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387장.

     사순절은 우리 주님의 시련과 죽음이라는 어두운 주제가 바탕에 있지만, 신앙생활에서 많은 유익한 훈련을 갖게 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을 따라서 사순절의 사건들 속에 있는 그 의미들을 새롭게 배우고 실천한다면 말입니다. 사순절의 첫 주제는 반드시 이겨내야 할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사람만이 승리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아담이래 진행 중이며 뉘게나 예외가 없습니다.
시험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이 실패였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시험에서 불행하게도 실패하였습니다(창3:1-6). 가인도 실패하였고(창4:1-10), 노아도  실패했습니다(창9:20-27). 아브라함도(창20:1-7), 야곱도(창27:1-23), 사울왕과 다윗도 시험 앞에서 패한 사람들입니다. 인류가 직면했던 시험들은 마귀에게서 출제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도 이런 마귀의 시험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마귀가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닌다(벧전5:8).는 사실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더 교활한 마귀의 시험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물질과 이성과 명예에 약하다는 것을 이용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한국의 지도자들이  마귀의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지도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을 인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긴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마귀의 시험은 매우 이성적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들을 끌어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은 세상이 안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중 하나였으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세상의 구세주임을 증명하라는 문제였습니다. 또한 마귀에게 절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해야 잘 살수 있다는 불신앙의 문제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설득력있는 문제들이 아닙니까? 세 가지 문제들 모두 낯선 주제들이 아니라, 매우 친숙한 주제들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이 내 거는 공약들은 한결같이 돌로 떡을 만들어 보겠다는 얘기들에 불과합니다. 복지정책 이란 미명하에 백성들에게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줍니다. 자신만이 이 시대의 구세주라   고 떠들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물신숭배가 훨씬 지혜롭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시험을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이기려면 시험에 이기신 우리 주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셨 습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3형제의 땅값이 올라 더 행복했어야 하는데,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인류의 현실을 대변하는 사건입니다. 일찍이 잠언 기자는 육선이 가득한 집에서 다투는 것보다 마른 떡 한 조각으로 화목 하는 것이 낫다고(잠17:1) 했습니다. 물질의 유혹에서 이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 되심을 증명하라고 공격 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크게 성공함으로 인정받으라고 합니다.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은 우리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하십니다. 마지막 시험은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섬기라고 합니다. 어떤 부흥사는 솔직하게 돈 달라고 매달리라고 가르치고  있었 습니다 . 기복종교에는 주인이 아닌 종 된 하나님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시험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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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75장.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변모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우리주님의 변모주일입니다.  그것도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시는 모습이 제자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성스런 음성도 들렸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변모사건은 십자가의 길 바로 앞에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첫 신비현상은 세례후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마3:17)이었습 니다. 앞으로 전개될 예수님의 삶과 활동을 하나님께서 보증해 주시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변화산에서 똑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 것 입니다.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직감하게 됩니다.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는 이를 해석하기 를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17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할 때 들려온  말씀이라면, 이제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가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그 구원 역사의 대단원이 십자가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 신 것입니다. 고통과 치욕의 십자가의 길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단 하나 의 길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보증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도 낯선 진리이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죄에서 구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은 더욱 낯선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 외에 달리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확실한 보증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였습 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겉 모습만을 보고, 그 속 깊은 의미를 놓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보증하시는 음성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비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야 이런 말씀들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빛이 비치게 되자 죽었던 말씀들이 기운차게 살아났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가장 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입니다. 은혜와 긍휼로 담겨있는 사랑말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신 주님이십니다.
변화산의 신비현상을 베드로는 오해했었습니다. 초막 셋을 짓고 세상 근심을 뒤로한 체  살려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오르신 우리 주님을 보고, 베드로는 변모하신 주님의 속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때문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신 분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오해했 다면 우리들의 오해도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우리도 진리에 눈떠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때문에 존귀를 받으시고, 십자가 때문에 영광을 받으십니다. 변모산의 신비현상이 가르치는 의미를 생각해야 하듯, 십자가가 지시하는 진리에 눈이 떠져야 하겠습니다. 끝없는 용서와 희망의 하나님의 기다리심이 십자가에 있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넘치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십자가 때문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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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46장.

     아직 새해 첫 달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년지계 재어춘(一年之計 在於春)이라고 했습니다. 멋진 한 해를 살아갈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기독자인 우리들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제 마음대로 사는 세상이라면 문제가 많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절대로 네 마음대로 살아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 눈에 비친 자녀는 언제나 위태롭게 보이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제 마음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아담이 그랬고(창3:17), 유다가 그랬(창38:17)습니다. 그래서 세상엔   고통과 슬픔이 들어왔습니다. 제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한다는 말은 무슨 말 입니까? 자신이 주인처럼, 목자처럼 살겠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백성을 주인으로 섬기는 일을 뒤로한 체 정치가들 마음대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학생들 마음대로 공부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일꾼 들은 제  마음대로 일해선 안 됩니다. 일을 맡긴 사람의 뜻을 먼저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제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외쳐야 합니다. 인생들아! 네 마음대로 살지 말라! 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세상입니다.
<왕꽃 선녀님>이 안방에 침투했다고 야단들입니다. 그러나 세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삶 때문에 불안해서 살수가 없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앞일을 얘기해 주기를 바랍니다. 다섯 살 철부지를 신선님이라고 어른들이 무릎을 꿇는 일을 하였습니다. 대명천지에 어리석은 일을 멈추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들 인생을 인도하실 유일한 목자이십니다(시23:1).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이것을 배우고 반성하고, 실천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 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이 무엇이며,  왜 그렇게 살았는지를 확인하고 반성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희망사항은 공의, 인자 그리고 겸손으로 사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희망사항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천천의 수양도, 만만의 기름도, 사람을 제물로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7절). 미가 선지자는 또렷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공의, 인자, 그리고 겸손이었습니다(8절). 공의와 인자는 동료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좋은 이웃들 속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희망 사항은 너무도 평범한 내용 이었습니다. 생각과 행동을 똑바로 하는 일이 공의입니다. 그리고 연약하고 부족한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고 아껴주는 일이 인자입니다. 누구나 실천하면 마음이 기뻐질 쉬운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도움을 청하는 것 또한 쉬운 행동 입니다. 그렇게 살기만 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과 동행하시는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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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183장.

   우리 기독자는 천국을 향한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한 걸음 한 걸음이 순례의 길임을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천국으로 향한 길은 어떻게 가는 길입니까?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며,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믿는 일입니다. 

천국을 향한 길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천국을 향한 첫 걸음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회개라는 말은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첫 설교는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과 행동의 완전한 변화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새롭게 살고 싶어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 다윗은 무서운 죄가운데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을 때,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삼하12:1-14). 다윗은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사로잡고 있는 죄악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천국을 향한 길은 복음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율법은 사람의 행동과 생활을 저울질 합니다. 그래서 율법 때문에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놀라운 일을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들 인생을 살리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십자가로 우리의 죄 짐을 다 옮기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는 죄의 종노릇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말씀(롬6:17-18)하십니다. 이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행동은 복음을 믿고 의지하는 일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여전히 천국을 향해 가는 길에 찬 바람도 불고 유혹의 골짜기도 지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의지하는 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홀로 그 길을 걷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가는 고난의 길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벧전2:19-25). 

삶의 순간순간이 천국을 향해 가는 걸음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어제의 결과로서 오늘이, 오늘의 열매로서 내일이 열릴 것입니다. 천국 역시 땅에서의 삶을 마칠 때에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땅에서의 삶이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일이란,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며 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죄에 대해서 죽는 생활(회개)이 있어야 하고, 또 날마다 주님이 주신 은총으로 살아나는 생활(복음을 의지함)이라고 말입니다. 세례를 기억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한 발을 땅에 디딜 때 회개하고, 다른 발을 하늘로 들 때 주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한 걸음과, 주를 의지하는 또 한 걸음으로 행진하는 것이 인생길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이 진리를 확인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립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나그네와 행인으로 묘사하였습니다(벧전2:11). 천국을 향해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회개와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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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25장.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풍성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생각과 생활이 넉넉한 삶을 말입니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려고 온갖 수고를 참아냅니다.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바울 사도의 권고를 듣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풍성함은 지식(앎)을 가진 것입니다.
눈뜬 봉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다만,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글뿐만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도 그렇고,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아 야 한다고 말씀(2:2)합니다. 바울 역시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매달고 살았습니다. 최고의 선생에게서 배웠다는 것, 율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등으로 자랑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허망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달린 십자가만이 우리가 알아야 할 보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신 십자가는 단 하나의 구원의 길입니다. 그 때 비로소 삶이 풍성해 짐을 깨닫게 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십자가에 담긴 깊은 의미를 아십니까? 이것을 알게 될 때 삶은 기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풍성함은 은사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은사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재능)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저마다 독특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먼저 자신의 은사를 확인해야 하겠고, 그 다음엔 바르게 관리해야 하겠습 니다. 은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청지기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돌보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는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주인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 때, 그는 풍성한 삶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들 인생 의 주인은 훨씬 더 높고 넓은 세계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 중국 전도사님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저는 예수님을 믿고 출세했습니다.” 저의 통역을 맡았던 분이었는데, 자신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했고, 매일 매일 복음을 전하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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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36장.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사랑과 긍휼로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금년에도 함께 해 주심을 믿고 힘찬 출발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일하십니다. 성도는 말씀 가운데 서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현존하십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어떤 신비현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그 대표적인 증인들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창7:1-5)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도 99살에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할례를 행했습니다(창17:9-24). 모세나 기드온, 한나와 다윗이 모두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말씀 밖에서 만나려고 합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현실이 그것이고, 성경을 제 구미에 맞추는 것도 그렇습니다. 또한 성경을 구속사적이란 큰 관점에서 보지 않고, 지엽적인 안목으로 이해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현대 기독교회가 힘을 상실했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은 대안으로 <聖市化運動>을 벌이자 고 합니다.여전히 양적, 물적 힘을 생각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힘은 말씀을 귀로 듣게 하는 게 아니라, 삶으로 보여줄 때입니다(약2:26). 프로그램은 다양하지만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력인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때문입니다. 최초에 외국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불렸던 것은,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50, 60년대의 기독교인들은 말과 행실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의 특징은 교회마다 성경읽기와 기도운동을 강조하였습니다. 대학수험생이던 고3학생인  저 역시 매 주일 200장 가깝게 성경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을 실천할 때 나옵니다. 위로와 기쁨, 용기와 소망은 오직 말씀을 순종할 때 기대할 수 있습니다.

말씀 중심의 생활을 실현하는 한 해를 시작합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한 인격체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루를 여는 첫 시간에 말씀을 읽고, 하루를 위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하심을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삶이 풍성하고 복된 것은, 소유의 많음이나 지위의 높음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대하심에 따르고 있을 때입니다. 남을 헐뜯기 잘하고, 악행을 서슴지 않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세상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삼고 사는 것 또한 기독교인의 탈을 쓴 세상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10:31)고 명하셨고, 자신 역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려고 힘썼(고후4:9)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살고, 말씀으로 끝맺는 은총의 한 해가 되게 합시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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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115장.

    불교 용어 중에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사가 인연이 있다는 것이며, 그 인연으로 만나고 헤어지며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이해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말도 인연이 아니면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이런 인연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하나님만이 역사(혹은 때)의 시작과 끝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특별한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가장 적당한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어떻게 예언되었고, 성취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인간 역사의 어느 한 시점을 주목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때가 찼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이 탄생하신 바로 그 때가 인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방향을 돌릴 가장 적당한 시간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이 오신 때부터 “주님이 다스리는 시대”라는 의미의 A.D.를 사용하고, 예수님의 탄생 이전을 “그리스도 이전”이라는 의미의 B.C.를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의식하든 하지 않던 간에, 인간 역사는 이제 주님이 다스리는 시대를 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전쟁과 기근, 다툼과 분쟁 등 문제들이 여전히 들끓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주님이 다스리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겉으로는 절망처럼 보이고, 고통의 바다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의 방향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역사의 방향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진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 계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우리 성도입니다.

기독교회의 시간이해는 종말론적 삶을 요구합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 사는 존재입니다. 제한된 시간이 주어져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이 똑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날들입니다. 단 한번 뿐인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매 순간 순간을 마지막처럼 살고 있다는 정신, 곧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무한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물 쓰듯 시간을 낭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오늘은 단 하루뿐입니다. 내일이 오겠지만 오늘과는 전혀 다른 날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시간을 잘 관리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헛되고 어리석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다 값지고 귀한 일에 시간을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저는 베델성서를 배울 때 <조각시간>이라는 용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조각시간>에 성경 요절과 개념을 외울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 뒤부터 <조각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합니다.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것을 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책도 읽고, 편지도 쓰고, 설교 주제를 생각하기도 하고, 꿈을 꾸기도 합니다. 한번 뿐인 인생살입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기회를 순종하며 삽시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단 하루 동안에도 후회스러운 일이 많았음을 되돌아봅니다. 한 해를 보내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 후회들 가운데는 꼭 했어야 할 일들을 뒤로 미룬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 섬겼어야 했는데, 떠나가신 다음에야 깨달았다면 후회막급한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생각을 가져다주시는 분을 성령님이라고 믿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제 아름다운 한 가정을 심방하였습니다.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키운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가한 자녀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부모님을 대하는 자녀들의 말씨가 어찌나 공손했는지 모릅니다. 성령님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한 때문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우리들 앞에 항상 두 개의 소리가 들립니다. 성령님과 마귀가 그들입니다. 매우 순간적인 일입니다. 누구를 따르시겠습니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즉각적인 응답을 합시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순간과 영원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나 인생은 순간을 살아갑니다.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기 위해 시험을 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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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117장.

    대림절 화환에 4개의 초가 빛을 발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어린 아이로 탄생하셨습니다. 탄생기사는 마태복음과 누구복음만이 보도합니다. 그런데 여인의 몸을 빌었을 뿐, 성령에 의한 잉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헛소리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신비는 과학으로 풀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들어오심은 극적인 사건입니다.
인간의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들에게 나타난다는 것은 예사로울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의 일반적인 질서를 무시하는 것처럼, 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원이 완전히 다른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역사개입의 사건들이 여러 차례 소개되었습니다. 바로에게 행한 10가지 재앙들(출7-11장),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일(출14:15-20), 광야 40년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일(출16:4-20),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고(출17:1-7),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왕하 4:8-37) 등 이루다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세계에서 하시는 일들은 모두가 기적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일들이 하나님에게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역사개입은 언제나 기적으로 밖에는 깨달을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믿음으로 수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것은 중요한 일이며 필요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창조주를 향해서 대항하는 것보다, 순종하는 편을 택한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성령의 잉태를 수용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존경하는 나머지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 또한 그에 못지않은 위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약혼자가 자기도 모르는 아이를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던 점도(18-19절) 그렇고,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따른 점도(20-25절) 그렇습니다. 약혼자 마리아의 잉태는 요셉에게 있어서는 관대하게 눈감아 줄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여자의 순결에 대해서 엄격했던 아랍세계에서 볼 때 말입니다. 지금도 비슷한 법이 행사되고 있습니다만, 아랍세계에서는 부정한 여인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성령으로 잉태한 분이  죄와 죽음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리아를 떠받들 듯 보살펴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런 기록이 아랍세계에서는 입에도 담을 수 없는 폐륜행위라고 여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해졌다는 점에서 그 진실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당사자인 요셉이 성령의 잉태를 인정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잉태는 우리들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이 백만 부 이상 팔린 책이 가장많이 팔린 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 이야기들을 성경의 방향과는 엉뚱하게 취급하고 있어서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이래로 예수님은 의문의 대상이었습니다. 공생애 3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30년에 대해서는 만족스런 자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심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야단맞는 일은 없었을까? 이웃집 소녀들과의 러브스토리는 없었을까?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막달라 마리아와는 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이런 사람들의 호기심에서 출발한 소설이 바로 [다빈치 코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추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구원받는데 필요한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한 책인 때문입니다(요20:30-31).물론 성경에서 도덕적인 교훈이나 지혜롭게 살아가는 처세술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근본 목적은 구원의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증진시키는 책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잉태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대림절은 절망적인 인간 세계에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절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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