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예수님이 구주이시다.”라는 말씀입니다. 매우 단순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살아갈 모든 힘의 원천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장 큰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반응은 찬성과 반대라는 형식을 통해서 새 역사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엔 희망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 주간 데살로니가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구세주 이시다는 말씀이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은 거짓이고 저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복음증거에 일생을 던졌습니다. 물론 복음이 당장 밥먹여 주도 일이 아니고, 출세가도를 달리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씨가 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생명이라는 씨가 자라났습니다. 그 복음의 씨가 자라날 때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힘을 얻었고,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복음 때문에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복음의 한 복판에 예수님이 서 계시는 때문입니다. 그 분은 인생의 모든 어두운 문제들을 희망으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바탕을 능력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만이 누리는 은총은 희망이었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엔 강한 거부반응도 있었습니다.
복음은 환영과 거절이라는 상반되는 반응을 받아야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그리고 베뢰아에서도 그랬습니다. 이 때문에 복음의 역동성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의 생명력이 입증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 중심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복음은 거부당했습니다.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은 유대교도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율법적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인간의 가치있는 행동으로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용서와 사랑의 화신인 십자가 신앙을 비웃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롬1:16)를 하나님의 수치로 생각했고,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없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에게 나타났음을 말합니다. 세상과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인생들이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은 아무 차별없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죄의 값을 치렀다고 말씀합니다. 이 복음 때문에 모든 사람은 죄와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 때문에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이 복음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도록 일깨워주었습니다. 인간을 위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게 되었고, 서로 섬기는 삶이 값지고 행복한 모습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각양각색의 구원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는 것은 복음이 잠들어 있다는 반증입니다. 복음이 당장 먹을 것과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복음이 선포되는 한 반드시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 희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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