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5:1-5.
찬송  175장. 

우리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신앙입니다.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전적인 고백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감화 시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성령님의 인도로 가사로 가는 길을 향했습니다(26절).
지중해 변 가사지방으로 가는 길은 광야 길이었습니다. 빌립 집사의 마음에 성령께서 찾아오셨고, 가사로 내려가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주의 사자” 혹은 “주의 천사”가 그렇게 지시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주의 천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여러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나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재무장관 격인 내시의 마차 곁으로 다가서게 하신 것도 성령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29절). 성령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의 위인들은 성령께 의지하고 겸손히 순종할 때, 위대한 삶을 살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임재와 활동을 어떻게 깨닫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가지 힘을 인정합니다. 성령님과 악령인데, 성령님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악령은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고 말입니다. 

빌립은 성령님의 인도로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35-40절).
요즘 <고민을 풀어 주는 시계> 얘기를 들었습니다. 운동을 할까 말까 망설일 때, 그 시계를 치면 해답을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궁금증을 풀어주는 역할일까요?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과, 싫어하실 일을 분별하게 하십니다. 빌립에게 마차에 탄 사람 곁으로 가라는 마음을 주셨다면, 그리고 전도자의 마음을 가지고 가도록 하신 것은 분명 성령님의 감동하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빌립의 태도였습니다. 그는 성령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실 때,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는 생각을 분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악령의 소리도 들려왔을 것입니다. “쓸데없는 짓은 왜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성령님과 악령을 쉽게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성령님께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 순종할 때 우리도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찾아오셔서 속삭이십니다. 그런데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생각나도록 일깨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물론 성령님을 향해 닫혀있는 마음보다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훨씬 더 성령님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성령님의 음성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난 주간에 박희완 집사님과 강화도 마리 산을 찾았습니다. 산행에선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박집사님이 “안녕하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친절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의 빗장을 열고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감화시키 십니다. 만일 우리들이 순종할 준비를 하고 있다면, 우리도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빌립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성령님께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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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아름다운 그림언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표현한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들 인간을 양이라고 할 때,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그림어입니다. 목자는 양들의 안전과 행복한 삶을 돌볼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생명까지 바쳐 지키는 수호천사 역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인생길을 인도하십니다(16절, 시23:2).
고매하다는 선생도, 인생 경험이 풍부하다는 어른도, 인생길을 묻는 물음에 잘 알지 못한다고 사래질을 합니다. 살면 살수록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인생길이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길을 어떻게 살아야할 지 알 수 없어서 더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소개하십니다. 다윗이 고백했던 선한 목자를 자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써 우리들이 왜 사는지, 삶의 이유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마 5:13-16)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앞장서서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인지 모른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높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많이  가지는 것도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고, 세상을 맛나게 하는 소금이 되어서 착하게(제 구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길이라고 말씀하시고,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보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14-15절).
히브리어에서 안다는 말을 <야다>라고 합니다. 이 <야다>는 단순한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인 이해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다고 하실 땐, 우리의 두려움과 아픔까지 알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찾아 나갈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그러나 겪어보지 않아서 동정하지 못하는 낯선 분이 아니라, 친히 우리의 삶을 경험하셔서 사랑의 눈빛으로 우리들의 눈을 들여다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구구절절 설명이나 변명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입을 열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왔어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저를 붙잡아 주세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곧 바로 평정심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 내가 알고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라. 내 평안을 가져라”(요14:27). 예수님만이 우리를 알고 계시는 단 한 분, 우리 주님이십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15-18절).
지난 5년 동안 신장을 기증한 사람이 총 800명이었는데, 순수 기증자는 534명이고 교환이식 기증자가 266명이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순수 기증자 중 남자가 362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겉과는 달리 뜨거운 사랑에 있어서는 남자가 앞선다는 현실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는데(15절), “내가 스스로 버리”신 다고 자원해서 한 행동하는 사랑이었습니다(18절). 수단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자기 혼자만 살려고 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을 밝히고 있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맨 앞에 서 계십니다. 서 계실 뿐 아니라, 지금은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우리들을 사랑으로 돌보시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들 삶 앞에 언제나 서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보다 더 크고 소중한 축복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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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121-128.
찬송  410장. 

요한일서를 기록하는 목적을 사귐을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3절). 그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갖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부활신앙 가운데서 사는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과 사귀는 일입니다. 참된 사귐이 그리스도 안에서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 생명이 있습니다(2:1-2).
어느 때 보다도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시대입니다. 흔들리는 세상을 살고 있는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가치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개인도 사회도 오직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합집산을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기독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표준이며 삶의 근거가 되시는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온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하려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화목 제물이신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박하려고 힘써야 합니다(고후5: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고(롬9:1, 고후2: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빌1:21,갈 2:20)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입니다(1:5-1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들 인간 사이에 우뚝 서 계시는 중보자 이십니다. 죄와 허물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을 앞세우고서(2:1, 히4:14-16)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변호하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히8:1, 12:2).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어떻게 살아왔던지, 그는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도 있고(요14:13, 15:16),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요일1:5-6).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로 우리 곁에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목자가 되십니다(시 23:1-6). 그래서 환란과 풍파 많은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과 평안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과 교제하는 일입니다(1:2-3).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정치세계의 얘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참된 이웃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형제와 자매입니다. 초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롬1:7, 벧후1:1,요이1:3). 그래서 서로의 필요를 따라 삶을 나누며(행 2:44-45),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엡6:22), 함께 모여 기도하는데 힘썼습니다(행2:42). 인류 역사에 기독교회가 미친 영향력은 다 열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의료와 교육, 그리고 봉사를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지표로 삼은 것은 기독교회의 정체성처럼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도왔던 탈북자 최병국 선생이 최근의 동향을 말했습니다. “북한에 빵 공장을 세워서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 분이 받은 사랑을 북한 지역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감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정신숙집사님은 암 환자병동인 삼성제일병원 339호실의 마스코트로 마지막 사랑의 불꽃을 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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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73-80.
찬송  94장.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모든 사람은 이 질문에 충실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 대답 여하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삶을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그 대답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로 알려진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회는 많은 위기를 넘어왔습니다. 그 위기 한 복판에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사도 신조>, <니케야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가 채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기독교회의 고백서 입니다. 오는 5월에 이른바 <다빈치 코드>가 극장가에 올려진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기독교 신앙고백을 흔들기 위한 또 하나의 광풍일 수 있습니다만, 잘 이겨내리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고백된 성경의 선언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보려고 하지 않고, 인간적 차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사래질을 치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 성경을 따라 우리들이 고백해야 할 신앙입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세상을 구원하신 메시야이십니다(막 3:21).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람으로서 세상을 향해 외쳤습니다. 한 때 그는 자신의 고백과 다른 나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래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순교할 때까지 예수님을 메시야로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첫 설교가 오늘 본문 말씀인데, 놀랍게도 구약 성경에서 예언되었던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심을 조목조목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모세와 사무엘 그리고 엘리야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통일성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전혀 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 사건(출 12:1-51), 홍해 길에서의 놋뱀 사건(민 21:4-9), 이사야의 많은 예언들(사 11:1-5, 53:1-12, 61:1-4)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목자이십니다(시 23:1-6).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이십니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대답해야 할 최대의 문제입니다. 그 대답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비롯해서 성경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고(롬 1:1, 행 3:15, 약 1:1), 주님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특별한 말이었습니다. 삶을 지도하는 일 뿐 아니라, 살고 죽는 일을 책임지고 있는, 전권(全權)을 가진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저 없이 주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꿈과 미래를 주님께 맡겼습니다(시 23:1-6). 바울은 살고 죽는 것을 오직 주님을 위해서 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롬 14:7-8). 이런 사람들은 삶의 기쁨과 슬픔이 무엇인지 명료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고 있는지 여부로 판별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단순하게 삶을 살아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직 주인 되신 주님께 초점을 맞추며 사는 것이라고 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누구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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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17-24.
찬송  145장. 

부활절 아침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주님의 무덤을 찾았던 세 여인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주님은 살아나셨고,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말입니다. 시체에 뿌릴 향유를 가져갔던 여인들이 들은 것은 놀랍게도 부활 소식이었습니다. 그만큼 부활은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부활을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갈릴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듣게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갈릴리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갈릴리는 복음이 선포될 무대인 때문입니다(막 1:14-28)
부활한 주님을 만나게 될 자리가 갈릴리라는 천사의 말씀은, 갈릴리를 주목하게 합니다.  갈릴리는 유대 역사에서 한 번도 주목을 받은 곳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20:7에 처음 언급된 갈릴리는, 부지중 살인한 사람들이 보복을 피해 숨을 도피성으로 지정된 외딴 지역이었습니다. 출세와 성공한 사람들의 무대인 예루살렘과는 달리 무관심과 천시를 받는 변두리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복음 선포가 시작되었다는 것, 그런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복음이 필요한 곳은 바로 이런 갈릴리가 적합한 자리였다는 것입니다(사 61:1, 눅 4:16-19). 거기만이 복음을 듣고 싶어 하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갇힌 자와 눌린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기도의 소원이던 부자가 되면 될수록, 복음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역설인지 모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들을 지금도 찾으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릴리는 주님이 계시는 자리인 때문입니다(7절).
주님이 갈릴리로 가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여인들은 낯설게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예수님에게 어울리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잘난 사람들보다는 못난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셨고, 힘 센 사람들보다는 연약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신 때문입니다. 한 중국인 교회를 방문했을 때, 많은 교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제가 온다는 말을 듣고 하던 일을 멈추고 모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자신들을 찾아 준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곳에 있었던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겠다고 하면서도, 예루살렘에서 시간을 다 보냅니다. 여전히 갈릴리의 벳세다 광야나, 가버나움, 그리고 갈릴리 해변은 외면합니다. 지금 우리 주님께서 어디에 계실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들이 향할 곳은 갈릴리입니다(7절).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갈릴리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켄트 케이스가 쓴 [그래도]라는 책에서 많은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일명 <역설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10가지 역설은 마음을 감동 치게 했습니다. “사랑하라, 사람들이 이기적이라 해도. 착한 일을 하라, 사람들이 잊어버린다 해도. 정직하게 살라, 공격당할 수 있어도. 크게 생각하라, 실속이 없어도. 약한 자를 위해 싸우라, 힘센 자의 편에 서더라도. 도와주어라, 보따리를 내 놓으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신분 혹은 존재 때문입니다. 갈릴리는 무관심과 냉대를 받는 곳일 수 있습니다. 성공과는 먼 실패자들이 많고, 건강한 사람보다는 병든 자들이 있는 어두운 곳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내면은 갈릴리라고 해야 옳습니다. 애써 부인할 뿐입니다. 거기에 주님이 와 계십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연약하고 병든 사람이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지체 없이 찾아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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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788호(2006.4.9. 사순절 여섯째 주일).
시편  118:6-9.
찬송  145장.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환영나온 시민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흔들엇던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번 주는 매우 무거운 분위기가 예상됩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으로 내려가시는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6-7절).
겸손한 태도나 마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바보스러운 일처럼 생각되는 때문입니다. 매우 소극적인 사람으로 비춰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 아드님이시지만,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들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시되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자리까지 가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렇게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높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가장 천한 사람, 가장 실패한 사람,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가장 절망에 빠진 사람을 높여주고 세워주고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낮은 데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내려가지 않으시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선교사 한 분은 차림새뿐 만이 아니라, 생활태도까지 현지인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런 겸손함을 현지인들은 존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겸손의 길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복종하는 마음입니다(8a절).
우리 시대에서 가장 치욕적인 말은 복종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목사들 앞에서 존경할만한 권위를 가진 목사가 없다고 장탄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누구도 복종할 대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복종이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에 들고 안들고에 따라서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강아지 똥]을 쓴 권정생님을 1977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은 안동의 한 작은 교회당의 사찰이었습니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선생은 자신보다 무식한 전도사님에게 10여년간 무조건 복종하면서 교회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종하신 분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복종이 필요했습니다. 세계적인 스타가 된 아들이 보잘것 없는 어머니 앞에서 읖조립니다. 무슨 말씀이던지 오직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예,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반쪽의 모국을 찾은 에드 하인즈가 그런 사람입니다. 복종은 따르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8b절). 
우리들이 본받고 배워야 할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헤아리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은 예외 없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사고뭉치들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셨습니다. 죽도록 사랑하셨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가장 최후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사랑이란 바보스러울 수 있고, 헛된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은 포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단 한 분이 있으니,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묵묵히 실천에 옮긴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랑은 기적을 만듭니다. 영화 <아프리카의 여왕>에는 주정뱅이와 깐깐한 잔소리꾼이 등장합니다. 둘 다 고집불통인 이기적인 사람들이지만, 시련을 겪으면서 서로를 연민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마침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랑만이 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을 성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고난이 주제가 되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주님을 따라 걸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 목요일에는 세족식과 성찬식을, 성 금요일에는 어둠의 예배나 가상칠언(架上七言)을 묵상하기에 적당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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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5:9-13.
찬송  72장.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바꾸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약속을 바꾼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뀌는 것은 언약의 내용이 아니라, 그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돌이나 육비에 새긴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긴 약속이라는 점입니다. 누구도 잊거나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약속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창 17:1-14).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불변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 증표로 할례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도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출 3:10). 이렇듯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약속은 적어도 둘 이상의 사람 사이에서 맺어집니다. 그리고 약속은 쌍방이 성실하게 지킬 때 보존되고 효력을 발휘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항상 신실하신 분이라고 증거합니다(신 7:9, 사 49:7, 호 11:12).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을 어길지라도 그 약속을 파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승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깨트리는 것은 언제나 인간입니다(32절).
약속을 깨트리는 사람들의 심리는 대체로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약속을 잘 알면서도 유혹에 빠져서 다른 쪽으로 빠지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입니다. 교활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키지 않을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진실한 체 가장 한다고 합니다. 거짓말쟁이와 진실한 사람을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허풍을 잘 떠는 사람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건망증이 있다면, 약속을 지킬 수 없습니다. 다른 일에 분주해서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린다면 이것은 비극중의 비극입니다. 우리들 신앙생활에서 이런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자신과의 약속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홀히 하는 것은 씻을 수 없는 비극입니다. 그것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인지 모릅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실천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새긴 약속을 맺으셨습니다(33절).
약속은 문서로 날인해서 하거나, 아니면 돌비에 새겨두기도 합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런 약속을 합니다. 옛날에는 <경계비>를 세워, 나라와 나라의 국경을 정했습니다. 모세와는 돌비에 새긴 약속(십계명)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변명할 수 없도록 언약을 갱신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새긴 약속입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도록, 기억하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판에 새겨진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고백했습니다(고후 5:17). 그들 자신의 힘이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용서받은 죄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전혀 그 죄악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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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2:1-5.
찬송  414장.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삶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사는 길과 죽는 길이 있다면,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바보스런 질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는 길을 택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옛날이나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유대 광야에 있던 사람들에게나 과학문명의 한 복판에 있는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죽음 한 복판에서도 언제나 살 길은 있습니다(14절).
비관적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인간은 죽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눈은 달라야 합니다. 사는 길을 향해서 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겉으로 볼 땐 하는 일마다 무덤을 파는 것 같습니다. 병을 만들고, 몸을 약하게 만듭니다. 문제를 만들고 고생을 사서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큰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눈앞의 작은 고통과 시련을 참고 견뎌야 했습니다만, 실제는 전혀 달랐습니다. 애굽 노예생활 때의 길들여진 복종과 수치가 더 편하게 여겨졌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미래가 불안하고 두렵기까지 했고, 작은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을 불 뱀에 물려죽도록 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는 죽어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죽는 사람들, 애곡하는 사람들이 났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탄원합니다. 그래서 만들어 세워놓은 것이 장대위에 걸린 놋뱀입니다. 불뱀에 물려서 죽어 가는 사람이 바라보기만 하면 살게 되는 놋뱀을 세운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사는 길입니다(14-15절).
예수님은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모세가 세워두었던 장대에 달린 놋뱀의 실체로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가치가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어린 양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그림자가 되는 것도 구약의 역할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생들이 항상 주목해야 할 삶의 지표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회를 십자가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십자가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지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시는 가장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방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은 감싸지 못할 죄인도,  사랑하지 못할 인생도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며, 구원의 확신을 더해 주는 가장 귀한 은총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에서 사는 길로 인도합니다(16절).
사람들은 저마다 최선의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우리들의 최선이란게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았다는 사람도, 회한과 부끄러움의 삶을 살 뿐입니다. 그것은 시지푸스가 받는 벌처럼 끝없는 헛수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은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는 사랑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마련입니다. 다미안은 이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따르기 위해서 기꺼히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이 십자가를 따라 살려고, 이 조선땅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 있지 않고, 지금도 우리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어제는 청계천 고서점 몇 집을 뒤져서 책 2권를 샀습니다. 하나는 [성경 인물-지리 대사전]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문학 비평용어 사전]입니다. 목사에게 [성경인물 지리사전]은 [성구 사전] 다음으로 요긴한 책이지요. 반에 반도 안 되는 값으로 찾던 책을 살 때는 무슨 횡재라도 한듯 가슴이 뜁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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