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97호(2024. 11. 29. 금요일).
시편 94:17-20.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물리학자이며 풍자 작가인 리히텐베르크(Georg Christoph Lichtenberg, 1742년 7월~1799년 2월)는 사람들에게 경고등을 켜게 하는 명언을 남겼다. “일단 자신의 약점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그로 인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현실은 약점보다는 강점과 잠재력에 더 많은 힘을 쏟는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을 제대로 아는 것처럼 귀한 자산은 없을지 모른다. 리히텐베르크의 말처럼 더 이상 낭패를 당하지도 불이익도 당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2. 왕이신 그리스도의 주간 다섯 번째 말씀은 “서로 받아들여라(롬 15:7-13절)”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설교에 가장 근접한 용어는 선포라는 헬라어로 케류그마인데, 동사 케뤼소에서 온 용어입니다. 선포 혹은 선포하다는 이 낱말은 어떤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입니다. 마치 우리가 예배 말미에 듣게 되는 강복/降福 혹은 축복 선언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서 그냥 내려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해설처럼 하는 것을 경계하는 설교학 교수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을 요약한 표제어도 그런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받아들여라고 하신 말씀은 이유나 어떤 특별한 목적을 차치하고서 그냥 무조건적으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령형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설득력 있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만, 하나의 사례/事例를 드셨는데, 그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은 받아들이신 것 같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받아들인다는 단어는 προσλαμβανω(프로스람바노)로, 능동태일 때는 “음식을 같이 먹다”는 의미이지만, 중간태일 때는 “영접하다,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자기 옆으로 데리고 가다는 의미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환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죄인들인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은 마지못해서 당신 옆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를 영접하고 환영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마치 의인/義人이기라도 한양 누군가 이웃이 잘못하면 그 허물을 들추어내느라고 혈안이 되었는데, 우리 주님은 허물 많은 우리들을 마치 영웅호걸들을 환영하듯 감싸 안아 주셨다는 말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원수와 마귀와 같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최상의 우호적인 찬사를 하고 있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처럼 보입니다.
사도는 이방인에 대한 이런 우호적인 찬사를 구약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고증/考證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가운데서 주께 찬양 드려라”(시 18:49, 삼하 22:50), “이방인들이여, 주님의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여라”(신 32:43), “모든 이방인들이여 주를 찬양하여라”(시 117:1),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돋아 이방인들을 다스릴 분이 나타나리니, 이방인들은 그분에게 희망을 걸리라”(사 11:1, 10) 고 말입니다. 한 마디로 신약은 물론 구약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온 세상이라는 점, 특히 선민사상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었던 이방인들까지도 망라하고 있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어제는 한 지인 장로님과 오랜 통화를 하였는데, 여전히 많은 기독인들 중에는 선민사상과 기독자의 특권에 대한 의식이 너무 강해서, 교회당을 문을 선뜻 열고 세상을 환영하는 그런 열린 마음이 아직은 아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의외로 우리 한국인들은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라고 하는데, 특히 개신교인들은 요한 계시록에 대해서 맹신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느 핸가 지방 교회 은퇴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서 계시록 강의를 하룻밤 같이 나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계시록에 등장하는 여러 개념들에 대해서 관심을 표했습니다. 특히 144,000명의 구원설을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의 주장과 매우 흡사한 얘기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흔히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바라보는 어리석음처럼,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지 않고, 특별한 자구에 매달리는 그런 경향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계시록은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할 것을 계시록의 저자가 밝히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감춰진 뜻인 계시를 보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계 1:1-3). 하나님의 창조섭리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해석해야 옳은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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