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33호(2025. 4. 14. 성주간 월요일).
시편 116:1-3.
찬송 41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74년도에 나온 김민기의 노래 <어찌 갈거나>는 여러 해 후에 풀렸는데, 지금도 금지곡처럼 찾기가 힘이 듭니다.“어찌 갈거나 바람 부는데, 어찌 갈거나 길은 멀 은데, 봄비 내리는 모래 바람 속, 내 집에 어찌 갈거나 오, 바람 불어도 길은 멀어도, 두려울 것은 하나 없음은 고갯마루에 올라서보니, 내 형제 손짓하고 있네/ 어찌 갈거나 밤은 깊은데, 어찌 갈거나 길은 험한데, 눈보라치는 얼음산 위에 내 집에 어찌 갈거나 오, 밤은 깊어도 길은 멀어도 두려울 것이 하나 없음은 들판에 서서 바라다보니, 내 이웃 기다리며 웃네.” 김민기가 그토록 기다리고 의지했던 것은 형제와 이웃이었다 하니 너무 소박합니다.
2. “야훼의 종의 세 번째 노래(4-10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수난 주간 월요일에 읽기에 가장 어울리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사야서는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1-39장, 40-55장, 56-66장), 그 중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2부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위로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야훼의 종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이 야훼의 종의 노래는 네 개로 나뉠 수가 있는데(42:1-4, 49:1-6, 50:4-9, 52:13-53:12), 오늘 본문은 야훼의 종의 노래의 세 번째 종에 해당됩니다. 이른바 <고난 받는 종>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분석하면 이 야훼의 종은 첫째 고달픈 자를 격려하도록 다정한 말을 전하도록 야훼께서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4절). 둘째는 야훼께 들을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하고 있음을 소개하십니다(5절). 셋째는 야훼의 종을 때리고 모욕을 주는 자들에게 당당히 자신을 맡기십니다(6절). 넷째 끝까지 야훼께서 도우실 것을 믿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7절). 다섯째 하나님께서 무죄함을 알아주심으로 법정에서 다투자 하십니다(8절). 여섯째 야훼께서 도우시는데 누가 정죄할 수 있느냐고 맞서십니다(9절). 이를 마태복음서 기자는 본문에서 말하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을 인용에 의하면서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지칭하고 있습니다(마 26:67-69, 27:26-31). 제 기억이 희미해서 확답은 할 수 없습니다만, 어느 죄수가 제5공화국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최후 진술을 할 때 성경을 많이 인용하였는데, 매우 당당한 어조로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데, 누가 나를 정죄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훗날 그 분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당당히 역사의 무대에 컴백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정죄했던 그 원수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정죄와 용서, 상반되는 용어입니다. 1986년 여름 저는 두 번째 단기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때 제게 주말마다 교수님의 가정에서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老사모님은 한국 사정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하셨는데, 그때 제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던 질문은, 한국의 목사들은 어찌하여 침묵하고만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겪은 얘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젊은 혈기에 반정부투쟁을 하시는 한 목사님을 신앙 강좌에 사흘 동안 초청했을 때의 일화입니다. 교단 지도부에서는 집회를 취소하라고 종용해 왔습니다. 민감한 시대에 모셔서는 안 될 강사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래서 더 들어야 할 말씀이 있지 않겠느냐고, 책임질 일이 생기면 제가 지겠다고 고집을 부려 진행했습니다. 그 강사는 참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저의 집에서 기거하셨는데, 잡혀가 갇혀 있던 감옥에서 벽에 박치기를 해대니까 감시조가 붙어 보호해 주었다는 말씀에서부터 죽어서 나갈 각오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저녁 집회에는 3-4명의 형사들이 상주하였고, 설교의 내용은 물론 주변 상황도 아예 노트를 펴놓고 꼼꼼하게 적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해 전 독일의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 박사가 연세대 루스 채플에서 강연을 할 때의 장면도 소환했습니다. 저는 대학원생으로 그 집회 장소에 플래카드를 내걸고, 강사의 물주전자와 컵을 준비하는 등의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는데, 중정에서 나온 분이 저를 잡고 몰트만의 사상과 저서에 대해서 그리고 진행 중인 강연의 내용을 설명해 달라고 윽박질렀던 추억도 말입니다. 저는 한 마디로 요약해서 사모님께 대답을 드렸습니다. 서슬 퍼런 자리에서 침묵하는 사람들도 고문 받는 느낌은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곁에 계셔서 나를 죄 없다 하시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겠습니까? 이사야의 결기/決起는 역사를 거쳐 대물림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신의 죽음을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기를. / 요 12:27-36. (0) | 2025.04.16 |
---|---|
우린 주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 고전 1:18-25. (0) | 2025.04.15 |
조건없는 새 약속을 의지하며. / 렘 31:27-34. (0) | 2025.04.12 |
70년의 노예생활을 벌 주신 하나님. / 렘 29:1-14. (1) | 2025.04.11 |
지금도 교회 안에 많이 있는 사람들. / 렘 26:1-16. (0) | 2025.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