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724.

시편 시 85:10-13.

찬송 52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는 새끼들에게 멀리 바라보는 훈련부터 시킨다고 하지요. 가끔은 우리도 멀리 시선을 두고 실패나 성공에 대한 생각을 곰곰이 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시선을 가깝게 두면 오늘만 보이지만 멀리 보면 한 달 일 년 그 뒤의 내 모습도 보이겠지요. 오늘도 멀리 시선을 두시고 하루를 힘차게 출발해 보시기 바랍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76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로, 10:25-37의 말씀을 본문으로 우리가 도울 이웃은 누구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수 없는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에서 안정감과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동시에 저마다의 독특한 욕망으로 인해서 충돌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관심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율법의 중심주제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25-29).

충실한 율법사로서 율법의 주제를 모를 리가 없을 것입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22:34-40).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말씀에 대해서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인간이 사랑해야 할 두 대상 하나님과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창조주요 섭리자인 절대자라고 어릴 때부터 배워왔으니 어느 정도 알 것 같은데, 이웃이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우리들 이웃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으며, 또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요? 가령 우리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웃을 분류하곤 합니다. 첫째는 혈연(血緣)관계, 둘째는 지연(地緣)관계, 셋째는 학연(學緣)관계가 그것입니다. 그밖에도 이해관계에 의해서, 또는 신앙적 관계 혹은 이념적 관계로 이웃을 생각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신 이웃이 있습니다(30-36).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말해야 했으니, 매우 부끄럽고 치욕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죽음 직전의 유대인을 도운 것은 레위인도 제사장도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비유는 사마리아인이 일반적으로 선한 성품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강도만나 죽게 된 사람 앞에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불가능한 가능성에 눈을 뜨게 하시려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미움과 천시를 받아오던 사람이 복수자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등장시킨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교훈은 팔을 안으로 굽히는 삶이 아니라, 팔을 밖으로 뻗는 삶, 곧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이웃이 아니라,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며 그에게 다가가는 일이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이 올바른 신앙입니다(37).

진리를 이해하고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신앙의 기초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러 있으면 위선에 불과합니다. 참된 신앙이란 믿는 내용을 이해할 뿐 아니라,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너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율법사만큼 율법의 정신과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행동하는 신앙이 아니었음을 주님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 서울에 오시다>란 대학 가장행렬 촌극에 예수 역을 맡았던 저는, 김포공항에 몰려온 한국의 기독교지도자들을 향해 한국 교회를 보고 싶다.” 했지만, 그들은 한 마음 한 행동으로 예수역을 연기하는 저를 비행기에 던져 넣고 말았습니다. 달콤하고 화려한 말잔치로 끝나는 지도자들의 설교가 한국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어두운 현실을 비판한 것입니다. 갈릴리를 중심무대로 공생애를 사셨던 주님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묵상식구 김효종 목사님은 한국 교회 청소년들을 인솔해서 미국 루터교 연합 여름 캠프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유익한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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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717.

시편 시 83:16-18.

찬송 171, 177, 17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장마철에 우산이 없으면 곤란한 것처럼, 일상에서도 마음의 우산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일이 자주 꼬일 때, 일보다 사람 때문에 더 지칠 때, 이유 없이 자꾸 힘이 빠질 때, 이럴 때 산처럼 든든하게 지켜주는 사람의 위로가 필요하지요. 힘내라는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때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비를 대신 맞아주는 고마운 우산처럼,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닿아 마음의 우산이 되어 주면 좋을 텐데 싶어집니다<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73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로, 구약 이사야 66:10-14을 본문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기를 희망하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서로 나누는 최상의 인사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2:4, 1:28)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총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야훼 하나님을 예배하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10-11).

광야 40년 동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중심에 예배의 자리를 두게 하신 분은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을 훈련하는 첫 걸음은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는 일입니다. 깡패 같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 있었습니다. 저와는 친하지 않았는데, 훗날 저는 목사로 그는 사장인 장로로 만났습니다. 상상 못할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모친이 남긴 유언을 언급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주일 성수였습니다. 그때문에 복을 받았다 확신했습니다. 예배는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원망과 불평을 감사로, 갈증과 두려움을 풍성함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예배의 목적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우리의 필요와 탄원과 희망을 전하는 최상의 자리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체험하는 감격의 자리입니다(12-13).

광야 성막교회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에는 항상 등잔을 켰습니다. 성전의 등잔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강복(降福)으로 예배자들을 찾으시고, 예배자들은 감사와 찬송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래서 예배를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교제라고 규정합니다. 이런 예배는 평화가 강물처럼 흐리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위로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이런 예배의 감격 때문에 지난 수천 년 동안 예배는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저의 고향 교회는 1020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걸어서 찾는 교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교회당은 화려해지고 프로그램도 다양해지지만, 예배에서 감격을 잃어버릴 때 더 이상 교회당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바른 하나님의 말씀과 바른 예배자들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예배가 되도록 모두가 회개해야 합니다(14).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본질보다는 비본질에 눈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사랑과 배려 그리고 감사와 평화가 가득해야 할 가정보다는 물질과 성공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으로, 회복할 수 없는 깨어진 가정들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가장 슬픈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자리를 마련하는데 힘써야 하겠는데, 하나님이 부재중(不在中)인 예배를 목격할 때가 많습니다. 거짓 신의 이름을 부르며 광란의 춤을 추는 무당을 본 일이 있습니다. 온갖 두려움과 저주가 가득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벌벌 떨면서 부르는 대로 제물을 바칩니다. 하나님이 부재한 예배에서는 인간이 주인공이 됩니다. 감사와 찬송 그리고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향한 찬송과 감사 기도가 올려져야 합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에서 설교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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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710.

시편 시 82:1-2.

찬송 17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 중의 하나는, 사람은 살아가는 의미를 찾으면서 살아간다는 점일 겁니다. 가슴에 뜻을 품고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또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그렇게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인데요. 전쟁이라는 것이 비극적인 이유, 그건 바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데 있겠지요. 우리가 인간임을 포기하라는 강요. 그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625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로, 사도 서간문 갈 5:1, 13-25을 본문으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란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들 크리스천은 더 이상 자연인이 아니라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성령의 사람을 의미하며,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성령의 사람이란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참된 자유인을 말합니다(1).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 이는 1775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던 패트릭 헨리의 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인 1863년 에이브라함 링컨은 흑인 노예해방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인 1955년 마틴 루터 킹은 흑인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2021년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일어난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운동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위한 투쟁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밑바탕에는 죄에 사로잡힌 불쌍한 인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노예로 살고 있는 한 우리들 인생에는 참된 자유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죄란 목표를 이탈한 일체의 행위입니다. 부모나 선생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며,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죄로부터 자유하는 지름길은 사랑의 노예가 되는 일입니다(13-15).

누구도 죄에서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수렁 한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는 노력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들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의 종노릇, 다시 말하면 사랑의 노예가 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파격적이며 역설적인 제안입니다. 죄의 노예는 미움과 파괴 불행의 원인이 되지만, 사랑의 노예는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 되는 때문입니다. 제가 시골에 정착하면서 뭔가 마을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제안했을 때, 내 걸었던 모토가 선생님을 사랑하면 공부는 잘 할 수 있다.”였습니다. 사랑의 묘약을 먹이고 싶었습니다. 공부 뿐 아니라, 우리들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묘약 역시 사랑의 노예가 되는 일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구석이 없다며 손 사레를 치는 분이 많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반드시 사랑할 구석이 있습니다. 사랑할 이유를 발견하는 즉시 위대한 사랑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성령님을 따라 살면 성령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게 됩니다(16-25).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는 일은 부작용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참 마음으로 사랑하게 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성령님께 여러분이 주목하고 있느냐 여부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며 따라 살려는 사람들은 항상 성령께 질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혹은 자기 뜻대로 살려는 사람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 방황할 것이며, 그도 힘들면 아카시 잎을 차례로 따내며 된다. 안 된다.”를 주문처럼 외울지 모릅니다. 어리석은 짓임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은 조용히 질문합니다. “성령님, 가르쳐 주십시오.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길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이런 기도가 생활 속에 자리 잡은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지혜의 창고를 열어주십니다. 결국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를 배우게 되고 그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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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703(2022. 6. 19.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시편 시 80:12-15.

찬송 2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긍정의 힘]의 저자인 조엘 오스틴 목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생활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말을 바꿔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는 습관을 들이면 기분이 달라질 뿐 아니라, 삶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데요. 실패보다는 성공을, 불가능보다는 가능을, 두려움 보다는 자신감이 앞서는 말이야말로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면서 긍정적이고 큰 역할을 하겠지요. , 새로운 한 주를 여는 오늘 아침입니다. 삶을 바꾸는 긍정의 힘을 믿으면서, “!” 라는 부정적인 말 보다는, “예스!”라는 긍정적인 말로 활기차게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618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로 눅 8:26-39을 본문으로 미친 세상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렀을 때, 군대 귀신에 미친 젊은이 하나를 만났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무덤가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를 온전한 사람으로 살려주시려고, 근방에서 방목하는 돼지 떼에게 군대귀신을 보내어 돼지들을 대신 미치게 해서 물에 빠져 죽게 한 일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미친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26-31).

거라사에서 주님께서 만난 청년 뿐 아니라, 과학 문명이 발달한 21세기 현대 사회에서도 미친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우크라이나가 불과 넉 달이 채 안 된 지금, 전쟁의 포화로 온 나라가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수 백 수천 년을 돌보고 가꾼 아름다운 고향을 잃은 전쟁 난민들, 특히 고아들의 두려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게 만든 것은, 미친 한 사람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더 많은 사람들이 미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고상한 체 시치미를 떼고 산다는 현실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오해하고서 무작정 위로 올라가려고 남을 밀치고는 사람들입니다. 1999년 우리나라에 소개된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죽을힘을 다해 위로 오르기만 한 애벌레는 허망을 깨닫는 것에 반해, 나비가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누리는 삶이야말로 참된 행복임을 깨닫자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미친 삶과 제정신으로 사는 삶이 놓여 있습니다(32-38).

제가 사는 마을에는 지붕 개량사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는 벽난로 공사와 태양광 공사로 큰 파도가 지나갔습니다. 10년 동안 아주 조용했는데 투기바람이 불고 있다 합니다. 마지막 거처이길 바라며 상추와 고추 오이와 부추를 수확하며 산새와 노루 꿩들과 함께 15년째 살고 있는데, 걱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한 정신을 잃은 젊은이의 생명을 지켜주시려고, 수 백 마리의 돼지들의 생명을 맞바꾸신 일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미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제정신으로 살 것인가? 미친 삶이란 벌거벗은 것을 모르는 부끄러운 삶이며, 수백 마리의 돼지 떼를 아름다운 산야에 풀어놓는 장삿속 시류(時流)를 말합니다. 제정신의 삶이란 죽은 자의 거처 무덤을 떠나, 사랑하는 이웃들과 어울려 웃고 울며 정을 나누는 평범한 일상이라 하겠습니다. 선택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라 하십니다(38-39).

신학대학을 지원한 동기를 묻는 질문에 여러 유형의 답변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여기저기 응시했지만 잘 되지 않아서 하나님의 뜻인가 해서 지원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 교회의 현주소가 있기도 합니다. 목사의 길이 최고의 선택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미친 삶에서 제정신을 차린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을 (이웃에게)알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몇 년 전 통계로는 매년 수천 명의 목사후보자가 배출된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연변 지역의 다방에는 중국에 선교사로 온 한국의 목사들이 수백 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신학생이나 목사가 더 이상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립시다. “네 집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것을 알리라.” 불특정 다수에게 하는 전도방식에서 가족과 이웃을 향한 인격적인 전도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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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696.

시편 시 79:1-4.

찬송 3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연 속에서 사는 분들은 정말 하루가 참 길다고 합니다. 아침에 해가 솟아 오른 후에 그 해가 지고 밤이 올 때까지 시간이 참 느리고 여유 있게 흘러간다고 하시던데요. 나에게는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지 생각해 봤는데, 그건 시간이 아니고 내가 빨리 움직이기 때문이더군요. 바쁠수록 창밖을 많이 보시고 자연의 완만한 흐름을 감상하면서 느린 시간 체험을 해 보는 것도 괜찮으시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612일 방송>

 

2. 오늘은 성삼위일체 주일로 잠언 8:1-11을 본문으로 하나님은 지혜의 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1년에 딱 한번 오늘은 교리 설교를 하는 날로 정하고, 설교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은 공동의 목표를 가지신 한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지혜문서인 잠언의 말씀으로 삶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1:7).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 강당 옆에는 두 그루의 커다란 전나무가 있었는데 그 사이로 작은 구름다리가 있고, 그 위에 하얀 나무 팻말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란 성구가 씌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왜 그 성구를 저 구름다리 위에 내 거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혜롭지 않고서는 공교육의 목표인 건강한 민주시민이 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저는 지혜를 삶의 기술 혹은 생존을 위한 기술이라고 정의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아버지께만 날계란을 드리셨고, 아버지는 그것을 깨트려 노란 밥을 비벼 드셨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께 나도 날계란 먹고 싶다 말씀드렸을 때, 네 아버지는 우리 식구 모두를 위해 고생을 많이 하시니까 잘 드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는데, 두 번 다시 투정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지혜로우신 분이셨습니다.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셨지만, 그런 지혜로 9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삶의 길목마다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들이 있습니다(1-5).

1988년 출간된 로버트 풀검 목사의 <나는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은 1,70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나누어 가져라.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두어라. 내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마라.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어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라.” 등등.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연다면, 우리는 매 순간 지혜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지혜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지혜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에게 선물해 주신 축복들입니다. 강아지의 간절한 눈빛에서 기도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고, 꽃밭에서 싱그럽게 키 재기를 하는 온갖 식물들에게서 함께 어울려 공존하는 지혜를 배웁니다. 일찍 꽃을 피운 식물들은 다른 식물들이 꽃을 피우도록 뒷전으로 물러앉더니 아예 숨어버립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살게 합니다.

 

지혜의 샘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6-11).

남산 도서관 밑쪽엔 길고 높은 계단이 있었고, 양쪽에 밝은 가로등이 있어서 야학하기에 알맞았습니다. 70년대 초반 남대문 시장과 서울 역 주변에서 껌팔이 구두닦이 아이들을 모아 야학을 열었습니다. 그때 질문을 잘 하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금방 배운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묻기도 했고, 왜 사는 것이냐며 근본적인 것을 묻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 겁니다. 영락교회가 야학을 위해 방 한 칸 빌려주지 않는다고 항의했던 일말입니다. 일주일에 사흘만 불을 환히 켜고 다른 날은 캄캄한 어둠을 지키는 게 옳지 못하다고 말입니다. 그때의 동지들이 훗날 교육자가 되었고 사회복지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가닿지 않는 질문이란 시작만 한 사업이고, 답이 없는 넋두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답을 주실 지혜의 샘이신 하나님께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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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689.

시편 시 78:43-46.

찬송 175. 181, 1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스코틀랜드 속담에 어둠을 탓하기 보다는 촛불 한 자루를 켜는 게 낫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우리네 역사 속에도 이렇게 시대의 아픔과 어두운 현실을 가슴아파하면서 스스로 촛불 한 자루가 되고자 했던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요. 제 몸을 태워서 밝은 빛을 만들어냈던 그들이 아니었다면 과연 오늘의 우리가 존재했을까 생각을 해 보게 하는 그런 아침입니다. 66일 현충일인데요. 나라를 위해서 희생했던 오늘의 진정한 주인공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아침 되시기를 바랍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66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주일로 행전 2:1-21을 본문으로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돕자.”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령강림사건은 교회의 출발을 알렸습니다. 성령님은 두려움에 떨면서 숨어 지내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이 각 민족에게 전파되고, 새 술에 취하게 만드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절망하던 초대교회를 성령께서 일으켜 세웠습니다(1-12).

지나간 역사는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사는 사람마다 희망사항을 더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 사를 분별하고 이해한다는 것인데, 어렵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십자가 예고에도 불구하고 날벼락 같은 절망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주셨지만 승천하심으로, 초대교회는 더욱 더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역사가의 기록인 행전에 의하면(행전 1:1-11, 2:1-4), 유월절에 잡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시며 제자들을 가르치시다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인 오순절에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강림을 갈망하던 120여명의 성도들은 세찬 바람소리와 불꽃으로 임재하신 성령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자신의 나라 방언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강림 사건을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13-21).

유대인의 추수절인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로, 한 해의 첫 곡식을 거두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명절입니다. 이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임재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구약성경 요엘서 3:1-5에 근거로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으로, 놀랍게도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게 되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는 내용과, 그 다음에 주님의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강림사건은 하나님의 계획된 사건으로,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구분 없이 예언을 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방언을 통해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하는 목적을 가졌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 크리스천의 중요 과제입니다(고전 6:19-20).

하나님은 창조 시부터 인간을 일꾼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세상을 관리하도록 맡기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물 중의 걸작으로 만드시고, 인간에게 부여하신 첫 과제는 짐승과 새들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2:19-20). 인간의 역할은 하나님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도록 협력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성령을 훼방(모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3:29).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같이 멸망당했습니다. 이런 징계는 중간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그런데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는 최종적인 심판이라 하겠습니다. 죄에서 돌이켜 구원받게 하시려는 성령님을 돕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3. 오늘은 주성 농인교회에서 설교를 할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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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682.

시편 시 78:12-17.

찬송 41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의 발밑에서 행복을 키운다.” 영국의 속담이라고 하는데요. 작은 일에 만족을 느끼고, 사소한 기쁨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쉽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발밑처럼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소박하지만 현명한 사람일 겁니다. 언제나 웃을 준비가 되어 있고,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여유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늘 행복이 잔잔하게 채워져 있을 것 같습니다<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530일 방송>

 

2. 오늘은 부활절 일곱째 주일로 요 17:20-26을 본문으로 하나 되기를 바라신 주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맛깔나는 기도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저의 모친으로, 저의 모교회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분이셨습니다. 청산유수 같아서가 아니라, 감동적인 기도를 드리신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기도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 됨이란 단일화(unification)가 아니라 통합(integration)을 의미하셨습니다(20-21).

우리나라에서는 의사들의 세계나 검찰의 세계는 군대식 위계질서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가끔 드라마에서 병원이나 검찰청의 장면들이 나오는데, 군대식 모습에서 아연실색하였습니다. 가장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하는 곳이라 생각한 때문입니다. 단일화를 강조하는 곳에서는 내용보다는 형식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통합을 강조하는 곳에서는 이해와 협력이 강조됩니다. 주님께서 꿈꾸시고 그 꿈을 향해 힘쓰신 삶은 형식보다는 내용이었으며, 이해와 협력을 바탕에 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전도자들의 말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이 하나 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주님이 서로 안에서 하나된 것처럼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목적 같은 구원 같은 평화를 나눌 신앙동지들인 때문입니다. 어쩌면 천국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평화를 노래할 공동체 말입니다.

 

불순종에서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과 화해할 때 기대할 수 있는 새로운 하나의 공동체입니다(22-23).

불행과 고통의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난 경험으로, 불순종의 생활 태도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불순종이란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일로, 모든 불행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불순종은 스스로 행복의 울타리를 뛰쳐나가는 일인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순종으로 인해 생긴 높고 굳은 불행의 담벼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인생을 당신 품안에 품어주신 것입니다. 모든 기쁨과 행복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행복의 실체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숨 쉬고 일하고 사랑할 때를 말합니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때는 봄>이란 시에서 봄날의 아침/ 아침 중에서도 7/ 언덕엔 영롱한 진주 이슬/ 하늘에 종달새 날고/ 장미 가시 줄기엔 달팽이 기어가고/ 하늘엔 하나님이 계시니/ 세상은 평안하여라노래합니다.

 

삼위요 일체이신 하나님처럼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24-26).

하나 됨의 영원한 모델은 하나님으로, 높낮이와 서열을 가르기를 좋아하는 우리들과는 전혀 다르게,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높낮이와 서열을 찾을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인종과 성별, 권력과 재물에 의해 차별은 교묘하게 진화와 심화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의사나 교수 심지어 목사들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조폭 수준의 서열문화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의 특징은 권력 다툼이 정점에 있습니다. 조폭 성향이 있는 이들에게 아첨꾼들이 기생하며 패거리를 만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모델로 제시하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사랑을 속성으로 하고 있기에 다툼도 패거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도 사랑이시고, 성자 예수님도 사랑이시고, 성령님도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곳에 완전한 신뢰와 완전한 희망 그리고 완전한 평화가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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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675.

시편 시 77:10-12.

찬송 5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제가 소만 절기 이었습니다만, 만물이 이 땅에 가득 찬다는 소만절기답게 세상이 온통 푸르게 꽉 찬 느낌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드는 소만답게 무척 덥기도 했지요. 서울의 낮 기운이 26도까지 올랐고, 남부지방은 30도까지 오른 곳도 있었더라고요. 이런 날씨는 평년 6월 중순에 해당되는 날씨라고 하네요. 자 여름에 입고 있는 푸름이 짙어가는 자연의 기운을 담아서 생생하게 아침을 열어 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522일 방송>

 

2. 오늘은 부활절 여섯째 주일로 부활절 기간에는 구약을 대신해서 행전을 읽는 관습에 따라 행전 16:9-15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힘들다는 깨우침을 받을 것입니다. 청소년기에는 공부가 가장 힘들고, 자녀를 기르는 것도 힘들고, 설교하는 것도 농사짓는 것도 힘들고, 모든 게 힘이 듭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도 힘이 듭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9-10).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힘들게 살고 있다 생각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사도 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을 앞두고 1차 선교여행의 동역자였던 절친 동료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고 결별했습니다. 이유는 바나바의 생질인 요한 마가가 밤빌리아 선교에서 무단 이탈(離脫)한 전력 때문으로, 바울은 실라를 동역자로, 바나바는 마가를 동역자로 따로 따로 선교활동을 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다투고 헤어지는 지경이었으니 그 마음들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뿐이 아니라, 1차 선교지였던 아시아 지방 선교가 지지부진하고, 하는 일마다 틀어지고 막히고 제대로 되는 게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 환상의 내용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선교지를 옮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더욱 더 힘들게 하신 것입니다.

 

낯선 유럽의 첫 번째 도시 빌립보에서 첫 번째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11-15).

우리는 이런저런 시련과 고통을 맛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만사형통하지 못한 삶이 그렇습니다. 사업도 건강도 자녀들도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없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아시아에서 실패를 맛본 바울일행은 새로운 전도지로 유럽을 정해 주셨습니다. 유럽에 와서 맞는 첫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아 강가로 나갔는데, 거기에 여인들이 모여있었습니다. 빨래를 하러 나왔는지, 몸을 씻으러 나왔는지, 그도 아니면 바람을 쐬러 놀러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바울과 실라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 중에서 자주 옷감을 파는 장사꾼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라고 했는데, 유대인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성령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셔서, 사도의 설교를 잘 듣게하셨고, 결국 사도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온 집안이 세례를 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루디아는 유럽 선교에서 얻은 첫 열매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주신 가장 큰 위로와 격려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6:34).

벼슬을 가진 사람보다 평범한 보통 사람이 문제가 가장 적고, 또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어느 대통령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첫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는데, 바람이 분다고, 비가 온다고, 햇빛이 난다고, 온 나라 백성들의 걱정을 떠맡은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들 역시 저마다 근심 걱정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부산 신일교회를 개척했을 때, 첫 걱정은 오르간 반주자를 구하는 것이었는데, 열심히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교회 주변에서 100가정을 택해서 매주 한통의 편지 전도지를 보냈지만, 6개월 동안 어른 교인을 한 사람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반주자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듯, 저희 교회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서구 괴정동에 한 음악학원 원장님을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반주할 교회를 찾아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우리의 지혜와 노력으로 역사룰 만들어 가는 줄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일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용기와 위로 격려를 주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3. 오늘은 왕십리 루터교회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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