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115장.

    불교 용어 중에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사가 인연이 있다는 것이며, 그 인연으로 만나고 헤어지며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이해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말도 인연이 아니면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이런 인연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하나님만이 역사(혹은 때)의 시작과 끝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특별한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가장 적당한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어떻게 예언되었고, 성취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인간 역사의 어느 한 시점을 주목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때가 찼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이 탄생하신 바로 그 때가 인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방향을 돌릴 가장 적당한 시간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이 오신 때부터 “주님이 다스리는 시대”라는 의미의 A.D.를 사용하고, 예수님의 탄생 이전을 “그리스도 이전”이라는 의미의 B.C.를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의식하든 하지 않던 간에, 인간 역사는 이제 주님이 다스리는 시대를 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전쟁과 기근, 다툼과 분쟁 등 문제들이 여전히 들끓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주님이 다스리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겉으로는 절망처럼 보이고, 고통의 바다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의 방향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역사의 방향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진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 계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우리 성도입니다.

기독교회의 시간이해는 종말론적 삶을 요구합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 사는 존재입니다. 제한된 시간이 주어져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이 똑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날들입니다. 단 한번 뿐인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매 순간 순간을 마지막처럼 살고 있다는 정신, 곧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무한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물 쓰듯 시간을 낭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오늘은 단 하루뿐입니다. 내일이 오겠지만 오늘과는 전혀 다른 날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시간을 잘 관리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헛되고 어리석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다 값지고 귀한 일에 시간을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저는 베델성서를 배울 때 <조각시간>이라는 용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조각시간>에 성경 요절과 개념을 외울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 뒤부터 <조각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합니다.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것을 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책도 읽고, 편지도 쓰고, 설교 주제를 생각하기도 하고, 꿈을 꾸기도 합니다. 한번 뿐인 인생살입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기회를 순종하며 삽시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단 하루 동안에도 후회스러운 일이 많았음을 되돌아봅니다. 한 해를 보내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 후회들 가운데는 꼭 했어야 할 일들을 뒤로 미룬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 섬겼어야 했는데, 떠나가신 다음에야 깨달았다면 후회막급한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생각을 가져다주시는 분을 성령님이라고 믿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제 아름다운 한 가정을 심방하였습니다.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키운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가한 자녀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부모님을 대하는 자녀들의 말씨가 어찌나 공손했는지 모릅니다. 성령님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한 때문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우리들 앞에 항상 두 개의 소리가 들립니다. 성령님과 마귀가 그들입니다. 매우 순간적인 일입니다. 누구를 따르시겠습니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즉각적인 응답을 합시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순간과 영원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나 인생은 순간을 살아갑니다.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기 위해 시험을 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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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117장.

    대림절 화환에 4개의 초가 빛을 발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어린 아이로 탄생하셨습니다. 탄생기사는 마태복음과 누구복음만이 보도합니다. 그런데 여인의 몸을 빌었을 뿐, 성령에 의한 잉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헛소리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신비는 과학으로 풀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들어오심은 극적인 사건입니다.
인간의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들에게 나타난다는 것은 예사로울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의 일반적인 질서를 무시하는 것처럼, 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원이 완전히 다른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역사개입의 사건들이 여러 차례 소개되었습니다. 바로에게 행한 10가지 재앙들(출7-11장),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일(출14:15-20), 광야 40년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일(출16:4-20),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고(출17:1-7),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왕하 4:8-37) 등 이루다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세계에서 하시는 일들은 모두가 기적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일들이 하나님에게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역사개입은 언제나 기적으로 밖에는 깨달을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믿음으로 수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것은 중요한 일이며 필요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창조주를 향해서 대항하는 것보다, 순종하는 편을 택한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성령의 잉태를 수용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존경하는 나머지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 또한 그에 못지않은 위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약혼자가 자기도 모르는 아이를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던 점도(18-19절) 그렇고,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따른 점도(20-25절) 그렇습니다. 약혼자 마리아의 잉태는 요셉에게 있어서는 관대하게 눈감아 줄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여자의 순결에 대해서 엄격했던 아랍세계에서 볼 때 말입니다. 지금도 비슷한 법이 행사되고 있습니다만, 아랍세계에서는 부정한 여인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성령으로 잉태한 분이  죄와 죽음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리아를 떠받들 듯 보살펴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런 기록이 아랍세계에서는 입에도 담을 수 없는 폐륜행위라고 여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해졌다는 점에서 그 진실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당사자인 요셉이 성령의 잉태를 인정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잉태는 우리들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이 백만 부 이상 팔린 책이 가장많이 팔린 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 이야기들을 성경의 방향과는 엉뚱하게 취급하고 있어서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이래로 예수님은 의문의 대상이었습니다. 공생애 3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30년에 대해서는 만족스런 자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심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야단맞는 일은 없었을까? 이웃집 소녀들과의 러브스토리는 없었을까?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막달라 마리아와는 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이런 사람들의 호기심에서 출발한 소설이 바로 [다빈치 코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추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구원받는데 필요한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한 책인 때문입니다(요20:30-31).물론 성경에서 도덕적인 교훈이나 지혜롭게 살아가는 처세술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근본 목적은 구원의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증진시키는 책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잉태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대림절은 절망적인 인간 세계에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절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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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59장.

     대림절은 준비와 기다림이 주제이지만, 그 상징은 빛입니다. 어둠을 헤치고 빛이 다가오듯, 빛 된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신앙도 빛나는,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신앙을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 가능성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빛나는 신앙은 평범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고 인내하는 가운데서 얻게 된다는. 

주님을 맞는 첫 걸음은 기다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능동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무엇인가 좋은 것들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미6:6-7). 그러나 우리가 믿는 신앙은 오히려 수동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주도권이 하나님이 되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듣는 입장(렘7:23, 마7:24), 순종해야(삼상15:22)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서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가장 적극적인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듣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억제하거나 포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대표적인 수동적인 행동입니다.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순전히 오시는 분 뜻대로 입니다. 한 밤중엘 런지 맡기는 자세로 기다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마25:1-13)를 잘 알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처녀들에게는 신랑이 언제 올 것인지 전혀 알리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참 답답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기다림은 상대방을 더욱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꼭 필요한 기회라고 말입니다. 우리 역시 기다림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인내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오랜 속담이 있습니다. “참는 자가 이긴다. 얼마나 지혜롭고 훌륭한 말인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지 못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드리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 비결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예화(악한 재판관 비유/눅18:1-8,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눅11:5-8)를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참는 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잠깐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서 낭패를 본 사람들 얘기도 성경에 많이 소개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없음에 화를 참지 못해서 반석을 두 번씩이나 치는(민20:11-12) 실수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입다는 성급한 맹세로 자신의 무남독녀를 죽게 만들었습니다(삿11:29-40). 지혜로운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약5:7). 풍성한 사랑의 관계를 위해서 오래 참고 견뎌야 합니다(고전13:4-7). 빛나는 신앙이란 순간의 고통과 모욕을 견디고 마지막에 영광을 바라며 참고 견디는 과정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인내력으로 무장되어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헌신하는 사람들의 주님이 되십니다.
어둠을 밝히는 초를 보십시오. 그는 주변을 밝게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태우는 희생 없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소금이 제 맛을 내려고 하면 자신을 녹여야만합니다.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헌신과 자기희생이 없이는 빛나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어제 신문에는 <미 중년부부 ‘부모파업’>이란 웃지 못 할 실화가 소개되었습니다. 17살 12살 난 두 아이들을 상대로 부모 노릇을 하지 않겠다고 파업을 선언한 것입니다. 성탄절까지 부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집을 나가겠다는 위협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술을 하고 가료중인 어머니가 쉬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안일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 자식들에 대한 항의였다고 합니다. 부모만 자녀에게 헌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 역시 가족을 위해 헌신해야 가정이 평화롭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밝히셨습니다. 선다싱은 종족간의 화해를 위해서 대신 죽어 인도를 밝혔습니다. 슈바이처는 헌신으로 아프리카를 밝혔습니다. 헌신만이 빛을 냅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얼마나 위대한 힘입니까? 빛나는 신앙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다림과 인내, 그리고 헌신을 속성으로 하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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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99장.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성취라는 구조가 있습니다. 흔히 구약을 구세주 예수님을 향한 약속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하면, 신약은 그 예수님에 의한 구원 사역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며,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 새 삶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에 가득 찬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을 향합니다.
약속이란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약속이나 중요한 약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희망적인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약속은 얼마나 중요한 것들입니까? 구약 성경에는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창12:1-3)을 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훈련소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출3:12)하셨습니다. 다윗에게는 일평생 하나님께서 동행하며 존귀케 하시겠다고 약속(삼하7:9)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분입니다. 할례를 하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늘의 무지개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창9:14-16)떠올리게 합니다. 벧엘에 세운 야곱의 돌무더기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기 위한 상징이었고, 유월절 양을 잡아먹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품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그 예수님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며, 그 분만이 세상을 혼란과 슬픔에서 구하십니다. 

신약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된 것을 주목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은 모두가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요셉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탄생예고(마1:20-22)에서 시작되어 헤롯의 눈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 중 베들레헴에서의 영아 살해사건(마2:13-23), 세례 요한의 전령자로써의 활동(마11:7-11), 병자를 고치시는 일(마12:9-21)들이 약속의 성취로서라고 말씀합니다. 비유로 가르치심도(마13:34-35), 예루살렘 입성 일화나(마20:1-5), 배반한 유다가 죽어 묻힌 밭에 관한 예언(마27:5-10)도 약속된 말씀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으로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다 이루셨다고(요19:30)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치심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순종으로써 성취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이 보다 더 분명히 증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진리라는 것을 당신 자신의 삶을 통해 행동으로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놀라운 기적에서, 생명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그 자체이셨다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이 빗나가는 것은 그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구체적인 내용이 신뢰할만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과, 그 분의 아들이 구세주로 십자가에 달리신 일,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 신앙의 근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신앙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또렷이 기억하며 사는 일입니다. 우리를 절망에서 일으켜 세워주고, 슬픔에서 위로를 주며, 영원한 삶으로 안내해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비결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였음이 증명된 이상, 우리들 역시 이 약속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매일 성경말씀을 읽어야 할 이유가 이것이며, 순간순간 이 말씀을 회상하며 감사하며 기도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종이 그리하겠나이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그 약속은 구약에서는 그림자로, 신약에서는 실체로 성취된 내용입니다. 우리들 역시 약속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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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36장.

   오늘부터 4주간 보내게 될  대림절은, 이 세상에 구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해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교회력은 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변하는 세상 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있어야 함도 가르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의 한복판에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지켜주노라. 너를 살려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겨울을 알리는 전령은 차가운 바람입니다. 나무를 풍성하게 했던 잎들이 차가운 바람이 불자 다 땅에 떨어졌습니다. 파랗게 움트던 봄날이 엊그제 같은데, 몇 차례의 변화를 거친 것입니다. 이렇듯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이 변하는 것들입니다. 입시제도가 자주 바뀐다고 학생들은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변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의 화두는 크게 두 가지인 듯 합니다. 국보법을 비롯해서 몇 가지의 법을 고쳐야 한다는 얘기와, 다른 하나는 수능과 장성인사에서 부정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법이란 절대로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법이라고 하더라도 시대가 달라졌다면, 당연히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논란의 초점은  바뀔 때가 되었다는 쪽과 아직은 아니라는 것일 뿐입니다.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변화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변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는것 같습니다. 사람의 도덕심이나 윤리가 그것입 니다. 커닝에 대해서, 진급심사에서 도덕심과 윤리가 깨트려졌다는 사실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노력의 대가로 대학에 진학해야 했습니다. 정정당당한 평가를 받아서 장군이 되어야 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윤리를 최고의 덕목으로 규정하는 분들은, 윤리가 파괴되는 요즘의 세태에서  서글퍼할 뿐만 아니라,  말세라는 말까지 사용합니다. 부모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다른 가족들까지도 다 죽일 생각을 했었다는 한 일본의 젊은이 얘기는 그리 특별한 얘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도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천지는 변하겠으나  내 말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35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하신 변하지 않는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혼란과 무질서로 뒤죽박죽이 된 세상을 정리하는 심판의 날에 관해서 말씀합니다만, 이 말씀의  배경에는 변하지 않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그리고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십자가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주님의 말씀이 있음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화는 삶을 생기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돌 듯 하는 일상에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변화의 바람을 원하면서도, 어딘가에 붙들려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소년 시절에 나이 많은 장로님께서 유행에 관해 들은 얘기입니다. 유행하는 옷은 몇 가지 변화의 테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나팔바지와 붙은 바지, 긴 바지와 짧은 바지 등, 그 테두리 안에서 바뀐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위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런 변화에 대해서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변화를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의 말씀을 매일 먹는다면 말입니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직장을 향해야 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끝없는 변화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주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변화를 호기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변화 가운데서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때문입니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변화는 삶을 신선하게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줍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주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변화속의 삶을 당당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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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9:21-26.
찬송  93장.

  오늘은 교회력 마지막 주일로, 인생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시간이며,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우리에게 절대 복종해야 할 왕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 분의 은혜 아래서 살아왔음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진심으로 배우는 주일입니다. 우리 왕은 하늘과 땅을 잇는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하늘이 땅에 닿았고, 땅이 하늘에 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은 끝이 없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불쌍한 민족을 등에 업고 축재를 한 지도자 얘기를 듣고 분노합니다. 기업의 약점을 이용한 허울 좋은 정치자금 얘기는 이젠 낯선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왕이신 예수님은 참된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태어나, 나사렛의 목공소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그리고 힘없고 무지한 사람들의 좋은 이웃으로 사랑을 나누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평범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대접도 받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임을 보이신 유일한 왕이 되셨습니다. 이 왕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높아지려고 한다면, 먼저 낮아지라고 하시면서, 섬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위인이라고 강권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지금 많은 지도자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서 섬기는 일을 하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예전 같으면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문제는 말과 생각은 깨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빈 약속으로 끝나버리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왕의 성품과 삶으로 우리 곁에 우뚝 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 사회를 갈등과 대립으로 규정하고, 그 해답을 찾는 대화의 장이 열렸습니다. 한 연사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라고. 사람들에게는 자기만의 관점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그 관점을 앞세울 때 심각한 갈등 속에 살 것이며, 동과서가 이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갈등의 골은 깊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이 짊어진 문제는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죄악의 대립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서로 타협할 일말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십자가를 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으로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셨고, 동시에 십자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눈뜨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온 세상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도 그리고 인간도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갈등과 대립을 감싸 안아 주는 위대한 희생의 다리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을 땅에, 땅을 하늘에 닿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갈등과 분쟁이 하루도 떠나지 않는 세상입니다. 평화는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세대차가 더욱 뚜렷해지고 있으며, 인간관계는 더욱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합집산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생명경시 현상입니다. 자살테러는 전혀 동정을 받지 못하는 범죄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인간성이 무참히 파괴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우리의 왕을 모시는 일 밖에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손해를 보는 일을 뜻하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세계이든지, 거기에 누군가 희생의 짐을 지는 사람이 있다면,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인류의 왕이신 예수님, 그 분만이 평화의 왕이 되십니다.  우리의 지난 1년은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패와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모시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감사할 제목이 많은 한 해였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건강과 소망, 그리고 힘과 용기를 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평화의 왕이 여러분의 왕으로 섬김 받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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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40-43. 
찬송  219장.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끝없는 시련속에 살았다는 말씀은 많은 실망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통없이 살아야 당연하다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시련과 고난속에 살았고,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는 것 입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 사는 인생을 주목하는 분이 계십니다.
주전 7세기의 이스라엘은 애굽과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이라는 초 강대국들의 세력다툼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한 여고생이 난처한 질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곳의 자동차는 80%가 한국산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부자인 한국 사람들이 왜 미국 눈치를 보며 사느냐고 하더랍니다. 그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세도가들은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슬에 묶여 사는지도 모릅니다. 지천에 깔린 것이 슬픔이고 고통입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그 멍에를 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모순이나, 부조리로 단정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재와 무능력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신앙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속의 하나님은 슬픔과 고통을 짊어진 인생들을 주목하고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고통이 없는 인생이 아니라, 고통을 짊어진 인생들에게 끝없는 사랑을 보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어느 한 순간도 우리 인생을 잊어버린 적도, 눈길에서 놓친적도 없을 뿐 아니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십니다(시121:4,8).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생들과 함께 하신 아버지이십니다.
현대인을 <고독한 군중>으로 정의한 사람은 리츠먼입니다. 군중속에서 외롭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나눌 이웃이 없다는 서글픈 얘기입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아버지를 상실한 결과입니다. 그것을 죄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아버지를 잃어버린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하늘 아버지는 죄로 멀어진 자녀들을 주목할 뿐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마음속에만 염려할 뿐이겠지만, 우리 하늘 아버지는 사랑의 눈길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누웠을 때에도, 모세가 애굽의 바로 앞에 나설 때에도, 다윗이 골리앗을 마주해 나갈 때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홀로 있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가까이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언제든지 붙잡아 주실 지근거리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고통의 심연에서 잘 들립니다.
저는 어릴 때 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자주 불렀습니다. 콩밭에서 김매는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놀라기도 했고, 동생과 나무를 하러 산에 가서 길을 잃고 겁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창피하지만  어머니를 찾고 동생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범죄한 아담을 하나님이 찾으셨습니다(창3:8). 모세를 찾으셨고(출3:4), 기드온을 찾으셨습니다(삿6:12).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셨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주한 세상 속에서는, 승승장구하는 때에는 하나님도 그 음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슬픔속에서 훨씬 분명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가장 힘들고 외로운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어깨위에 손을 얹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내니라. 내가 네 곁에 서 있으니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 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사41:10).  

하나님의 눈길이 우리들에게 머물고 있습니다. 결코 혼자도 아니고, 홀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신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니라”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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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미국에 의한 평화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세계가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걱정은 여전합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강화하겠다고 합니다. 나라 안 사정도 비슷합니다. 가정들이 학교들이, 직장들이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흔들리는 세상 한 복판에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절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세상의 터전은 항상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참 평안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겉으로 보아서 잘 모를 뿐, 나라마다 사회마다 개인마다 흔들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만 국민 부채가 수백만 원인 것이 아니라, 미국도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어떤 사업하는 교인에게 어리석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빚없이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때 이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빚없이 장사를 어떻게 합니까? 사업가들의 부도는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런 가능성은 언제든지 안고 있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떻습니까? 항상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만, 발표가 안되었을 뿐이지, 모든 사람들이 심각한 질병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시간이 언제냐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불안과 두려움을 억지로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쓸 뿐입니다. 청년 실업문제는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제가 미국에 갔을 때 3년 전에 박사학위를 받은 한 미국 사람을 똑같은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까, 3년 내내 여기에 그냥 실업자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육문제는 우리나라만 엉망진창이 아닙니다. 속사정을 잘 몰라서일 뿐, 세계 어느 나라나 크고 작을 뿐, 문제투성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주님 품에 안길 때 참 평안이 있을 뿐입니다.” 

참된 문제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세상을 흔들고 있는 문제들이 정치나 경제 사회와 같은 일반적인 문제들만이 아니라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부여안고 있는 흔들리는 이 세상의 문제들은 사회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 세상의 문제들처럼 취급할 수도 있지만, 그 근원을 추적해보면, 그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더 강력하게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파병한 자이툰부대 장병들이 처음 목적과는 다르게 진흙탕 싸움에 끌려들어갈 것이 뻔합니다. 유전자 연구는 틀림없이 뜨겁게 찬반양론으로 일대 격전을 치룰 것입니다.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은 종교전쟁으로 치닫을 전망입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모든 문제들의 밑바닥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깔려있습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들로 발전해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기독교가 제자리를 차지하느냐? 아니면 일반 종교와 다를 바 없이 떨어져 내려갈 것이냐가 판가름 날 형편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 내내 <십자가 신학>이라는 주제로 씨름을 했습니다. 기독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고민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질병의 노예가 되어서 맥없이 끌려 다니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고난과 시련에 꽁꽁 묶여서 사는 것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능력의 오른 팔로 마귀들을 쳐부수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시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더 이상 기댈 희망이 사라진 절망의 처지가 되어서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망과 실패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시련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세상이 흔들립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며, 우리들이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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