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63(2025. 2. 3. 월요일).

시편 105:31-33.

찬송 7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6년간 무속인 으로 살다가 8년 전 회심한 심선미(54) 부산 제2영도교회 집사는, 무려 40%의 기독교인들이 점집을 찾는다는 사실을 고발하였다.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전폭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다는 이야기이다. 왜 그럴까? 불확실한 세속의 파고/波高에 흔들리며 산다는 반증이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24-30)”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치신 예수(31-3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의 말씀입니다. 두로는 가나안 정복 때 아셀 지파에게 속한 땅이었으나, 예수님 당시에는 레바논의 한 지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땅인 두로에 가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지내고 싶어 하셨는데, 그곳에서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악령에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을 찾아와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실 것을 간청한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거절하신 것입니다. 같은 내용의 평행귀인 마 15:21-28을 보면, 보다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 가나안 여자가 사람들이 주님을 에워싸고 있어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나이다.”고 떠들어대자, 제자들이 이 여인을 보내시라고 부탁하자, 주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완곡하게 거절하시는 말씀을 합니다. 그러자 여인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앞서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대답합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에 끼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절대로 뒤로 물러설 기미가 없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불퇴전의 의지를 확실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확고한 의지나 신념을 밝히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보여주고 있는 대로, 자신의 소망 혹은 희망사항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이루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신 주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원문에 가까운 번역은 공동번역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비록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올바른 믿음,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충분히 그리고 언제든 하시고자 하시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정해진 사람들, 그들이 선민이든 부름을 받은 사람이든, 그들에게만 제한해서 일어나는 역사/役事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이 하실 일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은총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은 모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무한대로 열려져 있는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에게 확인할 것은, 우리가 가진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믿음을 우리가 지닐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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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62.

시편 105:28-30.

찬송 25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귀한 의미를 생각나게 한다. 사랑의 십자가, 감사의 십자가, 위로의 십자가, 그리고 소망의 십자가 등 등. 서양에는 십자가 교회가 많이 있다. 기독교 진리의 핵심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십자가 교회가 매우 드물다. 고난으로만 생각하는 때문이다. 그게 슬픈 현실이다.

 

2. 주현절후 넷째 주일의 사도서간 고전 13:1-13을 본문으로 사랑으로 충만한 삶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고매한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께서 유행가 가수 패티 킴씨에게 전화를 걸어, 부부와 자녀들이 너무 사랑스럽다며 계속 그렇게 살라고 말하고 싶다 했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패티 킴은 최현배 선생님의 장례식에서 조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온전한 사랑에 눈뜰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3-5).

모든 사랑은 온전한 사랑과 반쪽뿐인 사랑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기쁨이 있는가 하면, 사랑의 아픔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기쁨을 희망하지만, 사실은 사랑의 아픔 혹은 사랑의 슬픔이 더 많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결혼식 주례사에서 사랑의 기쁨보다는 사랑의 아픔을 더 많이 강조했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그것을 얻으려고 바친 땀과 수고가 너무 컸기 때문도 그렇지만, 실상은 위장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사랑의 아픔은 누구에게나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성을 갖는 현상인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아야 하고, 친절해야 하며, 시기도 자랑도 교만도 무례하지도 사욕을 품어서도 성내서도 앙심을 품지도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이란, 오랜 전부터 우리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란 용기가 필요하다 말씀하십니다(6-10).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낭만적인 감정 소비재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충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발산하기도 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하기도 하며, 치우치지 않고 넓은 관용을 베풀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나 희망 그리고 인내의 폭도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랑의 영역은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신앙의 다양한 은사들이 시들어질 수 있습니다. 예언이나 방언이 멈출 수 있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만, 사랑은 언제든지 다시 솟아나는 화수분/貨水盆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해야 할 신앙의 덕목은 사랑이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사랑만큼은 언제나 완전한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생 힘쓸 사랑하는 삶에는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11-13).

흔히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반쪽 사랑이 아닌, 온전한 사랑으로 우리들 인생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친히 고난의 멍에를 짊어지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는 가장 확실한 상징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유일무이한 신앙의 표지/標識입니다. 미국교회를 심방한 일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모든 가정들의 거실에는 십자가가 중앙에 걸려 있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형통할 때나 힘들고 어려울 때도 그 십자가는 그 가족들에게 언제나 거룩한 힘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랑스러울 수도 있고, 때론 부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짊어지신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를 다시 감싸주고 믿음과 희망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우슬초목사 시무)에서 설교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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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61(2025. 2. 1. 토요일).

시편 105:25-27.

찬송 20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주 한국일보에 실린 오피니언의 몇 줄이다. “포토맥 강가에 섰다. 25년 만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25년 전 덜레스공항을 통해 이민 수속을 밟은 후 두 달여 동안 이곳에 머물다 동생이 살고 있는 다른 주로 떠나버렸다. 다시 이곳을 찾아와 포토맥 강가에 서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보니 엠이 부른 바빌론 강가에서란 노래가 떠오른다. 유대인들은 70여 년 동안 바빌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느낀 타국의 서러움과 고향인 시온(Zion)’을 그리며 바빌론 강가에서 노래를 불렀던 그들이 왜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2024. 2. 27. 안초희.

 

2. “유대인들의 전통(1-23)”을 읽었습니다. 전통이란 오랜 세월 속에 길들여진 습관들이 개인이나 사회 속에서 규범화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전통은 강제하는 힘을 가진 법보다도 더 끈끈하고 단단한 힘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이런 전통은 한 인간이나 가정 그리고 사회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대인의 두 가지 전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위생과 건강을 위해 집집마다 5-6개의 물 항아리를 두고 외출 후 손과 발을 씻는 전통 소위 <정결례>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감사나 기타 목적을 이루었을 때 드리기 위해 준비하는 예물 <고르반>이란 전통이 그것입니다. 저는 평화방송을 자주 시청하는데 예배를 시청하기도 하고,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시청하기도 하는데 많은 유익을 얻곤 합니다. 그런데 제가 속한 개신교회에 비해서 뚜렷하게 다른 특징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똑같이 말씀선포에 강조하면서도, 개신교회는 선포 그 자체로 끝나는데 반해서 로마 가톨릭의 강론에서는 실천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런 강조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로마 가톨릭교회는 행위에 강조한다는 비판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굳이 야고보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행함이 없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이제 예배는 끝났습니다. 세상으로 나가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증거하십시오.” 마지막에 선포하는 소위 파송의 인사말이었습니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에 분명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요긴하게 사용하였던 6개의 항아리는 정결례에 사용할 도구였습니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빗물을 받아서 그릇을 씻거나 자신들의 손발을 씻고 밥을 먹곤 하였습니다. 우리들도 본받을 만한 매우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과 발을 씻지도 않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스푼이나 포크, 나이프 등이 없이 식사를 하는 습관 때문에 이 손을 씻는 법이 엄격하게 지켜지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왕하3:11). 엘리사는 엘리야의 종으로 그를 섬겼고 주인이 손을 씻도록 물을 부어주는 일은 종이 할 일이었습니다. 이렇듯 건강을 위해서나 청결을 위해서 정결례는 순기능이 아주 많은 것이므로 반대하거나 부정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통에 대한 시각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 예수님의 견해였습니다. 그 실례로 든 것이 저 유명한 <고르반 전통>이었습니다. 고르반의 기원은 레 1:2, 2:1, 3:1, 7:12-17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고르반이란 뜻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하나님 전에 바치지는 않았으나, 바치기로 작정하고 따로 떼어놓은 재물을 의미하였습니다. 수입이 생겼을 때 먼저 하나님께 드릴 량으로 예물을 떼어놓지 않으면 정작 드릴 때가 되었을 때, 써 버리고 없어진 후여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경험에서 나온 전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전통이 아주 여지없이 변질되어 버렸던 것을 주님은 지적하셨습니다. 가령 부모나 형제가 돈이나 재물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빌려줄 마음이 없으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르반 뿐이라고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림이 된 것을 부모든 형제든 더 이상 조를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좋은 제도나 전통 심지어 좋은 법까지도 얼마든지 역기능을 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사랑이 없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핑계였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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