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203, 327장. 

“一年之計 在於春이요, 一生之計 在於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년 설계는 이른 봄이 좋고, 일생 설계는 어린시절이 좋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새롭게 살기를 바랍니다만, 作心三日이 되곤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로운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새로운 삶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기억하는 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새로운 삶이란 세례로 시작되는 삶을 말합니다(5절).
세례라는 것은 기독교인으로 사는 첫 단계를 말합니다. 세례란 “물로 씻다. 물에 잠그다.”는 뜻입니다. 죄를 씻는 세례였고, 죄에 죽는 세례였습니다. 이런 세례의 모형은 유대인의 할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생후 8일된 남자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였는데, 하나님과의 관계 맺기를 내용으로 합니다(창 17장).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 할례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하고, 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의식을 가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할례의 목적과 세례는 일치한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태어남(혹은 거듭남)의 가시적인 행위가 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례 받은 이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분명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고 말입니다. 세례 받은 이는 새로운 삶을 살 준비가 끝난 사람입니다. 

새롭게 살기 위해서 세례의 내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새롭게 살기 위해서 좌우명을 정할 수도 있고, 삭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결심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새로워지려는 것의 반대편에 있는 것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요약해서 죄악입니다. 죄를 씻든지, 아니면 죄를 죽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자는 날마다 죄와의 전쟁을 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힘든 싸움입니다. 죄와 싸우는 한 그 사람은 새롭게 살고 있는 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할 일은, 예수그리스도를 붙들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례의 두 번째 내용입니다. 세례에 물속에 잠그는 죽음의 요소가 있는가 하면, 물 위로 다시 올라오는 생명의 또 다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세례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롬 6:3-5). 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세례를 기억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새 옷을 사 입고, 새 집에 사는 것이 새로운 삶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과 삶의 목표가 새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새로운 삶인 때문입니다. 되풀이되는 일상에서 새롭게 산다는 말은 의미 없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야 말로 이런 우리의 일상을 늘 긴장하게 만들고, 의미 있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자리에서든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하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상 죄를 죽이는 것이나, 죄 없는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으로 인해서 넉넉히 가능한 일입니다(롬 8:37). 이것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말합니다(고후 5:17). 참된 신자는 날마다 세례를 기억하며, 날마다 세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의의 부활에 참여하며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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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690호.
찬송  408, 358장. 

병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충성스러운 개의 성품처럼 자신과 가족, 이웃과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 첫 말씀은 “하나님만 섬기자!”는 주제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까? 풍성하게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들 삶의 원천이 되시는 때문입니다(22절). 
하나님이란 칭호는 “절대자”, 혹은 “창조주”를 의미합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그 하나님을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시 18:2).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인간의 성격, 의지, 감성 등을 잘 이해할수록 더 좋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력과 반대로 좌절감에 빠집니다. 인간이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을 아시기 때문이며, 하나님만이 나와 여러분을 아십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시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자신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릴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공의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24절).
당당한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면, 바탕이 튼튼해야 합니다. 바탕이 튼실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흔들리며 살수 밖입니다. 우리를 붙들어 줄 삶의 근거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끝없는 에너지를 제공하는 힘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였습니다. 수 차례 삶의 목표도 수정하였고, 삶의 방식도 바꿔야 했습니다. 믿었던 인간관계나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계획들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잘된 일이었습니다. 인간 중심적인 기초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있을 터전은 하나님,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뜻대로 이루신다고 했습니다(사 55:11). 세상은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치 않습니다(벧전 1:25). 하나님을 섬겨야 할 분명한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람답게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25절).
의롭게 산다는 말은 사람답게 산다는 뜻입니다. 왜 의롭게 살아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는 왜 배워야 하느냐고 묻는 것과도 같고, 왜 밥을 먹어야 하느냐고 묻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한 수단들인 때문입니다. 결국 잘 산다는 말은 사람답게 사는 것을 의미할 때, 이 보다 더 중요한 관심과 노력은 있을 수 없겠습니다. 여기에서 질문다운 질문을 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이냐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두 주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영예를 얻을 것이다.”(새번역 25절). 이사야 선지자의 증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다 하나님께서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여기신다는 말입니다(롬 1:17). 이것을 신학자들은 기독자의 존재양식(存在樣式)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사람의 선행이나 공로의 크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감싸 안고 있는 예수님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만을 앞세울 것입니다. 이 보다 더 사람다운 삶은 있을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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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8:13-18.
찬송  124장.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성탄절에 은혜받을 말씀은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말구유에 누워계십니다. 여기에 성탄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가장 의미있게 보내려 한다면,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말구유는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7절).
서양에서는 성탄절이 되면 온 세상이 축제분위기에 싸입니다. 집집마다 창가엔 오색등이 걸고, 크리스마스 츄리밑에는 가족에게 줄 선물들을 쌓습니다. 시내는 온통 성탄 캐롤로 가득차고, 사람들은 들뜬 기분으로 거리에 물결을 이룹니다. 중국에도 싼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 보따리를 메고 있는 모습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첫번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말 구유에 누워계셨기 때문입니다. 말구유의 누인 예수,세상은 예수님을 환영은커녕 푸대접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쩌면 알면서도 거부했다는 말이 옳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와 친구가 되었고, 자기 중심적인 삶을 즐겼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말구유의 예수님을 기념하면서도, 그 의미는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21세기의 말구유의 의미를 헤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낭만적인 말구유로 만족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말구유는 예수님의 현존을 의미합니다(15-19절).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 목적은 다양하겠습니다만, 예수님만이 자신들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때문임에 분명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예수님께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는 어머니나, 병든 가족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어디에 현존하시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말구유에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마음이 상하고 부자유한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사 61:1-2).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한다면,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놓은 교회가 아니라, 초라한 말구유에 계십니다. 목자들처럼 우리들도 그 곳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구유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14절).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말들 합니다. 정치도 변해야 하고, 경제도 변해야 한다고 합니다. 국회는 법제정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행정부는 권위행사로 변화를 시도하며, 사법부는 판결로 변화를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말씀합니다. 지도자들은 당리당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일해야 합니다. 가정과 사회의 해묵은 문제들 역시 사랑으로 처방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자기 희생과 섬김에 바탕을 둔, 말구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배우고 눈떠야 할 사랑은, 받고 누리는 자기 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라, 베풀고 섬기며 다가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눈과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 입니다. 말구유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그 말구유를 찾아간 목자들처럼 사랑에 전염된 삶을 살아갈 때, 달라진 세상 속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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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676호.
시편  86:6-10.
찬송  239. 236, 장

기독교 신앙에는 화육(Incarnation)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정녀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셨다는 교리입니다. 바로 그 당사자인 마리아의 고백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성령께서 자신을 통해 생명을 잉태케 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말씀의 능력을 인정하고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37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하나님의 실체가 말씀이라는 사실을 입으로는 줄줄 외우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히 4:12)신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말씀이시며,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반드시 행동하시리라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 여인이었고,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녀처럼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보다도, 엘리야나 바울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한 유일한 인간이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동의하였습니다(38절).
오늘 본문에서 이 대목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동의하에서 일하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한국 과학 수준은 우등생인데, 정치 수준은 낙제생이라는 말을 합니다. 서로 다른 주장이 공존하고 타협을 통해서 협력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영원한 평행선을 달리기 때문입니다.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이 아니라면, 문제의 핵심을 공유하고 최선의 해답을 찾으려 했다면, 얼마든지 객관적인 의견수렴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차이는 한 치도 좁히지 못하고 날치기식으로 법령을 통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마음대로 누구에게나 생명의 씨앗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아니면 다른 누구에게서 찾을 수없는 동의를 듣고 싶어하셨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차별성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마리아의 참여로 이룩되는 위대한 사건인 때문입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더할 수 없는 신앙입니다.

마리아처럼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고백하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신앙에서 가장 큰 취약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말씀> 이라는 등식은 성경적 진리입니다(요 1:1). 하나님을 말씀 속에서 만나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받고 싶어 하는 점입니다. 말씀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말씀 속에 마땅히 행할 삶의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씀을 소홀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모”했다고 고백(시 19:10)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목표가 빗나가 있는 점입니다. 최상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나 정말 이상스럽게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에는 무관심하고, 대신 자신들의 야망이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먹고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너희 천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뜻을 구하라.”(마 6:31-33).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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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4:1-4. 
찬송  358장. 

삶의 목표에 따라서 사는 방법과 태도가 결정될 것입니다. 땅을 살리고 바른 먹거리를 생산하려고 한다면, 정농하는 농부 모습이 어울릴 것이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다면, 그 다운 모습과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으로 살기로 했다면, 어떤 모습이 가장 어울릴 것일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천다운 모습은 낙관적이라고 말씀합니다(16절). 
자세히 사람들을 관찰하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태도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밝은 쪽보다는 어두운 쪽을 먼저 바라봅니다. 그래서 언제나 불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두운 쪽보다는 밝은 쪽을 먼저 바라봅니다. 이 두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까? 저는 할 수 없는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문제투성이의 세상을 지나가고 있습니다만, 크리스천은 그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키우고, 가능한 방법을 찾는 사람이라고 깨우침을 준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말 같지 않은 말입니까? 그러나 밝은 쪽만을 바라보라는 말로 들려야 하겠습니다. 삶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항상 기쁨 쪽, 희망적인 쪽, 할 수 있는 쪽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천다운 모습은 하나님 중심적이라고 하십니다(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기도만 하면서 어떻게 살 수 있느냐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지금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는 이유로 은퇴를 고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 존경스러운 표현입니다. 삶의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을 최후의 판단자로 모시고 사는 분처럼 보이는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란,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과 의논하는 일을 말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일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생각을 살피는 일이 기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오래 전에 한 미국 신학생을 만났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는데,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부탁해 놨는데, 아직 대답을 안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하나님과 삶을 나누며 살아야겠습니다.

크리스천다운 모습은 감격의 생활이라고 하십니다(18절).
한국 사람들이 표정이 없다는 소리를 듣곤 합니다. 그런데 중국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들보다도 훨씬 더 표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웃음도 참지 말고, 울음도 참지 말라고 말입니다. 지금 제 강의는 표정이 생겼습니다.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아졌습니다. 감격을 가진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크리스천은 이상스런 사람들입니다. 감사와 감격밖에는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인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언제나 그들이 가진 것과 받은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만 바라보며,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만 생각하니까, 언제나 불평밖에는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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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533, 543장. 
  
사람들은 무언가 희망의 소식을 찾아서 뉴스에 주목합니다. 일자리를 찾는 실업자들, 포화가 멈추기를 바라는 병사들, 농산물 값의 급락으로 절망하는 농민들이 희망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희망의 소식을 듣고 싶어 합니다. 희망의 소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누구로부터 들어야 할 소식입니까? 

희망의 소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1절).
사람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 희망이지만, 그 희망이 성취되려면 밖으로부터 오는 힘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을 전달하는 배달꾼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게 희망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래 전에 독일 <교회의 날> 행사에서 “예수, 우리의 희망”이란 주제를 걸었습니다. “수출 5000억불”과 비교할 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요? 정보지식(IT)과 생명지식(BT)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코리아라고 합니다. 문명의 발전 한 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희망이 무엇입니까? 참 자유와 기쁨, 그리고 평안은 더 발전된 문명이 가져다주는 것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맺힌 가슴을 풀어주고, 묶인 삶에서 자유를 주며, 두려움과 절망에서 희망을 갖게 한다고 말입니다(1-4절). <엘피스>라는 희망은 하나님께 향한 바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희망의 소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5절).
하나님의 현존은 말씀하시는 때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예배 중에 촛불을 켜는 것은 구약적인 배경입니다. 하나님은 빛 가운데 존재하심을 상징화한 것입니다(출3:2-5).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시고, 말씀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 기자는 하나님은 말씀이시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요 1:1). 하나님을 신비가운데서 찾으려는 것은 성경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망의 소식을 들으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절망을 안겨줄지도 모릅니다.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이라고 말씀할 때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말씀조차도 희망의 소식입니다. 마른 풀과, 떨어질 꽃을 더 이상 붙들지 않게 하시니 말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고 고백하듯, 오늘 우리들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희망의 소식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9절).
우리들 인류가 들어야 할 소식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황우석교수에게 거는 기대가 무너지자 세상이 큰 슬픔에 쌓였다고 외신이 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제2, 제3의 황우석신드롬이 불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다시금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고, 그 넓은 품에 안아주시며, 연약한 인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인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들 삶의 중심이 되시는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중심이며, 혼란과 무질서에 낙심하다가도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때문입니다. 캄캄한 터널 같은 때는 물론,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길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누구나 희망의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시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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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9:5-9.
찬송  86장. 

오늘은 교회력 대림절 첫째 주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또한 추수감사절로 이 날을 지킵니다. 새로운 시작과, 마지막의 감사를 함께 묵상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주제를 잘 아우를 수 있는 말씀은 “깨어있는 삶을 살자” 입니다. 시작하는 첫걸음과 마감하는 끝자락에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감사로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자랑스럽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특별한 정신을 품고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이 감사라는 것입니다. “고맙게 여기는 마음”인데, 효자나 애국자, 그리고 순교자들이 갖고 있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부모나 조국, 그리고 신앙의 대상에 대해서 감사함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람과 기쁨 속에서 그 감사함을 행동으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 감사의 마음을 항상 품고 살아간다면, 그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감사를 잃은 사람들은 사막처럼 메마르고 피곤한 삶을 살 뿐입니다. 고마운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차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저절로 솟아나는 것이 아니며, 의식적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입에 발린 감사의 말을 합니다. 거기에 감사의 혼을 불어넣고, 행동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 자연과 세상을 향해  “감사합니다.” 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깨어있는 기다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대림절의 주제는 깨어 기다리는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가 대림절의 정신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주님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역사 속에 오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말씀해 주셔야 하고, 주님이 오셔서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신앙태도는 기다림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다림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이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눈뜨게 되고, 베풀어 주신 은총의 크기를 깨닫게 됩니다. 기다림은 우리 자신을 확인하는 기회도 됩니다. 우리의 허물과 무력감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대림절, 신앙의 출발점에서 기다림은 우리에게 깨어있는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물론 기다림은 많은 고통을 안겨 줄 수 있습니다. 인내력을 시험받게 될 것이고, 결과에 대해서 회의를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깨어있는 기다림은 신앙과 생활을 성숙하게 이끌어 줍니다.

참된 깨어있음은 주님 안에 정박하는 일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적인 활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책임 하에 두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참다운 깨어 있음이라,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께 우리를 정박시키는 일입니다. 어쩌면 주님이 우리의 온전한 주인의 자리에 모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여느 사람과 똑 같은 삶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에 계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는(고전1:25)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9)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맡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9-10)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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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8:34-39.
찬송  208장. 

오늘은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 주일> 입니다. 옥수동교회 주일아침 설교문 초록을 보내드립니다. 은혜로운 주님의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운명을 바꾼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생일대의 사건이라고 하겠는데, 아마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일어나게 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운명의 갈림길에서 여러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살고 죽는 일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담은 우리에게 죽음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담을 향하면 죽음의 길입니다(22절).
우리 인간에게 가장 절망적인 사건은 아담이 타락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결과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창3:19). 죽음은 인간에게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죽음은 아담이 스스로 택한 길이었습니다. 아담은 얼마든지 죽음을 피할 수 있었고, 풍성한 삶을 영원토록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거부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거절한 일입니다. 이런 아담의 행위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온 인간을 죄와 죽음 가운데로 인도했던 것입니다(롬5:12). 하나님을 거절하는 행위, 그것은 인간의 품위나 성실성에도 불구하고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길에 대해서 여전히 경고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려고 하는 첫 아담의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 유혹의 소리입니다. 

예수님을 향할 때 생명이 시작됩니다(20절).
예수님은 역사에 오신 두 번째 아담입니다. 이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바울 사도는 “생명”을 가져오신 분이라고 소개했습니다(롬5:17-18).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구체적인 일을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고 설명했습니다(롬5:19).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한 뜻에 대한 순종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런 순종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뒤바뀌는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반대로 죽음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일입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주목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종으로 일관된 삶을 사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사는 길과 죽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향할 때 우리는 생명으로 가는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갈림 길 앞에서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23절).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이라는 어려운 결단을 내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매 순간순간이 선택이며,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아담의 길이든, 둘째 아담의 길이든 선택은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첫 아담은 열심히 우리를 설득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이 되라고 말입니다. 네 멋대로 살아라 고 합니다. 근사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은 십자가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라.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고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일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내 마음대로 꿈꾸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인생을 만들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결단인 선택을 주님께 맡겨야 하겠습니다. 나보다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나 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선택중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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