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17호.
시편 시 68:11-13.
찬송 23, 474, 47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이 사람들의 소원을 즐겨 들으사, 황금의 보화를 주실지라도, 또 허영에 찬 사람들을, 빛나는 명예로 장식해 주실지라도, 인간이란 얻은바 그것으로는 만족함을 도대체 모르는구나, 탐욕은 얻은 것을 다 삼키곤, 입만을 더 크게 벌리는 것, 제 아무리 큰 은혜를 받을지라도 탐욕의 갈증은 더 해만 가니. <중략>, 보에시우스, 철학의 위안, pp.68-69.
2. 성령강림절 둘째 주일의 복음서 막 2:21-22을 본문으로 “옛 것과 새 것의 조화”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고 계십니까? 자신에게 실망을 하거나 때로는 무능하고 무책임하다고 절망하신 일은 없습니까? 아니면 자신에게 용기를 주거나, 자신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평가를 자신할 수 있습니까?
관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세상이 되었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숙제는 없습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철학자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대화 철학을 수립한 <나와 너>의 저자 마르틴 부버와, <만년에 대하여/ On Late Style>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부버가 유대인인데 반해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으로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나 학자로써도 좋은 관계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인 사이드가 매우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하였습니다. 자신이 10살 때인 1948년에 유엔이 이스라엘을 국가로써 승인을 하게 되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는데, 팔레스타인들은 집과 토지를 모두 이스라엘인에게 빼앗겼는데, 자신의 집을 점령한 사람이 마틴 부버였다는 것입니다. 대화의 철학을 개척한 부버에게 일말의 기대를 했으나, 결과는 다른 점령자들처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강조한 부버 역시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공자와 맹자 같은 이들과 주님은 달랐습니다(21-22절 상).
삼강오륜은 동양 철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인간관계를 말하고 있지만, 시대적 배경이라는 변수가 매복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지킬 도리,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지킬 도리, 남편과 아내가 지킬 도리를 삼강이라고 하고, 부모와 자녀,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젊은이, 친구사이의 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께서 하신 관계와 차별화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옛 것과 새 것의 관계, 옛 정신과 새 정신의 충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기운다면,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다면, 엄청난 사건이 터질 것입니다. 그 까닭은 시간과 세대의 변화를 무시한 때문입니다. 시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야 했습니다. 일회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을 가르치는 성경은 한번 뿐인 인생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불교가 가르치는 윤회적 시간과는 구별해야 하겠습니다.
가장 좋은 관계는 조화의 관계입니다(22절 하, 사 35:1-10).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국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들 중에서, 땅에서 만났던 부부사이나 부모와 자녀 사이가 천국에서 민망해지고 난처할 수 있다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만남도 있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는 장로들의 유전인 수혼법 때문이었습니다(마 23:23-33). 그래서 주님은 천국에서는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다 말씀하셨는데, 천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질서를 따르는 평화의 세계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성경은 천국에서의 삶을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은 것이라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을 따르는 게 맞다 생각합니다(사 35:1-10). 천국을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어휘는 평화인데, 그것은 옛 것과 새 것의 조화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천국까지 이어질 관계입니다. 천국생활을 가르치고 연습하고 실천해야 하지만, 성령님이 도우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3. 저는 오늘 주성농인교회(담임 우슬초목사님)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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