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342장 

우리를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 곧 신자라고 부릅니다. 누군가를 믿고, 무엇인가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이래로 기독교의 믿음은 시련을 겪어왔습니다. 자주 혼란스러운 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의 신앙을 설명하는 일에 가장 권위자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신앙을 진술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곤 합니다. 믿음에 관한한 그에게서 배울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어떻게 믿은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은 독특했습니다. 그가 믿은 것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성경에 그 내용이 여과 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것(창12:2) 입니다. 땅의 티끌처럼 많은 자손으로(창13:16), 하늘의 별처럼(창15:5)주시겠다는 것   입니다. 아내와 조카 단 세 혈육만으로 25년을 살면서도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100살이 다된 늙은이가 꿈꾸기에는 불가능한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에게서는 가능하다는 확신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믿은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상대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몸과 마음을 맡겼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어떤 이득과 손해가 되는 지를 면밀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축복의 근원>으로 세우셨을 때(창12:1-4) 그는 두렵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대한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의인 10명 사면론>으로 흥정했습니다(창18:16-33). 참 놀라운 거래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를 포기했던 것과는 정반대입니다(욘1:1-3). 요나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알았지만, 그 계획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마치 <주기도>처럼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기를 바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가졌던 최초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믿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살에 낳은 독자입니다. 그 아이는 하늘의 별무리처럼 늘어나게 될 근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독자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창22:1-19). 그러나  아브라함은 묵묵히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계획과는 상반되는 명령처럼 들릴 수 있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의 근거가 되는 의심이 밀려들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인격에 맡긴 이상 철저하게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자기 경험과 이해와 지혜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이 믿음을 의(義)로 간주하신 것(창15:6)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의로운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 역시 아브라함에게서 계승된 것이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겼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