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990.

시편 시 125:4-5.

찬송 5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루하루는 그대 생애의 나뭇잎 하나뽈 발레리의 유명한 시구인데요. 월요일이라는 작은 가지위에, 또 하루라는 잎새 하나가 맺혀서, 자라기 시작했다는 그런 연상, 참 싱그럽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쪽으로는 잎이 무성해 지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나이테를 늘리면서, 우리들 생도 나무처럼 자라나겠지요? 하루하루는 그대 생애의 나뭇잎 하나. 그렇게 벌써 3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KBS FM 1, FM가정음악, 2008331일 방송>

 

2. 오늘 종려주일의 사도서간문 빌 2:5-11을 본문으로 우리가 품을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주제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설교를 흔히 케류그마 곧 선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성경 말씀의 중심점을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품을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5-8).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마음을 품다. 같은 마음을 가지다. 마음을 같이하다.”는 단어는 생각하다.”는 헬라어 프로네오(φρονεω)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가지셨던 그런 생각을 갖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나깨나 주님께서 가지셨던 생각이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인데, 휘파쿠오(υπακουω)라는 말로 자신을 포기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자신의 의지나 꿈이나 생각을 포기하게 될 때만 가능한 것이 순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면 순종의 삶을 살까 생각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을 순종의 극치로 꼽습니다만, 이 사건은 미완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사건으로 순종의 대미(大尾)를 장식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최고요 최선인 신앙의 완성은 순종입니다.

 

순종의 삶을 살 때, 가장 위대한 삶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9-11).

사람들은 저마다 헛되지 않은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겠다는 자기 평가입니다. 훈장을 받고 권세를 누렸다 해서 자랑스러운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이들 중에는 가짜들이 훨씬 더 많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최후심판이 있는 이유입니다. 농부나 광부로써 주부나 베짜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알고 충실하게 살아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후한 평가에서 결코 제외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들의 공헌을 잊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영국을 왕정국가에서 공화제로 바꾼 올리버 크롬웰은 타작마당의 촌부에게서 소명에 충실한 삶의 가치를 깨달았다 합니다. 꼭대기로 올라가는 삶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순종의 삶이며, 이를 온 몸으로 실천한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힘쓰는 사람들만이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의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을 재정립하는 종려주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27:27-31).

영광의 신학에서 십자가의 신학으로 크리스천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은 여전히 힘겨운 노정인 것 같습니다. 비교적 신실하다는 크리스천들까지도 영광의 신학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회의 비극이 있습니다. 성공과 출세를 신앙의 목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말입니다. 마구간에 오셔서 평생을 성공과는 거리가 먼 갈릴리 변방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친구로 살아가신 주님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이 찾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자칭 크리스천이라는 사람, 유명한 미션 대학의 총장을 3연임이나 한 분이 축재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본 그의 제자가 실망감을 토로하는 것이랄지, 국회의장을 지낸 장로라는 이는 골프장 캐디를 성희롱해서 유명해 지는 등, 모범은 고사하고 가나안 성도를 만들고 교회를 수렁에 빠트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우슬초목사 시무)에서 설교할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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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983.

시편 시 122:4-6.

찬송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비는 곤충 중에서도 가장 천천히 나는 종으로 알려져 있지요. 꽃 사이를 날아다니거나 꽃에서 꿀을 취할 때에도 나비는 유유자적 무엇 하나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평소에 동그랗게 말고 있던 조롱을 천천히 나비의 모습은 성급히 먹어치우기 바쁜 우리의 식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요. 어찌 보면 마치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다른 속도로 시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금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천천히 돌아보는 그러한 시간 갖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325일 방송>

 

2. 사순절 다섯째 주일의 복음서 요한복음 11:17-27을 본문으로 십자가 신앙 그리고 부활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칭해서 예수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사건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고, 부활을 통해서 영생을 약속하셨음을 믿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입니다(45:15, 9:23).

윌리엄 브레데는 <메시아 비밀, 1901> 이란 책에서, 마가복음서는 예수의 공생애 중에서 적어도 세 번은 당신이 메시아인가?”라는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은폐하였음에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사건 이후에야 당신이 메시아이심이 밝히 드러날 것임으로, 생전에 쓸데없는 오해와 논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설명한 사도 바울은 고전 1: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였고, 6:14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했고, 고전 2:2에서는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겠다.” 말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의 십자가 사건이란 숨어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주장을 했습니다.

 

부활 신앙은 자신의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만 은총입니다(17-24).

성경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열 명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왕상 17:17-24),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32-37), 엘리사의 뼈에 몸이 닿은 사람(왕하 13:21), 나인성 과부의 아들(7:12-15), 야이로의 딸(5:35-43), 나사로(11:43-44), 예수님(28:5-7), 무덤에서 나온 사람들(27:52-53), 다비다(9:40), 유두고(20:9-12). 이 정도의 역사가 있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만, 나사로의 죽음을 목격한 누이들이나 지인들은 그가 다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부활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서 부활하였다고 하더라도, 부활신앙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들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음을 촉구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고.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은 연속성을 가집니다(25-27).

많은 크리스천들이 신앙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이 믿고 의지하는 신념을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신앙인 줄로 착각한 것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더욱 더 깊은 실망과 절망의 나락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룟인 유다를 비롯해서 소위 안티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신념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신앙의 길에서 떠나갔습니다. 십자가 신앙을 가졌어도 그 다음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죽음 너머의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연결되는 것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십자가에서와 같이 부활에서도 한결같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신앙과 함께 부활의 신앙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령님만이 이 신앙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3. 매화를 선두로 목련화와 수선화도 연이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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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976.

시편 시 119:175-176.

찬송 15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명예혁명이라고 부른 작가가 있었습니다. 3월과 4월은 화려하고도 명예롭게 이루어진 혁명을 축하하는 봄 축제들의 계절이기도 하지요. 지난 주 고로쇠 축제가 있었고, 어제부터는 섬진강 변에서 매화 축제가 시작됐습니다. 이번 주말 부터는 도 구례의 노오란 산수유 꽃 축제, 통영 국제 음악제도 시작됩니다. 축제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에는 좀 더 부지런히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이 축제의 한 가운데 있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드네요.

<KBS FM 1, FM가정음악, 2008317일 방송>

 

2. 사순절 넷째 주일의 구약 성경 이사야 42:14-21을 본문으로, “제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할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묵상할 시간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심각하게 질문해 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 포로가 되어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14-15).

생각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백성으로 택하신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간 일입니다. 3차에 걸쳐(B.C. 597, 586, 582) 국민 25만 명의 20%45,000여명이 남의 나라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절망의 한 복판을 살아가는 자기 백성을 향하여 예언자들은 희망과 승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퇴계 이황의 어록 가운데는, “근심가운데 낙이 있고, 낙 가운데 근심이 있다.”는 말이 있다 합니다. 어떤 인생도 포기할 만한 인생은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더군다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을 안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승리의 노래의 한 구절로 분노가 머리끝까지 오른 예언자가 해산하는 여인의 참을 수 없는 신음처럼,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절망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베르디는 그의 오페라 <나부코>에서 일상의 회복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소경의 손을 잡아 캄캄하고 험한 길을 인도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16-17).

우리들 삶에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이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 하나가 하나님의 해방선언과 해방실행입니다. 430년의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때, 이집트는 가장 강한 왕 라암세스 2세가 통치하던 시절이었고, 70여년의 바벨론 노예생활에서 그 백성을 해방시키실 때의 바벨론을 계승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서쪽으로는 튀르키에까지를 통치하던 막강한 군주였습니다. 그들 철권통치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의 힘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소경의 손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캄캄하고 험한 길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이란 자기 백성을 항상 기억하시는 하나님, 그들의 어리석음을 잘 알면서도 친히 구원의 길로 들어서도록 도우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만이 소경과 귀머거리 같은 인생을 구원하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18-21).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는 기초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초등학교 교육이 부실하면 그 다음 과정인 중 고등학교 교육이 부실해지고 마침내 인생 낙오자가 되기 쉽다는 사실 말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이 배움의 비결이라고 강조합니다. 공부가 재미있어지는 지름길인 때문입니다. 그런데 낙오자들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처럼 위장술을 펼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낙오자 중에서 성공한 백만 분의 일인 사람을 일반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임수로는 안전하고 희망에 찬 길로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으로 빛을 볼 수 있습니다만, 도토리 키 재기에서 한 걸음도 나아질 수 없습니다. 평화의 길, 생명의 길, 영원한 길을 찾기에는 인간의 힘과 노력은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머리를 돌려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3. 무엇을 어떻게 하며 지내시느냐? 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매일의 숙제를 열심히 한다 대답합니다. 그 첫 번째는 착실하게 식사를 준비하고 먹는 숙제, 둘째는 묵상자료를 끝내는 숙제입니다. 숙제를 끝내고 나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매일의 숙제를 충실히 하시기를 바라며,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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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969.

시편 시 119:156-158.

찬송 36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영화 속 주인공이, “혼자 보는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어.” 이렇게 중얼거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오히려 혼자라는 사실이 더 두드러져서 쓸쓸해 하는 모습이었는데요. 아름다운 풍경이란, 아름다운 것들이란 늘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 들려주고 싶다. 함께 하고 싶다. 이런 나누고 싶은 감정부터 불러일으키지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들 감정의 착한 부분을 더 먼저 자극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KBS FM 1, FM가정음악, 2008310일 방송>

 

2. 사순절 셋째 주일의 사도서간 롬 5:1-8을 본문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3장의 인간의 타락의 역사는 하나님과의 불화였습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과 그리고 자연과의 불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의 해답은 자연이나 사람 자신과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 내지는 평화를 이루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할 기회가 우리 앞에 넓게 열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1-2).

누가 인류의 조상이 깨트려버린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인간들이 고심 끝에 만들어놓은 철학이나 종교는 여러 가지로 인간이 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더 악화일로에 있습니다. 요즘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인성에 찬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가게 앞에 진열해 놓은 물건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다거나, 길에 떨어트린 돈을 주인에게 돌려준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남의 물건을 훔쳐가는 것이나 앞사람이 흘린 돈을 제것으로 삼는다고 말입니다. 더욱 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이 세상에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할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자는 누구나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된 관계는 평생동안 간직할 자랑스러운 희망이 되었습니다(3-7).

바울 사도의 신학에는 이미 그러나 아직”(Aready but not yet)이라는 관용어가 있습니다. 특히 구원과 관련된 신앙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심판할 때까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점이 구원파와 다른 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으나(2:8), 앞으로 구원받을 것이다(5:9)고 말입니다. 참고할 성구들이 많습니다. 8:15-8:23, 1:7-4:30, 고전 1:2-살전 5:23-24 등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육신이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시련과 고통 절망과 의심에 빠질 수 있지만 끝까지 이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은 사람답게 살아갈 과제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의지할 분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 이루어진 것입니다(8-11).

일반인은 물론 스스로를 정통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런 놀라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인간의 공로나 노력으로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정통 신앙에서 빗나간 매우 위험한 주장이고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의 8절은 개역성경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어떤 선한공로나 수고없이 공짜로 얻게 된 은총입니다. 혹자는 이 귀한 진리를 알지 못한채 죽은 옛 성도나 가족들을 염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옥에 머물러 있을 그들을 위해서 뭔가 보속(補贖)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쌀독을 긁는 어머니께 쌀이 떨어졌어?” 걱정하는 자식에게, “그건 네 애비가 할 걱정이야! 너는 네 걱정이나 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께 맡겨야 합니다(6:24-34).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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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962.

시편 시 119:137-139.

찬송 23, 519, 39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식물들의 인내나 노력이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동물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깊고 크다고 합니다. 직접 움직일 수 없는 대신에, 오래 참고 또 엄청나게 많이 준비해서, 자신의 개체수를 지켜가고 늘려간다고 하는데요.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한계가, 오히려 더 강하게 버틸 수 힘으로 작용하는 그 이치 배워둘만하다고 생각합니다. <KBS FM 1, FM가정음악, 200834일 방송>

 

2. 사순절 둘째 주일의 복음서 요 3:1-17을 본문으로 구원 : 장대와 십자가를 바라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유대인의 최고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니고데모와의 한 밤중의 토론에는 두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듭남의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기독교회의 구원관이 그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이미 출애굽기에서 예고하셨습니다(14-17, 21:8-9).

일반종교에서는 도덕적인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향입니다. 마치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놓고 오르는 구원을 가르칩니다. 이른바 공덕을 쌓는 일인데, 민간신앙이나 불교가 그 대표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는 전혀 다른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데 오늘 본문입니다. 출애굽 과정 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마르고 거친 광야에서 굶어죽는 줄 생각하고 격렬하게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을 불 뱀에 물려죽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탄원으로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한 것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로 긴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게 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장대와 나란히 비교한 본문 역시, 죄와 죽음에 허우적대는 인류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 말씀하십니다. 장대나 십자가에서 나오는 어떤 신통력이 아니라, “바라보면 살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구원의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주제입니다(1-7, 6:68).

니고데모와 주님 사이에 나눈 한 밤중 대화는 우리들 기독교인이 깨달아야 할 진리의 정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이 없이는 구원을 향한 수고는 헛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난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 했기에 불가능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가능하다 대답하셨는데, 우리가 받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거듭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증거는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현존(現存)으로 믿고 순종하는 삶이면 충분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징을 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외적 변화에서 거듭남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방언과 신유 같은 현상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주님을 떠나갈 때에,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으니 떠나지 않겠다 고백했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도 세파에 흔들릴 수 있지만 그래도 주님은 돌봐주십니다(8-13).

아프리카 선교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 요한 웨슬레는 낙담하며 귀국선에 올랐는데, 그가 탄 배가 엄청난 파도로 배에 물이차고 뒤집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떨고 있는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떼의 기도하는 사람들 모라비안 선교단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경험은 웨슬레로 위대한 목사로 변화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도 믿음이 흔들릴 수 있고, 시련과 역경 앞에 던져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뿌리가 더욱 단단하게 자리 잡는 기회일 뿐, 쓰러지거나 절망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복음가 중에 <Remind Me Dear Lord>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소중히 아끼는 내 삶의 모든 것 주님께 빌린 것이죠. 나의 나됨은 모두 주님의 은혜인데, 연약한 인간이라 자꾸만 잊어요. 그러니 기억나게 해 주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우리가 혼자라 생각할 때는 주님께서 우릴 당신의 등에 업고 계실 때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묵상식구 우슬초목사)에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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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955.

시편 시 119:119-120.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눈 덮여 있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소프라노 김영미 선생은 음악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에, “음악이란 정화제다.”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을 하셨지요. 매일 아침 우리들의 하루를 음악이라는 정화제에 통과시키고 나면, 하루 전체가 참 신선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음악이라는 곳을 통과하고 나면 어쩐지 너무 낮은 감정을 끌어올려주고, 너무 가파랗던 감정은 좀 골라지고 그럴 것 같은데요. <KBS FM 1, FM가정음악, 2008226일 방송>

 

2. 사순절 첫째 주일의 구약성경 창 3:1-21을 본문으로 순종하는 삶과 풍요로운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버릇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전통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버릇은 좋은 습관을 그리고 좋은 습관은 좋은 전통을 만든다고 합니다. 좋은 버릇과 습관 그리고 전통은 삶을 힘들지 않게 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는 삶 역시 우리들 삶을 아름답고 윤택하게 만들어 줍니다.

 

좋은 버릇은 습관을 만들고 좋은 습관은 위대한 전통을 만듭니다(1-7).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 중의 걸작인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가장 비극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이를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을 불신하게 하는 반복적인 유혹과 줄기찬 습관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즘 유행어 가운데 하나는 거짓말도 버릇처럼 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온 나라가 집단 최면에 걸린 것 같은 해프닝이 끝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간교한 들짐승 뱀은 거짓말을 되풀이 하며 하와에게 접근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갈등을 했을 것이나 되풀이 되자 단단했던 마음이 해제되고 귀를 기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버릇 좋은 습관에는 순기능도 있는데, 일어나고 눕는 시간이 길들거나, 부지런한 습관, 주일이면 교회로 향하는 습관은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하고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좋은 버릇과 좋은 습관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절망의 나락에서도 희망으로 돌아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8-15).

어린 아이나 청소년 시절에는 눈앞만 바라보기 쉽습니다.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쁜 버릇 나쁜 습관에 젖어버리곤 한다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지식이 없는데 중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입니다. 로버트 풀검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유치원 공부가 인생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물으셨습니다.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거짓된 삶에서 돌아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대는데 열중했습니다. “Today sorry, but tomorrow no sorry!” 지루한 미국 여행 중 가이드가 던진 조크였는데, 우리들 삶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기회입니다. 그리고 감사와 기쁨 그리고 근면과 사랑을 길들이고, 순종을 습관으로 삼을 기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앞에는 즐겁게 순종함으로 풍요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16-21).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최상의 낙원에서 최악의 세상으로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채찍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끌어올리시려는 사랑의 매였습니다. 하와에게는 산고(産苦)를 치르는 고통과 남편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굴욕을 맛봐야 했고, 아담에게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힘든 것은 습관 되지 않은 때문입니다. 순종이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학 강의를 준비하는 아들에게 철물점에서 3치 못을 사오라고 했을 때, 아들은 컴퓨터와 제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벌떡 일어나 철물점으로 향했습니다. 즐겁게 순종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더 낫습니다.”(삼상 15:22).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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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948.

시편 시 119:99-101.

찬송 52, 442, 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설득은 가짜다. 공감만이 진짜다.” 토론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반대 의견을 가졌던 이의 마음을 찬성으로 돌아서게 하는 설득보다, 그 일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갖고 있지 않던 사람들에게서 얻어내는 찬성, 그 공감이 보다 진실 된 감정이라고 말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절로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의견에 매료되는 일, 공감이 가져오는 좋은 효과이겠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217일 방송>

 

2. 오늘은 주님의 산상변모주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사도서간문 벧후 1:16-21을 본문으로 오직 성경의 말씀만을 믿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둔 주님은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 보는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다고 복음서가(9:2-13) 전하고 있습니다. 옷에서 광채가 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이런 신비현상을 어떻게 믿고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교회는 두 번의 위기를 겪었습니다(16, 1:1-2).

20세기 이래로 기독교회는 성경의 말씀에 의문을 품을 뿐 아니라, 부정하는 물결 앞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사람이 꾸며낸 헛소리냐의 문제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교회는 두 번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첫 번째는 초대교회이래로 시작된 문제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사람의 아들이냐? 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날 필요가 있느냐는 문제가 교회가 흔들었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종교개혁 시대의 질문으로, 사람이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는 것은 선행을 통해서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냐 였습니다. 첫 번째 위기는 <기독론>이라는 신학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이신득의의 신앙을 성경에서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곧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행위를 믿을 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위기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과제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경 자체가 증인입니다(17-19).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증거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시작하고 있고,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주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24:35). 성경은 출애굽 신앙 위에 굳게 서 있다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이란 긴 세월동안 사람이 생존할 수 없는 모래사막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전하는 생생한 신앙의 기록입니다. 6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타고 배고플 때, 뜨겁고 추운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시련과 역경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살려주셨는지를 말씀한 기록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들 역시 출애굽 신앙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어떤 환경 어떤 시련 속에서도 우리 인생을 지켜주실 유일한 분이심을 믿는 신앙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는 성령 하나님의 개입 곧 영감으로 기록한 때문입니다(20-21).

성경을 폄훼하고 부정하는 시도는 역사 속에서 줄기차게 진행 중에 있습니다. 문학 역사 그리고 과학 비평 등을 통해서 조직적인 공격을 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라, 적어도 1,600년이라는 기간 동안 40명의 알려진 인물과 알려지지 아니한 수 백 수천 명의 인물들에 의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살려내시려는 구속사라는 것입니다. 일관성 있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 하나님께 영감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한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가 만나는 내용과, 광채가 나는 옷이며 하늘의 음성을 소개하는데, 이 모든 것은 영감에 의한 기록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3. 오늘은 왕십리루터교회에서 설교를 할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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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941.

시편 시 119:81-83.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행 작가의 명함에 그려진 운동화 한 켤레, 대뜰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고무신 한 쌍, 밤늦은 귀가길 전철을 타는 자리에 얌전히 그려진 구두 한 켤레. 올해 몸을 지탱하느라 옆으로 늘어난 우리들의 신발. 신발은 참 많은 말을 합니다. 신발에도 지문처럼 뭔가 나만의 무늬가 담기는 걸까 생각해 봅니다. 신발이 가지런히 놓인 현관을 들어설 때처럼, 오후 4시도 산뜻하게 맞이하시면 좋겠네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212일 방송>

 

2. 오늘은 주현절 후 여섯째 주일로 마태복음서 5:21-37을 본문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라시는 뜻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말 보다는 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학생들과 젊은이들에게서 듣게 될 때 마음이 아픕니다. 되돌아보면 우리들 삶엔 불가능보다는 가능한 일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항목들은 한결같이 불가능한 것들처럼 보입니다(21-26).

우리들은 하루에도 5만 가지 걱정을 품고 살아간다 합니다. 그래서 온통 화날 일도 분통 터질 일도 많다 합니다. TV프로그램 중에는 명사들의 좌담회가 자주 있는데, 세대별 차이 없이 부부간 부모 자식 간 그리고 직장 동료 간에 크고 작은 마찰과 갈등들을 호소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평행선을 달리는 경우들이 많아 보입니다. 결국 이혼하거나 사표를 내던지거나 멀어진 관계들이 많습니다. 절망적인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아쉬운 면들이 많이 보입니다. 조정이 가능한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좋은 부부, 좋은 가정, 좋은 동료관계들은 갈등과 마찰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기다려주면서 조정한 경우들이었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체면 그리고 도덕적인 면들도 조정 작용을 하곤 합니다.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인생살이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율법 중에는 불가능한 명령들이 대부분인 것도 사실입니다(27-30).

그 불가능한 율법들이란 살인죄나 간음죄와 같은 항목들입니다. 화를 내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음욕을 품거나 음담패설을 하는 것 등입니다. 성경은 이런 행위자체를 금하고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에게 라가라(욕설) 하는 자마다 살인하였느니라.”(5:22)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하였느니라.”(5:28)고 단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하나도 예외 없이 죄인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처음부터 지킬 수가 없는 말씀들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율법의 기능을 말할 때, 죄를 알게 하고, 정죄하며, 그리고 절망하게 하는 것을 말하곤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율법의 절망하게 하는 기능에서 몽학선생의 역할을 강조합니다(3:24). 율법은 인간을 절망하게 하지만 그래서 그리스도를 찾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율법은 절망을 향하게 하지만, 그 반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합니다(31-37).

1755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리히터 8.5-9.0 규모의 지진이 발생, 도시의 85%가 파괴되는 대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교회가 무너지고 신자들이 죽었는데, 당시에 가장 타락한 곳으로 지탄받던 집창촌 알파마는 재난을 피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나 관공서처럼 건물이 높은 곳들의 피해가 컸던 것과는 달리, 낮은 건물들은 피해가 적었던 탓도 있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나 은총은 전혀 달랐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율법의 최종 목표가 절망과 저주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희망과 생명을 향하는 반작용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1세기의 교육제도 중에 몽학선생을 두는 것이 있었는데, 주인의 아들을 스승에게 데려다 주는 임무를 가진 종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최종 목적은 절망하는 인류로 하여금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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