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80(2025. 2. 20. 목요일).

시편 106:38-40.

찬송 16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브라우닝/ Robert Browning (1812-1889)은 피파의 노래로 세계적인 시인이 되었습니다. “일 년 중에서도 봄/ 하루 중에서도 아침/ 아침 중에서도 일곱 시/ 언덕엔 이슬방울 진주처럼 맺히고/ 종달새는 높이 날고/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있고/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니/ 세상은 만사태평이구나!” 봄날의 희망을, 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낙천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가장 유명한 노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는 브라우닝을 이 시의 화자인 피파와 동일시해서 시인이 세상을 너무나 단순하고 순진하고 낙천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만 읽는다면 이 시가 지닌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이 노래는 <피파 지나가다>(Pipa Passes)라는 브라우닝의 극시 중의 일부인데, 브라우닝이 영국의 거리를 지나다가 세상에 실질적인 영향력이 전혀 없는 아주 순진무구한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자기도 모르게 세상에 변화를 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내고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13-17)”부활에 대한 토론(18-2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최근에 묵상식구 두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분은 저를 오찬에 초대하셨고, 다른 한 분은 제가 오찬에 초대를 했습니다. 두 분 모두 열심히 살아가시는 분들로 제가 그토록 강조하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계시는분들입니다. 제가 늘 궁금하게 여겼던 질문을 꺼냈습니다. “형님이 애쓰시는 것만큼 성의를 다해 묵상자료를 읽지 않는 분도 많을 것이라는 대학 동기의 충고(?)가 저의 의욕을 떨어트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일단 1만 회를 끝내셔야 합니다. 저도 글을 써 봐서 한 편의 글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기에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목사님, 힘내십시오.”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대단한 유혹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내적인 침체와 나약함 때문임을 깨우친 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종파 중에서 기득권을 가진 부유한 보수주의자들로써, 제사장들과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가령 그들은 모세의 오경만을 성경으로 읽는 사람들로써 장로들이 전해 주는 전통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모세오경에 천사나 부활 등에 대한 자료가 미약하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사두개파 사람들이 주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그들이 들고 나온 것은 수혼법/嫂婚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형의 자식을 잇기 위해서 형수를 대물림하는 법입니다.

    어느 집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를 가정/假定했습니다. 그럴 경우 수혼법에 의하면(38:8-11, 25:5-10), 맏형의 후손을 위해서 동생들이 아들을 낳을 때까지 차례로 형수와 관계를 해야 하는데, 훗날 죽어서 부활하게 된다면, 맏형의 형수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두개파 사람들은 수혼법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18:16, 20:21), 부활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들이 성경도 제대로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운을 떼시고는, 사람이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천사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출 3:6절에 나오는 가시덤불 사건에서, 부활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바로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입니다. 쉬운 말로 새로운 나라 천국에서는 인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따져보는 촌수 계산이 없다는 말입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부르는 찬송가에서 천국에서 누군가 기다릴 부모 형제자매는 의미 없는 1차원적 발상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영원히 생명의 하나님이 되시며, 영원히 부활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79(2025. 2. 19. 수요일).

시편 106:35-37.

찬송 8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리교회를 시작한 요한 웨슬리는 17385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에서 열린 모라비안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고 회심한 것으로 유명하다. 훗날 웨슬리가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배 위에서 폭풍을 만나 공포에 떨고 있었을 때, 한 무리의 모라비안들이 그 파도 속에서 서로 손을 잡고 찬송하는 모습에서, 또 다시 회심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참고로 모라비안 형제회는 1457년에 설립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약 400명 미만이었으나, 오늘날은 전 세계 40개국에 1,700교회 약 14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이른바 숨겨진 씨앗이란 별칭을 가진 개신교 공동체이다.

 

2. “예수의 권한에 대한 질문(27-33)”포도원 소작인의 비유(12:1-12)”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오늘 본문은 공관복음서에서 모두 취급하고 있는데(21:33-46, 20:9-19), 공관복음서는 서로가 매우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세를 받으려고 종을 보내는데, 마태복음서와 마가복음서는 세 번을 보내고 있다 기술하는데 반해서 누가복음서는 네 번을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차이라 하겠습니다. 이 본문은 포도원 주인을 하나님으로 해석할 때, 소작인은 우리들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우리들 인간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임무 분담을 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며, 동시에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묵상할 주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들 인간을 위해서 포도원을 맡기시고, 그들에게서 일정한 세를 받기로 하셨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세계에 살면서 이렇게 살게 하신 하나님께 일정액의 세를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소작인들은 하나님의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거부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세를 받으러 보낸 하나님의 종들을 쫓아내거나 심지어 죽였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인 것입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신들의 지혜나 의지 그리고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3번 혹은 4번이나 그 약속 위반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고 인간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하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의 역할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약속을 내팽개쳐 버리고 탐욕에 분이 멀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은 이렇게 악행한 인간들을 다 죽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섯 번째는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가장 중요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마련해 두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하는 것입니까? 진지하게 돌아보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숲이 아니라 한 그루 나무에를 바라보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이 무엇인가를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인간은 그들이 당연히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당신의 외아드님을 어리석은 인간들의 탐욕의 눈으로 죽게 하심으로 구주가 되셨다는 것을 바르게 알아야 하겠고, 본래의 삶 곧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돌아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나 파멸이 아니라, 그 분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78(2025. 2. 18. 화요일).

시편 106:31-34.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며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도록 수정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 기도김대광 지음

 

2. “저주받은 무화과나무(12-14)”, “성전에서 쫓겨난 상인들(15-19)”믿음의 힘(20-2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셋째 단락인 믿음의 힘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써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하늘 위를 떠다니는 뜬 구름을 잡으려는 것으로까지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튜브에는 서울 00 영광교회의 집회 장면을 자주 볼 수가 있는데, 제 눈에는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해서, 저렇게라도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싶은 생각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열광적인 장면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소에 우리의 신앙은 너무 뜨거워서도 안 되고, 너무 신비적이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무 뜨거우면(열광적) 몸을 해칠 수도 있고, 너무 신비적이면 현실에 부적응할 수 있는 때문에 그렇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냉정해야 하고, 현실적이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말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희망하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늘 주목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대단할 뿐 아니라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에서는 불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믿음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지나가던 주님의 일행 중 베드로가 주님께 말문을 열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답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어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첫째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지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며 말씀이면 그대로 될 줄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이런 믿음 곧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바탕을 둔 믿음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은 줄로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들이 혼란을 느끼는 것 또는 오해 내지 곡해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점에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져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우인데, 믿는 자의 마음대로 온갖 세상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오해가 생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할 일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산을 이리저리 옮기시는 쓸데없는 일은 하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같은 일을 하실 경우가 있을 때일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세 번째 인데, 믿음으로 구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흔히들 조급증에 걸린 우리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게 아니라는 점을 고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믿음의 응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고, 우리가 아멘으로 응답할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충분히 간증할 수 있는 확실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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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77(2025. 2. 17. 월요일).

시편 106:28-30.

찬송 5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30년도 넘게 불렀던 복음가에는 <창문 두드리며 비가 오네>가 있습니다. “창문 두드리며 비가 오네 눈물의 빗줄기. 자녀를 위하여 오래 흐느껴온 이 세상 이 세상./ 그 예부터 들려오는 외침 내 귀에 들리네. 전쟁과 굶주림 못 견디어 우는 저 음성 저 음성 / 창 문 두드리며 비가 오네 눈물의 빗줄기. 내 온갖 두려움 벗어 버리고서 빗속을 달리네. 후렴) 우리 위하여 죽으신 구주 예수께 우리는 무얼 배웠나? 왜 아직 서로 헐뜯고 평화 모를까. 왜 우리 눈은 이리 어둘까?”

 

2. “예루살렘 입성(1-11)”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제게 있어서 무화과는 오랫동안 신비에 쌓인 과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줄로만 알았으니까요. 그러다가 어느 핸가 남도 지방에서 열린 강습회에서 무화과를 발견하였고, 한 상자를 구입했는데, 한 개를 먹고는 질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이 과일만한 것이 없었을 테니까 가장 사랑받는 과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식사 때를 놓쳤는지 시장 끼를 느끼셨고, 마침 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보시고 다가서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 나뭇잎의 무성함과는 반대로 열매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멀리서 무화과 나뭇잎만 보고 한 걸음에 달려왔는데, 열매가 없자 많이 서운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열매를 맺는 철이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모르실리 없었을 텐데도 주님은 그 무화과나무에게 저주를 퍼 부으셨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여 아무도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고 질문할 것입니다. 제 철을 분간하지 못하신 예수님의 판단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도 따를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군살을 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리떡 5덩이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던 주님이시라면, 철 이른 무화과나무에 몇 개의 열매를 맺게 하실 수도 있지 않으셨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악의적인 질문은 주님께서 시장하셔서 뭔가를 먹고 싶으셨는데, 무성한 잎뿐인 무화과를 보고 화풀이를 하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각가지 질문들이 쏟아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느냐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 뿐 아니라 주님의 생애를 통틀어서 중심적인 상황에서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마침 이 날은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대제사장들의 사병들에 의해서 체포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날이었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한 끼 식사를 걸렀다고 해서 역정을 내시고 저주까지 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철 이른 무화과 열매를 구하시긴 했지만, 주님의 마음을 온통 감싸고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믿음의 열매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모세와 다윗 등 수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보여주었던 그 믿음의 위대함을 이스라엘 자손들은 계승하기는커녕 그 작은 믿음의 씨알까지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말라 죽는 것과 같이 믿음 없는 세상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저주밖에 없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라고 말입니다. 믿음의 씨앗 혹은 믿음의 열매를 우리 주님께서는 찾으셨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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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76(2025. 2. 16. 주현절후 여섯째 주일).

시편 106:25-27.

찬송 43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14일자 국민일보는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윤동주 순국 80주년을 기념해서 그에게 개교이래 최초로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도시샤 대학은 순국 50주년인 1995년에 교정에 윤동주의 시비(序詩)를 세우기도 했는데, 도시샤대학은 전체 유학생(1375)33.5%가 한국인 유학생(461)으로 유독 많은 한국학생을 배출하였다. 세상사는 참 아이러니 하다. 정작 모국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는 꿈도 꾸지 않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2. 주현절후 여섯째 주일의 구약성경 렘 17:5-8을 본문으로 사람이냐? 하나님이냐?”를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해서 긍정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바벨탑을 쌓았었고, 현대에는 기술문명의 대명사인 AI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불행해 집니다.

 

인간 중심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은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살 것이라 예언합니다(5-6).

주관적인 자기만족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물로 멸망당한 사람들이나, 불로 심판을 받았던 롯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처럼, 한결같이 인간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인간중심이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방법을 인간에게서 찾는 것을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 사람을 믿는 것, 사람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 결과는 벌판에 자란 덤불과 같고, 소금 땅의 식물들처럼 자라지 않고, 뙤약볕만 내려쬐는 사막에서 살 것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람들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복된 삶을 살 것이라 예언합니다(7-8).

우리 크리스천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행복에 대한 것인데, 곧 복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복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하늘을 우러러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 오래 전부터 우리와 동거하고 있는 축복들을 발견하고 이를 감사하고 노래하는 일이라는 하겠습니다. 작년에는 47개의 감을 산새들을 위한 까치밥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어느 아침에 감꼭지에 소복이 쌓인 눈이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춘분이 지나면 여기저기서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이 아름답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여름에는 소나무 숲이 노래를 부를 때, 행복은 우리의 곁에 함께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예레미야는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잎사귀는 무성하고 어떤 가뭄에도 줄곧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손자와 손녀들이 훌쩍 자란 모습을 문득 깨달을 때의 그 느낌말입니다.

 

행복을 찾은 사람들은 순경에서나 역경에서 항상 하나님이 중심에 계셨습니다(6:20-26).

행복에 관한 복음서의 말씀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5:2-12)과 누가복음의 평지수훈(6:20-26)에 잘 볼 수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교육목적을 가진 마태복음서와 휴머니즘의 정신을 강하게 들어내는 누가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누가복음서는 사회적 약자들(어린 아이와 여자 그리고 죄인과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심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어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수많은 실패와 고통 그리고 배고픔과 질병을 경험한 사람들이 행복에 눈을 뜨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을 발견하게 되는 경향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잣집 문 곁에서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는 온통 하나님의 자비와 천국만을 사모했습니다. 삼중고를 겪었던 헨렐 켈러나, 불치병을 안고 살았던 몽골의 한 전도사님은 자신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라고 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675(2025. 2. 15. 토요일).

시편 106:22-24.

찬송 36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디언 수우족의 한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중략> 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 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내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로 하여금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내 혼이 부끄럼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2. “여리고의 소경(46-52)”을 읽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불렀던 노래 중에 <창문 두드리며 비가 오네>라는 복음가가 있습니다. 몇 구절을 1절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창문 두드리며 비가 오네. 눈물의 빗줄기. 자녀를 위하여 오래 흐느껴온. 이 세상 이 세상, 우리 위하여 죽으신 아기 예수께 우리는 무얼 배웠나? 왜 아직 서로 헐뜯고 평화 모를까? 왜 우리 눈은 이리 어둘까?” 이 복음가는 육신의 눈보다는, 마음의 눈을 두고 안타까워하는 말일 것입니다. 여리고 집회를 마치신 예수께서 떠나실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바디메오라는 거지 소경이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떤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더 큰 소리로 똑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주님이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시며 그를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바디메오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버리고 벌떡 일어나 주님께 다가섰고, 주님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실 때,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셨습니다. 눈을 뜬 바디메오는 주님을 따라나섰다고 요한복음서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묵상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디메오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너무 많은 것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무엇을 구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단순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우리의 희망사항들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에 맡기는 일입니다. 주님의 자비나 주님의 은총이면 필요충분조건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기도의 대상에 대한 확실한 이해입니다.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가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이었습니다. 저의 할머니는 삼신할머니를 섬기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모습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이나 두 손을 모아서 비는 모습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상만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셨습니다. 셋째는 기도를 방해하는 환경을 극복한 것입니다. 자신의 기도를 막아서는 이웃들이 있었지만, 그 기세에 눌리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고 담대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넷째는 주님이 부르실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던져버렸습니다. 바디메오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겉옷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는 그런 중요하다 여기는 것들은 아무짝에도 비교가 되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다섯째는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저는 기도를 많이 하는 분들에게서 바로 이 점이 가장 약하다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구했기 때문에 한 마디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것과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것, 그리고 마침내 가장 중요한 것을 구해야 하고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여섯 번째는 주님의 자비는 육신의 바디메오의 눈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온전한 몸과 영혼까지 구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바디메오는 영생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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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74(2025. 2. 14. 금요일).

시편 106:19-21.

찬송 79, 2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고 말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사랑과 승리와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2.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32-34)”섬기는 사람이 다스린다(35-45)”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갖게 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과 세상을 위해서 죽음으로 대속하려고 했을까? 죽는 길을 택하기 보다는 사는 길을 택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등등 말입니다. 여기에 기독교가 제시하는 새로운 삶의 신비가 숨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소리를 하려고 하는데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키우는 반려견 중에 한 녀석은 먹는 것에 진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는 것을 보면 온통 그것에 집중해 있습니다. 그리고 먹을 때는 오직 그것 하나를 위해 살고 있다는 듯 충실하게 행동합니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면 음식을 고려해서 몸에 좋은 것만을 주어야 하겠지만, 주인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먹이게 되면 비만이 생기고 각종 질병에 걸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먹어치우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주인 탓을 해야 하겠는데, 또 다른 한 녀석은 제 몸에 해롭다 생각하는지, 무엇이든 선뜻 받아먹지 않고 거절부터 합니다. 그리고 가려서 먹는 습관이 있습니다. 제가 두 마리의 개들을 예로 든 것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우리 주님은 앞서 예로 든 탐욕에 빠진 개와 같은 인생들을 주목해 보셨습니다. 먹는 것이든 누리는 것이든 탐욕에 길들어버린 인간은 오직 그 탐욕에만 눈멀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아무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가 아무리 바른 길을 충고하여도 이미 깊이 빠져버린 탐욕에서 한 발자국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남아 있는 것은 파멸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직면해 있는 파멸이 예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계명의 분류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이웃 사람에 대한 계명을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는 4 : 6으로 분류하고, 로마 가톨릭 정교회 루터교회 등에서는 3 : 7로 분류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는 3가지를, 이웃 사람에 대해서는 7가지로 분류한다는 말입니다. 그 특징은 개신교회에서는 1계명을 둘로 나뉘고, 루터교회에서는 10계명을 둘로 나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9계명은 사람에 대한 탐욕을, 10계명은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에게서 가장 큰 문제는 탐욕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탐욕을 비롯해서 부모공경과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거 그리고 탐욕에 미쳐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인간은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굴레와 질곡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를 성경은 단 한 사람도 제 힘으로 죄를 이길 수도 죄의 수렁에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된 것입니다. 통일교는 그들의 원리강론에서 죽으러 태어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면서 예수의 강생은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으러 이 세상에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적어도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가 대제사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중략> 그들은 능욕하고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라고 말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3:10, 14:1-7, 53:1-6)고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죄와 멸망에서 자신을 구원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바라보신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로 하여금 대속/代贖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출발점이며 전부입니다. 이미 그 예행연습이 아브라함과 그의 독자 이삭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22:1-13). 성경의 중심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에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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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73(2025. 2. 13. 목요일).

시편 106:16-18.

찬송 46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거지 성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1181-1226)은 많은 일화를 남긴 분이다. 그 중 하나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01-10절에는 예수가 자신의 열두 제자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도록 당부하는 내용인데,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곧바로 <작은 형제회>를 세우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2. “부자 청년-낙타와 바늘 귀(17-27)”백배의 상(28-31)”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청년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청년의 관심사는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해서는 소극적인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는 이른바 자수성가를 했거나 나름대로 일가/一家를 이룬 성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주님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묻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묻습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른바 십계명에서 이웃에 관한 계명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속임수 그리고 부모 공경을 알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잘 지키고 있다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를 유심히 살펴보시고는 대견해 하시며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며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근심하면서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23-27절에서 재물을 가진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시며,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도대체 구원받을 사람은 있기나 한가 하고 수군거릴 때, 주님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자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1828~1910)입니다. 그는 말년에 천국을 갈망하면서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시작한 것은 자신의 큰 농장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실천할 것이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한 인세를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였는데, 부인 소피아가 막아선 것입니다. 이 일로 톨스토이 부부는 다툼이 잦았고 마침내 1910년 장녀와 가출해서 아스타포보라는 작은 간이역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비록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지는 못하였지만, 그런 삶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삶을 마감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세속적인 성공이나 부유함이 천국 가는 길에 장애가 되는 것인가? 톨스토이처럼 그렇게 공동선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가난보다는 부유함이 훨씬 효과적인 것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세속적인 성공이 가져오는 폐해는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금수저로 태어나서 온갖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치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나 톨스토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제정신을 갖게 되듯(He became to himself.) 하나님의 은혜로 제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부자이면서 겸손한사람을 찾기 힘들고, 많은 학식을 가지고서 낮아지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세속적인 성공들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세상을 경시하는 못된 인성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가난의 길, 실패한 사람으로 사는 것은 오히려 지혜로운 인생관이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우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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