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158.

시편 시 18:44-46.

찬송 29, 93, 46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도 안 변했다는 애교스런 거짓말이 잘 통하지 않을 때가 있지요? 이젠 예전보다 더 뜸하게 찾아뵙게 되는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을 만나 뵐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만나 뵐 때마다 표 나게 세월을 느낄 수가 있지요. 이번 추석에 고향에 다녀오신 분들 실감하셨을 텐데요. 부모님의 인생도 이젠 점점 저물어 가는구나 하는 마음에, 좀 서글퍼지시지는 않으셨는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915일 방송>

 

2. 성령강림절후 열여섯째 주일의 구약성경 창 50:15-21을 본문으로 인간이 하는 일,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세상엔 죄악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인간은 죄를 먹고 마시며 죄짓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입니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을 승리하게 하신 힘은, 형제들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15-16).

야곱은 두 명의 부인과 두 명의 첩에게서 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야곱이 처음부터 사랑한 둘째 부인 라헬에게서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습니다. 문제는 요셉을 지나치게 사랑한 야곱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에게서 미움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광야에서 물 없는 우물에 빠트려 목이 타서 죽게 만들려 했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를 죽이려 했던 비정한 세상이었습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요셉의 삶이 시작됐습니다. 애급으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모함으로 옥에 갇히지만, 꿈 쟁이의 이력을 살려내고, 마침내 애급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고, 그 꿈을 실현키 위해서 총리대신에 오르게 됩니다. 총리로써 요셉은 칠년 풍년과 칠년 가뭄에 대책을 세워, 주변 나라들에게 곡식을 팔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왕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복수심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랑과 용서의 삶을 눈뜨게 하셨습니다(17-19).

인간의 타락 이래로, 이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貫盈)하게 되었습니다. 죄악을 먹고 마시고 죄악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낙원도 인간의 발길이 닿기만 하면 파괴와 죽음의 땅으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변함없이 사랑과 용서로 세상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는 요셉의 마음도 하나님께서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선 아버지 야곱을 통해서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형들이 악의로 한 일이건, 마음을 잘못 먹고 한 일이건, 못할 짓을 한 것을 용서해 주어라.”고 말입니다. 이 아버지의 유언은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차갑고 굳었던 요셉의 마음을 봄눈 녹듯 녹여주었습니다. 용서라는 성경언어는 기억치 않는다. 지워 없애버린다.”는 뜻입니다. 잘못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잘못한 인간을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죄를 지을 것이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사랑으로 용서하십니다(20-21).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캄캄한 죄악 세상에서 절망하며 살 수 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경을 가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이번 9월을 마을 청소당번으로 일하고 있는데, 일반 쓰레기장에는 규정에 따라 충실하게 분리배출을 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음식물 쓰레기는 몇 사람에 의해서 엉망입니다. 단톡방에 호소를 하고 부탁을 드려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잘못을 해결하는데 매우 소극적일 뿐 아니라, 오히려 편을 들고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나에게 못된 짓을 꾸민 것은 형들이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악을 선용하시는 하나님, 죄인을 불러 하나님의 일꾼 삼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3. 오늘은 주성 농인교회(담임 우슬초목사님)에서 설교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151.

시편 시 18:23-25.

찬송 410, 41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디언의 기도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답니다. “당신의 지갑에 언제나 동전 몇 닢이 남아 있기를, 당신의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그리고 당신의 손엔 언제나 할 일이 주어지기를.” 비록 지갑속이 넉넉지는 못할지라도 오늘 아침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어디론가 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여러분 발 앞에 더 밝은 길이 여러분의 손에 더 멋진 일들이 놓이기를 기대합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99일 방송>

 

2. 성령강림절후 다섯째 주일의 사도서간문 롬 13:8-10을 본문으로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율법은 적극적 중립적 또는 소극적인 자세로 임할 수 있습니다만, 성경은 적극적인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서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그 핵심에는 사랑의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8).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한 계명만을 위해서도 무려 38가지의 세부사항을 다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계명들을 실천하려면 얼마나 많은 세부사항들을 지켜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사랑의 의무를 지키는 사람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깊이 새겨봐야 합니다. 사랑의 의무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슨 일을 하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이라는 바탕에서, 사랑하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행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제한하시는데, 가깝게는 부모와 형제자매를 비롯, 모든 이웃을 진심으로, 정성으로,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할 의무사항이라는 말씀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도우실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있는 곳에 참 기쁨과 희망이 있습니다(9).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오해하거나 곡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을 거짓 사랑, 허깨비 사랑이라고 규정합니다. 진실한 사랑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위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3:4-7에서 사랑을 정의하기를 긍정적 요소 7가지와 부정적 요소 8가지를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탐내지 말라는 세 가지 계명을 이웃사랑의 요약이라 소개하고 있지만, 모든 계명은 진실한 사랑으로 필요충분조건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진실한 사랑은, 잘 꾸민 앞모습 너머의 부끄러운 모습까지 감싸주는 사랑이며, 잘 훈련되고 숙달된 장점들 너머의 잊혀지고 숨겨진 모든 허물까지 덮어주는 사랑이며, 이 사랑은 무가치한 인간을 대신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이었습니다.

 

진실한 사랑의 궁극적 목표는 영원한 감사와 평화입니다(10).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불행한 이유는 거짓 사랑이 판을 치고 있는 때문입니다. 한 젊은이가 결혼을 앞두고 배우자 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결론은 참되고 진실한 사랑을 찾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찾았다고 믿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고 만 것입니다. 절망하고 좌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것은, 바로 그런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남아있는 과제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위험지수를 일찍 간파하고 피해서 수도사가 되거나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 이상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했습니다. 진실한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포기했으니 말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거짓을 진실로, 원망과 미움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바로 그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144.

시편 시 18:1-3.

찬송 51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일과 내 다음의 인생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 올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는데요. 삶을 대하는 티베트 사람들의 생각이 담긴 이 속담, 이 속담처럼 미래를 확실히 장담하는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오늘이 내 마지막 하루인 것처럼 오늘하루가 내 생애의 최고의 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선물처럼 주어진 오늘 하루, 기분 좋은 음악과 함께 행복하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93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 넷째 주일로, 16:21-28을 본문으로 모두가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다른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는 자기 십자가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를 성실하게 짊어질 의무가 있는데도, 어리석고 슬프게도 자기 십자가를 원망과 불평으로 짊어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만의 십자가를 짊어질 것을 예고하셨고, 실천하셨습니다(21-23).

흔히 하기도 듣기도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사는가? 그렇습니다. 매우 대답이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해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해답이란 누구든 저마다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우리들이 사는 이유라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소위 십자가 예고라는 형식을 통해서 세 번씩이나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은 친히 당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란 무엇을 말합니까? 삶의 의무이기도 하고 책임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죄와 죽음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 인류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것은 주님만이 질 수 있는 고유한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주님과 같은 십자가를 질 수도 없고 질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친 후에 자신의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지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최선의 활동임을 말씀하십니다(24-25).

하루는 어머니가 쌀뒤주를 긁고 계셨습니다. 쌀이 바닥이 난 것입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가 쌀이 떨어지면 어떡해?” 하자, “이건 네 에비와 에미가 할 걱정이니, 너는 네 걱정이나 하거라.” 핀잔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부모가 질 십자가를 대신 질 수도 없고, 지려해서도 안 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십자가(소명/召命)부터 충실하게 짊어져야 하는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밝히 말씀하고 있는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기본자세는 자기를 버리는 일로, 이는 자기 자신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란 구절이 나오는데, 전쟁에서 죽음을 각오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요행히 살고자 하면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의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들만이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 하십니다(26-28).

삶을 대하는 태도를 마치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출발점에서는 각오가 대단해서 그럴 수 있지만, 도중에 잃어버리곤 한다는 것입니다. 제게 신학을 배우고 실습을 했던 어떤 분이 이런 대표적인 실례가 될 것입니다. 어느 해 뜨거운 여름, 성경학교 교사 강습회를 끝내고 온통 땀으로 목욕하듯 파김치가 되어 힘들었을 때, 내일로 미루는 제게, “목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다 정리하고 가겠습니다.”는 말에 뿌듯하고 자랑스러워 그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랬던 분이 정작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엔, 자기 십자가를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더니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각오만으로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이겨내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을 찾고 계시며, 그런 사람에게 영광의 부활에 이르도록 도우시는 때문입니다.

 

3. 오늘은 제가 협동목사로 섬기는 왕십리루터교회가 창립 60돌을 맞는 날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137.

시편 시 16:5-8.

찬송 2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구두를 신은 자신 외에는 구두의 어느 부분이 발을 아프게 하는 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모양이 예쁜 신발이라고 해도, 내 발에 잘 맞고 편한 지는 직접 신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것처럼, 겉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나 자신만의 고민 걱정거리 하나쯤 갖고 계시겠지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속을 다 알 수 없지 않아요.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하고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828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 셋째주일로, 51:1-6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현존인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당신의 말씀으로 인식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당신의 뜻을 나타내셨고, 당신의 말씀으로 축복과 저주의 삶을 확정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인식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매우 보잘 것 없는 신앙인이었음을 말씀하십니다(1-3).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속담[과두시사(蝌蚪時事)]이 있습니다, 올챙잇적 일은 감추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출세한 사람은 과거의 자신의 초라했던 과거를 잘 아는 친구들을 피한다 합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 모두가 떠받드는 신앙의 조상이며, 소위 성공한 신앙인입니다만, 사실은 그 역시 매우 초라한 옛 시절이 있었습니다. 마치 성전의 화려한 돌들이 채석장에서 뒹굴던 때처럼, 깊이 감춰있던 캄캄한 동굴에 지내던 삶처럼 말입니다. 이렇듯 한 때는 부끄러운 삶을 살던 존재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자랑스럽게 그리고 위대하게 바꿔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이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이유입니다. 황무지를 에덴으로 만들고, 허허 벌판을 야훼의 동산으로 만들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하십니다(4-5).

신앙인으로써 극복해야 할 매우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중심에 반대되는 하나님 중심이라는 주제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세기 르네상스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의 거대한 격동의 시대를 불러왔습니다. 순기능을 말할 때 인간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자적 신앙, 근본주의 신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기능도 살필 수 있는데, 하나님 중심의 인간 본래의 삶이 약화되고 축소된 것이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은 이 두 주제 사이를 줄타기를 하듯 조심스럽게 통과하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위대함과 공로에 취해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재발견,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깨닫게 한 계기였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주목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말씀으로 자기 백성들과 함께 존재하고 계십니다(6).

우리 인간은 현혹되기 쉬운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가령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많은 보조 수단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최적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수단으로써 성화나 성상들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면, 모든 보조수단들은 잠잠해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신 때문입니다(1:1-3). 그런데 하나님의 현존인 말씀보다 성전과 성화 그리고 성상이 더 중요하게 그리고 우선적으로 취급되고 있다면, 이것은 엄청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 개혁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근거로, <이신득의의 신앙>(1:17)을 찾아냈고, “너희도 가려느냐?” 란 주님의 물음에,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6:68)라고 정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130.

시편 시 13:3-4.

찬송 405, 41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게 안 좋니?”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는 그래도 우리가 아직 여기에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리는 아직 여기 있지 않아.” 황폐해진 지구를 아버지와 아들이 여행하는 이야기를 담은, 코멕 메카시의 소설 [로드]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일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 같은 삶이라 해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직 살고 있다는 것, 삶은 오늘도 계속된다는 것, 그 말이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 새롭게 시작된 삶의 길을, 어제보다 더 행복하게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821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열두째 주일로 11:1-2, 13-15을 본문으로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 생각들만큼 말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식은 것도 아니고 더구나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는 더 뜨겁고 더 확실한 것이었습니다그러니 낙심하지도두려워 떨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1-2).

   실패를 맛보거나 건강 등의 이유로심각한 위기를 경험할 때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이웃이 세상을 떠나갈 때우리는 신앙의 혼란을 느끼곤 합니다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제가 8년째 매월 첫 주에 설교하는 농인 교회는 바울 사도처럼 자비량 목회를 하시는 훌륭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비록 작은 교회를 섬기시지만전국에 있는 농인교회 목사님들에게 존경을 받고 계시고, 필립핀과 멕시코의 농인교회를 위해서도 힘써 후원하고 계십니다. 지난 달 설교하러 강단으로 올라가는데 목사님이 서럽게 울고 계셨습니다. 서럽게 우시는 배경이 궁금했습니다. 장애인 교회들이 어린아이 같아서 걱정하신 것이었습니다목사님은  12년째 교회에서 사례를 받지 않고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의로운 걱정을 하신 겁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3-4).

   그렇다면 이처럼 힘들고 외로울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겨내십니까제게 이런 질문을 하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많은 분들이 남대문 시장의 장사꾼들에게 배우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방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런 얘기가 바울 사도를 통해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아합 왕과 이세벨이 통치하던 시절에, 그를 대항해서 싸웠던 신앙의 용사였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 850명과 기도 싸움을 해서 승리의 감격을 맛보았지만, 그 기쁨은 잠시 오히려 계속되는 죽음의 위협이 찾아왔습니다그때 엘리야는 승리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죽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그렇게 해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기도자들이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아무리 힘들어도 죽을 만큼 힘든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멈출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릴 지켜주시고 계십니다(13-15).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배워야 할 많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시라."는 주제입니다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방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아무튼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하나는 은혜의 사랑과 긍휼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그러니까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은혜와 긍휼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은혜라는 말은 “넘치고 넘치는 사랑이라는 뜻이고긍휼이란 “끝까지 참아주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요약하는 이 은혜와 긍휼을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해석합니다( 9:17,  1:9). 그러니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우리는 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되겠습니다

 

3. 오늘 저는 제가 협동목사로 있는 왕십리 루터교회에서 설교합니다그리고 어제 22일자 묵상자료를 잘못 배달한 것을 LA에 계신 최상준 교수님의 안부편지에서 알게 되었습니다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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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123.

시편 시 10:14-15.

찬송 49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모여서 크게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곁을 지나칠 때는, 발걸음이 조금 느려지곤 하지요. 무슨 일일까? 뭐가 저렇게 재미있을까? 어쩐지 그렇게 행복하게 웃는 이유를 알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전염성이 강한 감정이라는 뜻이겠지요? 행복한 사람 곁을 지나칠 때는 누구나 발걸음을 늦추고 싶어 하는 그 행복의 법칙, 기억해 둘만 하겠다 싶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811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열 한째 주일의 복음서 마 14:22-33을 본문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설교라는 낱말에 가장 가까운 성경원어는 선포라는 의미의 케리그마입니다. 그런데 이 선포라는 말 속에는 의미를 전하는 것과 함께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뜻이 있습니다. 듣는 것은 물론 행동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주님의 부재 시에 제자들에게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22-24).

하루의 수고를 마치신 주님은 제자들과 군중들을 쉼터로 돌려보내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몇 시간 사이에 배를 타고 쉬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나 시달리고 있었다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당시의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부재를 느낄 때 문제들은 심각하게 다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으로써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단하고 분석하는 태도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대부분은 주님과의 육적인 거리감을 중요시하는 경우입니다. 진정성도 없이 주님이나 교회생활을 하는 경우입니다. 아주 일부만이 주님과의 영적인 거리감을 중요시 하는 경우입니다. 교회가 멀든 가깝든 삶에서 주님의 뜻을 묵상하고 따르려고 합니다. 제자들의 경우는 단연코 전자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도 그렇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발견한 제자들은 주님 곁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25-30).

주님과의 육적인 거리감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거나 손을 내밀지 않으면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살아갑니다. 철부지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인들입니다. 주님을 유령으로 생각할 때는 망설였지만, 주님의 음성을 확인하자 반색을 하며 주님께로 달려가려고 하였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세상 물결로 눈을 돌리자 두려움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철저하게 육적인 거리감을 중요시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거리감이 영적 거리감을 집어삼킨 것입니다. 요즘 유튜브에서는 서 아무개 목사의 신유집회가 생중계되고 있는데, 참가자들은 황홀경에 빠져서 온 몸을 흔들며 광란의 춤을 춥니다. 가끔씩 TV에서 비춰주는 클럽의 장면과 똑 같습니다. 그들에게서 주님과의 영적인 거리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에게 냉담한 현실이 다가옵니다.

 

주님과의 참된 동행이란 믿음으로 주님과 영적 거리감을 유지하는 일입니다(31-35).

육적 거리감에 민감하였던 베드로는 주님께 큰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의심으로 가득한 신앙생활이었고, 깃털처럼 가벼운 믿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물결에 흔들리고 떠는 것보다는, 그의 내적인 신앙이 더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인생엔 하루도 빠짐없이 무서운 속도로 태풍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관통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치솟는 물가라는 태풍은 물론 유럽에 불고 있는 전쟁의 바람도 밀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주님과의 영적인 거리감을 느끼고 살아가는 일, 이른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매일 5만 가지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한복판에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일, 곧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삶에 실천하는, 주님과의 동행이 절실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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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116.

시편 시 9:10-12.

찬송 20, 98, 16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8월의 숲속에서는 귀를 기우리면, 나무 가지에서 새 잎이 돋는 소리, 풀이 자라는 소리, 또 나무가 수액을 빨아들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요. 그만큼 8월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는 달이라는 뜻이겠지요. 자연이 너무 강해서 상대적으로 우리가 조금 약해 보일 정도인데요. 이럴 땐 그냥 약간 비켜서서 놀란 눈으로, 짙은 자연을 바라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88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째 주일로 이사야 55:1-5을 본문으로 역설의 진리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구조나 상식적으로는 모순되는 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진리를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상식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 역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새롭게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가?(1).

하나님을 찾는 여러 유형의 인간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시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선택하는 경우입니다.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나 절간이나 두드려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효험을 봤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들을 낳으려고 절간에 갔다가 아들을 낳았다는 경우이고, 합격기원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합격한 경우도 그것이며, 어느 부흥회에 갔다가 고질 병을 고쳤다는 분도 해당됩니다. 그러나 소원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진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했는데, 여전히 그 범주에서 배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태 신앙이든 체험 신앙이든 간에 하나님께 자신의 전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는 한결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정신과 가치관을 가지려고 힘쓸 뿐 아니라, 어떤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하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귀한 삶을 헛되게 낭비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2-3a).

우리의 삶이란 시간 속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가치를 깨우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귀한 시간을 눈뜨게 해 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교회와 학교가 반드시 책임을 갖고 일할 과제입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는 <명심보감> “권학편에 나오는 소년이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하니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라는 명언을 귀가 닳도록 가르쳤습니다. 풀어서 말하면 인생은 쉽게 늙고 뜻을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얼 배우고, 무얼 이루기 위해서 시간을 다투어 정진하는 것입니까? 부와 명예와 권세를 말합니까? 이사야는 그런 사람들을 헛되게 인생을 낭비한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나폴레온이나 힛틀러 그리고 퓨틴은 이런 어리석은 망나니들을 대표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귀한 인생을 죽이기 위해서 가장 비싼 무기에 돈을 낭비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3b-5).

예언자 이사야는 자기 민족의 위기가 무엇인지를 밝히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풍랑과 파도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억하자고 권합니다(44:21-24). 그들이 찾아야 할 하나님은 유일 무이하신 한 분 하나님이심을 일깨우고 있습니다(43:10-11). 그리곤 이스라엘 민족에게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연약한 인생들이 마주치는 세상의 풍파는 인간의 의지와 신앙까지도 흔들리게 할 수 있습니다만, 바로 그런 때가 더욱 더 강하고 담대한 신앙으로 일어설 기회인 때문입니다. 지키시고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훌륭한 신앙의 역설입니다. 조건이나 상황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현존인 말씀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이 기억할 역설의 진리입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우슬초 목사 시무)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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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109.

시편 시 8:1-2.

찬송 24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캉스 계절이지요? 그런데 이 바캉스(vacances/불어)라는 단어는 비어 있다는 의미의 베이컨트(vacant)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모두들 산으로 바다로 떠나고 나면, 마을 전체가 텅 비어있다는 데서 기인한 말인데요. 지친 몸의 휴식뿐만 아니라, 매일 되풀이 되는 일상과 스트레스로 복잡하고 정신없었던 마음 속 피로까지 모두 다 비워버리는 것이 진정한 바캉스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휴일인 오늘 마음속을 비워보다는 마음속의 바캉스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83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아홉째 주일의 사도서간문 롬 8:28-39을 본문으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누가 정죄하랴!”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쉬울까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사랑받기를 고집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근자감을 가집니다.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인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28-30).

요즘엔 빈도수가 낮아졌습니다만,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했었습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감이라는 뜻이라 합니다. 저는 매일 일기장에 그날의 소확행을 적기를 권합니다. 책 선물을 잘 하고 밥도 잘 사주는 분에게서 크게 배웠습니다. 의미나 가치 있다 싶으면 잔고가 바닥이어도 그래도 나누면 행복이 기득 찬다고 말입니다. 제가 사는 아산엔 <맹씨 행단>이란 세종 조에 좌의정을 지냈던 맹사성의 고택이 있습니다. 낙향한 맹정승이 초라하게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이곳 아산 원님이 하인에게 쌀 10섬을 들여놓게 합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가난한 백성이 처자식이 굶고 있다며 도움을 간청합니다. 그러자 두말 않고 방금 들어온 쌀 10섬을 가져가게 합니다. 황당해 하는 원님에게 내 형편 잘 아는 분이 돕지 않겠소.”라고 답했다 합니다. 소확행을 실천한 것이었고, 소유에서가 아니라 가치 있는 삶에서 행복을 누리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입니까?(31-34).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있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쉽습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보려고 힘쓸 것입니다. 그런데 얼토당토않게도 하나님은 내 편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엉터리 믿음을 앞세우고서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전 삶을 묶어서 하나님께 산 제물이 되려고 기를 쓴 사람입니다. 자나 깨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만을 생각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고 인도하심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힘이 생기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사람을 위해 기도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들과 동행하신다고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신앙으로 승리했던 비밀이었습니다.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는 것이 참다운 기독교 신앙입니다(35-39).

온전한 사람이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으로 나갈 때가 많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어리석고 후회하며 괴로워하기도 하고 때론 절규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연약한 인생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고해에 비유한 것은 너무도 적절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역경보다도 우리 인생을 더 잘 들여다볼 기회란 없습니다. 한 고비 또 다른 한 고비들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때마다 겸손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학생회관 기도실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신 주님의 그림을 매일 바라보았습니다. 이 일보다 더 큰 위로와 용기 그리고 희망을 준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도 당신의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짊어지셨듯, 우리도 주님 도우심으로 우리들 몫의 십자가를 충실히 짊어지라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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