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독불장군처럼 살 수 없고,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협력하는 삶을 만들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로 묘사된 주님과 우리들은 이런 관계의 철학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독자적이면서 함께 나눌 기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상호 존중과 신뢰가 관계의 출발점 입니다. 대화의 철학자로 알려진 마틴 부버는 [너와 나]라는 책으로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인간관계는 인격적인데 바탕을 두고 있음을 눈뜨게 해 주었습니다. 인간은 서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만,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 줄 때 기막힌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과 그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서는 주종의 관계 이외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들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인간에게 엄청난 기회와 자유를 허락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을 노예처럼 부리는 게 아니라, 인격적인 대화의 상대로 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그림이 오늘 본문입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 어찌 보면 대등한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 인간을 대하는 기본자세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뿐 아니라, 우리들의 얘기도 귀 기울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처럼 존중과 신뢰로 출발하는, 부부들과 가족들 그리고 민족과 세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할 과제가 있습니다. 가지의 역할은 나무를 의지하는 것 뿐 입니다. 열매가 맺히는 자리는 가지입니다. 언뜻 보아서 가지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습니다만, 사실은 가지 자신만이 짊어질 일이 아닙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가 아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잎 하나 꽃 하나를 제 힘만으로는 피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분명 열매를 맺는 대단한 일을 하지만, 언제나 그 가지가 나무에 연결되어 있을 때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가지라고 한다면, 열매 맺는 일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나무둥치에 얼마나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볼 것입니다. 가지와 나무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서로 붙들고 있을 때, 건강한 나무가 되고 마침내 기대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진리를 잊어버릴 때가 많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입니다. 목적만 달성하면 수단이나 방법은 개의치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원칙도 양심도 내다 버릴 수 있다는 풍조도 만만치 않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거짓부리로 열매를 매달아둘 수 있습니다만, 곧 본색이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나무와 좋은 관계를 갖는 가지가 되기를 힘쓴다면, 열매 맺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 생전에 열매를 못 거두면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자식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열매를 거둘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열매가 아니라 떨어지지 않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현상을 보이지 않는 근원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혜롭지 못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언제나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조건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만일 ~~하면>이라는 구조를 주목해야 합니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다음이 어떤 화려한 것이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매가 최종의 목적이겠지만, 그 열매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루터는 기독교인의 삶을 정의하기를, 자신이 받은 세례를 매일 매일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호 긋기>를 장려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 받은 것을 확인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신앙으로 사는 일입니다. 우리의 존재양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말하고, 예수님께서 사랑하듯 이웃을 대합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주인으로 좌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제 주변에는 참 아름다운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한 손을 펴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의 땀을 쏟습니다. 주님의 이름만이 나타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열매가 없는 삶이라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주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슬퍼하십시오. 나무둥치이신 주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가 그 분 안에 살기만 하면 됩니다. ---------------------------------------------------------------------------------------- 2003년 5월 18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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