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04(2024. 12. 6. 금요일).

시편 96:4-6.

찬송 49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클라우드 페페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거와 같다. 당신이 계속 페달을 밟는 한, 당신은 넘어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피곤하면 페달을 밟을 수 없게 되고, 그래서 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젊은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그 자전거에 의지해서 달려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신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1-12)”을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교회는 장로교회였는데, 입교(견신례)를 하려면 교리문답을 공부해야 했는데, 그 첫 머리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니라. 고 답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교육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했는데, 아마도 오늘 본문의 정신을 참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지 우리에게서 배웠고, 또 배운 대로 살고 있습니다.”(1)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 강령들이 조목조목 언급되고 있습니다. 음행을 피하고, 각각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기 아내의 몸을 대하고, 이교도처럼 욕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까닭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기독교회가 금욕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살 것과,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손으로 일해서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올바른 도덕적인 삶이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삶일 것입니다.

    제가 설교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린 듯 살고 있을 때, 자나 깨나 유명 인사의 설교집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드는 설교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설교를 듣겠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까? 라는 의문도 생겼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면 주석을 잘 해야 하고, 그래서 성경 언어를 제대로 풀어서 오늘의 상황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하고, 거기에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을 잘 살펴서 그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뜻을 찾아야 하는데, 도무지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갖춘 설교는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천 페이지가 넘는 설교사전이라는 것을 구입했는데, 다양한 설교들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이 도덕적인 설교였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70년대 초기에는 우리 교회가 주로 공자님의 말씀을 설교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었고,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관과 철학을 주로 소개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많이 거리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반성을 하고, 이번에는 정반대로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설교에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이른바 성경본문의 중심 주제를 파악하는 것과 함께,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로 선포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청중의 필요를 채우는 설교 작성법>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경 본문의 중심점을 설교의 중심점으로 옮기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 뒤로는 성경을 건성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한 단락을 읽은 후에 거기까지의 중심점이 무엇인가를 요약하는 훈련에 길들였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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