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25.

시편 114:4-6.

찬송 28. 383, 39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선행/善行이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남이 보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다. 선을 행할 의지가 있으면, 선을 행할 기회가 주어진다. 선행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또 다른 선행으로 선행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p.156-157.

 

2. 사순절 다섯째 주일 사도서간 빌 3:8-14을 본문으로 목표가 분명한 인생을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 저는 거창한 주제를 가지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며, 그 목표를 향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바울 사도의 간증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우선 목표란 무엇이며, 어찌하여 목표를 가져야 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19:21).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꿈을 품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도의 꿈이었습니다. 꿈을 품는 것은 삶에 의미를 채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꿈을 품도록 가르칠 책임이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제가 200011월부터 20157월까지 중국 등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39주간 가졌는데, 인상적인 한 장면을 기억합니다. 하얼빈에서 목적지인 치치하얼로 가는 열차에서 현지 중학교 교사와 같이 가게 되었는데, 중국 학생들이 꾸는 꿈에 대해 물었는데, 놀랍게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꿈에 대해서 희망에 대해서 묻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얘기였습니다. 꿈을 꿔야하고 희망을 품어야 할 중요한 시절에 말입니다. 저의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부>에는 장래희망이 목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의 꿈은 저의 어머님의 영향이었는데,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엔 여자 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12-14).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소박한 꿈도, 원대한 꿈도 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꿈들이 한 개인이나 집안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한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울 사도의 꿈은 개인적이면서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꿈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꿈이란 매우 소박한 신앙적인 꿈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려고 힘쓰셨던 꿈, 곧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그 꿈을 따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고 붙들어 주셨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대로 개인적인 구원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특히 절망과 슬픔과 고통 속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영원한 구원을 이루려는 목표였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따르는 꿈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했습니다(8-11).

요즘 저는 청운의 꿈을 안고 동문수학했던 친구들을 자주 만나는 편입니다. 그들 중에는 나라를 구해보겠다는 애국심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던 사람들로부터, 가난과 질병에 찌든 이웃들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주경야독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이웃들이었습니다. 저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학교에 다녔고 시간을 쪼개어 두 그룹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야학에까지 참여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친구들의 모습은 제 각각이었습니다. 세파에 시달리느라 너무도 많이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았다고도 하였고, 그 빛나고 아름답던 꿈들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을 아쉽다 하였습니다. 사도는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처음 가졌던 그 꿈을 좇아서 달려가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다 던져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낌없이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자랑스러운 삶을 살아갔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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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23(2025. 4. 4. 금요일).

시편 113:7-9.

찬송 23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였다. “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나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 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신의 일을 이성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20.

 

2. “메시아(1-8)”을 읽었습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מָשִׁיח/ַ 마쉬하인데,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유다 사회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행하는 의식이었는데, 아론과 같은 대제사장(3:1-3), 다윗과 같은 왕(삼상 16:13),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는 반드시 기름부음과 같은 성별(聖別)(1:4-5) 필요로 했습니다. 이렇듯 기름부음을 통한 성별의식은 정통성을 가진 하나님의 일꾼으로써의 자격을 인정해 주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왕의 정통성은 그 권한과 영향력의 크기 때문에 더욱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씀하는 메시아는 죄와 전쟁을 종식시켜 우주적 정의를 가져오며,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이런 구약의 가르침을 발전시키고 있다 하겠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로, 이런 주장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고백되었습니다(4:18-19, 4:27, 10:38).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양떼를 돌봐야 할 그들의 책무를 방기/放棄하고 오히려 양떼를 죽이고 흩뜨려 버려서 낯선 땅에서 헤매게 만들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정통 가계에서 참된 기름 부은 현명한 왕을 세워서 바른 정치를 할 뿐 아니라, 백성들의 살 길을 열어 주시겠다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차제에 우리는 기름 부음을 받은 절차상 하자가 없는 정통 하나님의 일꾼들이, 그들이 왕과 같은 사람이든 선지자이든 제사장이든, 어찌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직무를 포기해버리고 세속적인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되는가에 대해서 심각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는 구약적인 의미로 거룩한 제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물이란 제사에서 사용되는 생명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을 위한 보속의 제물이 되기도 하고, 세상의 평화를 위한 제물이 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제사에서는 제사장이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 누군가의 죄를 넘겨주는 의식을 행합니다. 둘째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할 임무를 맡기셨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일관된 사상 중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은 철두철미하게 세상을 복되게 하는 도구로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12:1-2). 제가 받는 질문 중에서 가장 답하기 힘든 것은, 삶의 의미를 묻는 내용들입니다. 너무도 반복적이고 특별할 것도 없는 그래서 때로는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인생살이를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물론 사람들 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젊은 날에는 부지런을 떨 정도로 값진 의미를 위해서 뛰어다녔던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팔순을 넘긴 무기력한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물을 때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냥 웃지요.”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 에밀리 E. 디킨슨의 시 <내가 만일>의 시는 결코 헛된 삶은 살지 않을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일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아요. 내가 만일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 주고 고통 하나를 식혀 줄 수 있다면, 그리고 또한 힘이 다해 가는 로빈새 한 마리를 그 둥지에 다시 올려 줄 수만 있어도. 나의 삶은 진정 헛되지 않아요.” 우리 삶이 위대해 지는 순간은, 허무가 아니라 의미를 위해서 살고 있다 생각할 때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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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22(2025. 4. 3. 목요일).

시편 113:4-6.

찬송 3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이란 안락함이나 성공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현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 그 단순한 사실에 감사함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다. 소박한 기쁨을 맛보고, 그러한 기쁨과 조화를 이루는 능력, 그리고 그런 기쁨을 자주 만들어 내는 능력에서 오는 것이다. 덕 있는 삶,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 때만 행복하다. 그대가 지닌 많은 행복의 원천을 떠올려라.”            윤문원, 지혜와 평정, p.168.

 

2. “여호야김의 운명(13-19)”여호야긴의 운명(20-23)”을 읽었습니다. 어제 제가 제목으로 달았던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아무래도 뒤가 켕겨서 한 마디를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루터의 저 유명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 simul justus et peccator”을 의역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자칫 죄인이 서서히 의인으로 바뀌어 간다는 이른바 성도가 부분적으로 의롭다거나 부분적으로 죄인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의인이고, 전적으로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말에서 루터는 인간이 의롭다함을 받을 때 죄 사함을 받고, 그 후에는 전가된 의를 발판으로 자기의 의를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4:7을 주석할 때, 인간이 외적으로 의로운 것은 단지 하나님의 전가에 의한 것이기에, 내적으로 그리고 우리들 자신들로서는 항상 죄인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루터는 죄인과 의인인 것이 모두 온전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7;18 주석에서는 죄인과 의인의 동시성을 강조합니다. 동시성에서 의인됨과 죄인 됨은 섞여서는 안 되는데, 섞이면 어거스틴의 견해와 같이 부분적으로 죄인이고 부분적으로 의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루터는 완전히 의인이고 동시에 완전히 죄인이라는 이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동시성의 의인과 죄인임으로, 혹자에게는 뻔뻔스럽고 낯짝이 두껍게 보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엊그제 제가 사는 마을에 갑자기 영하 3, 4도로 내려가는 한파가 몰아쳤습니다.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목련꽃이 막 꽃잎을 활짝 펴가던 때에 말입니다. 그 새하얀 꽃잎이 얼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추하게 변해버린 것입니다. 전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 아름다운 자태를 몇 장의 사진으로 찍어둔 게 행운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이든 자연이든 나름대로의 운명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필연적이고도 초인간적인 힘.”을 말한다고 사전을 설명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받은 신탁을 통해서 이를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적어도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운명을 전해주는 것은 대단한 유익이 있다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운명에 대해서 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왕노릇을 하려면 집도 크고, 누각은 시원스럽게, 창살문을 고급스럽게, 그리고 단청은 화려하게 칠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욕심을 부리는 현실을 들추어냅니다. 자신은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백성들이 아쉬울 것 없이 먹고 마시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는 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억눌림을 당하고 들볶임을 겪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전해 들은 대로 선포합니다. “가엾어라 우리 임금님, 불쌍하셔라 우리 왕후님, 죽은 나귀를 치우듯 끌어내어 예루살렘 성 문밖 멀리 끌어다 던지리라.”고 말입니다. 시원스럽고 고급스러우며 화려한 생활이 어느 덧 비참한 죽은 나귀 취급을 받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여호야김의 운명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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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21(2025. 4. 2. 수요일).

시편 113:1-3.

찬송 3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 S, 빈센트 밀레이는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인데, 이런 명언을 남겼다. “세상을 존속시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다.” 가령 최선을 다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열심히 일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가능성과 행복에 이르기 때문이다.

 

2. “옹기장이 집에서 말씀을 받다(1-11)”을 읽었습니다. 옹기와 옹기장이 비유는 우리 인생의 복과 화가 어디에 달려 있는가를 분명하게 일깨워줍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옹기가 빚어지는 장면을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하였습니다. 옹기장이는 흙 한 덩이를 녹로(轆轤)/발 물레 위에 올리고 옹기를 빚고 있습니다. 그런데 옹기장이는 한참을 발로는 물레를 손으로는 그릇을 빚더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 물레 위에 있던 흙으로 다른 그릇을 빚는 것입니다. 그러는가하면 오랫동안 땀 흘려 빚은 그릇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냅다 그 빚은 그릇을 흙더미 속으로 던져 넣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가마에서 사흘 밤낮으로 구워 얻은 새 그릇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깨트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흙이 옹기장이 손에 달려 있듯이, 너희 이스라엘 가문이 내 손에 달린 줄 모르느냐? 내가 옹기장이만큼 너희를 주무르지 못할 것 같으냐?” 그리고 하나님은 정신이 바짝 들게하는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한 민족 한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했다가도, 당신의 말을 듣지 않고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하면, 약속했던 복을 집어치운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복과 화가 달려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옹기의 운명은 옹기장이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신앙의 계율과 생활을 객관화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의 내용과 방법 등은 모두 객관적 해석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극히 주관적인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그 까닭을 4세기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영역이 다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곧 이성에 의해서 해명되고 증명되는 것들은 인간의 영역에 있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은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에서만 논의되고 밝혀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피조물로 태어난 인간이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령 시계를 만든 장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 장인은 시계의 구조와 동력을 매우 구체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시계를 만든 장본인인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시계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만든 장인을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는 더욱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시계는 자신을 만든 장인의 뜻을 따라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소명/召命을 다한다 하겠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바르고 참된 것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창조하신 분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신앙의 사람들로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이른바 불림을 받았다는 크리스천들에게 그들이 범하는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야훼를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지고 맡겨진 삶의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른바 윤핵관의 원조였던 한 분이 스스로 삶을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참 아쉽고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는 엄격한 목사의 아들로 자라났습니다. 그는 죄의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오랫동안 번민했을 것입니다. 그는 한 여인의 인생을 망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을 향해서 음욕을 품는 자 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8)고 선언하심으로 보편적인 간음죄인들입니다. 그리고 너희를 위해서 내가 십자가에 죽는다고 말씀하시고 실천하셨습니다. 벌을 받고 낯짝 두껍게 끝까지 살아갈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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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20(2025. 4. 1. 화요일).

시편 112:9-10.

찬송 5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자/국민일보에는 삶의 무의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의미 있는 삶이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인 줄 생각하곤 하지만, 삶의 의미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면 해결될 수 있다. 매사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일상이 흥미진진하고, 자랑스러우며,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태조(1392)부터 철종(1863)까지 25대에 걸친 472년간 조선 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年月日順)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이다. 그 지루한 왕궁의 생활을 남긴 기록물이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의 결과물이었다.

 

2. “안식일을 지켜라(19-27)”을 읽었습니다. 유대인의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항목의 맨 마지막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계명을 위치시켰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구체적인 시행령(?)으로 39가지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벌어졌던 수많은 논쟁들은 대부분이 안식일의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바리새파 사람들의 문제제기였고, 훗날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 문제에도 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은 점을 들기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법이나 사회법은 신앙이나 생활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순기능을 위해서 법을 만들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 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레 되는 날 쉬신 것을 그 제정 정신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도 아니고, 고대 사회에서 엿새 일하고 이레 되는 날 하루를 쉬는 날로 정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분제가 정착된 시대에 엿새 만에 하루씩 쉴 수 있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제가 어릴 때는 머슴이라는 직업이 있었는데, 큰 농사를 짓는 가정에 주로 고용된 종과 같은 직업인으로 그들에게는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매일 이른 새벽이 되면 주인의 방문 앞에 와서 기침/起寢 인사를 하고, 그날의 할 일을 지시받곤 했습니다. 그러니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기득권층에게는 매우 불편한 계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쉬셨으니 너희도 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복된 날을 어찌하여 어길 수 있을까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을 바르게 지킨다는 시행세칙 39가지를 보면, 얼마나 철저하게 쉬어야 하는지를 거듭거듭 말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39가지는 이렇습니다. 1. 바느질. 2.()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 6. 곡식 등을 까부는 일. 7. 거두어들인 곡식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 등을 가는 일. 9.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 12. 양털 깎는 . 13. 그것을 빠는 일. 14. 그것을 치는 일. 15. 그것에 물들이는 . 16. 실을 잣는 일. 17. ( 따위를) 엮는 일. 18. 두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꿰매는 일. 24. 두 조각을 꿰매기 위해 찢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 28. 그것에 소금을 치는 일. 29.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 31. 그것을 자르는 .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등불을 끄는 일. 37. 등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이를 요약하면 철저하게 쉼에 몰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은 하나님을 찬양과 감사함으로 섬기는 일이며,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이레 중 하루만이라도 삶의 의미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과 주일은 정반대의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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