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144호.
시편 시 18:1-3.
찬송 51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일과 내 다음의 인생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 올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는데요. 삶을 대하는 티베트 사람들의 생각이 담긴 이 속담, 이 속담처럼 미래를 확실히 장담하는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오늘이 내 마지막 하루인 것처럼 오늘하루가 내 생애의 최고의 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선물처럼 주어진 오늘 하루, 기분 좋은 음악과 함께 행복하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년 9월 3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 넷째 주일로, 마 16:21-28을 본문으로 “모두가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다른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는 자기 십자가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를 성실하게 짊어질 의무가 있는데도, 어리석고 슬프게도 자기 십자가를 원망과 불평으로 짊어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만의 십자가를 짊어질 것을 예고하셨고, 실천하셨습니다(21-23절).
흔히 하기도 듣기도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사는가? 그렇습니다. 매우 대답이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해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해답이란 누구든 저마다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우리들이 사는 이유라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소위 십자가 예고라는 형식을 통해서 세 번씩이나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은 친히 당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란 무엇을 말합니까? 삶의 의무이기도 하고 책임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죄와 죽음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 인류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것은 주님만이 질 수 있는 고유한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주님과 같은 십자가를 질 수도 없고 질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친 후에 자신의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지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최선의 활동임을 말씀하십니다(24-25절).
하루는 어머니가 쌀뒤주를 긁고 계셨습니다. 쌀이 바닥이 난 것입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가 “쌀이 떨어지면 어떡해?” 하자, “이건 네 에비와 에미가 할 걱정이니, 너는 네 걱정이나 하거라.” 핀잔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부모가 질 십자가를 대신 질 수도 없고, 지려해서도 안 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십자가(소명/召命)부터 충실하게 짊어져야 하는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밝히 말씀하고 있는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기본자세는 자기를 버리는 일로, 이는 자기 자신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란 구절이 나오는데, 전쟁에서 죽음을 각오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요행히 살고자 하면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의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들만이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 하십니다(26-28절).
삶을 대하는 태도를 마치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출발점에서는 각오가 대단해서 그럴 수 있지만, 도중에 잃어버리곤 한다는 것입니다. 제게 신학을 배우고 실습을 했던 어떤 분이 이런 대표적인 실례가 될 것입니다. 어느 해 뜨거운 여름, 성경학교 교사 강습회를 끝내고 온통 땀으로 목욕하듯 파김치가 되어 힘들었을 때, 내일로 미루는 제게, “목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다 정리하고 가겠습니다.”는 말에 뿌듯하고 자랑스러워 그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랬던 분이 정작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엔, 자기 십자가를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더니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각오만으로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이겨내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을 찾고 계시며, 그런 사람에게 영광의 부활에 이르도록 도우시는 때문입니다.
3. 오늘은 제가 협동목사로 섬기는 왕십리루터교회가 창립 60돌을 맞는 날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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