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47호(2025. 4. 28. 월요일).
시편 118:19-21.
찬송 42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절반의 진실은 완전한 거짓보다 더 무섭다.” 오스트리아의 시인 포히터슬레벤이 남긴 명언이라는데, 작금 우리 사회에서 떠다니고 있는 유령 같은 가짜 정보에 식상한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말이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질 않나, 잘 살고 있는 부부를 이혼했다고 온갖 악담을 퍼붓는 유튜브가 그 진원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시간을 두고 기다려볼 일이다. 그래야 절반의 진실에 현혹당하지 않고 제대로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생명의 말씀(1-4절)”과 “하나님은 빛이시다(5-10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젊은 날에는 빛 보다는 어두움이 좋았습니다. 고단한 육신이 쉴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은퇴하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은퇴를 하고 시골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처음 몇 해를 제외하고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단하지 않아서인지 많은 쉼이 필요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이 너무 길다 생각했고, 빨리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빛과 어두움의 창조자가 하나님이시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둘 중 어느 것을 더 낫다고 앞세우지도 않습니다. 빛은 빛대로, 어두움을 어두움대로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또는 “하나님은 생명이시다.”는 구절들과 함께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말씀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그 자체로는 귀하고 중한 가치를 가진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 빛과 그 어두움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가치가 바래거나 나쁜 이미지를 덮어씌운 것입니다. 성경에는 마귀 또는 사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두움을 악용해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고, 여러 가지 슬픔과 비극들을 몰고 온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수군거림이 쉬워졌고, 각종 음모와 무서운 모의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결과 마치 어두움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책임을 전가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환한 빛 가운데서도 이런 무서운 음모와 작당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빛의 위력조차도 어두움의 세력들을 이겨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서도, 그리고 신성하다는 법정에서도 어둠의 음모는 진행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은 빛이시다 는 이 말씀을 심각하게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빛에 관한 성경의 첫 번째 말씀은 창 1:3에 나옵니다. 히브리어로는 두 가지 낱말이 사용되는데 첫째는 오르(אוֹר)라는 명사인데 구약성경에 120-133회 사용되고 있다 소개합니다. 두 번째는 노가흐(נגהּ)라는 명사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낱말은 서로 구별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 예가 이사야 60:3입니다. "열방은 네 빛(오르)으로, 열 왕은 비취는 네 광명(노가흐)으로 나아오라" 라고 하십니다. 요한서신의 저자 요한이 살던 1세기의 이스라엘과 소아시아는 영지주의와 같은 헬라 철학의 영향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빛과 어두움 같은 이원론이 보편적인 사고라고 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원론에서는 진리와 거짓, 선과 악 그리고 영과 육처럼 전혀 상반되는 두 종류의 물질이나 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고, 우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두움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사고방식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편리한 기준이 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인 요한은 교우들로 하여금 어두움이 아니라 빛 가운데 살아갈 것을 강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칫 이런 강조는 도덕이나 윤리적인 측면으로 기우는 경향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나 도덕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씻어지는 것만이 하나님의 빛가운데 거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죄의 씻음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죄씻음에서 온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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