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52.

시편 시 72:11-14.

찬송 36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파란만장한 이력을 가졌다.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나, 몇 주가 지나서 동독 교회에 목사가 필요하다는 청을 받고 동독으로 넘어가 동독교회를 섬긴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가정에서 자랐다. 1990년 동서독 장벽이 무너져 통일이 되자, 그녀는 1991년 헐무트 콜 내각에서 여성 청소년부 장관을 거쳐, 연방 하원의원에 8차례 당선되었고, 2005-2021년까지 4차례 독일 총리를 역임하였다. 그가 남긴 명언은 빨리 가고 싶다면 혼자 가도 된다. 그러나 멀리 가고 싶다면 함께 가야 한다.” 이다. 빨리 가고 싶어서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휘청거린다.

                박성완, 24. 7. 6.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 주일로, 사도서간 고후 12:1-10을 본문으로 환상과 계시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른바 신비체험은 모든 기독교인의 로망일 수 있습니다. 신비한 음성을 듣고 놀라운 기적 한 복판에 서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럽고 확고한 신앙의 반석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한 경험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초대 기독교회는 신비체험자들로 넘쳐나 혼란스러웠습니다(1-4).

50-60년대는 용문산에서, 70-80년대는 한얼산을 중심으로 신비체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방언을 받았다는 평신도들의 기도 소리가 교회당을 흔들었습니다. 정숙한 예배를 강조하던 장로교회에서는 이런 현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허용했지만 교회당에서는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방언기도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박수를 치며 복음가를 부르는 모습이 빈번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막으려 했지만 터진 봇물과 같았습니다. 한얼산 골짜기는 기도소리로 캄캄한 밤을 하얗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제3자처럼 담담히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신비체험은 모든 사람을 능가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까지 올라가게 되었는데, 몸과 함께 갔는지 영만이 갔는지는 모르겠다 했습니다. 낙원과 같은 곳인데,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말을 들었습니다.

 

신비체험은 교만병에 들게 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서 가시를 주셨습니다(5-8).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만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에 교만해졌습니다. 그것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거나, 성공했어라 거나,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고 남들 앞에서 자랑할 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때를 위기로 생각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때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교만병에 들게 되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인류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영웅호걸들이 자신이 최고의 지혜와 능력을 가졌다고 호언장담할 때 몰락의 길로 떨어진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였던 선배 한 분이 있었는데, 세계적인 학자라고 추켜세우자, 천국에 갔다 왔다는 책을 낸 것입니다. 바울은 교만병으로 세 가시로 고통당한다. 고백하였는데, 안질과 치질 그리고 간질이었다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교만병의 멍에를 평생 짊어지고 살면서 그 멍에를 자랑해야 했습니다(9-10).

교만병의 폐해는 심각하여서, 사도 바울은 이를 가시에 비유하였습니다. 한번 박히면 살을 뚫고 깊이깊이 빠져들어 가는 가시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간청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너는 이미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이 자신에게 머물러 계시도록, 더욱 더 자신의 약점들(가시들)을 열심히 자랑했고,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모욕과 빈곤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아야 했다 고백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을 받았다면, 더 건강하고 부유하고 온갖 축복이 넘쳐야 하는데, 오히려 모욕과 박해를 당했다면 말입니다. 교만병을 극복하는 방법은 교만병이 가져다주는 가시들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질과 치질 그리고 간질을 반길 사람은 없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445.

시편 시 71:13-15.

찬송 38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보물이라고 한다. 그의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똑바로 서서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명언 가운데 이런 말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 밑바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아직 밑바닥이 아니다.”

밑바닥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고 있다. 지금부터는 오르는 일만 남아 있다고 말이다. 당신의 삶이 밑바닥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제 남겨두었던 힘을 모아 볼 때가 되었다. 박성완, 24. 6. 29.

 

2.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의 구약성경 애가 3:22-33을 본문으로 하나님께서 시련을 눈 감으시는 까닭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 믿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을 도발한 독일은 악마의 역할을 하였지만, 이는 하나님의 묵인하여 이루어졌다 생각합니다. 악마도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은 고난의 기원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연구해 왔습니다(27-30).

고난의 문제를 가장 방대하게 집대성한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들은 사성제 팔정도라는 핵심 진리를 가지고 있는데, 세상의 모든 문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압축할 수 있는데, 고통의 원인과 집착 그리고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진리를 닦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8가지 바른 행동을 통해 살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항한 피조물 인간의 불순종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을 관리하도록 맡기시면서, 한가지만을 당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말입니다. 예나 제나 사람들은 순종의 의미를 무시하곤 합니다. 순종의 가치를 소홀이 여깁니다. 순종이란 자기 의지와 능력을 다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대기업의 총수라고 해도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순종보다 더 나은 제사가 없다 말씀했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 가장 중요한 태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22-26).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시련과 역경을 견디지 못하고 절망하며 쓰러져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시련을 당연한 삶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잘 견뎌내야 합니다. 제가 시험공부를 할 때, 유명 대학에 입학한 친구가 찾아와 어깨를 두드리며, “힘내, 조금만 더 참아!” 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낙심하고 있을 때, 소위 잘 나가는 친구목사가 찾아와 이 고비만 넘기면 돼,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네.”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시련과 역경을 이겨냈다 했습니다. 시련을 시련으로 아는 사람은, 시련과 역경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은총을 자신의 능력으로 치환/置換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시는 때문입니다.

시련과 역경이란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놓여 있는 통과 의례일 뿐입니다(31-33).

통과의례(通過儀禮, rite of passa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중요한 과정을 말합니다. 곧 출생, 성인, 결혼, 죽음을 말하는데, 사회적 지위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는 시점을 의미하는데, 동양에서는 관혼상제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을 갖추는 통과의례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르면서도 심각한 위기로써 통과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게 바로 시련과 역경이라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감당하기 힘든 시련과 역경이 있는데, 이것들을 잘 통과하는 사람은 남은 생애를 훌륭하게 짊어지고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는 이런 시련과 역경을 마주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다고 믿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 전거(典據 proof text)입니다. “마냥 내버려 두시지도 않고, 벌하시다가도 불쌍히 여기시며, 미워서 괴롭히거나 벌하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3. 캐나다에 사는 막내딸과 손주들이 여름학기를 제 곁에서 지낼 예정입니다. 멀리 떨어져 지내던 가족을 만나는 것은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있을 때 잘 해!”라는 노랫말이 생각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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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438.

시편 시 69:35-36.

찬송 46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16대 황제로 그의 <명상록>은 지금도 인기 있는 자기 계발서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박해한 네로 황제 다음으로 기독교를 박해하였고, 순교자 저스틴 유스티누스를 참수한 황제로 유명합니다. 이런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명상록에는 이런 글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우선 시작해야 한다. 손이 일에 착수했다는 것으로써 일의 반은 이룬 셈이다.”

훗날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스승 유니우스 리쿠티구스와 순교자 유스티누스와의 대화록을 전해주고 있는데, 이생과 내생에 대한 이처럼 확고한 차이를 한 분에 볼 수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박성완, 24. 6. 22.

 

2.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주일의 복음서 막 4:35-41을 본문으로 기적을 경험케 하는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살면서 크고 작은 기적들을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우리의 삶에는 기적의 연속이라는 것이 맞는 말씀 같습니다. 우리는 기적 속에 살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풍랑은 주님과 함께 할 때에도 예외가 없었습니다(35-37).

가끔 대표기도를 하는 분들의 기도 내용 가운데는 고통과 아픔이 없는 삶을 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모든 문제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의 삶에 계시지 않은 때문처럼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우리들과 항상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들 인생을 송두리째 뒤 흔드는 풍랑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들이 타고 있는 배에 함께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인생 그 전 과정에서 주님은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첫째는 인생 자체는 풍랑 속을 지나가는 과정이라는 것과 둘째는 주님과 함께 풍랑을 헤쳐 나간다는 확고한 신앙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그래서 인생의 풍랑은 생각보다는 거칠 거나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현주소는 항상 주님을 잊고 사는데 있었습니다(38).

저는 젊은 시절, 그리고 목회자로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부흥사들의 믿음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구원에 대한 넘치는 자신감에서 주눅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든 주 삼창 순서가 되었을 때는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조용히 명상도 하고 기도하라고 아담한 기도실을 준비해 주면서 학생들에게 권했는데, 사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기도실은 교수 사택과 가장 가까이 있었는데, 자정이 되면 기도실 창문을 열고 주삼창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잠을 잘 수 없다고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주삼창하는 학생들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인 학장께서 제 방에 오셔서 그 문제를 꺼내셨습니다. 주 삼창을 가르치느냐? 그게 무슨 뜻으로 하는 것이냐? . 참 난처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답답하니까 주님을 부르는 것이거나, 아니면 주님이나 자신을 잠에서 깨우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신 후,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습니다(39-41).

신앙생활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생각합니다. 언제 어디서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이 암시하듯, 주님은 주님의 일을 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인생을 사랑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위로와 용서 뿐 아니라, 멀고 아득한 미래를 바라보게 하시고, 무엇보다도 당신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한 순간도 주님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여기시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수행해야 할 신앙생활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적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아닌 날이 하루도 없음을 제대로 깨우칠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기적은 믿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431.

시편 시 69:16-18.

찬송 22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100달러 지폐의 얼굴은 벤자민 프랭클린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그는 과학에도 공헌을 하였는데, 피뢰침과 다초점 안경, 민간형 비행기, 뇌파 측정기 등으로, 그가 남긴 말 중에는 지금도 익혀두면 좋을 경구가 있다. “안내할 줄 아는 사람은 바라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드리면 100% 비가 온다고 한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는 때문이다.’

만일 부모나 선생 등 지도자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최대의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참는 일 곧 인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사랑은 인내할 때 빛이 난다 가르치고, 안중근은 옥중 유묵을 남겼는데, 一勤天下無難事/일근천하무난사와 百忍堂中有泰和/백인당유태화가 그것이다. 부지런한 사람에겐 어려움이 없고, 백번 참으면 집안에 평화가 있다는 뜻이다.

박성완, 24. 6. 15.

 

2. 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의 사도서간문 고후 5:1-10을 본문으로 몸의 부활과 천국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제 스스로도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것은 너무 궁금해 하지 말라고 가르쳐왔습니다만, 주변에서 엉터리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부득불 취급하는 것들 중 하나가 부활과 천국에 관한 궁금증입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죽으면 곧 바로 천국에 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10, 23:43).

이런 생각을 하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오른 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란 청에, 주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엄격하게 따져 말하면 맞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죽어 부활할 때까지는 찰나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계산할 수 없는 죽음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전반적인 내용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부활할 때까지 잠 속에 있다가, 부활 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대에서 예수님의 증언으로 생명의 부활로 나타날 터인데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 후에 부활의 삶을 출발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정리한 신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신학이 이런 복잡한 성경의 말씀들을 교통 정리해 준다 생각하면 됩니다.

 

성경은 영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1-5).

헬라 철학자들은 인간은 영과 육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신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은 살아서 활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원론은 육은 악하고 썩고 변한다고 생각했으며, 영은 그 반대라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어리석게 만드는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육과 영은 모두 다 거룩하고 존귀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불순종으로 타락한 인간은 많은 문제들이 생겨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폐기처분해야 할 정도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새롭게 고쳐주실 수 있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거듭남의 은총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이원론이란 거짓 사상을 퍼트려서 문제를 풀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생각이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재창조하실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때문입니다.

 

천국생활은 전혀 새로운 질서와 가치 그리고 목표를 가지고 있는 세계입니다(6-9).

아주 오래 전에 한 신학대학장이 공동생활을 제안하면서 7가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저는 예배를 인도할 목사로 일해 달라 부탁하였습니다. 그분은 신바람이 나서 그 천국 공동체를 설명해 나갔습니다. 각기 자신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함께 모여 살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것이 천국생활의 모형을 꿈꾼다 했습니다. 하루의 수고를 끝낸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아주 너른 방에서 그 날의 마지막 활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루의 수고를 같이 나눈다 했습니다. 그리고 위로와 용기 그리고 새로운 대안을 나누고 진심으로 어깨를 도닥여주는 시간을 가진 후에 예배를 드립니다. 모든 삶이 감사와 찬양 그리고 영광이 주된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여전히 문제가 생기겠지만, 언제든 새롭게 고쳐갈 수 있다 했습니다. 사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424.

시편 시 68:30-32.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변의 시인들을 보면, 어딘가 조용하고 단아하며 속이 깊은 그런 모습이다.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생전에 단 두 편의 시를 남긴 분으로, 자신의 실연사건과 부친의 성격 때문에 평생을 은둔 시인으로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란 시는 항상 내 가슴에 남아, 내 삶의 의미와 정체성을 지키게 해 주었다. 우리의 삶을 자랑스럽게 내놓을 게 없어보여도, 그래도 결코 헛되지 않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만일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 수 있다면, 저의 삶은 헛되지 않아요. 제가 만일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주고, 고통 하나를 식혀줄 수 있다면, 그리고 또한 힘이 다해가는 로빈새 한 마리를 그 둥지에 다시 올려 줄 수만 있어도, 저의 삶은 진정 헛되지 않아요.’                                        이봉국 역, 영원한 세계의 명시, p.35. 박성완, 24. 6. 7.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로, 구약 창 3:8-15을 본문으로 왜 그랬을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1974년에 나온 노래 제목이 왜 그랬을까?”였습니다. 머리로는 뻔히 알면서도 삶에서는 전혀 딴 판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책망하는 노래입니다.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 왜 그랬을까? 대중가수 펄시스터스가 부른 노래였습니다.

 

인간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8-9).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천국은 에덴동산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오해하곤 합니다. 너무 심심하고 재미없는 곳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은 온갖 좋은 것들로 가득 찬 곳임에 분명합니다. 문제는 그 좋은 것들과 좋은 삶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석양 산들바람이 불 때,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거닐고 계셨다 했습니다. 그러자 아담과 하와는 울창한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거주하는 삶의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거처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는 만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담과 하와가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으셨던 것입니다.

 

알몸이 되어 부끄러움을 깨닫고 하나님을 피했던 것입니다(10-11).

인간이 최초로 깨달은 것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198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달간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에 스위스 제네바에는 레만 호수에 들렸습니다. 무려 145m나 뿜는 분수가 있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장면이어서 호기심을 가졌는데, 어떤 분이 그쪽으로 잘못 가면 나체 해수욕장이 나오니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나체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며 이를 지지하는 히피족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말씀과는 완전히 정반대 이론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쪽은 자연스러움으로, 다른 쪽은 부끄러움으로 말입니다. 자연스러움으로 출발한 것이 맞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 죄가 들어오고, 그때 자연스러움이 부끄러움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해야 할 낙원에 죄가 들어왔고 그래서 부끄러움의 동산으로 뒤바뀐 것입니다. 불순종은 기쁨을 슬픔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12-15).

우리들의 선조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자녀가 부모에게 불순종을 하는 것은 그리 큰 잘못이 아닐 수 있습니다. 늘 하는 짓이니 말입니다. 무릎 꿇고 간절히 빌면 용서받을 수 있고, 더 큰 사랑을 받을 기회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바보짓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들은 핑계대기를 했습니다. 아담은 그의 아내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핑계를 댔던 것입니다. 핑계대기란 무엇입니까? 핑계란 자기 자신이 지은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떠다 넘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 잘못은 없어! 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매우 악한 행위입니다. 죄를 인정하는 것보다는 핑계를 대는 게 쉽다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쉬운 길을 걷고 이들이 많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더라면, 그래도 하나님께서 벌을 주셨을까?

 

3. 저의 항암치료가 3차례의 연기를 거쳐 오는 12일 가능하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전공의들의 심정도 이해를 할 수 있으나, 환자들이 정치싸움에 희생양이 되는 것은 잘못 같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417.

시편 시 68:11-13.

찬송 23, 474, 47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이 사람들의 소원을 즐겨 들으사, 황금의 보화를 주실지라도, 또 허영에 찬 사람들을, 빛나는 명예로 장식해 주실지라도, 인간이란 얻은바 그것으로는 만족함을 도대체 모르는구나, 탐욕은 얻은 것을 다 삼키곤, 입만을 더 크게 벌리는 것, 제 아무리 큰 은혜를 받을지라도 탐욕의 갈증은 더 해만 가니. <중략>, 보에시우스, 철학의 위안, pp.68-69.

 

2. 성령강림절 둘째 주일의 복음서 막 2:21-22을 본문으로 옛 것과 새 것의 조화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고 계십니까? 자신에게 실망을 하거나 때로는 무능하고 무책임하다고 절망하신 일은 없습니까? 아니면 자신에게 용기를 주거나, 자신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평가를 자신할 수 있습니까?

 

관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세상이 되었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숙제는 없습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철학자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대화 철학을 수립한 <나와 너>의 저자 마르틴 부버와, <만년에 대하여/ On Late Style>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부버가 유대인인데 반해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으로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나 학자로써도 좋은 관계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인 사이드가 매우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하였습니다. 자신이 10살 때인 1948년에 유엔이 이스라엘을 국가로써 승인을 하게 되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는데, 팔레스타인들은 집과 토지를 모두 이스라엘인에게 빼앗겼는데, 자신의 집을 점령한 사람이 마틴 부버였다는 것입니다. 대화의 철학을 개척한 부버에게 일말의 기대를 했으나, 결과는 다른 점령자들처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강조한 부버 역시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공자와 맹자 같은 이들과 주님은 달랐습니다(21-22절 상).

삼강오륜은 동양 철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인간관계를 말하고 있지만, 시대적 배경이라는 변수가 매복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지킬 도리,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지킬 도리, 남편과 아내가 지킬 도리를 삼강이라고 하고, 부모와 자녀,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젊은이, 친구사이의 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께서 하신 관계와 차별화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옛 것과 새 것의 관계, 옛 정신과 새 정신의 충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기운다면,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다면, 엄청난 사건이 터질 것입니다. 그 까닭은 시간과 세대의 변화를 무시한 때문입니다. 시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야 했습니다. 일회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을 가르치는 성경은 한번 뿐인 인생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불교가 가르치는 윤회적 시간과는 구별해야 하겠습니다.

 

가장 좋은 관계는 조화의 관계입니다(22절 하, 35:1-10).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국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들 중에서, 땅에서 만났던 부부사이나 부모와 자녀 사이가 천국에서 민망해지고 난처할 수 있다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만남도 있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는 장로들의 유전인 수혼법 때문이었습니다(23:23-33). 그래서 주님은 천국에서는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다 말씀하셨는데, 천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질서를 따르는 평화의 세계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성경은 천국에서의 삶을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은 것이라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을 따르는 게 맞다 생각합니다(35:1-10). 천국을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어휘는 평화인데, 그것은 옛 것과 새 것의 조화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천국까지 이어질 관계입니다. 천국생활을 가르치고 연습하고 실천해야 하지만, 성령님이 도우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3. 저는 오늘 주성농인교회(담임 우슬초목사님)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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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410.

시편 시 68:11-13.

찬송 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에 대학 동기동창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50년 전 친구들이라 옛 이야기 소재를 준비했는데, 저의 스크랩북을 들춘 것입니다. 거기엔 1973. 9. 19 <신과대학 예배 순서> 였습니다. 사회는 동기생인 양재서군이, 설교는 제가, 축도는 김찬국학장이었습니다. 성경본문은 시 121:1-8, 설교제목은 너를 지키시는 자였습니다. 저는 이 시편의 저자를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으로 설정했고,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에 돌아만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폐허로 무너진 절망밖에 없었다고 그 불쌍한 시인을 주목했습니다. 그때 절망의 돌무더기 위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올려다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 서로다.”

 

2. 오늘은 성 삼위일체 주일로 행 2:14, 22-36을 본문으로 설교의 모범이 된 베드로의 설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교회력의 유익한 점 하나는 매년 적어도 한 차례는 성삼위일체를 설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위격은 성부, 성자, 성령 세 가지(persona/ 인격)이며 서로 구별되면서도 본질은 같다(ὁμοούσιος)는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삼위일체에서의 위격은 인격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삼위일체의 위격은 세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느님의 상대적인 상호관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H2O가 물과 얼음 그리고 수증기라는 식의 양태론이 위험한 주장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령 현상을 구약에서 예언된 것임을 말씀합니다(14, 15-21).

유대인의 추수절인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일단의 무리들이 성령을 받았다며, 방언을 말하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낯선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인 것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언급이 필요했고, 베드로는 이런 성령 현상에 대해서 설교의 첫 주제로 삼았습니다. 우리 교회의 설교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주제나 내용일 때 사람들의 귀는 닫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요엘 3:1-5을 인용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성령에 관한 말씀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활동은 다윗의 말씀으로 증거합니다(22-28).

첫 단락에서는 유다 동포와 예루살렘 시민에게 한 설교라고 한다면, 둘째 단락은 이스라엘 동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예수라는 분에 대한 오해와 곡해를 불식시키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시편에서 증거하였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16:8-11).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 하나님을 가장 먼저 소개하셨고, 다음으로는 성자 예수님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죄와 죽음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말입니다. 이 예수님은 다윗도 찬양하였다고 말입니다.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에 관한 말씀도 성경에서 근거를 찾았습니다(29-36).

마지막 단락에서는 형제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역사에 얼마나 깊이 개입하고 계시는가를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을 대비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죽어 묻혔는데, 지금까지도 그의 무덤은 이 세상에 남아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이 보내신 예수를 죽음의 세계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썩지 않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시편을 해석하기를,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고, 당신의 보좌 오른편에 앉히시고 원수를 굴복시킬 때까지 그리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 구세주가 되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베드로의 설교에는 성령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자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삼위일체 되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합시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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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403.

시편 시 66:16-17.

찬송 30, 169, 2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글은 글쓴이의 삶의 배경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것입니다. 보에시우스의 다음 시를 감상해 보시지요.

어떠한 운명에도 의연한 사람은, 거만한 운명을 발밑에 깔고, 행운과 불운을 올바르게 쳐다보며, 그 얼굴 태연하게 보존할 수 있네. 태풍 휘몰아치는 바다의 광포도, 큰 입으로 화염을 뿜어서 흑연/黑煙에 뒤덮인 활화의 베시우스 산도, 드높이 솟은 저 탑 때려치는 천둥 번개와 벼락도, 그 마음 혼란시킬 수는 없네. 가련한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잘 것 없이 횡포스럽기만 한 폭군들을 무서워 떤단 말이냐보에시우스, 정의채 역, 철학의 위안, pp.30-31.

 

2. 성령강림절 주일의 구약 성경 에스겔 37:1-14을 본문으로 마른 뼈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인간의 삶의 현장을 직관하려고 합니다. 까닭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우리의 힘겹고 절망스러운 삶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절망 한 복판으로 에스겔 선지자를 인도하셨습니다(1-3).

설교에 앞서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던지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망가트리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밖으로부터 던져진 실패와 질병 등입니까?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무관심, 무의미, 무감정, 무기력과 같은 것입니까? 밖에서 오는 외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무기력과 무의미라는 내적 문제가 우리 인간을 서서히 절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들을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묘지가 있었는데 소홀한 관리로, 무덤에서 뼈들이 솟아날 것 같이 황량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몽골의 정신적 힘이었던 무당들의 사당 주변에는 동물들의 뼈들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땅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인도하신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그것은 절망과 죽음의 땅을 생명으로 바꾸시겠다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절망은 희망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4-10).

마른 뼈들아, 야훼의 말을 들으라.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그러자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고, 뼈에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에스겔에게 명하시기를 너 사람아,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그러자 모든 시체들이 제 발로 일어서서 큰 무리를 이루었다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은 우리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자 생령이 된 것처럼, 절망과 죽음의 골짜기에 하나님의 숨, 곧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자 새로운 생명들로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른 뼈들에게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 죽어 백골이 되었던 뼈들에게서 힘줄이 돋고, 살이 붙고, 가죽이 씌워지고, 생기를 불어넣자 생명이 재탄생한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11-14).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마른 뼈들, 절망의 골자기를 뒹굴고 있던 뼈들은 하나님께서 뽑아 세우신 이스라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얼마든지 마른 뼈들로 절망 한 복판에서 뒹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 앞에는 마른 뼈들이 뒹굴고 있고, 캄캄한 절망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 전부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새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옛날 에스겔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을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도 절망과 슬픔 그리고 무기력과 무의미를 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의미 있는 삶으로, 감격으로 가득 찬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시는 말씀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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