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359장 

   오늘 묵상자료는 옥수동루터교회 성령강림절후 여섯째 주일설교 초록을 보내드립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입니까? 사도는 죄에 죽고, 의에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루터는 이것을 세례의 의미라고 정리했으며, 결국 세례를 기억하며 이를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죄에 대해서 죽었고, 예수 십자가 공로로 새롭게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와 적극적으로 대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서 민감해야 합니다. 거짓과 불의, 그리고 불법에 대해서 낯선 사람입니다. 물론 기독자의 삶의 주변은 온갖 죄들로 가득차 있는 게 현실입니다. 거짓과 불의를 보고 듣고 먹고 마셔야 하는 환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죄와 어울려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죄를 거부할 뿐 아니라, 죄와 대결하여 싸워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죄는 가공할 파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기독자는 죄를 두려워 해야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죄란 목표를 빗나간 모든 생각과 행동을 말합니다. 학교로 향하던 걸음이 놀이터로 향하는 것이 죄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포기하는 것도 죄입니다. 이렇듯 출발은 미미한 것일 수 있습니다만,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들과 싸워야 합니다. 소극적인 생각과 행동 역시 죄로 향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이런 죄와 적극적으로 대결하고 싸워 이겨내야 합니다. 이렇듯 기독자는 죄를 죽이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죄와의 싸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일평생 죄와 싸우겠지만, 죄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할 것입니다(롬7:15-25). 죄 아래 살다가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려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의의 행동을 따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이 흉내 낼 수도 없고, 우리가 선행과 노력으로 이룰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의지 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행동하신 위대한 일들을 인정하고 선포하고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산다는 말은, 이 믿음을 가지고서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약속하신 일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들을 의지하고 찬양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행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죄에 죽고 의에 사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자신도 뭔가 큰일들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과 예수님을 비교하려고 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세례를 기억하면서,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약속하였던 것처럼,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하고, 주님이 행하신 의를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죄와 대결해서 싸워야 할 것이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의를 선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죄와 싸우면서도 자주 넘어지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향해서 손을 내밀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힘주시지 않으면 패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죽음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가장 복되게 사는 모습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우리들을 보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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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멸망할 조국의 미래를 예언할 선지자로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1:11-19).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은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의 말을 듣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고,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삼키는 소용돌이 속에도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십니다.

세상은 달콤한 거짓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7-9절).
옳은 일을 한 사람이 상을 받고, 일을 그르친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정반대인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보다는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경우가 적지 않고, 근면 성실한 사람보다 요령껏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유리하게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저항하려고 하지 않고, 적당히 어울려 살아가는 우리들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세상 물정 모르는 지도자로 오해했습니다. 달콤한 말과 쓴 말을 구별하는 눈치가 없고, 오히려 화나게 하는 말을 주저하지 않는 바보짓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될 선지자로 세우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4-9). 거짓 평안의 설교는 위로와 힘이 될 수 없고, 오직 진실만이 참된 힘과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아픔을 주지만, 진실만이 살 길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이 큰 소리치고 있었습니다(10절).
예레미야는 멸망을 눈앞에 둔 조국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죽을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2:13). 온 나라가 우상숭배로 가득 차 있었고(10:1-16), 거짓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7:1-29). 새벽부터 기도하고, 번제와 희생제를 드리며, 성전 문을 닳도록 밟고 거룩한 체 모양을 꾸몄지만, 사실은 예배가 아니었습니다.도적질, 살인, 간음, 거짓 맹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바로 우상들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가뭄과 기근과 전쟁으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누란의 위기에 있는 민족과 조국을 향해서 눈물로 호소합니다(8:18-9:26).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만, 확실한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예레미야 시대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선지자는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만이 최후의 재판장이 되십니다(11-13).
<판도라의 상자>라는 그리스 신화가 있습니다.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될 상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호기심이 상자를 열게 했고, 마침내 희망이 사라지고 온갖 슬픔과 불행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앞일을 내다본다는 것처럼 두렵고 슬픈 일이 없을지 모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멸망이 목전에 닥친 민족과 조국을 보면서 하루도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거기다 거짓 평안을 선포하는 예언자들과 싸워야 했고, 주객이 바뀌어서 그들로부터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20:2,14-18). 하지만 의인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아십니다(11-12절). 그리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친히 씻겨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계21:1-4).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십니다(요14:27). 이런  하나님을 선지자는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될 분명한 이유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4:1-2). 이것만이 우리들이 위로받고 구원받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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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제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세우시고 명령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들도 따라야 할 제자의   소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에클레시야란 말은 교회를 뜻하는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말씀이 되는 까닭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9:35).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한국계 뮤지컬 여배우 데보라 크레익 토니상 수상>이란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에는 “생후 6개월에 미국 플로리다 루터교 목사 가정에 입양되다” 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소극적인 의미와 적극적인 의미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 아래 살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달려죽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선포하는 것을 복음의 소극적 의미라고 한다면, 이 복음을 삶에서 실현하는 것을 복음의 적극적인 의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입술로 전하는 복음과 행동으로 전하는 복음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할 복음은 행동하는 복음을 말합니다(약2:17). 곧, 믿는 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보시는 데서 일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기독자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지금 이 복음을 듣기를 갈망할 뿐 아니라, 그 향기와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전략을 세워 복음을 전하라 하십니다(10:5-6).
삶을 전략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략이란 군대 용어입니다. 효과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철저한 전략이 구상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이방인 선교나 여타 지역 선교보다는 유대지역으로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선교 전략을 오해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유대뿐이라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온 세상으로 전파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요3:16). 그러나 세상으로 전파되기까지는 먼저 복음의 출발점이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유대지역을 선교의 출발점으로 삼으셨습니다. 복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라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연못에 던진 돌이 파문을 일으키듯, 복음의 파장이 서서히 밖으로 번져나가야 할 것입니다. 가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친구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 세계를 향해서 복음이 번져나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복음 이외의 것들도 고려하라고 하십니다(10:8).
예수님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다른 일들을 하셨습니다.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셨으며, 제 정신 아닌 사람들을  구해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도구들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복음에 눈 뜨게 할 수 있다면 모든 방법을 사용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어느 대학교수는 사탕과자를 얻어먹는 재미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회상합니다. 또 어떤 장로님은 학생회의 문학의 밤에 초대되었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고, 어떤 구역장은 빨래를 해 주는 분의 헌신에 교회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셨고, 적극적으로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따라야 할 대목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형제 사랑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일터가 세상 한 복판임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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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42장 

우리를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 곧 신자라고 부릅니다. 누군가를 믿고, 무엇인가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이래로 기독교의 믿음은 시련을 겪어왔습니다. 자주 혼란스러운 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의 신앙을 설명하는 일에 가장 권위자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신앙을 진술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곤 합니다. 믿음에 관한한 그에게서 배울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어떻게 믿은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은 독특했습니다. 그가 믿은 것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성경에 그 내용이 여과 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것(창12:2) 입니다. 땅의 티끌처럼 많은 자손으로(창13:16), 하늘의 별처럼(창15:5)주시겠다는 것   입니다. 아내와 조카 단 세 혈육만으로 25년을 살면서도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100살이 다된 늙은이가 꿈꾸기에는 불가능한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에게서는 가능하다는 확신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믿은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상대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몸과 마음을 맡겼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어떤 이득과 손해가 되는 지를 면밀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축복의 근원>으로 세우셨을 때(창12:1-4) 그는 두렵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대한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의인 10명 사면론>으로 흥정했습니다(창18:16-33). 참 놀라운 거래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를 포기했던 것과는 정반대입니다(욘1:1-3). 요나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알았지만, 그 계획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마치 <주기도>처럼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기를 바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가졌던 최초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믿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살에 낳은 독자입니다. 그 아이는 하늘의 별무리처럼 늘어나게 될 근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독자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창22:1-19). 그러나  아브라함은 묵묵히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계획과는 상반되는 명령처럼 들릴 수 있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의 근거가 되는 의심이 밀려들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인격에 맡긴 이상 철저하게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자기 경험과 이해와 지혜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이 믿음을 의(義)로 간주하신 것(창15:6)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의로운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 역시 아브라함에게서 계승된 것이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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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1월 20일까지는 성령강림절 후 주일들로, 신앙의 성장과 실천적 생활에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 첫 걸음은 복과 저주의 길 앞에서 현명한 선택을 요구하는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복으로 가는 길과 저주의 길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복과 저주의 삶이란 무엇이며, 그 기준은 어떤 것입니까? 피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복된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을 자세히 설명하는 책”이란 뜻을 가진 신명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중요성을 십이분 강조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고,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녀에게 가르칠 것을 재삼재사 강조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말씀에 복과 저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씀을 따르면 복이되고, 말씀을 거역하면 저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가운데 존재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를 복되다고 했습니다(시 1:2).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친밀해야 합니다. 누구든, 집안에서든, 길에 행할 때든, 누웠을 때든, 일어날 때든, 말씀을 가르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가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은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입니다.
삶의 질과, 웰빙 시대를 얘기합니다. 줄기 세포의 비약적인 연구는 죽지 않을 미래를  약속하고 있지만, 어쩌면 또 다른 저주가 예상되는 것 같습니다. 죽고 사는 순환을 거부 한다면 암세포처럼 더 큰 절망을 가져올 때문입니다. 최상의 웰빙시대라고 말할 수 있던 에덴동산에서 말씀을 거역할 때, 저주의 삶이 시작되었고(창3:1-7), 미래가 보장되었던  재산과 명예도 말씀의 명령을 거역할 때, 아간과 그 가족들은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 갈 수 밖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이란 하나님께 반항과 불순종이며, 우상으로 대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를 우상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근거입니다. 인간 중심, 물신 숭배, 과학만능주의가 지배하는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하나님이 성을 지키지 않으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허사” 라고(시127:1) 고백합니다. 바벨탑을 쌓던 시대를 닮아 가는 시대상을 주목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실천하며 사는 것이 최상의 복입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최근 20년 동안 불교 인구는 3배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불교는 종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 중심적 입니다. 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기초에서 출발하는 때문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인간에 초점을 두는 신앙에 매력을 두는 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합니다. 위기 입니다. 푸른 목장에 수많은 양떼를 봅니다. 그들 앞에는 먹고, 뛰놀고, 쉬기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목장주인에게 달려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게 비극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될 수 없는 분명한 이유를 대변합니다. 신명기의 저자 모세는 우리들 인류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며,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하며 사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감사할 것과 회개할 것의 근거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시119:105)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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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시며 그러나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주일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르는 말씀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할 일이 많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일단 행운아입니다. 인생이란 일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가치 있는 일을 한다면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 기독교인들은 가치 있는 일, 곧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고(출20:9) 하셨습니다. 그런데 닷새만 일하자고 하는데,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각각 자기의 짐을지”라고 (갈6:5)말씀했습니다.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저마다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거짓과 불의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수입이 좋아도 그런 일은 하나님께서 복 주실 일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또한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을 하더라도 정당한 방법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늘 아버지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많고 많은 일 중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한 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여러 기능들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기능, 가르치는 기능, 섬기는 기능, 복음을 전하는 기능, 친교 하는 기능 등 입니다. 이런 교회의 기능을 활발하게 하도록 돕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회를 위해 일할 일꾼들을 찾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과, 예배를 섬기는 봉사자들, 성가대원과 관리자들이 필요합니다. 주방에서 수고할 이가 필요하고, 새로운 신자를 안내하는 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 말고도 하나님의 일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 해야 할 일들 입니다. 바로 모든 사람이 매일 출근하는 직장에서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이 무엇이든 하나님께 맡은 일로 믿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 생활이 그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모든 기독인에게 선포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인 사람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한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3가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첫째는 세례를 주는 일입니다. 둘째는 제자를 삼는 일입니다. 셋째는 성도로 살도록 돌보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교회를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주 이심을 고백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제자는 선생님을 따라 다니며 배우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선생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법과 생활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서 건강한 성도로 살아가도록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한 사람이 여러분 곁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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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마침 유대인의 오순절(첫 추수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기에 오순절이라고도 부르지만, 이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우리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말하는 특별 용어입니다. 성령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 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꿈과 사랑과 믿음을 가지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십니다.
요엘 선지자는 성령이 오실 것과, 성령께서 하실 일을 예언하였는데, 사도행전2:1-4은 이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루살렘 시온 산 곁에 위치한 마가의 다락방에는 120명 쯤 되는 제자들이 기도하고 있었고(행1:15), 오순절에 그들 가운데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했는데, 성령께서 그 사람들에게 방언을 하게 했다고 말씀하고 (행2:4)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고, 전혀 낯선 방언을 말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놀랍고 놀라운 일입니다. 성령님이란 누구 십니까? 성경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천지창조 때부터 일하신 하나님이셨고(창1:2),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갖게 해 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맡아주신 하나님이십니다(요14:16-26). 성령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의 마음을 감동 감화시키시며 인도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꿈을 꾸게 하십니다.
요엘 선지자가 소개한 성령님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꿈을 꾸도록 해 주시는 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령님은 늙은이와 젊은 이, 심지어 남종과 여종들에게까지 꿈을 꾸도록 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입니다(28-29절). 꿈이 무엇입니까? 미래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꿈은 칠흑처럼 캄캄한 밤에 샛별처럼 피어나는 것 입니다. 절망과 슬픔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꿈을 꿔야 합니다. 어쩌면 그런 형편이 꿈꾸기에 적합할지 모릅니다. 요엘 선지자는 성령께서 오실 때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이 세상이 달려가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이나 천길 낭떠러지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처지에서 꿈을 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은 이런 소망을 우리에게 갖게 해 주십니다. 시궁창에서 푸른 하늘을 향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도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에 붙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자주 언급하였습니다. 어리석은 것을 깨우쳐 주셨고, 연약함을 도우실 뿐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가르쳐주셨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신 분이라고 말입니다(롬 8:2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려면 성령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옛 사람을 다 벗어던지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마귀의 유혹과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들 마음에 찾아오셔서 속삭이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섬기며 살라고. 성령님은 죄와 타협하지 말고 싸워 이기라고 용기를 주시기도 하고, 불의의 세력에 쓰러졌을 때 일으켜 세우시고 위로와 격려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도록 권고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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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가정의 의미, 어버이의 자리가 새삼 위대함을 생각할 기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중보자 예수님>께서 우릴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내용입니다. 다시금 관계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를 하나님께 이어주는 유일하신 중보자이십니다.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한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조차, 즐겁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젊은 남녀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이런 분들이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 결손 가정의 아동을 초청해서 목욕을 시켜주고 따뜻한 밥을 먹여주고 함께 잠을 자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어려운 이웃에 대해서 얘기를 듣기가 무섭게 팔을 벗고 돕는 손길을 베푸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새벽 기도회 시간에 낡은 옷을 입은 신학생 얘기를 했는데, 한 주간도 지나기 전에 양복 한 벌 값을 내밀던 한 고 이금순 권사님이 기억나고, 퇴학당할 처지의 신학생의 등록금을 몇 차례 이름 없이 내주셨던 고 김성일 장로님이 기억납니다.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은 기도로 승화되었습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더욱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실 때, 사랑의 가슴으로 벅차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배고프고 병든 사람들, 외롭고 지친 사람들, 자신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질긴 굴레에 묶여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역시 한계가 있으셨습니다. 시간적으로도 모자랐고, 공간적으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보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켜주심을 빌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의 실천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탁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쉬지 않아야 할 것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사랑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중보의 기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천지가 개벽하는 그런 몽상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해서는 끝이 없습니다만, 단 한 사람, 자기 자신만 바꾸면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된 것을 늘 확인하셨습니다. 꼭 같은 생각이나 행동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목표를 향해서 함께 손을 잡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서로 이해하는 마음이고, 서로의 입장을 배려해 주는 마음입니다. <관중과 포숙아>의 얘기를 다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전혀 엉뚱한 친구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때 우정은 계속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지금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한 마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큰마음이며 넓은 마음입니다. 그 때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가능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중보의 기도로 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참 모습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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