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22호.
시편 시 104:19-23.
찬송 73, 48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인 만큼, 그냥 지나가다가 힘들이지 않고 주울 수 있는 해변의 조약돌 같은 것은 아니야. 그것은 예술가가 혼동의 세계에서 고심에 고심한 끝에 만들어 낸 생명체와도 같은 거야.” 서머 셋 모음의 [달과 6펜스] 중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면서 쉽게 아, 아름답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 뒤에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예술가들의 열정과 땀이 숨어 있지요. 이렇게 어렵게 탄생한 예술 작품이기에 그 아름다움과 가치가 더 빛을 발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년 10월 16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열 아홉째주일로 창세기 32:4-30을 본문으로 “야곱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울 점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야곱의 기도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생활을 일컬어 신앙생활이라고 말하는데, 기도가 신앙의 진면목을 대변하는 때문입니다.
죄의 가공할 위력을 실감한 것이 야곱의 기도의 출발점이었습니다(10-23절).
프랑스의 수학자 쥘 앙리 푸앵카레(Jules Henri Poincareé/1854.-1912)는 죄는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는 듯하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땐 또렷하게 되살아난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기까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가 가진 장자권과 축복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던 사람으로, 형의 복수를 피해 22년간 외삼촌 집에서 피난살이를 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가족과 재산을 정리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동안 큰 근심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의 복수의 칼에서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내놓아 형의 환심을 사려고 했지만, 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이 없이는 헛된 일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는 절박한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죄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기도가 야곱을 통해 배우는 기도자의 모습입니다(24-26절).
요즘 대통령의 언사(言事)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유나 평화와 같은 말은 그 말 자체로는 매우 모호하고 애매할 수 있어서 구체적인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최선이라는 용어도 아무 때나 함부로 사용할 말이 아닐 것입니다. 기도생활에 있어서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예를 들자면 인디언식 기도처럼 ‘이루어질 때까지’ 엎드리는 기도의 자세일 것입니다. 오늘 야곱의 기도에서는 야곱이 천사를 붙잡고 씨름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씨름이란 두 사람이 공정하게 상대의 샅바를 양손으로 붙잡고 땅에 넘어트리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씨름은 땅에 넘어짐으로 끝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바라던 소원을 이루기까지는 샅바를 악착스럽게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야곱의 엉덩이 뼈(고관절)를 쳐서 위골시킨 다음에야 샅바를 놓고 말았다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여 주심을 깨달았습니다(27-29절).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자신의 소원이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도 있겠지만, 보다 더 큰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시는 것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가끔 언급하는 실화입니다만, 저의 교우이며 학생이었고 또 교회 실습전도사로 저를 돕던 분의 간증입니다. 피난민들이 몰려 살던 매봉산 기슭 어느 큰 바위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고 합니다. 마침 그 텐트촌에 세워진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세 가지 기도 제목을 갖고 기도했다 합니다. 첫째는 단 한 평이라도 좋으니 내 이름의 집을 갖는 것, 둘째는 대학을 졸업해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겠으니 대학을 졸업하기, 셋째는 자신이 음악을 좋아하니 근사한 피아노 한 대를 갖는 것이었다 합니다. 세월이 흘러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살던 어느 날 그 기도제목들이 모두 다 이뤄져 있더라 합니다. ‘거짓말쟁이’라는 뜻의 야곱을, ‘하나님이 싸워주셨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꿔주신 하나님께서는, 황공하게도 자신과도 동행하심을 깨달았다고 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 10. 30. 성령강림절 후 스물한째 주일] 끝까지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내라. / 살후 1:1-12. (1) | 2022.10.30 |
---|---|
[2022. 10. 23. 성령강림절 후 스무째 주일] 우리는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눅 18:9-14. (0) | 2022.10.23 |
[2022. 10. 9. 성령강림절후 열여덟째 주일] 그리스도의 병사들. / 딤후 2:1-13. (0) | 2022.10.09 |
[2022. 10. 2. 성령강림절후 열일곱째 주일] 제목 겨자씨 한 알의 믿음. / 본문 눅 17:1-6. (0) | 2022.10.02 |
[2022. 9. 25. 성령강림절 후 열여섯째 주일] 현상이 아니라 방향성이 문제다. / 암 6:1-7. (0) | 2022.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