 숨어버린 것 같이 생기는 현상을 텔현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대 유적지는 현재의 평지보다 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종류의 예언이 등장하는데 첫 번 예언은 베들레헴 에바브라에서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라는 내용입니다(1-4). 베들레헴의 옛날 이름이 에바브라입니다. 그 의미는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 중에서도 매우 보잘 것 없는 작은 지파에 불과한 곳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약하고 작고, 보잘 것 없으며 주목받지 못하고 멸시받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다스릴 자가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그의 핏줄은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고 말씀합니다. 어쩌면 베들레헴의 위대함이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미국의 단편작가 나다나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마을 뒷산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큰 바위처럼 위대한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는 전설 말입니다. 그래서 한 시인은 그 큰 인물을 찾겠다 결심합니다. 그래서 마을 출신 중에서 유명인을 소환합니다. 첫 번째 인물은 개더골드’(Gathergold)였으나,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전 몇 푼을 던져주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두 번째 인물은 올드 블러드 앤 선더’(유혈과 폭력의 노인) 라는 별명의 장군이었습니다. 시인은 그에게서 강한 의지와 힘은 느꼈지만, 자애로움과 지혜는 찾아볼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세 번째로 주목받은 인물은 올드 스토니 피즈’(Old Stony Phiz: 돌처럼 차가운 얼굴의 노인)라는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큰 바위 얼굴의 장엄함이나 위풍, 신과 같은 위대한 사랑의 표정은 없다는 사실에 또 다시 실망하고 맙니다. 그때 저 멀리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의 황금빛 속에 큰 바위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습니다. 그 주위를 둘러싼 흰 구름은 그 마을에서 태어나 사람들을 가르치는 설교자 어니스트를 감싸 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시인은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팔을 높이 쳐들고 외쳤습니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야말로 저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3. 오늘은 종교개혁 50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루터와 16세기 개혁자들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참된 교회 개혁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의미를 열심히 찾아 선포할 이유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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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67(2024. 10. 30. 수요일).

시편 89:36-37.

찬송 22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슬람권을 여행하다보면, 인샬라/In Sha Allah” 라는 단어를 많이 듣게 된다. “만약 신이 원하신다면이라는 뜻인데, 가령 여행 가이드에게 내일 투어는 몇 시에 출발하나요?”라고 물으면, “4시오. 인샬라!” 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이 말은 4시일 수도 있고, 4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늘이 도와서 날씨가 좋고, 자동차 타이어도 펑크 나지 않고, 기름도 충분하고, 나도 아프지 않아 기분이 좋다면, 4시에 출발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교보 제작팀, 어쩌다 어른2, pp.241-242.

 

2. “미가가 이스라엘 통치자들을 고발하다(9-12)”여호와께서 이루실 평화(4:1-5)”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적인 인사말에는 평화라는 단어가 사용되곤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Peace be with you,” 라든지, 아랍권에서 많이 사용하는 당신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뜻하는 앗살라무 알라이쿰(아랍어: ٱلسَّلَامُ عَلَيْكُمْ)” 이나 내 안에 계신 신께서 당신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의 의미인 인도 힌두교의 나마스테(Namaste)”가 그 대표적인 말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근본 목적은 평화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천국이나 극락의 상태를 말하는 용어가 된 것입니다. 평화란 말은 전쟁과 분쟁이 없는 이해와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완전한 상태라고 사전에서는 정의합니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그런 이상적인 완전한 조화의 상태를 누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런 평화를 향해서 힘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헨리 데이비스 소로우가 살았던 <월든> 호수가의 생활은 우리들이 추구해 볼 수 있는 평화의 생활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런 삶을 위해서 많은 토지를 소작민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자신이 쓴 책에서 나오는 인세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82세의 나이에 가출 쓸쓸하게 한적힌 간이역 아스타포보에서 객사하였던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마음에는 이미 평화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평화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미가 선지자가 소개하는 하나님에 의한 평화의 세계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산에 이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산이란, 여호와를 섬기는 성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의미는 여호와께 예배하는 자리를 뜻합니다. 둘째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를 만드는 일이라 하십니다. 칼은 보습으로, 창은 낫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셋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허락된 기회나 소유로 만족하는 생활을 말씀하십니다. 높은 자리도, 많은 재물도 아니라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넷째는 자신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생활입니다. 놀랍게도 인간 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앙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제정신을 가지고 깨우쳐야 할 것은, 저 구름 너머의 새로운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평화의 나라 조화의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를 위해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기도하고 땀 흘려야 하겠습니다. 김민기는 <금관의 예수>에서 천국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을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김민기는 그 나라를 찾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곳이라고.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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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66(2024. 10. 29. 화요일).

시편 89:33-35.

찬송 46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역설의 진리를 받아들이면, 미친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역설적인 진리를 실행하면, 본성대로 살 수 있다. 당신은 삶의 본질이 아닌 것들과 불만족스러운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정말 중요한 일에만 중점을 두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인 진리는 부나 권력, 명예 같이 흔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이라고 여겨지는 요소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대신 의미에 중점을 둔다. 여기서 의미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좋은 일을 하고 대의를 생각하고 약자를 위해 투쟁하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얻을 수 있는 의미를 뜻한다. 그런 행동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 결과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켄트 케이스, 문채원역, 그래도/Anyway, p.107.

 

2. “미가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고발하다(1-8)”을 읽었습니다. 이른바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는 역사의식이 현저히 떨어지는 설교를 하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서 가능하면 정치나 경제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들로 교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주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부 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지 세상 얘기 특히 정치얘기는 너무 민감해서 듣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로써 또는 크리스천으로써 우리는 모두 역사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자체가 역사 속에서(Context) 말씀(Text)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이미 특정한 역사적 배경을 품고 있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그 말씀의 배경을 잘 공부하고 이해한 다음에 본문을 살펴야 할 것이고,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청중들에게 이해가 되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해석의 차이를 두고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겨울 방학 때 미국 미네소타 주의 한 도시에 있는 한인교회 성경반을 방문하였는데, 제가 아는 전도사님께서(박사과정 중)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성경 본문으로 지도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질문 겸 나름의 해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은 화학박사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물위에 발을 빨리빨리 움직이셨다면 이것은 기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으로 설명해야 옳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물 위를 걸을 만큼 빨리빨리 발을 뗄 수 있겠느냐는 새로운 물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다른 난제에 부닥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잘못들과 문제들은 무지랭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는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점을 미가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3천 년 전의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가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강한 말투로, 그리고 준엄한 목소리로 논고를 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따라야 할 그들이 오히려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듯 힘없고 연약한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먹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무리 부르짖어도 당신의 낯을 가리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를 향해서 올곧은 말을 해야 할 종교가들이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다 비난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환상도 보지 못하고 명쾌하게 들려 줄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이미 불의한 세상과 한통속이 되어 죄악에 깊이 빠진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볼 지도자들은 이미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과는 담을 쌓고 있으니,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1971년도 어느 대학 가장 행렬에는 한국에 오신 예수님이 한국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한국 땅도 밟아보지 못하고 쫓겨난다는 코미디 같은 시사 극을 펼쳤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평안과 축복의 말들로 도배를 하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짓과 불의 그리고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꿀 먹은 벙어리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한 통속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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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65(2024. 10. 28. 월요일).

시편 89:30-32.

찬송 39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뉴욕 출신의 배우이자 가수인 일카 체이스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아무 시도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 인생에서 자기 시대에 힘써야 할 일을 못본 체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실패도 하지 않을 테지만, 그 어떤 보람이나 기쁨도 얻지 못할,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다.

 

2. “멸망할 자들(1-13)”을 읽었습니다. 저의 성경읽기표는 어제부터 미가서를 읽도록 되어 있지만, 주일 설교 본문이 교회력에 따라 오래 전에 정해져 있어서, 불가피하게 2장부터 읽게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게 되면, 오래 전 제가 중학생이던 시절, 저희 마을에 통일교 전도자들이 찾아왔는데, 10여명의 젊은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전도대상은 비교적 성경을 잘 알고 있다 생각하는 기존 크리스천을 향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저에게 찾아온 두 명의 통일교 신자들은,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구약의 중심점이 무엇이냐? 신약은 또 무엇이냐? 등등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일반 기독교회는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있다면서,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교인 구약은 약속과 율법을 중심으로 한다면서 윤리와 도덕적인 신앙을 가르치고 있다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종교인 신약은 믿음을 주제로 가르친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 통일교는 고전 13:12의 말씀처럼, 멀리 계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직접 보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 교회 전도사님에게 그들의 얘기를 전하니까, 무조건 그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라며, 설명이나 자초지종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고 만나지 말라고만 하셨습니다. 우리 전도사님도 그들을 피하시는 것을 보니까 성경지식이 부족하셨던 것 같다는 생각들 하였습니다. 이런 이해는 크리스천들 뿐 아니라, 비판능력을 가진 일반 자연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구약은 모세의 율법이 중심이고, 신약은 예수가 중심이다 하고 말입니다.

    미가서는 주전 722년에 있었던 북왕국 사마리아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주전 700년경의 히스기아 시대의 예루살렘의 죄악과 위난을 주목하게 합니다. 특히 미가서는 열 두 소선지서 중 다섯 번째 책으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가의 준엄한 저주는 아주 먼 옛날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가령 소위 권력자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들은 침상머리에서 죄악을 꿈꾼다는 말이나(1), 탐나는 밭이나 집을 빼앗는 수법이 오십보백보이기 때문입니다(2).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겠다 말씀하십니다(6). 비록 야곱의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반드시 저주와 재앙을 내리시겠다 말씀하십니다(7). 어린 아이들에게 주었던 패물들마저 빼앗아 갔으니, 여기는 쉴 곳이 없으니 떠나가라고 준엄한 선고를 하십니다(9-10). 어느 시대나 소위 똑똑하다는 자들은 어디에 붙어 다니든 크게 손해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멍청하고 어리석은 무지랭이들이 평생 일군 재산을 강탈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는 빼앗긴 것들을 다시 찾아낼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기만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배웠다는 지도자들이 할 일이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 밝힌 대로 우리나라 말은 중국말과는 달리 한자를 가지고서는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므로 일반 백성들은 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도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모두 쉽게 배워 일상생활에서 두루 편히 쓰도록 하라.” 해야 했습니다. 강한 자 배운 자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3. <2025년도 설교계획과 생활계획안>1125일경 나올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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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64.

시편 89:27-29.

찬송 49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민기는 저보다 6살이나 어려도 삶을 일찍 깨우친 분이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몇 곡은 평생 마음속에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2. 성령강리미절 후 스물셋째 주일의 복음서 막 10:46-52 말씀을 가지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디메오가 눈뜬 삶을 바라듯, 저마다 더 나은 삶을 희망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삶을 구원의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땅에서 하늘에 이르는 구원의 삶을 소망합니다.

 

타산지석 또는 역지사지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46-48).

며칠 전 오랜 친구들과 3시간이 넘게 수다(?)를 떨었습니다. 대상포진으로 오래 고생했다는 얘기, 백두산 서파에 오르는 1442 계단을 거뜬히 걸어 올랐다는 얘기, 구청에서 주는 노인 일자리에 뽑혀 노익장을 과시하는 얘기, 그리고 사소한 세상살이들이 화제에 올랐습니다. 어느 하나도 제 얘기가 아닌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남 얘기처럼 귓등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본문의 바디메오가 냅다 큰 소리로 주님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라고 외친 까닭을 말입니다.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한 번도 앞을 보지 못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아무도 이웃의 힘겨운 삶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앞으로 다가 앉아 귀만이라도 쫑긋 세워주면 좋았겠는데 말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는 날이 오기 전에 말입니다.

 

바디메오는 주님만 들으시면 된다 생각했을 것입니다(49-50).

바디메오에게서 우리들이 배워야 할 삶의 태도는 이것입니다. 우리들 이웃이 역지사지도 모르고, 타산지석도 모른다면, 그래서 낙심할 수밖에 없을 지라도, 아직은 마지막 기회는 남아 있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그 진리란 주님께서 듣도록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것을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희망이 통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 삼창을 큰 소리로 외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상황에 맞게 따르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그를 찾으셨습니다. 전하는 제자의 말을 공동번역 성경은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너를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더 배울 말씀입니다.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길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말입니다. 특히 바디메오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너무도 많이 속았고, 뺏겼고, 상처로 투성이가 됐으니까요. 바디메오는 용기를 냈고 주님께 갔습니다.

 

주님은 바디메오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구원의 삶을 허락하셨습니다(51-52).

저처럼 평생을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의 세 가지 개념만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 개념들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냥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모든 잘못과 책임은 목사나 신부들이 져야 할 몫입니다. 믿음은 제 마음대로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제 소망대로 되는 것이 아니며, 행복은 제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말입니다. 바디메오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될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뜻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 뜻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주님 뜻을 따라 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감사함으로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입니다.

 

3. 오늘 오후 3시 묵상식구 김동환목사님께서 개척하신 생거 진천교회가 2주년을 맞아 새 교회 입당예배를 드립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되기를 기도하며 축하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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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63(2024. 10. 26. 토요일).

시편 89:25-26.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약자에게는 승산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약자가 옳고 마음속으로 약자를 지지한다 하더라도 약자를 지지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때로는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고, 성공하는 인생과는 거리가 먼 길을 가야 할 수도 있고,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를 응원하면서도 결국 강자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약자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또한 약자가 처한 모든 상황이 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있다. 이따금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약자를 도와야 한다. 인생을 정리할 즈음에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약자를 위해 싸운 일이 평생 한 일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켄트 케이스, 그래도, pp.85-56.

 

2. “바울이 로마에서 전도하다(17-31)”을 읽었습니다. 50여 년 전에 만난 대학 동창들과는 격의 없이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어느 특정 교파에 소속된 학교가 아니라, 다양한 교파에서 오신 교수님들로부터 인생과 신학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구동성으로 감사의 말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덧 인생의 의미 혹은 가치에 대해서 화제가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제를 진부/陳腐하게 생각한 때문인지, 주로 건강과 노후를 어떻게 보낼까에 대해서 주로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이 되도록 힘쓸까가 아니라, 어떻게 초라하지 않게 건강하게 살 것인가를 관심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해서 부질없는 것에 너무 많은 진/을 뺐다는 식의 얘기도 나왔습니다. 어느 친구는 자신의 친척을 예로 들었습니다. 유명 의사로 많은 환자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는 삶을 살았다 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느낀 그 친척 의사는 자신의 책과 연구 논문 등 많은 자료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을 하는데, 자녀들은 고물장수에게 넘겨버리라고 했다 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조차 자신의 삶의 자취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어느 의학 박물관에 떠넘기다시피 하며 처리했다 합니다. 젊은 날의 열정과 수고, 뜬 눈으로 새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생명을 살려보겠다던 사랑과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허무감을 금할 수 없었다면서 말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생각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했습니다. 러시아의 과학자 류비세프를 대상으로 쓴 그라니의 책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를 소개하였습니다. 구소련의 과학자 류비세프는 그가 26세 되던 해인 191611, 자기의 모든 시간을 철저히 계획, 관리, 기록, 통계, 평가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른바 '시간통계법'을 통하여 그날 이후 죽는 날 까지 56년간을 그는 시간의 효율을 극대화시켜 살았으며, 엄청난 양의 일을 하였습니다. 생물학, 곤충학, 수학, 과학사에도 정통하고, 철학, 문학, 역사에서도 전문가를 능가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70여부의 전문 저서, 타자 원고 12,500장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가 전쟁터에서 조차 자신의 시간을 계산하며 연구했다는 대목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오늘 우리 인류는 저절로 발전하거나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류비세프는 물론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땀 흘려 수고한 덕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일평생 이방인의 사도로써, 예수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이신 것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전 삶을 바친 것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압송되었지만, 그는 복음을 전한 기회를 찾았고, 그의 바람대로 그에게 2년이 넘도록 로마의 셋방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도 하고, 자신이 사람들에게 찾아가기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수고에 대해서 누구하나 공치사 하나 전하지 않는 것에 화도 나고, 낙심도 될 것이지만, 흔들릴 이유는 없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많이 불렀던 노래 가운데, 한 태근 곡 박희진사의 <이 세상 어딘가엔>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엔 남이야 알든 말든 착한 일 하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밝아진다. 이 세상 어딘가엔 탐욕과 분심 눌러 얼굴이 빛나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밝아진다. 이 세상 어딘가에 청빈을 감수하고 덕행에 힘쓰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미음이 씻기운다. 이 세상 어딘가엔 하늘을 예경하고 이웃을 돕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기뻐서 눈물 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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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62(2024. 10. 25. 금요일).

시편 89:22-24.

찬송 9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1892222~19501019)세상을 존속시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다.”는 말을 남겼다. 역사의 진실은 오랜 세월이 지나간 뒤에야 그 꼬리를 드러낸다. 그래서 비록 확실하지 않을지라도 믿음을 붙들고 연구하고 전쟁터에 나가며, 세상을 섬기는 모험에 뛰어드는 것이다.

 

2. “멜리데 섬에 오르다(1-10)”바울이 로마로 가다(11-1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멜리데는 시실리 남쪽 95km에 위치한 섬으로 지금은 몰타공화국으로 바울 일행이 난파를 당해 무려 14일이나 고생을 하다가 만난 해안선이 바로 멜리데의 모래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지친 선원들과 군인 그리고 죄수들이 섬에 오르자, 원주민들이 특별한 동정을 베풀어 나무토막들을 긁어모아 모닥불을 피워준 것이 화근이 되었다 했습니다. 동면에 들어가려던 독사/毒蛇가 바울의 손을 물게 된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입을 모아, 이 사람이 살인자임이 분명하다며, 풍랑에서는 살아났지만, 이제 죽는 일만 남았다고 조롱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독사를 불에 떨어트렸고, 아무 해도 일어나지 않음을 보고, 바울을 신이라 불렀다 했습니다. 이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보블리오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항해하던 일행을 사흘이나 접대해 주었는데, 마침 그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로 고생 중이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에게 기도하고 안수해서 고쳐주었고, 바울 일행이 떠날 때에는 필요한 것들을 배에 실어주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여정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생각과 질문이 생기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난을 알고는 계시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는 크게 두 종류의 인간군이 있다 생각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매일 만나고 교제하는 일반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인본주의자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믿고 의지할 사람은 인간 자기 자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하며 바르게 살아간다면 이른바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인간군은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으로 세상을 다스릴 뿐 아니라, 세상 안에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지키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만나게 될 때, 그 책임은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지혜와 노력을 최우선적인 자리에 놓아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기준점은 인간 자신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이라는 사람들은, 모든 일의 시작과 끝, 그리고 성공과 실패 등 수많은 삶의 과정에 대해서 밤낮없이 자신만 바라보고 걱정과 근심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삶의 방향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기대와는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삶의 모든 것을 맡길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어제는 대학 동창들 6명이 저녁을 나누며, 50년 전의 추억을 더듬었습니다. 그런데 기억력에는 편차가 많이 났는데, 그 시절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여과 없이 말해주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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