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08호(2025. 3. 20. 목요일).
시편 109:20-22.
찬송 1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95. 3. 14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있었다. 유학파 대학교수가 1천억 대의 재산가인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피고인인 아들 대학교수는 사업 실패로 20억 원 가량의 빚이 있었음에도, 다시 사업을 준비하며 아버지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유산 상속에서 장남인 자신의 몫이 적다고 생각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 패륜아가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 20만인 2016년 2월 출소했다. 그는 출소 후 모친이 생전에 남긴 76억 원을 증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배금사상/拜金思想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교회도 그 뒤를 쫓고 있으니 근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 “북쪽에서 적들이 쳐들어온다(9-10, 19-28절)”을 읽었습니다. 선택적 기억이라는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편리한대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모든 말과 관계에는 대부분이 조건적입니다. 가령 사랑의 조건 하에서만 사랑이 통용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약속이 지켜지는 동안만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조건이나 약속은 무시해 버린 체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랑을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가령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얘기가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항의한 말 속에 들어 있는데, “야훼여, 당신이 이 예루살렘 백성을 속이시다니”라고 막말에 가까운 얘기를 하는데, 모든 게 잘 되어 간다고 하신 말씀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배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요즘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소위 가짜 뉴스/fake news 는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사용하는 반쯤만 진실인 뉴스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가짜 뉴스는 제대로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지만, 어리석은 백성들, 반쯤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속일 수 있는 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가짜 뉴스로 인해서 한 사회 전체가 혼란에 쌓일 수 있고, 나라 전체가 뒤죽박죽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 안 구석구석에서는 죽겠다고 아우성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내 속을 모르다니. <중략> 나쁜 일 하는 데는 명석한데, 좋은 일은 할 생각조차 없구나.”고 탄식하십니다. 그 결과 하늘과 땅 그 어디에도 거칠고 캄캄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에 불타 모조리 잿더미가 될 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고 말았다고 탄식하는 예언자의 절망의 목소리만 울리고 있습니다. 기어이 하나님께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쩌면 천만 다행일지 모르겠습니다. 비극의 실마리와 비극의 종착역을 훤히 내다보면서 살아간다는 얼마나 두렵고 또 슬플까요? 그러나 바보스러워서 그것 하나도 알지 못하니까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어가 코를 골며 잠을 청하는 것입니다. 요즘 저의 아이들은 노인들에게 찾아오는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이런저런 보험을 들겠다며 야단들입니다. 치매가 가장 문제라고 말하기도 하고, 간병인 보험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저의 내외는 그런 문제로 잠을 이루지 못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문제일 것이라고 태평하게 생각한 때문입니다. 요 몇 달 사이에 생면부지인 지인들의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갔다 연락을 해 왔습니다. 대부분이 90세 언저리라고 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는 속담이 왜 그리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무지와 분별없음을 위안거리로 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음입니까?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시인 김상용은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 건 웃지요.” [문학] 2호(1934. 2). 심각할 수도 있는 질문, “왜 사냐 건”에 대해서, “웃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는 되묻기 인지 모르겠습니다. 알 듯 말 듯 한 것들이 우리들 삶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는 체 까불지 말고, 모자란 듯 하나님을 올려다보며 물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