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03(2025. 3. 15. 토요일).

시편 109:4-6.

찬송 20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 강의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를 용문행 전철에서 93/325 페이지 읽었다. 유서를 써들고 다니는 얘기가 나오는데, 까닭은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라고 이야기한다.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이 하는 자기변명처럼 들린다.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보려는 호스피스 환자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2. “너희가 겪은 일을 자손에게 가르쳐라(18-25)”을 읽었습니다. 영국 기자가 우리나라의 6.25동란 후를 취재하면서 남긴 글을 읽었습니다. 그 배고픔과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자녀 교육을 위해서 힘쓰는 우리 민족이 위대해 보였다고 말입니다. 어린 시절 큰 집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천자문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형님 또래의 고만고만한 동네 아이들을 모아두고 천자문을 시작으로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는 책을 가르쳤습니다. 그 다음에는 계몽편, 명심보감, 소학 등의 순서로 공부하였고, 이 과정이 끝나면 논어, 맹자 등 어려운 과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다 공부하면 학부형들이 준비한 책거리라는 잔치를 벌여서, 동네 어린 아이들까지 몰려들어서 떡 한 개씩을 받아먹곤 했습니다. 그러니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쁜 시절에, 자녀 교육에 주목을 하고 온 사회가 힘을 모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일찍부터 일정한 시험을 거쳐 관리로 등용하는 과거시험 제도가 있었는데, 고려 광종 9958년에 군주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처음 과거제를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이 과거 시험은 3년에 1번씩 치르는 것이 원칙으로 간지가 자(), (), (), ()인 해에 시험을 보았는데 이를 식년시(式年試)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신분제였던 반상제/班常制에서 극심했던 빈부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사회적 계급을 타파하고 신식 교육이 상륙하면서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때가 구한말이었고, 기독교회의 선교로 연희전문 이화전문 등 교육기관이 개설되고 교육이 장려되었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가난과 무력감으로 절망적이었던 암울한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교육을 통해서 신분상승을 꾀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교육은 우리 사회의 최고의 꿈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이런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우친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정교육을 통한 자녀교육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쉐마 교육입니다. 그들은 교육 내용이 분명하였고, 그 방법 또한 철저하였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비록 2천년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는 디아스포라로 살았지만, 가장 위대한 민족 중의 하나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근대 민주주의 입장에서 보면, 신정/神政국가라는 아랍 세계와 궤를 같이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은 국가적 권력으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자발적인 의사로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교육방법에 대해서는 높은 점수를 주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교육을 시행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교육의 목적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성취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집에서나 여행 중이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있을 때에도 교육의 목적인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입시키고 있는 점입니다. 이런 교육방법은 철저하지 않으면 효과를 볼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풀무원이 의정부에 있을 때 두어 번 농어촌 교회 지도자를 위한 동계 성경 강습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구석구석 기둥 기둥마다, “욕심 뽑기라는 문구가 붙여져 있었는데, 원장님의 말씀으로는 그게 어렵다고 하셨고, 성공하지 못했다 하셨습니다. 그 당시 풀무원 공동체살림이 있었는데, 어른들은 공동체 정신을 이해하고 협조적이었지만, 어린 아이들은 도무지 교육이 백해무익하더라는 말입니다. 교수가정의 아이들은 공동체 정신을 따라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데, 택시 운전수 아들이 메이커 정품만 고집하더라는 것입니다. 기왕 할 바에는 철저하게 실천에 옮겼어야 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