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11월 20일까지는 성령강림절 후 주일들로, 신앙의 성장과 실천적 생활에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 첫 걸음은 복과 저주의 길 앞에서 현명한 선택을 요구하는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복으로 가는 길과 저주의 길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복과 저주의 삶이란 무엇이며, 그 기준은 어떤 것입니까? 피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복된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을 자세히 설명하는 책”이란 뜻을 가진 신명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중요성을 십이분 강조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고,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녀에게 가르칠 것을 재삼재사 강조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말씀에 복과 저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씀을 따르면 복이되고, 말씀을 거역하면 저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가운데 존재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를 복되다고 했습니다(시 1:2).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친밀해야 합니다. 누구든, 집안에서든, 길에 행할 때든, 누웠을 때든, 일어날 때든, 말씀을 가르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가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은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입니다.
삶의 질과, 웰빙 시대를 얘기합니다. 줄기 세포의 비약적인 연구는 죽지 않을 미래를  약속하고 있지만, 어쩌면 또 다른 저주가 예상되는 것 같습니다. 죽고 사는 순환을 거부 한다면 암세포처럼 더 큰 절망을 가져올 때문입니다. 최상의 웰빙시대라고 말할 수 있던 에덴동산에서 말씀을 거역할 때, 저주의 삶이 시작되었고(창3:1-7), 미래가 보장되었던  재산과 명예도 말씀의 명령을 거역할 때, 아간과 그 가족들은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 갈 수 밖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이란 하나님께 반항과 불순종이며, 우상으로 대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를 우상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근거입니다. 인간 중심, 물신 숭배, 과학만능주의가 지배하는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하나님이 성을 지키지 않으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허사” 라고(시127:1) 고백합니다. 바벨탑을 쌓던 시대를 닮아 가는 시대상을 주목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실천하며 사는 것이 최상의 복입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최근 20년 동안 불교 인구는 3배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불교는 종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 중심적 입니다. 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기초에서 출발하는 때문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인간에 초점을 두는 신앙에 매력을 두는 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합니다. 위기 입니다. 푸른 목장에 수많은 양떼를 봅니다. 그들 앞에는 먹고, 뛰놀고, 쉬기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목장주인에게 달려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게 비극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될 수 없는 분명한 이유를 대변합니다. 신명기의 저자 모세는 우리들 인류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며,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하며 사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감사할 것과 회개할 것의 근거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시119:105)기 때문이라고.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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