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342장 

우리를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 곧 신자라고 부릅니다. 누군가를 믿고, 무엇인가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이래로 기독교의 믿음은 시련을 겪어왔습니다. 자주 혼란스러운 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의 신앙을 설명하는 일에 가장 권위자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신앙을 진술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곤 합니다. 믿음에 관한한 그에게서 배울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어떻게 믿은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은 독특했습니다. 그가 믿은 것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성경에 그 내용이 여과 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것(창12:2) 입니다. 땅의 티끌처럼 많은 자손으로(창13:16), 하늘의 별처럼(창15:5)주시겠다는 것   입니다. 아내와 조카 단 세 혈육만으로 25년을 살면서도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100살이 다된 늙은이가 꿈꾸기에는 불가능한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에게서는 가능하다는 확신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믿은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상대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몸과 마음을 맡겼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어떤 이득과 손해가 되는 지를 면밀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축복의 근원>으로 세우셨을 때(창12:1-4) 그는 두렵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대한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의인 10명 사면론>으로 흥정했습니다(창18:16-33). 참 놀라운 거래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를 포기했던 것과는 정반대입니다(욘1:1-3). 요나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알았지만, 그 계획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마치 <주기도>처럼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기를 바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가졌던 최초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믿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살에 낳은 독자입니다. 그 아이는 하늘의 별무리처럼 늘어나게 될 근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독자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창22:1-19). 그러나  아브라함은 묵묵히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계획과는 상반되는 명령처럼 들릴 수 있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의 근거가 되는 의심이 밀려들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인격에 맡긴 이상 철저하게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자기 경험과 이해와 지혜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이 믿음을 의(義)로 간주하신 것(창15:6)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의로운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 역시 아브라함에게서 계승된 것이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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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1월 20일까지는 성령강림절 후 주일들로, 신앙의 성장과 실천적 생활에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 첫 걸음은 복과 저주의 길 앞에서 현명한 선택을 요구하는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복으로 가는 길과 저주의 길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복과 저주의 삶이란 무엇이며, 그 기준은 어떤 것입니까? 피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복된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을 자세히 설명하는 책”이란 뜻을 가진 신명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중요성을 십이분 강조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고,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녀에게 가르칠 것을 재삼재사 강조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말씀에 복과 저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씀을 따르면 복이되고, 말씀을 거역하면 저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가운데 존재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를 복되다고 했습니다(시 1:2).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친밀해야 합니다. 누구든, 집안에서든, 길에 행할 때든, 누웠을 때든, 일어날 때든, 말씀을 가르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가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은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입니다.
삶의 질과, 웰빙 시대를 얘기합니다. 줄기 세포의 비약적인 연구는 죽지 않을 미래를  약속하고 있지만, 어쩌면 또 다른 저주가 예상되는 것 같습니다. 죽고 사는 순환을 거부 한다면 암세포처럼 더 큰 절망을 가져올 때문입니다. 최상의 웰빙시대라고 말할 수 있던 에덴동산에서 말씀을 거역할 때, 저주의 삶이 시작되었고(창3:1-7), 미래가 보장되었던  재산과 명예도 말씀의 명령을 거역할 때, 아간과 그 가족들은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 갈 수 밖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이란 하나님께 반항과 불순종이며, 우상으로 대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를 우상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근거입니다. 인간 중심, 물신 숭배, 과학만능주의가 지배하는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하나님이 성을 지키지 않으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허사” 라고(시127:1) 고백합니다. 바벨탑을 쌓던 시대를 닮아 가는 시대상을 주목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실천하며 사는 것이 최상의 복입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최근 20년 동안 불교 인구는 3배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불교는 종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 중심적 입니다. 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기초에서 출발하는 때문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인간에 초점을 두는 신앙에 매력을 두는 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합니다. 위기 입니다. 푸른 목장에 수많은 양떼를 봅니다. 그들 앞에는 먹고, 뛰놀고, 쉬기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목장주인에게 달려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게 비극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될 수 없는 분명한 이유를 대변합니다. 신명기의 저자 모세는 우리들 인류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며,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하며 사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감사할 것과 회개할 것의 근거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시119:105)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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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시며 그러나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주일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르는 말씀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할 일이 많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일단 행운아입니다. 인생이란 일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가치 있는 일을 한다면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 기독교인들은 가치 있는 일, 곧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고(출20:9) 하셨습니다. 그런데 닷새만 일하자고 하는데,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각각 자기의 짐을지”라고 (갈6:5)말씀했습니다.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저마다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거짓과 불의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수입이 좋아도 그런 일은 하나님께서 복 주실 일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또한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을 하더라도 정당한 방법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늘 아버지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많고 많은 일 중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한 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여러 기능들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기능, 가르치는 기능, 섬기는 기능, 복음을 전하는 기능, 친교 하는 기능 등 입니다. 이런 교회의 기능을 활발하게 하도록 돕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회를 위해 일할 일꾼들을 찾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과, 예배를 섬기는 봉사자들, 성가대원과 관리자들이 필요합니다. 주방에서 수고할 이가 필요하고, 새로운 신자를 안내하는 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 말고도 하나님의 일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 해야 할 일들 입니다. 바로 모든 사람이 매일 출근하는 직장에서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이 무엇이든 하나님께 맡은 일로 믿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 생활이 그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모든 기독인에게 선포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인 사람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한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3가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첫째는 세례를 주는 일입니다. 둘째는 제자를 삼는 일입니다. 셋째는 성도로 살도록 돌보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교회를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주 이심을 고백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제자는 선생님을 따라 다니며 배우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선생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법과 생활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서 건강한 성도로 살아가도록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한 사람이 여러분 곁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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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마침 유대인의 오순절(첫 추수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기에 오순절이라고도 부르지만, 이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우리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말하는 특별 용어입니다. 성령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 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꿈과 사랑과 믿음을 가지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십니다.
요엘 선지자는 성령이 오실 것과, 성령께서 하실 일을 예언하였는데, 사도행전2:1-4은 이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루살렘 시온 산 곁에 위치한 마가의 다락방에는 120명 쯤 되는 제자들이 기도하고 있었고(행1:15), 오순절에 그들 가운데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했는데, 성령께서 그 사람들에게 방언을 하게 했다고 말씀하고 (행2:4)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고, 전혀 낯선 방언을 말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놀랍고 놀라운 일입니다. 성령님이란 누구 십니까? 성경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천지창조 때부터 일하신 하나님이셨고(창1:2),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갖게 해 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맡아주신 하나님이십니다(요14:16-26). 성령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의 마음을 감동 감화시키시며 인도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꿈을 꾸게 하십니다.
요엘 선지자가 소개한 성령님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꿈을 꾸도록 해 주시는 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령님은 늙은이와 젊은 이, 심지어 남종과 여종들에게까지 꿈을 꾸도록 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입니다(28-29절). 꿈이 무엇입니까? 미래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꿈은 칠흑처럼 캄캄한 밤에 샛별처럼 피어나는 것 입니다. 절망과 슬픔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꿈을 꿔야 합니다. 어쩌면 그런 형편이 꿈꾸기에 적합할지 모릅니다. 요엘 선지자는 성령께서 오실 때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이 세상이 달려가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이나 천길 낭떠러지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처지에서 꿈을 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은 이런 소망을 우리에게 갖게 해 주십니다. 시궁창에서 푸른 하늘을 향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도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에 붙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자주 언급하였습니다. 어리석은 것을 깨우쳐 주셨고, 연약함을 도우실 뿐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가르쳐주셨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신 분이라고 말입니다(롬 8:2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려면 성령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옛 사람을 다 벗어던지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마귀의 유혹과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들 마음에 찾아오셔서 속삭이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섬기며 살라고. 성령님은 죄와 타협하지 말고 싸워 이기라고 용기를 주시기도 하고, 불의의 세력에 쓰러졌을 때 일으켜 세우시고 위로와 격려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도록 권고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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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가정의 의미, 어버이의 자리가 새삼 위대함을 생각할 기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중보자 예수님>께서 우릴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내용입니다. 다시금 관계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를 하나님께 이어주는 유일하신 중보자이십니다.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한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조차, 즐겁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젊은 남녀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이런 분들이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 결손 가정의 아동을 초청해서 목욕을 시켜주고 따뜻한 밥을 먹여주고 함께 잠을 자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어려운 이웃에 대해서 얘기를 듣기가 무섭게 팔을 벗고 돕는 손길을 베푸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새벽 기도회 시간에 낡은 옷을 입은 신학생 얘기를 했는데, 한 주간도 지나기 전에 양복 한 벌 값을 내밀던 한 고 이금순 권사님이 기억나고, 퇴학당할 처지의 신학생의 등록금을 몇 차례 이름 없이 내주셨던 고 김성일 장로님이 기억납니다.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은 기도로 승화되었습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더욱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실 때, 사랑의 가슴으로 벅차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배고프고 병든 사람들, 외롭고 지친 사람들, 자신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질긴 굴레에 묶여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역시 한계가 있으셨습니다. 시간적으로도 모자랐고, 공간적으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보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켜주심을 빌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의 실천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탁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쉬지 않아야 할 것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사랑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중보의 기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천지가 개벽하는 그런 몽상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해서는 끝이 없습니다만, 단 한 사람, 자기 자신만 바꾸면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된 것을 늘 확인하셨습니다. 꼭 같은 생각이나 행동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목표를 향해서 함께 손을 잡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서로 이해하는 마음이고, 서로의 입장을 배려해 주는 마음입니다. <관중과 포숙아>의 얘기를 다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전혀 엉뚱한 친구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때 우정은 계속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지금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한 마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큰마음이며 넓은 마음입니다. 그 때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가능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중보의 기도로 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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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8:13-19.
찬송  404장.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면서 야외 예배로 드리는 특별한 주일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인 어린이들을 섬길 새로운 마음을 가지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삶을 고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고난이라면 한번 살아볼만한 인생이 아닙니까? 아름다운 고난의 삶을 만나봅시다. 

선행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21세기 현대인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선행이라는 말도 그런 말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서 선하다고 할 때의 의미는 “제구실을 하다”는 뜻입니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자녀를 잘 키운 부모, 자녀 역시 잘 자란 것이 선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먹을 것을 주고, 길을 묻는 나그네에게 친절히 길을 안내하는 것이 제 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제 구실하는 것 때문에 고난 받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거짓과 불의를 말하는 일은 손해를 봐야하고, 술주정꾼의 행패를 막으려 했다간 낭패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구실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사람답게 사는 바른 삶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일이나, 이웃을 이웃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힘쓰는 고난은, 아무리 어려워도 짊어져야 할 제 구실하는 삶이며, 아름다운 삶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름다운 고난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제 구실을 하다가 멈춰서 버립니다. 오랫동안 소년소녀 가장을 돕다가 멈춰 섰습니다. 불우 청소년에게 장학금을 주다가 멈춰섰습니다. 왜일까요? 헛된 일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보람과 기쁨이 사라지고, 무거운 짐 덩어리처럼 여겨진 때문일 것입니다. 제 구실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때,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까닭은 예수님은 일생동안 십자가의 길만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분명 최악의 고난이지만, 인간을 구하는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문제도 깨트리고 평화를 심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아름다운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가장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고난당하고 있는 현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 구실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정의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복음을 위해 고난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벧전 4:12-13)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세상에 증거하기 때문에 겪게 되는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가까운 이웃과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진실한  삶으로 전할 때 훨씬 효과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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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이란 “예수님이 구주이시다.”라는 말씀입니다. 매우 단순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살아갈 모든 힘의 원천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장 큰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반응은 찬성과 반대라는 형식을 통해서 새 역사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엔 희망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 주간 데살로니가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구세주 이시다는 말씀이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은 거짓이고 저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복음증거에 일생을 던졌습니다. 물론 복음이 당장 밥먹여 주도 일이 아니고, 출세가도를 달리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씨가 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생명이라는 씨가 자라났습니다. 그 복음의 씨가 자라날 때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힘을 얻었고,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복음 때문에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복음의 한 복판에 예수님이 서 계시는 때문입니다. 그 분은 인생의 모든 어두운 문제들을 희망으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바탕을 능력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만이 누리는 은총은 희망이었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엔 강한 거부반응도 있었습니다.
복음은 환영과 거절이라는 상반되는 반응을 받아야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그리고 베뢰아에서도 그랬습니다. 이 때문에 복음의 역동성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의 생명력이 입증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 중심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복음은 거부당했습니다.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은 유대교도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율법적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인간의 가치있는 행동으로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용서와 사랑의 화신인 십자가 신앙을 비웃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롬1:16)를 하나님의 수치로 생각했고,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없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에게 나타났음을 말합니다. 세상과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인생들이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은 아무 차별없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죄의 값을 치렀다고 말씀합니다. 이 복음 때문에 모든 사람은 죄와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 때문에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이 복음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도록 일깨워주었습니다. 인간을 위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게 되었고, 서로 섬기는 삶이 값지고 행복한 모습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각양각색의 구원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는 것은 복음이 잠들어 있다는 반증입니다. 복음이 당장 먹을 것과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복음이 선포되는 한 반드시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 희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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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서는 상징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인간을 양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상징어는 영적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구일 뿐, 그 자체를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운명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삶의 질(HDI)은 관계 지수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과 혹은 어떤 일과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사람이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였습니다. 그는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의 관계로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인격적인데 반해, <나와 그것>은 비인격적이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인격적이어야 할 <나와 너>가, 비인격적인 <나와 그것>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나와 너>는 서로 존중받는 인격체인 때문에 대화를 매개로 조정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무시하는 비인격적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가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양면성은 삶의 축복이지 결코 재앙이 아닙니다. <나와 너>의 인격적 대화가 계속될 때 말입니다. 그러나 <나와 그것>으로 전락한다면, 모두가 비극으로 끝날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나와 너>의 인격적 대화가 있습니다.
목자와 양은 주종의 관계로 보이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닙니다. 양들에게 제 이름을 불러주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서가고 뒤따르며 삶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둘 사이에 다른 낯선 이를 끼워 넣지 않습니다. 신뢰를 깨트리는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둘 사이의 대화에 진지할 뿐, 다른 사람의 견해로 헷갈리게 하지 않습니다. 목자와 양은 모습과 역할은 달라도 운명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위해서 일하고 살아가고 섬기면서 존재합니다. 커피숍에서 마주앉은 젊은 한 쌍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오직 서로에게만 충실하고 있습니다. 잘 듣고, 쳐다보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에게 무엇이 도움이 될까만을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목자 예수님은 오직 양들인 우리만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선한 목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목자들에 대해서 혹평합니다. 그들은 절도요, 강도며, 그리고 삯군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게서가 아니라 이런 강도들을 만난 후 실망하고 떠나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무리 고매한 선생이라고 해도 그는 인생의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인자하고 능력있는 목사님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른바 사람을 보지말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말의 뜻입니다. 물론 진실하고 선한 목자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을 전망입니다. 그 분이 보통 사람보다는 출중한 신앙심과 생활을 보였을 수 있습니다만, 유일한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수많은 여성 신자들에게는 확신보다는 혼동을 안겨 주었다고 말하는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 우리와 삶과 죽음을 함께 나눌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 예수님만 따라 인생길을 즐겁고 자랑스럽게 걸어 가야하겠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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