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9:14-20.
찬송  391장.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기독자는 십자가를 가장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이라고 썼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수치와 형벌이며, 이방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지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문답처럼 말씀합니다.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어찌 보면 무엇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때문에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 역시 그랬습니다. 히브리인인 것이 자랑스러웠고, 아브라함의 씨인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고후 11:22).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바리새인 랍비였고, 율법을 따라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유대교에 열심인 사람(행 22:3-5)이었습니다. 적어도 유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어쩌면 달나라에 갈 여비를 마련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들, 든든한 일터를 자랑하는 사람들, 자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자랑거리들은 나름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이 됩니다. 열심히 일할 희망과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자랑할만한 그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랑스럽게 살아야 헛된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새롭게 정했다고 소개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고(23절)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하였습니다(23절). 십자가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 한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덧칠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화려한 교회 안에 십자가는 걸려 있지만, 여전히 십자가는 수치요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진정으로 십자가를 사랑하고 있었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고후 11:23-33).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기 때문입니다(빌 3:5-8). 십자가는 그의 전부였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우리들 신앙의 현 주소는 십자가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들 죄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을 허물고 하나 되게 하신(엡 2:11-22) 하나님의 사랑이며 능력입니다. 이 십자가보다 더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갈 6:14).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요?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건강과 부귀와 영화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도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입술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게 하는 일입니다. 일본에서 유학중인 조선족 학생에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한 중국인 장로님은 2, 30리 떨어진 14개 교회를 돌보셨는데, 눈물이 마를 날이 없어 보였습니다. 장로님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몸과 마음으로 힘껏 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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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6:43-48. 
찬송  363장. 

지난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의 덕목은 회개와 금식, 기도와 봉사와 같은 영적전투를 수행하는 것들입니다. 사순절의 첫 과제는 시험받으시는 예수님을 주목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시험을 유혹(temptation)이라고 번역했는데, 사탄의 목표는 주님을 넘어트리는 유혹이었습니다. 시험은 뉘게나 있고 피할 수 없습니다. 

시험은 꼭 필요한 삶의 과정입니다(13절).
삶의 단계마다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학이나 직장에 취직하는 지적 능력만을 확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체력도 있고, 정신적 안정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역을 앓고, 이별의 아픔을 잘 감당하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 성숙함도 확인하게 됩니다. 이렇듯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험들을 치러야 합니다. 이런 수많은 시험을 치는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그 사람이 짊어져야 할 인생의 짐을 당당하게 지고 살수 있을까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아브라함도 시험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험이 그것이었습니다(창12:1-9). 모세(출3:1-4:31)와 여호수아(민13:1-14:10), 한나(삼상1:2-2:11)와 다윗(삼상16:1-31:13), 베드로(막8:29)와 바울(행9) 등 모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은 자격 시험에 통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험을 이기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마 4:1-11).
유독 시험을 잘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빗겨가려는 사람이나, 외면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을 말합니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골칫거리를 앞에 두고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내내 문제없는 세상을 찾아서 뒷길로만 다닙니다. 문제를 정면으로 대할 때, 의외로 문제가 잘 풀리거나 전혀 새로운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맞서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주셨습니다. 사탄의 눈을 똑바로 보았고, 그 사탄의 말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목조목 따졌습니다. 우리들이 따라하기에는 힘겨운 게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시험 앞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마4:4).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마4:6),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4:7)고 말입니다. 하나님으로 이기는 비결을 알고 계셨습니다. 

시험을 이길 힘을 구해야 합니다(마6:13).
신앙생활에서 시험을 피할 수 없다면, 방법은 시험에 당당하게 맞서는 것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불같은 시험이나(벧전 4:12), 덧없는 욕망의 시험들(요일 2:16)과 겨룰 수 있습니까? 너무 허약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 그리고 다윗 같은 신앙의 위인들도 종종 시험에 쓰러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할 것을 가르쳤습니다(마 6:13, 26:41). 시험을 이길 힘은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밖으로부터 시험을 이길 힘이 공급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힘의 원천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사 45:24). 하나님만이 우리를 모든 시험에서 이길 수 있게 하시고, 공급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항상 이 믿음을 굳게 붙잡고 있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셨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시 18:2). 시험은 고통과 아픔이 따르지만,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더욱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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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6:4-8.
찬송  87장.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변화 산에서 변모하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는 수요일부터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어느 때 보다도 우리 영의 눈을 가리고 있는 눈가리개를 벗어 던져야 합니다. 맑고 밝은 눈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제대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수건을 써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출 34:29-35).
하나님을 대면했던 모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 자신의 힘으로 당당하게 하나님을 마주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출 19:7-25). 그래서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휘장이 지성소를 가려야 했습니다(출 26:31-35, 40:1-16). 구약에는 이런 수건과 휘장 등 상징적인 교육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필요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지와 오해, 예수님에 대한 불신앙 때문에 수건이 필요했습니다(13절)고 말씀합니다. 율법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까 해서 수건을 쓰게 했다는 것입니다. 거리의 여자가 아니라 정숙한 여인임을 말할 때, 남자에게 속해 있다는 의미로 여자는 수건을 써야 했습니다(고전 11:2-16).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수건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16절).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준비되어 있던 휘장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순간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눅 23:44-46). 그래서 사도는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16절) 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었습니다(17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앞에 가리거나 감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 이름을 의지할 때, 참 자유가 생기며 자유인이 되기 때문입니다(요 8:31-32). 예수님은 우리들 인생의 전부이시며 모든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더 이상 의문에 사로잡힌 답답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율법의 휘장을 치고 있습니다. 율법의 그림자가 아니라,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인협동설(Synergism)을 여전히 붙들고 있습니다. 더 이상 수건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수건을 벗어던져야 합니다(3:18-4:2).
우리가 가진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적인 경험이나 느낌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땅이 흔들리고 세상이 불길에 휩싸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1:24-25).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때문입니다(사 55:9-11).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롬 10:17), 그 믿음대로 살지 않는다면 헛된 일입니다(약 2:15-17). 지금 우리들이 벗어던져야 할 수건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더 이상 예배 중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설교자가 큰 영상으로 사람들의 눈을 독차지 해 버렸습니다. 눈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어찌하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인간이 중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설교도, 기도도, 그리고 찬송까지도 말입니다. 수건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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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5:4-10. 
찬송  256장.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 3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의 꿈이나 희망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꿈꾸는 대로 살게 됩니다(히11:1-16).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는 그 사람의 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주어진 삶의 조건이 불리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꿈이 있다면, 얼마든지 훌륭한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위대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까? 오늘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세워지고 2년이 되었을 때, 미국 시카고에 있는 한 루터교회가 하나님의 꿈을 바라보고 응답했습니다. 그래서 옥수동교회가 새 성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간직했던 이름도 모르는 미국의 성도들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이곳에서 600명 이상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지금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고 있습니다. 천하보다도 더 소중한 생명들이 하나님의 꿈을 따라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일이란, 택한 자들로 찬송하는 것입니다(19-21절).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원대한 꿈을 바라보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메마른 사막에 강을 내어 모든 생명들로 마시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네게 복을 주리라”(창12:2)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온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시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이것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큰 소리로 노래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당신도 사랑하십니다.”라고.  

하나님의 새 일에 동참하는 것이 가장 값진 삶입니다(22-25절).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은 멀리 떨어져 있거나 높이 있어서 우리들과는 상관없는 그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행하고 계심을 간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만나게 해 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만났던 하나님을 얘기하는 일이고, 우리들이 믿고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일입니다. 이미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낯선 사람들에게 보다는 낯익은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우리의 고백을 증명해야 하는 때문입니다. 감동 감화를 주는 삶이 뒷받침되는 하나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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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4:6-9.
찬송  268장.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하심을 배웁니다.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담긴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고침 받은 문둥병자는 엄한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은혜 받은 그가 해야 할 일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믿는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고후5:17).
본문의 주인공이 된 문둥병자는 뜻 모를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문둥병자처럼 자신의 삶을 이해할 것입니다. 과연 내가 더 많은 고통 받아야 할 사람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뿐이라고 말씀합니다(롬 3:10, 히 9:27). 마땅히 죽어야 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다시 살게 되었다면, 이것은 분명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라는(고후 5:17) 바울의 고백은 이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자가 그 비참한 굴레에서 자유케 된 것이 은혜라면, 우리들 인생에게 죄와 죽음에서 자유 하는 일이야말로 이 보다 더 큰 은혜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은혜 아래 사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한 순간도 이 은혜 아래 살고 있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은혜 받은 문둥병자가 한 일을 살펴봅시다(45절).
문둥병자는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하였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구한 것 입니다. 그것이 그가 행한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서러운 굴레에서 자유를 되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제사장에게 보이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일만 할 뿐 함구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님의 명령과는 너무 다르게 큰 소리로 세상에 외쳤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동네로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자였던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을 더 널리 증거하였다는 말입니다. 은혜 받은 문둥병자가 행한 것은 잘한 일입니까? 아니면 잘못한 일입니까? 주님의 함구령을 깨트렸다는 것은 잘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받은 은혜를 큰 소리로 고백했다는 것은 잘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함구령과 고백이라는 사이에서 고백을 택한 사람입니다. 

받은 은혜를 고백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루터교 지도자를 본회퍼라고 말하는데,  그는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가르친 스승입니다. 값싼 은혜란 싸구려 상품 같은 것으로 싸구려 죄의 용서, 싸구려 위로, 싸구려 성만찬이라고 했습니다. 회개 없이도 용서하는 설교, 교리를 배우지 않고도 받는 세례, 죄의 고백 없는 성찬참여,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라고 했습니다. 값비싼 은혜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심, 생명을 요구하는 믿음, 하나님의 아들을 주심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합당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옳을 것입니다. 미국의 영웅 <하인즈 워드>는 어머니께 받은 은혜를 입으로 말할 뿐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겸손과 헌신을 가르쳐 주신 어머니를 끊임없이 떠올리고 행동하였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올바른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아래 살고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면,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고, 은혜의 주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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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2:17-22.
찬송  252장.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이 있고, 저마다 해야 할 삶의 과제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울 사도는 그것을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꿈은 다르고, 하는 일은 달라도, 복음 전하는 일은 모든 기독자에게 지워진 거룩한 임무라는 말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이며, 왜? 그리고 어떻게 전해야 하겠습니까? 

복음이란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말합니다(요 1:29).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는 구약에서 수도 없이 언급되었고,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죄와 죽음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와 긍휼의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문에 아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 때문에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겨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의 목표를 확정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는 일일 뿐 아니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입니다(16절).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 안에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 안에도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붙 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자신을 죄와 죽음에서 살려냈다고 믿는 사람만이 깨닫는 감격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밖에 없습니다(19절).
모든 사람은 죄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할 때 동의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 아래 살고 있다는 데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 현대인들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롬 6:23)입니다. 누구든 자기 죄 때문에 멸망할 것입니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디어간다는 현실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라고 명령했지만, 우상에게도 서슴없이 엎드려 절합니다. 2월 12일 오후 2시 청와대 숙정문에서 무당굿판을 벌인다고 합니다. 나라의 액땜을 하겠다며 무당을 내세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끌어들인 배경도 비슷했습니다. 추수의 신 바알을 섬긴 까닭이 그랬습니다. 죄에 대해서 민감해야 합니다. 죄 가운데 살고 있고, 죄인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절망할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은 최상의 기쁜 소식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은 죄의 가공할 위력에서 인생을 구하는 단 하나의 길인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에서 인생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24) 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20-23절). 
복음을 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그 복음 때문에 구원을 받은 사실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가장 올바른 응답이며, 자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갖 변신을 다했다고 고백합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할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어떤 처지 형편에서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딤후4:2) 합니다. 입으로 전도하고, 섬김으로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삶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가족을 구원할 수 없고, 친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향기 나는 삶에 있다는(마5:16) 말입니다. 성도의 생활이 복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기를 힘써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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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1718호(2006.1.29. 주현절 후 넷째 주일).
시편  99:6-9.
찬송  239장. 

하나님의 일꾼들 중에는 선지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입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려 주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선지자들을 찾았고,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도 생겨났습니다.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참 선지자를  구별하는 것은 물론, 선지자의 임무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18절).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모두가 신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며, 왜 직접 심판하지 않으실까? 등등이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할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훨씬 더 잘 알아듣고 순종할 것 같다고 말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는 것보다는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그러나 불완전한 대답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답은, 하나님은 당신의 일꾼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상상을 불허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입이 된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들은 말씀들을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위임한 말만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을 뿐,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하나님의 대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리는 전달자입니다(19절).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생이 구원받기에 필요한 모든 말씀들이 있습니다(요 20:31). 성경은 세례자 요한을 마지막 선지자라고 부릅니다(마 11:7-19).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고 권위가 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유혹이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런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3-29장은 거짓 선지자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 보다는 사람의 뜻을 앞세우고, 사람의 비위를 만족시키는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추구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과 사람들 중간에 서서 항상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너무 다른 둘 사이를 중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20-22절). 
우리가 교회를 찾아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선지자들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현존하시기 때문에,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절대로 우리들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함이나 높이 올라감이 아닙니다.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쁨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를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서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크리스천이라고 규정합니다(롬 14:7-8). 주님을 위한 삶이란 되갚을 수 없는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선지자들이 전해 준 하나님의 뜻이란 이렇듯 세상을 어둠에서 빛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회복해 내는 일이었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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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6:7-10.
찬송  252장.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을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은,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낚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을 낚는 일이란 무슨 말이며, 어떻게 사람을 낚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낚는 일이란 사람의 마음을 붙잡는 일입니다.
저는 낚시 광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낚시질을 즐기셨던 아버지를 보며 자랐습니다. 붕어들이 좋아하는 미끼는 지렁이였습니다. 빈 깡통에 지렁이를 가득 잡아 낚시 도구를 걸머지고 떠나시면 저녁 어둠이 깔릴 때쯤이면 돌아오십니다. 언제나 고깃바구니는 붕어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붕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낚싯대를 드리우기 전에 많은 깻묵이나 된장 덩어리를 던져 넣습니다. 그리고 한 참 후에 낚싯줄을 던집니다. 붕어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붕어를 낚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고서는 사람을 낚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낚으려는 사람들은 항상 이 점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입니다. 

사람을 낚기 위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호수에서 사는 붕어는 별식을 먹고 싶어 합니다. 구수한 된장이나 깻묵이 그런 별식입니다. 천지를 진동하는 강한 향기를 풍기는 별식 앞에서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별식을 먹고 사라진 이웃들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는데도 불구하고 달려갈 수밖에 없도록 말입니다. 사람들에게도 그런 별식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를 채워주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떡을 주셨고, 병든 사람에게는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위로해 주셨고,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얼마 전에 제게 편지를 쓴 세종대학의 한 교수님은 초등학교 5학년에 교회에서 주는 사탕을 얻어먹으려고 교회 갔다가 붙들리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 붙잡기 위해서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주목해야 하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낚는 진정한 방법은 복음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계속해서 떡을 주는 등 도움을 줄 수는 없을 겁니다. 돕는 것은 한계가 있고 또 그것만이 참된 도움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을 진정으로 돕는 일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진정으로 사람을 낚는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복음의 씨를 심어 주는 일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사람을 구하는 일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또 어떤 처지에 있든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는 일이 복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잘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받은 사람이 어떤 교회에 나오느냐 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삶에 지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을 듣게 하는 일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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