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22.

시편 시 104:19-23.

찬송 73, 4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인 만큼, 그냥 지나가다가 힘들이지 않고 주울 수 있는 해변의 조약돌 같은 것은 아니야. 그것은 예술가가 혼동의 세계에서 고심에 고심한 끝에 만들어 낸 생명체와도 같은 거야.” 서머 셋 모음의 [달과 6펜스] 중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면서 쉽게 아, 아름답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 뒤에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예술가들의 열정과 땀이 숨어 있지요. 이렇게 어렵게 탄생한 예술 작품이기에 그 아름다움과 가치가 더 빛을 발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1016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열 아홉째주일로 창세기 32:4-30을 본문으로 야곱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울 점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야곱의 기도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생활을 일컬어 신앙생활이라고 말하는데, 기도가 신앙의 진면목을 대변하는 때문입니다.

 

죄의 가공할 위력을 실감한 것이 야곱의 기도의 출발점이었습니다(10-23).

프랑스의 수학자 쥘 앙리 푸앵카레(Jules Henri Poincareé/1854.-1912)는 죄는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는 듯하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땐 또렷하게 되살아난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기까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가 가진 장자권과 축복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던 사람으로, 형의 복수를 피해 22년간 외삼촌 집에서 피난살이를 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가족과 재산을 정리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동안 큰 근심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의 복수의 칼에서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내놓아 형의 환심을 사려고 했지만, 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이 없이는 헛된 일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는 절박한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죄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기도가 야곱을 통해 배우는 기도자의 모습입니다(24-26).

요즘 대통령의 언사(言事)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유나 평화와 같은 말은 그 말 자체로는 매우 모호하고 애매할 수 있어서 구체적인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최선이라는 용어도 아무 때나 함부로 사용할 말이 아닐 것입니다. 기도생활에 있어서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예를 들자면 인디언식 기도처럼 이루어질 때까지엎드리는 기도의 자세일 것입니다. 오늘 야곱의 기도에서는 야곱이 천사를 붙잡고 씨름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씨름이란 두 사람이 공정하게 상대의 샅바를 양손으로 붙잡고 땅에 넘어트리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씨름은 땅에 넘어짐으로 끝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바라던 소원을 이루기까지는 샅바를 악착스럽게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야곱의 엉덩이 뼈(고관절)를 쳐서 위골시킨 다음에야 샅바를 놓고 말았다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여 주심을 깨달았습니다(27-29).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자신의 소원이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도 있겠지만, 보다 더 큰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시는 것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가끔 언급하는 실화입니다만, 저의 교우이며 학생이었고 또 교회 실습전도사로 저를 돕던 분의 간증입니다. 피난민들이 몰려 살던 매봉산 기슭 어느 큰 바위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고 합니다. 마침 그 텐트촌에 세워진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세 가지 기도 제목을 갖고 기도했다 합니다. 첫째는 단 한 평이라도 좋으니 내 이름의 집을 갖는 것, 둘째는 대학을 졸업해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겠으니 대학을 졸업하기, 셋째는 자신이 음악을 좋아하니 근사한 피아노 한 대를 갖는 것이었다 합니다. 세월이 흘러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살던 어느 날 그 기도제목들이 모두 다 이뤄져 있더라 합니다. ‘거짓말쟁이라는 뜻의 야곱을, ‘하나님이 싸워주셨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꿔주신 하나님께서는, 황공하게도 자신과도 동행하심을 깨달았다고 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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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815.

시편 시 103:18-20.

찬송 10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수영 시인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10> 라는 수필에서요.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둔짝,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댁, 벼룻돌, 부싯돌 등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꼽았습니다. 이 말들은 모두가 시인이 어린 시절 동네 어귀에서 자주 들으면서 자랐던 말들이라고 하는데요. 지금은 많이 쓰이지 않는 것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 이렇게 생활이 바뀌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도 참 변화가 많았는데요. 외래어나 인터넷 신조어에 밀려서 우리말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요즘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10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말을 고르시겠습니까?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109일 방송>

 

2. 성령강림절후 열 여덟째 주일의 사도서간 딤후 2:1-13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의 병사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제복을 입고 계급장을 달고 있는 구세군 지도자들을 볼 때면 군인정신이 번쩍 들곤 합니다.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들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크리스천은 군인과 같은 자세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1-4).

첫 번째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선생님의 추천으로 입주(入住)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지방에서 제일 부잣집이었는데, 일곱 번째 입주교사라고 했습니다. 맡겨진 학생은 공부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몇 달이나 버티나 그것만 셈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몇 년을 출퇴근 가정교사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터득한 공부비법(?)이 생겼습니다. 공부는 선생님(학교)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생활을 바르게 길들이는 것보다 더 좋은 교육방법이 없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크리스천의 생활도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군가 본보기가 될만한 대상을 흠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군인을 차출한 것 같습니다. 외모는 물론 그 정신은 탐내야 할 정도입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거기에 사명감까지 투철합니다.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대의명분에 딱 어울리는 우리들 크리스천의 표본입니다.

 

크리스천은 운동선수와 같은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십니다(5-7).

19672, 제가 상무대 기갑학교에 입교한 때입니다. 어느 자정을 조금 지난 시간, 저의 구대원 40명은 연병장에 선착순으로 집합했고 곧 바로 연못가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구대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입수(入水)!”라고 외쳤고, 우리는 살얼음을 깨고 배꼽 높이의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이게 당시 운동선수들이 받는 훈련이라면서, 죽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말라 안심시켰습니다. 탱크병사들 보다 운동선수들이 훨씬 더 힘든 훈련을 받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장 강인한 몸과 정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강철과 같은 몸과 정신은 머리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찌는듯한 더위와 살을 에이는 추위를 이겨내는 훈련은 필수 과정이라고 말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이런 훈련이 필요한 것은 그만큼의 시련과 역경이 찾아온다는 각오이며 대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십니다(8-13).

크리스천의 모델로 제시한 군인과 운동선수는 각기 나름의 목표가 확실합니다. 조국을 지키는 일이며 승리의 영광을 거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매일의 삶을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기억하는 생활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처럼 자신의 무덤 주변을 관광지로 만드는 것이나, 유명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매우 소박하면서도 단순한 삶, 예수 그 분이 나의 구주이심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신 예수가 우리의 구주시다는 신앙을 뜻합니다. 이렇듯 성경이 가르치는 크리스천의 신앙이란 매우 단순하면서도 분명합니다. 예수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믿음을 날마다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란 누구나 한 사람도 예외없이 가능한 삶, 곧 예수가 나의 구주이심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입니다.

 

3. 오늘은 주님의 날 주일이면서 우리가 자랑하는 한글날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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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808.

시편 시 102:23-25.

찬송 23, 338,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가까이 들여다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입니다.” 전설적인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남긴 말입니다. 하루하루 걱정거리, 고민거리가 끊이지 않고, 정말 내 삶은 왜 이렇게 힘들까 생각 들 때도 많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면 또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요.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너그럽게 삶을 바라볼 수 있을 테고요. 그러면 또 오늘 하루도 비극이 아닌 기분 좋은 희극으로 마무리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102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열일곱째 주일로 누가복음 17:1-6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겨자씨 한 알의 믿음으로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 말씀은 일기를 쓰듯 매일의 삶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일화들을 적절하게 편집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4절은 죄의 유혹과 용서를 주제로, 5-6절은 믿음의 힘을 주제로 말씀하신 일화들입니다.

 

우리들 인간의 삶에서 죄의 유혹은 매순간 발생하며 그래서 서로 용서해야 살 수 있습니다(1-2).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의 차이는 죄의 주제가 되풀이 되고 있느냐로 구별됩니다. 죄의 문제는 우리들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 어디를 가든 죄의 문제가 쉼없이 튀어나오지만, 남의 얘기 수준이라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죄는 모든 사람이 짊어지고 가는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치명적인 독화살과 같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남의 죄라도 들추어냄으로 자기 자신의 죄를 감추려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1977년 영화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어느 날 밤 행인을 차로 친 남녀 고등학생들이 사체를 유기함으로 사건이 종결되는가 했지만, 1년 후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고 적힌 의문의 편지가 날아오면서 관련 인물들이 하나둘씩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는 줄거리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인간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적어도 숨을 쉬고 살기 위해서 그리하라고 말입니다. 용서는 깨끗이 지워버린다는 뜻입니다.

 

크리스천으로써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만 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3-5).

제자들은 주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제자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요? 놀랍게도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믿음이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기를 원해서 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형제가 죄를 짓고 회개하거든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8:22에서는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 한번의 용서도 어렵고 힘든 일인데, 어떻게 490번이나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믿음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이 말씀하신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먹보다 더 검은 내 죄악을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신 주님의 공로를 믿는 믿음에서 출발한 믿음이었습니다. 나를 검고 붉은 죄악에서 눈보다 더 희게 씻어주신 주님의 공로를 믿을 때만 가능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은 주님을 우리 삶에 모셔들이는 일이었습니다(6).

성경을 읽을 때 흥미로운 점 하나는 우리 주님께서 믿음을 크고 작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4:31에는 물위로 걸어오신 주님을 보고, 자신도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구한 베드로가 풍랑앞에서 물 속으로 빠져들어갈 때 어찌하여 믿음이 적으냐?”고 책망하셨는데, 8:10에는 자신의 부하가 죽어갈 때 주님께서 네 집으로 가자고 하셨을 때, 말씀만 하시면 되겠다는 백부장에게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보지 못했다 칭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에 관한한 얼마나 많은가 하는 양의 문제도 아니고, 얼마나 특별한가 하는가도 아니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앞세우는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실 것을 믿습니다. 바로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시는 때문입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우슬초목사 시무)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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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801.

시편 시 101:6-8.

찬송 54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들의 기막힌 요리법의 핵심은 적당함입니다. 계측할 수 없는 적당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적당함이 요리의 비법이지요. “소금은 얼마나 넣을까요?” 여쭈면, 그저 조금, 적당히 이렇게 답하십니다. 적당할 때 만나고, 적당한 때 떠나고 적당한 때 쉬고, 내가 있어야 할 적당한 곳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참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살면서 자주 느끼곤 합니다. 적당한 선을 찾을 수 있는 적당히의 미학, 생활 속에서 더 잘 녹여내고 싶어집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929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열여섯째 주일로 구약 아모스 6:1-7을 본문으로 현상이 아니라 방향성이 문제다.”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스승들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의 출세와 성공만을 저울질 하는 사람들은 먼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릅니다.

 

위기는 부와 번영의 시대에 싹트기 쉽습니다(1-3).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부르는데, 아모스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여로보함 2세의 재위기간을 제2의 황금시대라고 부르곤 합니다. 전쟁의 위협은 물러가고, 문화 사회 경제에 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였습니다. 무역과 상업이 발전하고 사람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작용도 따랐는데, 사람들은 술에 취했고, 부도덕하고 타락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시대상을 예리한 정신으로 분석하고 비판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출세가 목표가 되고, 감성에 젖은 노래를 찬송이라 부르는 초점잃은 사람들로 가득 채우고 있을 뿐, 어디에서도 예언자적인 설교를 들을 수가 없는 우리 시대와 너무도 닮았습니다. 위기가 찾아오고 있는 그 때에 남왕국 유다 드고아 출신 양치기 아모스가 혜성처럼 나타나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5:24).”고 말입니다. 정의가 실종된 시대를 보고도 벙어리된 지도자는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현상에 머무르는 것에서 방향성으로 신앙의 키를 돌려야 합니다(4-6).

어느 시대나 세상의 물결은 현상에 목표를 두게 마련입니다. 가시적인 목표를 향해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루거나 얻은 판검사 그리고 장군과 교수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바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수단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판검사가 되라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장군이 되고, 세상을 밝히는 진리를 전하는 교수가 되라고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목사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고, 세상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앞장서는 삶을 살며 외치는 목사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방향성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만들자고 헛된 꿈을 부추기며, 부자가 되고 오래 사는 것이 성공한 모습이고 하나님의 축복이라 가르치는 지도자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게 개탄할 일입니다.

 

때가 이르면 역사의 죄인들은 가장 먼저 잡혀갈 것이라 예언합니다(7).

역사를 공부하는 민족은 망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원인부터 결과까지를 기억하도록 교육받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민족 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상을 위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을 몰라보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물론, 남의 것을 가로채는 염치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꾸준히 가르쳐야 할 사람들은 사회와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두 번 다시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말과 얼 그리고 이름까지 빼앗기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비극적인 일에 앞장선 배신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뼛속 깊이 기억해야 할 것이며, 그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먼저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은 자자손손에게 부끄러운 선조가 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현상이 아니라 방향성에 주목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걸음은 어디로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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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794.

시편 시 99:4-5.

찬송 4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라는 위대한 연설을 한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우리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꿈을 품고 있지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꿈은 잠들면 저절로 찾아오는 꿈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이루고 싶은 세상에 대한 소망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의 꿈은 비록 그 사람이 살아서는 이루지 못했더라도 후손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지금까지 전해지지요. 그리고 우리가 소망하는 작은 꿈들도 있습니다. 오늘 그 꿈들을 담아 둘 수 있는 투명한 작은 병을 선물합니다. 여러분의 꿈을 그 병에 담아 항상 마음 곁에 두고서, 그 꿈을 잊지 않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 그 병에 꽉 차서 소망한 일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919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 다섯째 주일로, 사도서간 딤전 2:1-15을 본문으로 바른 기도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다른 말로 기도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도의 중요성이 강조되곤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기도인가를 주님께 물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른 기도는 무엇인지 물어봅시다.

 

사도는 바른 기도생활이란 모든 이를 위한 다양한 기도라 권하고 있습니다(1).

우리의 기도가 자기중심적이고 단조롭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은 세상을 향해 열려진 것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기도가 그렇습니다. 사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를 벗어나지 못할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슬퍼하실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우리들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몇 사람을 살리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모두 구원하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열려 있을 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최초의 선교사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병원과 학교 고아원 등을 지어 돌봤습니다.

 

사도는 바른 기도생활이란 지위가 높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명합니다(2-4).

매우 흥미로운 것은 지위가 높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벼슬아치들에게 아첨하는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매우 복잡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중의 첫째는 그들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그 직무를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이 자신들의 권한을 잘못 사용할 수 있어서 그 때문에 구원받지 못할까 염려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주제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 겸손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의기투합할 성품을 가져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상 감투를 쓰더니 사람이 180도 달라진 것입니다. 눈빛과 말씨만이 아니라 성격까지도 딴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교만해졌습니다. 사람을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내려다보았고, 높임말이 아니라 반말을 해댔습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안하무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친구를 잃을 뿐 아니라, 구원도 받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단 한 분이심을 강조하십니다(5-7).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잠깐 멈춰 서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는 지를 말입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려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군가 들어보라고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진정성이 있어야 하고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분은 단 한 분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동시에 사람들을 감동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잠자는 하나님을 깨우는 기도나, 전후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 정보를 제공하는 기도는 더욱 아닙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구하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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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787.

시편 시 97:5-7.

찬송 35, 205, 4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주장했지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요한 방에 들어 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 “흙탕물을 맑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만히 놔두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혼자 조용히 휴식하면서 사색하는 시간, 그리고 가고 싶은 나라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 또는 추억 깃든 여행지의 사진을 감상해 보는 것, 오늘 일과표에 들어 있어도 좋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99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 넷째주일로 복음서의 말씀 눅 15:1-7을 본문으로 잃은 양은 누구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 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읽은 양의 비유는 가장 많이 오해하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잃은 양이 누구인지 주목합시다.

 

세상이 다 아는 소문난 죄인들을 잃은 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입니다(1-3).

이른바 예수님의 <잃은 양 비유>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처세를 비난할 때 행하신 즉흥적인 이야기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저 사람(예수님)은 죄인을 환영하고 그들과 음식까지 나누고 있다.”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죄인들이란, 세리와 그에 준하는 소문난 죄인들을 통칭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후로는 유대 지도자들이 말했던 사람들이 잃은 양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세리가 죄인으로 분류된 것은 자기 민족의 재산을 강탈해 가는 로마 통치자들의 앞잡이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로마 지배자의 비호아래 축재에도 열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밖에 소문난 죄인들이란 창녀를 비롯해서 혼혈인 사마리아 사람 그 밖에 문둥병자 등 난치병 환자들도 해당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이란, 이런 외적 흠결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잃은 양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4-5).

미국의 대통령은 반드시 기독교인일 필요는 없지만, 기독교인이 아니면 당선되기 어렵다고 합니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할 때 성경위에 손을 얹는 전통이 있습니다. 모순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지 여부가 입방아에 오른다고 합니다. 어느 대통령이 주일에 아픈 것을 핑계로 집에서 쉬었는데, 교회를 다녀온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의 주제는 뭐였소?” 그러자 회개하라.”고 하자, “누구보고 한 소리야?”라고 묻자, “아마 당신일걸.” 대답했다 합니다. 우리들 역시 유대 지도자들처럼 겉으로 드러난 죄인들을 잃은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잘못된 인식인데, 자신이 죄인임을 감추는 방어수단으로 남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희망도 궁극적인 구원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는 한 마리 양이 회개하지 않는 99마리 양보다 소중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6-7).

우리 주님은 회개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개라는 성경 언어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꾸다.”는 뜻입니다. 죄에 머무르고 있거나 죄로 향하던 삶의 방향을 하나님을 향해 바꾸는 행동을 회개라고 말합니다. 루터교회 예배는 <죄의 고백과 용서>라는 순서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선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며, 그때부터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과 교제하시는 게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과 교제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리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회개하는 잃은 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고, 비로소 가장 값진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3. 오늘은 주성 농인교회(묵상식구 우슬초목사 시무)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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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780.

시편 시 95:7-9.

찬송 5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서는 것이, 얼마나 높은 단계의 공부인가를 우리는 자주 놓치고 있다.”는 그러한 시인의 말이 있습니다. 바람이 서늘해지면 뜰 앞에 서고, 코스모스 가 피어나면 꽃길을 따라 걸어보고, 높푸른 가을 하늘 한번 올려다보는 일상, 쉬울 것 같아도 쉽지만 은 아닌 일이지요. 가을에는 사람도 풍경이 된다는 싯구절처럼, 그간 일상의 속도에 쫓겨서 미처 보지 못한 풍경 속으로, 천천히 들여다보기에 참 좋은 계절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94일 방송>

 

2. 성령강림절후 열셋째 주일의 구약 신명기 30:15-20을 본문으로 선택 속에 담겨 있는 순종을 배우자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 앞에 생명과 복, 그리고 사망과 화가 놓여 있는데,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들 인생길이 이런 식의 선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생명과 복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고 말씀하는 것을 왜일까요?(15-16).

그동안 여러분은 수도 없이 많은 충고를 들었습니다. “부지런하면 성공하고 게으르면 실패한다.”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라. 그러면 공부에 흥미를 갖고 잘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잘 듣고 실행하였습니까? 50년 만에 목사가 된 두 친구가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교수로, 다른 한 사람은 그 교수의 학생으로 말입니다. 학생이 된 친구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수업시간에 만화를 보고 있을 때, 너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었지. 그때 나는 왜 그런 바보짓을 했을까?” 많은 사람들 앞에는 항상 생명의 길 복된 길이 놓여 있었고, 얼마든지 바르고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학교 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더 쉽고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요행을 바란 때문일까요? 어찌되었건 선택이라는 관문 앞에서 바보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으나, 누구나 그 선택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17-20).

지금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망하는 길과 복된 길을 진지하게 소개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하는 길이 아니라 복된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지혜롭고 현명하게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복된 삶을 사는 사람과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그것은 선택에는 선택을 빛나도록 만들어 주는 순종이 따라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섬기면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택으로 끝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그 다음 단계가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학교에 새 선생님이 오셨는데, 대뜸 공부를 잘 하는 비결이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도 인내, 둘째도 인내, 셋째도 인내라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약한 의지와 경험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로 귀를 막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몇 학생은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열었고, 어려울 때마다 기억하며 따랐던 것입니다.

 

순종하는 훈련을 받을 기회는 엄청 많았습니다(6:1).

순종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바울 사도는 엡 6:1에서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는데, 순종이란 말은 잘 듣는 일(υπακουω)”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순종이란 잘 듣고 따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서 순종할 훈련을 하였듯, 우리도 부모님과 선생님을 통해서 순종할 훈련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순종이라는 말은 단순히 라고 대답하는 것 만이 아니라, 가장 큰 희생 자신을 포기하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택과 순종은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한가지 의미를 가진 사촌쯤 되는 말이라고 말입니다. 순종은 말씀하는 분의 뜻과 능력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순종하는 훈련을 잘 받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3. 감사, 묵상과 함께한 7,779오찬은 은혜 중에 끝났습니다. 참석하셔서 근황을 들려주신 묵상식구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왕십리루터교회 59주년 기념예배에서 설교를 할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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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773.

시편 시 94:8-10.

찬송 4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화를 하면 반갑게 달려 나올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나를 필요로 하는 공간과 일이 있는데, 무엇보다 돌아갈 집이 있고, 나를 기다려 주는 따뜻한 가족이 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끔은 세상에 나 혼자 뿐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편안해 지는 낯익은 얼굴들이 왠지 먼 사람처럼 느껴지고, 습관처럼 그 자리에 있는 일과 사람들이 지겹게 느껴질 때, 일상의 작은 빨간 신호등이 켜지는 때이지요. 이럴 때, 다시 일상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방법, 여러분은 가지고 계신지 궁금해지네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829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세번째 주일의 사도서간 히 13:1-17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말미는 왜 사냐 건, 웃지요라고 맺고 있습니다. 사는 이유를 물을 때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건, 근본적인 물음조차 고민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1-6, 고전 10:31).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에 따르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고 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말은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것처럼 살아가는 일입니다.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는 일,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는 일, 감옥에 갇힌 이들이나 학대받는 이들을 자신이 당한 것처럼 기억해 주는 일, 정결한 결혼 생활을 하는 일,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자족하는 생활, 이런 사람들과 동행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런 일들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려면 어떤 사람들 곁에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들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입술로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로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7-16).

신앙과 생활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오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대 선배이신 베드로도 그런 병에 걸려서 사도 바울에게 크게 책망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어쩌면 초대 기독교회 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을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유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율법 특히 할례를 강조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별개로 이해하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삶이란 세상 사람들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목을 받고 있는 대상이라는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족 간에서도 교회의 직분자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소극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자세로 세상에 우리 자신을 알릴 수 있을 정도로 겸손과 봉사하는 정신으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지도하는 분들을 존경하고 따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17-19).

우리 크리스천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심이 깊다는 이유로 자신의 부모나 스승을 홀대하는 일입니다. 슬프게도 이런 이들이 적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 때 민중 신학자에서는 바울에게서 예수에게로라는 주장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없이 어떻게 예수께 이를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나 스승 없이 하나님께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모와 스승을 보내 주셨고, 그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도록 훈련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되는 것이나 선생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좋은 부모와 좋은 스승을 만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는 자식에 의해서 혹은 제자에 의해서 부모나 스승이 빛날 수도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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