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11(2025. 3. 23. 사순절 셋째 주일).

시편 109:29-31.

찬송 30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최소한 농촌아이들이라면 산에 들에 피어나는 꽃 이름이나 새 이름은 알아야 할 텐데, 이 아이들은 골목길에 돋아나는 풀이름도 모른다. 산에 가서 나무하는 아이는 물론 소를 뜯기면서 꼴을 베는 아이도 없다. 바구니를 끼고 들판에 나가 나물을 캐는 아이도 없고, 시냇물에 다슬기를 줍고 통발로 고기를 잡는 아이도 없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p.128.

 

2. 사순절 셋째 주일의 복음서 누가복음 15:1-3, 11-32을 본문으로 잃어버린 것들을 찾으시는 우리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서의 특징을 정리한 신약개론을 보면, 누가복음서는 인도주의 사상과 보편주의 사상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와 세리 그리고 죄인들과 어린이 등 약자에 대한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1-7).

요즘은 깜빡 깜빡하는 일들이 자주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모자를 쓰고 나왔는데 어디다 두었는지 도무지 찾지를 못했는데, 한 사날이 지난 다음에 빨래더미에서 찾았습니다. 이렇듯 모자 하나도 여러 날 신경이 쓰였거든,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는 잠을 설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루는 주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인 자리에 설교를 하셨는데, 이를 지켜본 바리세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고매한 선생이 하찮은 무지랭이들과 어울릴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 유명한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탄생한 것입니다. 100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에게는 한 마리 한 마리 양이 모두 소중한 재산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수 십 수백 번을 헤아리고 확인했던 양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우리들 인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절대로 잃어버린 체 둘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잃어버린 아들 비유는 하나님 사랑의 백미입니다(11-32).

스펄전 이후 가장 유명한 설교자로 헐무트 틸리케를 거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의 설교집 중 하나는 <기다리는 아버지>라는 게 있습니다. 성경의 초점은 망나니로 부친을 속 썩였던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런 아들을 기다리는 하나님께 맞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식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눈물로 키운다는 말이 생겨났는지 모릅니다. 어느 집의 둘째 아들은 망나니였습니다. 제 멋대로 살고 싶어 했고, 마침내 부모께 물려받을 재산을 가불받아 집을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상거지가 되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집을 향했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다음 날부터 매일 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야말로 탕자와 같은 우리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이십니다. 언제 어디서든 아버지는 두 팔 벌여 우리를 환영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런 철부지들을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것입니까?(3:16).

한 젊은 전도사님이 저의 교회에서 목회 실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주 똑똑한 분이었는데, 제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로 오늘 셋째 단락의 표제어와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철부지들을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요즘 말로하면 애당초 우성인자를 가진 자식을 중점적으로 돌봐야지 열성인자를 폐기처분해야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을 쏟는 아버지로써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그들의 잠재력을 꽃피우도록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때문입니다. 링컨이 남긴 말 중에 하나님께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을 살게 하신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는 때문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어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10(2025. 3. 22. 토요일).

시편 109:26-28.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권정생 선생은 시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버스비가 모자라 완행기차를 탔던 얘기를 썼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한사코 자리를 양보해서 앉게 되었는데, 무심코 교회에 다니시느냐고 물었답니다. 아주머니는 반색을 하며 그렇다 대답하시고는, 10여년 쯤 이상한 체험을 했다 들려주더랍니다. 바쁘게 집안일을 하는데, 한 거지가 찾아와 구걸을 해서,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오라고 했더랍니다. 그런데 박대를 받은 거지 뒷모습을 보니까 틀림없이 예수님이더랍니다. 그래서 허겁지겁 쌀 한 대접을 퍼서 뒤따라갔으나 찾을 수 없었답니다. 그제야 잘못을 깨우치고 대성통곡을 했다 합니다. 그 뒤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면 예수님 대하듯 하며 살고 있다 한다 했습니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pp.116-117.

 

2. “마땅히 멸망하리라 2(20-31)”을 읽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죄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미련하고 속없는 청맹과니들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어서, 바보 같아서 죄를 죄인 줄 알지 못하고 짓는 죄인들입니다. 그런가하면 상식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릴 줄 아는 보통의 죄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흔히들 얘기하는 대로 힘든 세상에서 살아보려고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 짓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법의 내용이나 속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법망을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닐 줄 아는 소위 법꾸라지들 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법의 내용으로 보아서 분명히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절차상 하자가 있다거나 형식적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불법한 내용까지 엎어버리는 경우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변호사를 사야하는 경우가 필수요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름 청맹/靑盲과니가 그런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눈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볼 수가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입에서는 청맹과니만이 아니라 멀쩡한 귀머거리라는 말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적으로는 불구가 아닌데 불구처럼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넘치도록 많은 특혜와 특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철따라 소나기 가을비 봄비를 내려주시고, 추수 때를 어김없이 지켜주시며, 깊이 잠들어 있거나 높은 파도와 싸울 때에도 동행하여 주시는 든든한 인생의 보장이 되어주신다 철석같이 약속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걷어 차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기고, 거짓과 불의를 일삼으니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 인간은 아주 오래 전 선조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불순종하는 잘못을 저질러 온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뱀에게 유혹을 받을 때, 의심과 불신의 마음을 심어준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오히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맑고 밝게 세상을 볼 수 있다고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실체를 흔드는 의심의 씨앗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있는 양 생각하도록 허세를 부리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선의/善意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고, 올가미를 놓아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약탈해서 벼락부자가 되려고 하며, 고아나 빈민의 인권을 짓밟고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불행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언자들은 거짓말을 퍼트리고, 사제들은 제 멋대로 가르치며, 백성들은 그런 짓거리를 도리어 환영하는 시대를 만들고 있다고 말입니다. 초록이 동색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09(2025. 3. 21. 금요일).

시편 109:23-25.

찬송 5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시대 유감>이라는 가사엔, “, 짜식들 되게 시끄럽게 구네/ 그렇게 거만하기만 한 주제에/ 거짓된 너의 가식 때문에/ 너의 얼굴 가죽은 꿈틀거리고/ 나이 든 유식한 어른들은 예쁜 인형을 들고 거릴 헤매다니네/ 모두가 은근히 바라고 있는 그런 날이 바로 오늘 올 것만 같아/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 , 기다려왔잖아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네섬뜩한 글도 있지만, 반항 끼가 가득한 가사다. 그러나 그들의 컴백에 가출했던 청소년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도 실렸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p.153.

 

2. “마땅히 멸망하리라(1-9)”을 읽었습니다. 가끔 역사의식이라는 말을 해서 핀잔을 듣기도 하고, 눈살을 찌푸리게도합니다만, 예레미야서를 읽을 때는 그런 악역을 누군가는 해야 하겠구나 싶습니다. 평화와 안정 그리고 부귀와 형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일 뿐, 현실은 정반대되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마주하게 될 심각한 시련과 고통을 막아주고자, 그 임무를 예언자들에게 맡겨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하소연 하듯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면 바르게 살며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찾아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예루살렘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이 소환됩니다. 소돔 땅에 살고 있던 조카 롯을 구하려고 의인 10명까지 조건부로 걸었던 말씀 말입니다(18:32).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바르게 사는 사람/의인이 단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고삐 풀린 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사자와 늑대 그리고 표범에게 물려 죽음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지은 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상을 의지하는 불신앙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두고 간음과 창녀를 찾아다니는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의식이라는 것을 배우지 않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던 E. H. 카의 말을 다시금 되풀이 하게 됩니다. 과거를 모르는 사람에게 현재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며, 현재를 궁금해 하는 사람에게는 과거를 일깨워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똑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지식수준이나 생활수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지도자라는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역사의식이 투철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그들의 삶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힘겨운 삶의 무게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 반대로 너무도 만사형통하는 현재에 깊이 잠들어버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물 안에 갇힌 사람처럼 앞을 보아도 위를 보아도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과거고 미래 고를 따지지 않고, 당장 힘을 줄 것 같은 것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무슨 일이든 생각대로 잘 풀려갈 때는 마치 제 자신이 슬기롭고 많은 노력을 한 때문에 그런 줄 알고, 교만에 빠지거나 허세에 기울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것이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결코 배움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저는 유명 대학교수 보다는 시골에서 종지기를 하거나 초등학교 교사를 하거나 아예 봉사를 짓는 분들에게서 훨씬 더 많은 깨우침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을 차례로 부르면, 권정생 아동문학가, 이오덕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그리고 원경선 풀무원 원장님이십니다. 그리고 평생을 농사꾼으로 사셨던 저의 어머님이십니다. 역사를 배우지도 기억하지도 않을 때, 삶은 더욱 헝클어지고 막막해지고 캄캄해지는 것을 이스라엘은 너무도 자주 맛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악역을 담당한 예언자는 늘 공격적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08(2025. 3. 20. 목요일).

시편 109:20-22.

찬송 1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95. 3. 14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있었다. 유학파 대학교수가 1천억 대의 재산가인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피고인인 아들 대학교수는 사업 실패로 20억 원 가량의 빚이 있었음에도, 다시 사업을 준비하며 아버지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유산 상속에서 장남인 자신의 몫이 적다고 생각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 패륜아가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 20만인 20162월 출소했다. 그는 출소 후 모친이 생전에 남긴 76억 원을 증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배금사상/拜金思想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교회도 그 뒤를 쫓고 있으니 근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 “북쪽에서 적들이 쳐들어온다(9-10, 19-28)”을 읽었습니다. 선택적 기억이라는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편리한대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모든 말과 관계에는 대부분이 조건적입니다. 가령 사랑의 조건 하에서만 사랑이 통용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약속이 지켜지는 동안만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조건이나 약속은 무시해 버린 체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랑을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가령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얘기가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항의한 말 속에 들어 있는데, “야훼여, 당신이 이 예루살렘 백성을 속이시다니라고 막말에 가까운 얘기를 하는데, 모든 게 잘 되어 간다고 하신 말씀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배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요즘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소위 가짜 뉴스/fake news 는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사용하는 반쯤만 진실인 뉴스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가짜 뉴스는 제대로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지만, 어리석은 백성들, 반쯤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속일 수 있는 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가짜 뉴스로 인해서 한 사회 전체가 혼란에 쌓일 수 있고, 나라 전체가 뒤죽박죽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 안 구석구석에서는 죽겠다고 아우성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내 속을 모르다니. <중략> 나쁜 일 하는 데는 명석한데, 좋은 일은 할 생각조차 없구나.”고 탄식하십니다. 그 결과 하늘과 땅 그 어디에도 거칠고 캄캄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에 불타 모조리 잿더미가 될 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고 말았다고 탄식하는 예언자의 절망의 목소리만 울리고 있습니다. 기어이 하나님께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쩌면 천만 다행일지 모르겠습니다. 비극의 실마리와 비극의 종착역을 훤히 내다보면서 살아간다는 얼마나 두렵고 또 슬플까요? 그러나 바보스러워서 그것 하나도 알지 못하니까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어가 코를 골며 잠을 청하는 것입니다. 요즘 저의 아이들은 노인들에게 찾아오는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이런저런 보험을 들겠다며 야단들입니다. 치매가 가장 문제라고 말하기도 하고, 간병인 보험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저의 내외는 그런 문제로 잠을 이루지 못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문제일 것이라고 태평하게 생각한 때문입니다. 요 몇 달 사이에 생면부지인 지인들의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갔다 연락을 해 왔습니다. 대부분이 90세 언저리라고 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는 속담이 왜 그리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무지와 분별없음을 위안거리로 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음입니까?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시인 김상용은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 건 웃지요.” [문학] 2(1934. 2). 심각할 수도 있는 질문, “왜 사냐 건에 대해서, “웃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는 되묻기 인지 모르겠습니다. 알 듯 말 듯 한 것들이 우리들 삶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는 체 까불지 말고, 모자란 듯 하나님을 올려다보며 물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07(2025. 3. 19. 수요일).

시편 109:17-19.

찬송 41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엔 처음부터 끝까지 나 하나만을 위한 기도 말은 없다. 한결같이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다. 나만을 위한 기도는 곧 나만을 위한 삶이 있을 뿐이다. 주기도문은 앉아서 입으로 외는 기도가 아니다. 행동하는 기도, 살아 있는 기도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참다운 삶의 기도다. 하나님의 나라엔 특혜라는 건 없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p.46.

 

2.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6-18)”을 읽었습니다. 요시아 왕 때 예레미야가 받은 신탁/神託은 이랬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물론 남왕국 유다도 엇비슷하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친히 목도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높은 산마다 그리고 무성한 나무 밑에서 우상숭배를 했다고 말입니다. 할 만큼 했으면 돌아오려니 했는데, 거짓부리로 돌아온 척만 했던 것입니다. 마치 바람피운 여인이 새서방과 놀아나더니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친 모습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보다 유다가 더 요괴 짓을 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북 왕국 이스라엘에 가서 외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나를 배반하고 떠나갔던 자들아 돌아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마음 약한 촌뚜기 정혼자처럼, 자신의 모질지 못한 마음을 솔직하게 실토하고 맙니다. 그리고 제발 남의 나라 신들을 찾아다니는 어리석은 정혼 녀에게 그만 헛짓거리를 멈추고 돌아오라고 애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처럼 유약한 분이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배신자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 얼마나 속이 쓰리고 아플 것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이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어 비틀거리고 있어도, 그들에게서 옛 모습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에 흔해 빠진 사랑이야기들은 처음부터 허망한 것임을 전제/前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철부지 사랑으로 시작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추한 사랑으로 끝나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이대별 사랑을 정리한 얘기가 있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10대 사랑은 달달해. 20대 사랑은 뜨거워. 30대 사랑은 결혼해. 40대 사랑은 시발거(헤어질 결심). 50대 사랑은 저리가. 60대 사랑은 귀찮아. 70대 사랑은 어디가. 80대 사랑은 돌아와. 90대 사랑은 같이가. 그러니 우리는 애시당초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시작했다 끝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할 때, 인용하는 성경 구절로 요 3:16과 롬 5:8을 들곤 합니다. 이를 두고 이른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3:16은 온 인류를 감싸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라고 한다면, 로마서 5:6-11은 십자가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라고 말입니다. 한동안 해방신학과 민중 신학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 오를 때, 많은 기득권층에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요 3:16에서 그 범례를 찾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해방신학과 민중 신학에서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그리고 변방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주목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신학들의 영향 때문인지, 우리 사회나 교회가 조용해 진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제가 만난 어느 섬 지방에서 목회하시는 50대 목사님은 오히려 더욱 더 양극화 되어가는 시대 상황에 대해서 교회가 눈을 감고 있다고 울분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무기력하고 자존감조차 챙기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눈길을 쏟아 붓고 계시다는 것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06(2025. 3. 18. 화요일).

시편 109:14-16.

찬송 58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주의는 적어도 다음 네 가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동의한다. 첫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 둘째는 회심이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믿는다. 셋째는 비 기독교인을 기독교인이 되도록 돕는 선교의 절박성에 동의한다.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한다는 신앙을 따른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고 가르치는 근본주의 신학과 동일시해선 안 되며, 해석의 강조점 때문에 생기는 신학적 차이는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2. “이스라엘의 배신을 꾸짖으시다(1-13)”을 읽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매우 정중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치 우리가 자세를 고쳐서 듣도록 운을 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사는 사람들에게 똑똑히 일러 주어라.”(1-3) 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내용은 옛날이야기를 꺼내신 것입니다. 씨도 뿌릴 수 없는 땅 사막에서 지냈던 시절을 떠올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젊은 날의 순정을 가졌던 시절이었고, 막 약혼을 한 사랑으로 뜨거웠던 시절을 기억해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바칠 첫 열매를 집어 삼킨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심한 벌을 받은 것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가깝고 소중한 관계일수록 서로 지켜야 할 덕목과 예의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상처가 쉽게 생길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의 배신을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4-13). 하나님을 멀리하더니, 허수아비를 쫓더니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였는데, 이 땅을 더러운 땅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사제라는 자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율법사라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지도자라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기만 하고, 예언자라는 자들은 우상 바알의 말을 전하고 다닌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혐의를 고발하고 계십니다. 세상 모든 나라를 돌아다니며 찾아보라고 하십니다. 자신들이 섬기던 하나님을 바꾸어 도리어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기가 막히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생수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말라빠진 웅덩이에 불과한 우상을 섬기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입니다(공동번역 성경을 풀어서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요즘 복음이란 무엇인가? 를 묵상하곤 합니다. 누구나 복음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사람중심으로 또는 우상중심으로 모든 희망사항이 이루어지도록 부추기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이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넓은 마음으로 감싸 안아 주려고 해도, 요즘 복음이니 복음주의니 하는 분들이 복음은, 첫 번째 의미이거나 그쪽 방향성을 갖고 있다 생각이 듭니다. 온갖 거짓과 탐욕 그리고 증오와 분쟁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그 방법을 복음이라는 말로 감춰버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예레미야가 가장 힘들어 했던 것도 이런 말을 혼돈에 길들여진 시대를 살아야 했던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느 시대나 성공주의와 출세주의가 신앙의 목표와 방법인 것처럼 호도한다고 하면, 이는 병든 신앙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곤 합니다. “나는 시장 어귀에 좌판을 벌이고 몇 푼 벌이도 안 되는 가난한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를 감싸주는 목회를 해 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후임자는 이런 교회를 계승할 줄 알았는데, 정치적인 놀이에 취해서 고관대작들을 친구로 삼는데 바쁘다고 비판했던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70%이상이나 되는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그런 교회가 되려고 힘써야 한다고 말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친구라 말씀하셨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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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05(2025. 3. 17. 월요일).

시편 109:11-13.

찬송 39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끊고 맺음이 분명한 사람은 바쁜 것처럼 보여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여유가 있다. 우물쭈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은 한가한 것처럼 보여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바쁘다. 잎에 직면하여 마구 소란을 피우거나 평소에도 걱정만 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공연히 괴로움만 더해질 뿐이다. 무슨 일이든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우유부단한 것만큼 나약하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56.

 

2. “예레미야가 부르심을 받다(1-19)”을 읽었습니다. 난세/亂世에 영웅이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예언자인데, 그는 몰락한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나, 요시야 13(기원전 627)에 활동을 시작했으며, 여호아하스,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기야왕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는 유다가 멸망한 시대에 살았으며, 망명자들에 의해 강제로 이집트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는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불멸의 존재로 여기며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던 유다를 향한 야훼의 심판을 40년 동안 충실하게 선포했고, 그 대가로 박해 폭력 격리, 수감 등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침공으로 몰락한 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바룩이 대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소명하시는 중심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의 예언자로 부르셨다고 말씀하시자, 그는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고 대답했고, 이에 대한 하나님은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신 후, “내가 늘 네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두 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살구나무 가지 환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끓는 가마 솥 환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부르실 때, 특별한 환상을 보여주시는 내용을 소개하시곤 하는데, 이는 난세에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는 연약한 사람들에게, 강하고 확실한 동기부여를 위해서 그 같은 환상이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는 떨기나무의 불꽃을 보여주셨고(3), 아모스는 메뚜기 환상 등 5가지(7-9)을 보여주셨습니다.

    첫 번째 환상인,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살구나무 가지 환상을 보여주신 의미는,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는 12절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살구나무는 유대 땅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나무로, 모든 과일나무 중에서 가장 빨리 꽃을 피우고(12) 2월에 열매를 얻을 수 있는 나무라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성막 또는 성전의 등대와 등잔을 만들 때(25:31-37),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살구나무 꽃 모양을 하게 한 상징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곧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입이 되어 무슨 말이든 하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겠다는 보증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두 번째 환상인 끓는 가마솥 환상은, 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곧 침공을 암시하며, 그전에 하나님의 심판이 온 유다를 휩쓸 것이지만, 추운 겨울을 견디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살구나무 가지처럼, 어떤 경우에도 희망과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를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누란/累卵의 위기에 나라와 신앙이 암울할 때에, 하나님의 일꾼 예언자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강한 나라 바벨론의 군대가 유다 땅을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사람들을 죽이고, 집과 성전을 불태우고, 수많은 지식인들을 오랏줄에 묶어서 끌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께서는 또 심판까지 하시겠다 하십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이럴 때만은 하나님께서 좀 참아주시면 좋겠다 싶은데 그게 아닙니다. 받을 벌을 다 받고 노예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살구나무는 특별할 것 없는 아주 흔해빠진 나무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꽃을 피우고 가장 먼저 열매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지막 희망인 성전의 등대와 등잔에는 살구 꽃 모양을 새기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아직도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으로 고통 받는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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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04(2025. 3. 16. 사순절 둘째 주일).

시편 109:7-10.

찬송 58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막내가 캐나다 시민권을 신청할 서류를 부탁해 왔습니다. 손자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에 필요해서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시민권제도는 지난 160년간 수정헌법 제14조에 의해, 미국에서 출생하였거나, 미국인에 의해 출생한 경우 출생과 동시에 미국 시민권과 이전의 국적을 포함 복수 국적자가 되었는데, 이런 시민권제도가 폐기될 것이라 합니다. 세상의 시민권은 여러 가지 이해관계에 따라서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불확실한 제도임이 확실해졌습니다.

 

2. 사순절 둘째 주일의 사도 서간문 빌 3:17-4:1을 본문으로 우리가 가진 시민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시민권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시민권이란 어느 나라에 속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 시민권은 안전합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자기 자신을 모델로 삼고 따르라 말씀하십니다(17).

요즘 우리가 사는 지구촌은 엄청난 폭풍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지사 덕 포드/ Doug Ford의 말처럼, 단 한 사람 트럼프가 일으킨 폭풍입니다. 적어도 지난 70여 년 동안 이른바 미국에 의한 평화/ Pax Americana를 당연시 생각하는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화를 내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희생에 대해서 알아주지 않는 데서 오는 피로감은 물론 미국의 경제가 아직도 세계 1위임에도 불구하고, 무역에서 적자를 내는 것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듯합니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것은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돼 있는 체제까지도 부정하듯,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 선을 넘나드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완전히 다른 말씀으로 우리를 충고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만을 의지하는 사람인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 중심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18-19).

신앙생활이란 매우 독특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의미 있는 고난을 자원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는 인물들이 그랬습니다. 풀무원의 원경선 선생님이나 YMCA 총무 현동완 선생님, 전영창 교장선생님과 장기려 박사님 같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일부러 힘들고 어려운 삶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힘들어하는 약자와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중에서 삶의 의미를 택하는 것은 순전히 선택자의 권리입니다. 사도는 십자가의 길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세상 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으나, 십자가의 열매는 영원무궁한 행복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롭고 행복하다면, 누군가 이런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시민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위대한 삶을 향해 걷는 것입니다(20-21).

미국에 처음 유학 갔을 때 저의 멘토이신 교수님 댁에서 한 학기 내내 주말이면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그때 사모님께서 미국에 살면 미국사람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곳이 세상인데 세상 사람처럼 살아야 맞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들 신앙인들의 어려움이 예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세상살이는 영원하지 않고 머지않아 떠나갈 나그네살이 라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은 세상살이에 충실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살이는 하늘나라 시민으로 완성되어 가는 훈련과정이라고 말입니다. 마치 가나안에 정착하기 위해 광야생활 40년의 훈련이 필요했듯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절실해 지는 이유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기를 원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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